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4:49

영생이란 무엇인가?

(10:17-31)


진시황은 인생 말년에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의 권좌를 지키려는 욕심때문에 국고를 낭비해 불로초를 사들이고, 백성들의 노동을 낭비하며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Eternal Life)란 우리의 욕심 또는 욕망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어떠한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물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어로, “Good Teach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여기서 영어의 ‘inherit’가 히브리어의 클레로노메오를 잘 표현해 준다. ‘내가 만약 영생을 상속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의 뜻이다. 히브리어의 클레로노메오는 오직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 ‘약속’, ‘축복을 목적어로 취한다.

 

무엇인가를 상속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인가를 하면 상속 받을 수 있나? 상속은 행위의 관점에서 볼 수 없다. 상속은 관계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 사람은 행위의 관점에서 상속을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라고 묻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관점에서 상속을 접근하는 그에게 이런 행위할 것을 말씀하신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예수님을 떠나 갔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았기때문이다.

 

영생을 행위의 관점, ‘소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부자 청년처럼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갈 수 밖에 없다. , 그는 결코 하나님나라, 영생을 상속받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워하며 서로 수군댄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본문에는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못 들으면 완전히 이상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위험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바로 이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

 

기본적으로, 신약성경이 쓰여진 시대는 박해시대라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베드로의 고백은 베드로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다. 그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였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전토를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이민과 같다. 또는 죽음과 같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를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는가?

 

대답은 이것이다. 바로,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 때문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이 무엇이길래, 그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서게 하였을까?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이단사이비가 된다. 실제로, 이 말씀 들이대면서, 신도들에게 형제자매와 부모 자식을 떠나게 하고,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도록 강요하는 이단사이비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그들을 현혹시키고, 영생과 구원에 집착한 어리석은 신도들은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을 행위소유의 관점에 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일어나는 오류이다.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은 행위로 상속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개념이다. 관계사랑이 개입되고, ‘변화를 동반한다. 행위와 소유는 사랑과 변화가 동반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와 만나서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제한 채, 그저 영생을 자기의 재산처럼 소유하려고만 했다. 그렇게 영생을 얻으려는 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즉 그런 식으로 구원을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인가를 경험했다. 그것이 부활인데, 그 부활이란 이 세상의 것에서 완전히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필요하다.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을 상속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욕심 내지 욕망에서 벗어나, 예수에게 나타난 또다른 현실(하나님나라)를 경험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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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