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7. 11. 03:06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눅 10:25-37)


오늘 말씀은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질문에서 비롯된 말씀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질문한 이가 율법 교사이므로 그에 맞게 다시 질문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율법교사 답게 똑 부러지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신명기 65절과 레위기 1818절을 인용한 대답이다. 이 두 구절이 성경의 핵심을 요약한 구절이다. 이것을 간단히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달콤해 보이지만 실제는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랑만큼 큰 사건은 없다.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후의 모습을 바꾼다. 사랑하기 전과 사랑한 후의 모습은 같을 수 없다.

 

사랑은 변화와 희생을 동반한다. 변화와 희생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변화와 희생 없이 사랑을 하려는 자는 사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향락을 즐기는 것일 뿐이다. 사랑은 우리를 성장시키지만, 향락은 우리를 타락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사랑인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게 사랑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참으로 쉽지 않은 거다. 변화와 희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변화와 희생에 대한 염려는 전혀 안 하게 된다. 변화와 희생이 두렵고, 귀찮은 이유는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이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변화와 희생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데만 힘쓰면 된다. 그러면, 변화와 희생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런 다음에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하나님 뜻 안에 거하게 된다.

 

이런 말도 해볼 수 있겠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율법교사의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또다시 질문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해 주신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완전히 뒤엎는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내려간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예루살렘이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거반 죽게 되어 길 가에 버려졌다. 마침 그곳을 두 사람이 지나갔다. 한 사람은 제사장이고 다른 이는 레위인이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동일한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결이었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이들이 어쩐지 거반 죽게 되어 길 가에 버려져 있는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간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는 사람보다 일이 더 중요했다. 강도 만난 자가 거반 죽게 되었다는 것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 뜻일 텐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부정한 것 (시체 또는 피 흘리는 것)’을 만지면 부정해져서 정결의식을 거쳐 다시 정결해지기까지 성전의 일을 담당하지 못하게 된다.

 

일 중심으로 삶을 살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다. 일 중심으로 삶을 살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강도 만난 자는 이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귀찮게 만드는 존재에 불과했다.

 

교회에서도 보면 일 중심으로 인간 관계를 생각할 때 언제나 다툼이 발생한다.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다. 직장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다. 특별히, 직장생활이 힘든 이유는 직장이라는 곳이 원래 일 중심집단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 중심이다 보니, 직장 동료가 이웃이 되지 못하고, ‘골칫거리가 된다. 일을 잘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일을 못하면, ‘죽여 살려한다.

 

다른 곳을 몰라도, 가정과 교회는 일 중심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지, 일이 중심이 되면 다툼만 일어난다. 일 중심이면 모든 것이 다 짐스러워진다. 그러나, 사람이 중심이고, 사랑이 중심이면 모든 게 가벼워진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을 발음하면 입술이 닫히고 사랑을 발음하면 입술이 열린다 사람은 사랑으로 서로를 열 수 있다.” – 김은주 <달팽이 안의 달>

 

강도 만난 자를 구한 것은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고, 여행 중인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든 자는 다름 아닌 사마리아인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변화와 희생이 따른다. 강도 만난 자를 사랑한, 불쌍히 여긴사마리아인은 그를 위해 기꺼이 변화와 희생을 감수한다. 사마리아인은 가던 길을 멈추는 변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는 희생을 감수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희생도 감수한다.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변화와 희생이 동반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꺼려하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를 꺼려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맺으며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교사가 질문한 것에 대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중심으로 이웃을 가려냈다. 그들의 입장에서 강도 만난 자는 이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귀찮게 만드는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은 자들이었다. 그냥, ‘그 일을 하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물으라. 다른 말로 해서,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정말로 이웃을 사랑하는가?’를 먼저 생각하시라. 다른 말로 해서, 어떠한 일을 하는 데 드는 비용과 희생, 변화 등을 먼저 계산하지 말고, 사랑의 마음과 긍휼의 마음을 먼저 가지시라. “사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거꾸로 하지 마시라.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그런 다음 사랑하십시오!” 이건 사랑이 아니라, 향락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이웃을 더욱더 사랑하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백하자.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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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