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20. 12:59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창세기 1

(창세기 4:1-15)

 

쉼보르스카의 시 <우화>입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부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유리병을 낚아 올렸어요. 그 병에는 종이 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답니다:

사람들이여, 나 좀 구해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대양이 나를 파도에 싣고서 무인도에 갖다 버렸답니다. 모래사장에 나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서둘러주세요. 나 여기 있을게요.”

 

이 쪽지에는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틀림없이 이미 늦었을 거야. 유리 병이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떠나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첫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적혀 있질 않군. 대양이 한둘도 아니고, 어디를 말하는지 통 알 수가 없잖아.”

두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라는 섬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불현듯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편적인 진실이란 원래 다 그런 법,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여기 생각하기 나름인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입니다. 왜 가인은 아벨을 죽였을까요? 우리는 흔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제사 행위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의문은 한 가지 더 늘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아 주셨을까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마음은 더더군다나 들어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가인의 엄마 하와는 가인을 낳았을 때 가인에게 매우 기대를 걸었던 모양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은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 이를 풀어서 다시 옮기면 이런 뜻이랍니다. “내가 여호와와 함께 한 사람(남자)을 얻었다.” 하와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낳은 아들이라면, 분명 자신의 앞날에 이 아들을 통해 영광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을 겁니다. 하와는 이 사람에게 어떤 희망을 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기대주가인은 엉뚱하게도 살인자가 됩니다. 그것도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쉼보르스카의 다른 시 <베트남>입니다.

 

여인이여, 그대 이름은 무엇이냐? – 몰라요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 출신인가? – 몰라요

왜 땅굴을 팠느냐 몰라요

언제부터 여기 숨어 있었느냐? – 몰라요

왜 내 약지를 물어뜯었느냐? – 몰라요

우리가 당신에게 절대로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가? – 몰라요

당신은 누구 편이지? – 몰라요

지금 전쟁 중이므로 어느 편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몰라요

당신의 마을은 존재하는가? – 몰라요

이 아이들이 당신 아이들인가? – 맞아요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베트남 전쟁 때 구찌 땅굴에 살았던 베트공 여인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수많은 질문에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며 몰라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도처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 몰라요!

 

이 대답 속에는 자신도 왜 아벨을 죽였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들어 있는 것일 겁니다.

 

여러 해 전, 한국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호찌민에 살았던 베트남 여성 후인마이가 대한민국 천안시 문화동의 한 방에서 전과 6범의 남편에게 구타당해 늑골 18개가 부러져 죽은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후인마이는 죽기 전날 남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이렇게 죽게 될지 몰랐지만, 그것이 그녀의 유언장이 된 셈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무슨 음식 먹어? 물 먹어?라고 물으며 식모처럼 잘해주고 싶었어. 나는 결혼하기 전에 호찌민에서 일했어. 우리 가족에게 어려움 있었어. 가족을 위해 고생스러운 일 많이 했지만 월급은 적었어. 어느 해는 냉동식품 회사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가구 공장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고무 농장에서 일했어. 일 없으면 남의 논밭에서 일했어. 나는 힘든 일과 고생스러운 일을 잘 알아. 나는 한국에 와서 당신에게 이야기 많이 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되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은 잘 모를거다(베트남어로 썼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밖에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고, 위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가인과 아벨>의 사건도 하나님의 장난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 밖에는 그 사건을 이해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자가 이 사건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런 진단을 내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단서는 5절 이하에 나오는 가인의 심리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분노를 잘 느끼는 사람의 특징은 어려서부터 통제를 잘 받지 못한 탓일 가능성이 큽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가인은 엄마의 기대주였기 때문에, 엄마의 사랑은 많이 받았어도, 엄마에게 통제를 잘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귀하고 곱게 자란 아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면 분노를 쉽게 표출합니다.

 

분노를 노출하고 있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분노를 잘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분노는 존재를 죄의 지뢰밭으로 이끕니다. 터트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가인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분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아우 아벨에게 풉니다. 분노를 터트립니다. 터진 분노에, 아우 아벨이 죽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분노를 풀고 나면, 정신이 드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우가 죽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은 분노를 풀어내서, 살아 났지만, 그 분노의 폭발 때문에 아우가 죽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 몰라요!” 가인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당황합니다. 후회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우 아벨은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고아원 동기인 젊은 부부는 애를 낳자마자 족족 고아원에 넘깁니다. 만삭의 아내는 변기에 앉아 힘을 주다 그만 변기 속에 풍덩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꺼내서 닦아놓고 보니 눈과 코가 없었습니다.

 

평생 가정을 가져본 적 없이 무료 급식으로 연명하는 폐품팔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가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마냥 좋아 10대의 가출 소녀를 아가라 부르며 집 안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족이라 생각하며 가출 소녀를 매일 기다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만나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만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처음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처구니 없게, 아담과 하와는 기대주가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겪게 됩니다. 아벨은 어처구니 없게 다른 사람도 아닌 형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는 일을 겪게 됩니다. 가인은 어처구니 없게 자신의 분노를 아우 아벨에게 풀어내는 일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에덴동산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겪은 슬픔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사람이 죽는 거야 최초의 인간 때부터 있어왔던 일이라 익숙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일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을 떠나 이 땅에 온 존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인 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나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그에 대한 인간들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몰라요!”입니다.

 

커트 보네거트의 <레퀴엠>이라는 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지구가

목소리를 갖게 되고

아이러니가 무언지 알게 된다면

우리가 저지른 학대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게 바로 아이러니다

 

이것이 살아 남은 자의 가장 큰 슬픔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몰라요!”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가인은 자신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그 아이러니!

 

가인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그러한 슬픔을 가슴에 지니고 살게 됩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5). 가인이 하나님께 받은 표는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죄를 면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가 바로 그러한 표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내 죄를 들춰내는 거울이기도 하지만, 내 죄를 감춰주는 가죽 옷이기도 한 것이죠. 비록 우리의 인생이 어처구니 없고, 아이러니하고, 슬픈 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은 정말이지 눈물 나도록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어처구니 없는 하나님의 장난을 보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희망적입니다. 그러니 눈물을 닦고 힘을 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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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