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5:14

오병이어 이야기

(메시아적 만찬)

(마가복음 6:30-44)

 

두 명씩 짝지어 파송 받아 나가 복음 전했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두 명씩 짝지어 나가는 방법은 주로 성경에 충실한이단들이 쓰는 방법이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원래 가짜일수록, 가장하기 위해 성경에 충실한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여호와의 증인, 또는 몰몬교 등)

 

돌아온 제자들은 선교 보고를 한다.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우리는 매주일 세상으로 파송 받아 복음을 전하고 복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돌아와 주님께 예배 드리며, 우리들이 일주일 동안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해야 한다. 그것이 예배의 의미이다.

 

선교 보고를 끝낸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을 받는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쉼은 굉장히 중요하다. 쉼은 열광과 헌신을 구분해 준다. 분주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마르다는 너무 분주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얻는 것도 없었다. 그 입에서는 불평만 나왔다. 멈출 줄 알았던 마리아가 칭찬 받았다.

 

쉬러 간 제자들과는 달리, 무리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다니는 데 열광했다. 열광은 자기 자신에게 향한,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이런 자는 쉴 줄 모른다. 멈출 줄 모른다. 이건 열심히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이다. 자기 만족을 이루지 못하면, 금새 폭도로 변해 버린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열광과 헌신은 다르다. 헌신은 나를 부인하는 것이다. 헌신은 일할 때와 쉴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헌신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주님이 멈추고 쉬라시는 데, 그 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광신도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그렇게 열정적으로몰려든 큰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그렇게 열정적인 이유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목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맹목적으로 열정적이지 않다. 그들은 목자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기 자신을 헌신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기도 한다.

 

인간은 영적인 돌봄과 인도가 꼭 필요하다. 삶이라는 것은 망망대해와 같고, 광야와 같아서 돌봄과 인도를 받지 않으면 표류하거나 신기루를 좇아 가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다. 우리를 이용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먹이신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돌보시다, 시간이 흘러 식사 때가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제안한다. “이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6).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이게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펼쳐진다. 이 이야기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옛날, 성서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었던 시절에 성경말씀을 전했던 설교자들은 그저 이 이야기를 기적이야기로 전했다. 어린 시절, 동네에 뻥튀기장사가 자주 왔었다. 쌀 한 바가지 가져다 주면, 뻥튀기 장사 아저씨는 뻥을 튀켜그것을 몇 배로 부풀려 주었다.

 

그러한 예를 들며, 무엇이든 예수님께 가져가면 예수님이 이렇게 뻥튀기튀겨 주는 냥 말씀을 전했다. 물론 똑같이 순진했던 사람들은 그 말씀에 아멘했다. 이러한 순수한 믿음도 과히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더 중요한 과제는 본문이 전해주고자 하는 의미를 최대한 저자의 의도에 가깝게 파악하는 일이다. 그래야, 본문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장난치지 않을 수 있다.


들으면 무조건 은혜 되는 말씀이 좋은 말씀이 아니라, 본문의 의미를 온전히 짚어주는 말씀이 좋은 말씀이다.

 

마가복음서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밝혀내기 위함이다. 마가복음은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뻥튀기 장사가 아니라, ‘메시아이다.

 

떡과 물고기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일상 음식이었다. 그 일상 음식을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는 것은 메시아적 만찬이다.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신 뒤,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다. 여기에 나오는 네 개의 동사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매)는 엠마오의 식사와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동일하게 등장한다.

 

푸른 잔디는 메시아적 만찬의 식탁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푸른 잔디위에 사람들을 앉게하신다. 여기에 쓰인 앉게는 헬라어 아나클리노가 쓰였는데, 이는 누군가를 초대하여 식탁에 앉게 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리들을 초대하여 당신의 식탁에 앉히신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구약성경 가운데 만나 이야기와 엘리사가 떡 이십 개로 백 명을 먹인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만나를 다시 먹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만나를 먹이시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다름 아닌, ‘그 메시아라는 것을 말하고 증언하고 있다.

 

뿔뿔이 흩어져 각자 먹는 게 아니라, 함께 먹는 것은 하나 됨을 뜻하고, 오병이어의 식사는 하나님 백성의 모임을 상징한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푸는 잔치인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는 매주일 공동식사를 한다. 주일 공동식사는 메시아적 만찬이다. 우리는 그러한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메시아)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결코 그냥 놓아두지 않으시고, 먹이신다는 것이다. 그냥 먹이시는 것이 아니라, 배불리 먹이신다는 것이다.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만족을 주신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메시아로 고백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열어준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놓으면, 우리는 그분이 베푸시는 메시아적 만찬에 초대되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예수님은 메시아시다. 이것을 믿는 자 만족하게 될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 ‘만족을 모르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으시는가? 그분의 메시아적 만찬을 누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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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