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3. 23:56

거룩이란 무엇인가?

(레위기 19:1-2, 9-18)

 

자고 일어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각종 사건들이 전해져 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한인 입양아를 살해한 혐의로 현직 국가정보요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양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한인 입양아의 나이는 세 살이었고, 부검해 본 결과 뇌의 진액이 신체 곳곳에 스며들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을 보면, 절대로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한국에서는 13, 15살 먹은 어린 조카를 임신시키고 출산까지 하게 한 삼촌의 범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욕 때문에 소녀들의 소중한 삶을 무참히 짓밟은 이런 인면수심의 인간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어떤 중년 여인이 이혼소송을 냈는데, 그 이유가 남편의 종교 강요 때문이랍니다. 남편은 가족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교회에 헌금을 바쳤답니다. 그 액수가 처음에는 수 천, 그리고 나중에는 수 억 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편은 교회를 잘 안 나가려고 하는 부인과 자녀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족들 간에 불화가 생기고 급기야 이혼소송까지 갔는데 법원은 남편의 잘못된 종교 강요로 인해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판단과 함께 부인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종교 문제로 이렇게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성경에도 보면 거룩하지 못한 일들이 즐비합니다. 대표적으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인 유다의 부정과 다윗 왕의 간음이 있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자 셋째 아들 셀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계대결혼법을 어기며 며느리 다말을 시집으로 돌려 보냅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을 합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 사건을 보면서 거룩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이 이야기를 당당하게 싣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을 통해서 난 베레스와 쎄라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또한 다윗 왕의 간음 사건은 매우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자신의 음욕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의 부인인 밧세바를 왕궁으로 범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 전사하게 만듭니다. 물론 나단 선지자의 폭로를 통해 다윗 왕이 회개하긴 했지만,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이라고 하는 다윗이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거룩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2). 하나님 당신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선 거룩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거룩을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느냐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레위기서의 이 말씀을 살펴 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오늘 말씀과 관련된 것을 토대로 가르침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이웃사랑법이 레위기서에서 비롯됩니다. 레위기 18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것을 보면, 거룩이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라는 말씀 뒤에 이어지는 레위기의 규례들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웃과의 관계법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넓게 말해서, 레위기 19장에 등장하는 규례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배려하고(respect) 공경해야(honor)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웃)과 어떻게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웃이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the poor), 거류민(the stranger), 이웃(fellow), 품꾼(laborer), 귀먹은 자(deaf), 맹인(blind), 부자(the rich), 친족(kinsman), 동포(countryman).

 

가난한 자와 거류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9-10). 거룩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거류민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의 최저 생계를 보장해 주는 것. ‘이것도 내 꺼, 저것도 내 꺼, 다 내 꺼야라면서 혼자서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이라는 겁니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지리적 위치에서 내 옆집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삶 가운데서 만나서 삶을 나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13a). 거룩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 만나는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세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에 생명력이 넘치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그들을 오히려 섬기는 것이 거룩입니다.

 

품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13b). 품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참 대견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죠. 남에게 빌어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해서든 삶을 꾸려가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들입니다. 품꾼은 그날 벌은 돈으로 그날 먹거리를 사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굶주리게 됩니다. 그래서 품꾼의 삯은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주어야 합니다. 주지 않고 그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붙들고 있으면, 품꾼은 꼼짝없이 굶어야만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일 한 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 자신의 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의 배까지도 생각하는 것.

 

귀먹은 자와 맹인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14). 저 사람이 안 들린다고 저주하면 안됩니다. 저 사람이 안 보인다고 그 앞에 장애물을 놓으면 안 됩니다. 안 들리기 때문에 더 조심해서 말해야 하고, 안 보이기 때문에 그의 앞에 장애물이 있다면 치워주어야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안 들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저 사람은 안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이 뒤에 붙는 겁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 눈 앞에 그 사람이 없다고,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 그 사람의 인격에 흠집을 내는 것 또한 거룩하지 못한 겁니다. 지금 내 앞에 없어서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흠집을 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런 일을 하면서 낄낄거리며 웃을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듣고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15). 재판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데, 특별히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공의라는 개념을 들어 거룩을 표현합니다. 재판을 할 때, 올바르게 재판하기 위해서 동정도 아첨도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동정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부자는 아첨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공의가 제대로 서지 않게 되고, 관계가 어긋나게 되며 결국 이것은 거룩과 멀어지는 상황을 낳게 됩니다.

 

친족과 동포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17-18). 살다 보면 가족 간에도 미워하고 원망할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면 서로 간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으로 미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개념에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랑이 가득해야 하는데, 그곳에 사랑 대신 미움이 자리한다면 그것은 이미 거룩한 모습이 아닙니다. 미움을 마음에까지 남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할 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마음에 미움을 안고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은 주어진 본문 내에서만 거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만, 혼자 있는 고요한 시간에 레위기서를 찬찬히 들여다 보십시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 아래, 거룩이 무엇인지 제시되는 것은 모두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지만, 그것을 우리 인간 존재에 가져오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예배 잘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 잘 한다고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사람에게 붙는 수식어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3절 이하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배제한 거룩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거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시는데,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거룩한 예배란 우리가 얼마나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거룩한 예배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부족한 예배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예배나마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이웃관계를 맺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respect & honor).” 이것이 거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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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