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7. 18. 05:43

충만하다는 것

(누가복음 10:38-42 / 골로새서 1:15-20)

 

기독교의 성경은 단순히 좋은 말씀을 모아 놓은 격언집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증언이다. 예수에 대하여 성경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Jesus is Christ.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학문을 기독론 Christology’라고 한다.

 

여러분이 예수를 누구라고 고백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증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성경에 증언된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믿음이다.

 

기독교인(그리스도인)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의 증언은 매우 중요하다. , 성경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우리가 믿는 바가 진리라는 것을 삶으로 증명하면서 사는 자들이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잘 하고 있는가? 믿지 않으면 살지 못하고, 살지 못하면 안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것과 사는 것은 일치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예수를 누구라고 증언하고 있는 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알아야 믿을지 말지를 결정할 테고, 결정했으면 그 증언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온통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의 말씀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매우 발전된 증언을 담고 있다. 실로, 예수라는 분은 양파껍질과 같은 분이다. 우리는 2천년 동안 여전히 예수가 누구인지를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예수를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이비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다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우리가 누구인지 다 아실 뿐이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앙은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종말에나 가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 종말론이라고 한다.

 

골로새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4가지를 알려준다. 첫째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Jesus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하나님은 볼 수 없다. 하나님을 봤다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사이비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게 되는 하나님을 가장 잘 표현한 신학적 표현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the Crucified God이다(몰트만). 하나님은 그저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만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같이 되셔서(one of us),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분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모든 창조의 시작과 끝이시다(the source and destiny of creation itself). 16절과 17절을 다시 읽어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것은 대단한 신학적 고백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자는 세상 만사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서부터, 자고 일어나는 문제, 마음이 아플 때, 병에 걸렸을 때, 죽음을 앞뒀을 때, 기쁘고 즐거울 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하다못해 여러분이 화장실 가서 볼일 보는 문제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뜻이다.

 

세번째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다(head of the church). 18절 말씀을 다시 보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다. 예수님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순간 죽는 것처럼, 예수님과 교회가 분리되면 죽는다.

 

교회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계시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예수님이시다. 게다가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이시다. 이 말은, 교회 공동체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자들의 공동체라는 뜻이다. 이것은 거듭남이라고 한다. 교회 공동체는 단순히 동네 사람들이 모인 사교 집단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로 인하여 죽었다 다시 살아난 거듭남의 공동체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이 될 수 없다.

 

그 거듭남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례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된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여러분이 받은 세례를 가볍게 여기지 마시라. 여러분의 진짜 생일은 여러분이 태어난 날이 아니라, 여러분이 세례 받은 날이다. (세례 받은 날을 잘 기억하시고, 그날을 특별히 감사하시라. 가톨릭에서는 세례 받을 때 세례명이라고 새로운 이름도 받는다. 그렇게 세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본받아야 한다.)

 

마지막 네 번째로, 예수님은 만물의 화해자시다(agent of reconciliation of all things). 구원은 화해다. 구원을 자꾸 장소의 이동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둘이 원수인데, 한 공간에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부부가 한 공간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이다. 구원이란 원수처럼 지내던 자들끼리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화해라 한다.

 

여기에서 죄의 개념이 등장한다.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죄란 매우 신학적인 개념이다. 죄란 하나님과 원수된 그 상태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수 사이에는 화해가 필요하다. 미운 마음이 없어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서로 잘 지낼 수 있게 된다. 미운 마음이 없어지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쉬운가? 죽는 것보다 어렵다. ‘저 인간하고 같이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

 

평생, 미운 그 사람 생각하며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게 해 달라고 해봤자 소용없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워질 뿐이다. 우리 스스로 절대로 미운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없다. 우리 스스로 절대로 의로워질 수 없다. 그 일을 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의 미운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 주신다.  누군가 미워졌다는 것은, 지금 내 안에 그리스도가 충만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죄된 모습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어렵게 하면, 그럴수록 더욱더 예수님을 가까이 하시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시라. 누군가 미워 죽겠거든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더욱더 예수님을 가까이 하시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시라. 예수님께 여러분의 죄된 모습과 여러분 마음에 있는 미움을 모두 드리시고 맡기시라. 그러면 예수 안에서 화해가 일어날 것이다.

 

예수 안에서 사랑하시라. 인간의 사랑(생물학적인 사랑)은 오래 못간다.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부부 간에도, 부모자식 간에도, 형제 간에도, 친구 간에도, 얼마 못 가는 인간적인 사랑에 아파하지 말고,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사랑을 나누며 서로 기뻐하길 바란다. 각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서로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화해이고 구원이다.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은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초대교회의 여성 리더십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은 여성 신학자들이 좋아한다. 여성 분들은 이 본문을 좋아해야 한다. 교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이 많다. 그에 비해 여성 리더가 부족한 것도 현실이다. 초대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여성 리더십들이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끌었다. 이러한 것이 현재의 교회 공동체에도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나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고자 한다. , 오늘 우리가 살펴본 골로새서의 말씀을 바탕으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해석하고자 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충만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충만하게 되어,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마르다에게는 예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두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마르다는 염려와 근심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둔 마리아에게는 평안이 가득 차 있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

 

마르다는 사역을 하느라 여러 가지로 분주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문 말씀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에서 준비하는 일이 바로 디아코니아, 사역, 섬김을 뜻한다. ‘에 중심을 두고 마음을 쏟는 사람은 그것을 하느라 분주해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바로, 우리의 존재의 근원되시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게 된다. 그러면 발생하는 일이 있다. 염려와 근심이다.

 

예수님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마르다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영어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Martha, Martha, you are fretting and distracted.” 여기에서 염려와 근심, 두 단어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Fretting: be constantly or visibly worried or anxious.

염려: 끝임없이, 눈에 보이게 걱정하고 근심함

Distracted: unable to concentrate because one's mind is preoccupied

근심: 무엇인가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인가에 의해 점령 당했음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가 위에서 골로새서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온전히 알고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 가득 채워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디아코니아(사역, 섬김)은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한 가운데 흘러 넘쳐 나오는 것이어야 불만이 없이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충만하면 다른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충만하면 염려와 근심이 내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 끊임없이, 눈에 보이게 힘써야 할 일은 염려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다. 무엇인가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점령하는 것은 근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사시라.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구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화평으로 이끄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은 행복으로 이끄신다. 왜 염려하는가? 왜 걱정 근심하는가? 왜 슬퍼하는가?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사시는 믿음의 자녀, 거듭난 인생되시길 바란다.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