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여, 사유하라, 그리고 행위하라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그가 재판과정에서 본 아이히만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악은 진심으로 평범하다. 때론 선량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악은 보통 '발견'되지 못한다. 아렌트는 평범한 아이히만이 그렇게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게 된 까닭은 그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를 전혀 안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렌트는 '사유 (생각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유'란 단순히 '깊이 생각하기'가 아니다. 사유란 역역사지(易地思之)를 말한다.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다른 말로 공감이라 할 수 있고, 소통이라 할 수 있고, 연대(solidarity)라 할 수 있다. 아렌트의 용어로는 '행위(action)'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e)을 이루는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한다: 노동, 작업, 행위. 여기에서 '노동'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을 말한다. '작업' '예술'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인간은 단순히 먹고사는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업(예술행위)을 통해 현실 너머의 세상을 꿈꾸고 만나게 된다. '행위'는 타자와 상호작용하고 의사소통하면서 공적 가치를 실현해 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행위'를 다른 말로 하면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정치를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키는 '행위'로 규정한다. 정치를 사유와 결부시켜 말한다면, 정치란 개개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키도록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의 정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사유'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한 그동안의 한국 정치는 성경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다스렸다"( 34:4).

 

무엇보다, 국민들이 '사유'하며 각자의 존엄성을 지키게 끔 내버려두지 않고, 깊은 생각을 못하도록 언론을 조작하고, 스포츠나 스크린이나 때로는 북풍을 통해 정신을 딴데 쏟도록 유도해 왔다.

 

이러한 국가적 ''에 맞서 마땅히 싸워야 할 교회는 어떠했는가?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성경의 말씀을 왜곡시켜 국민인 신자들을 '무사유(無思惟)의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믿음이란 '생각 좀 하고 살아라'는 뜻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것을 '생각 없이 따르다'는 뜻으로 변질시켰다. 예수는 우리의 사유를 막으시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진정 구원이란, '악의 평범성'에 눈을 뜬 후 그에 맞서 '행위'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이다.

 

믿는 자여, 사유(思惟)하라. 그리고 행위(action)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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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