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5. 15:18

부활의 신비

(요한복음 11:17-27)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다. 한국교회의 교단에서는 이단대책연구소같은 것이 있지만, 미국의 기독교 교단에는 그런 것이 없다. ‘자유라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긴 한데,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충돌을 낳으면 해결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현재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부르는 교단은 대부분 미국에서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몰몬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 유명하다. 특별히, 여호와의 증인 같은 경우는 그 규모가 크고 조직적이다. 이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성경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받든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단이라고 불릴까?

 

기독교 전통은 삼위일체 신학을 발전시켰다. 기독교는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기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begotten son)로 부른다. 그리고, 양태론을 믿는다. , 예수는 완전 하나님이시고, 완전 인간이라는 뜻이다(vere homo, vere deus).

 

이단은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다르게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 같으나, 그 뜻이 다르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첫 피조물로 본다. 그리고, 첫 피조물인 예수를 십자가에서 희생시켜서 구원을 이루었다고 본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성자)를 동일본질로 보지 않는다. 그 사이에 구별이 존재한다. 그리고 성경을 매우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그것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들은 병역도 거부하고, 헌혈도 거부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논쟁은 끊이질 않았고, 끝나지 않았다. 사실, 문자로 기록된 성경이 생겨나게 된 계기도 이단논쟁 때문이다. 예수에 대하여 다르게 전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그룹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인성을 부정했다. 예수가 이 땅에 임한 것은 가짜 육신을 입은 것이라 주장했다. 그것을 가현설이라고 한다. 그것과의 논쟁의 결과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매우 육신적으로 그린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한다든지( 20:27),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제자들이 잡은 생선을 함께 잡수시기도 한다( 21:12).

 

오늘 말씀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 스토리의 배경은 베다니의 삼남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의 오라비 나사로의 가족사이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 베다니에 살던 삼남매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다. 가장인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것이다. 부모님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을 보면,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고, 남자인 나사로가 가장으로서 이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죽는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와서 죽어가는 나사로를 치유해 주시길 원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예수님은 늦게 도착했고, 그 사이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누인지 사흘(3)이나 지났다. 이젠 아무런 소망도 없다. 죽음을 그냥 받아들이고, 오라비 나사로가 없는 삶을 계획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소망도 없고, 죽음과 불안, 공포만이 맴도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22절에 흥미로운 진술이 등장한다. 마르다가 한 말이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I know that even now God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이것은 나사로를 살려주세요!’라는 의미보다는 이제 나사로가 죽었으니,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세요!’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르다가 가장 바랄 만한 것을 말씀하신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 그런데, 마르다는 그 말에 대하여 이렇게 대꾸한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지금 당장 살아나지는 못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모든 이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다의 (부족한) 고백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은 단순히 마르다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마르다와 같이 죽음을 맛볼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던지는 보편적인 질문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가?

 

이것은 굉장히, 아니 가장 중요한 진술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소개하고 있다. 영어로,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사람들 중의 한 명이거나, 생명을 부여 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가 믿는 복음이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있는 곳에 곧 부활과 생명이 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곧 부활과 생명을 얻는다.

 

부활은 무엇인가?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말한다. 부활과 생명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부활과 생명이다. 다른 말로, 부활과 생명이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곧 부활과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희망인 이유는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완성을 알고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할 수 없다. 하나님 외에,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부른다.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해 나가는 자에게는 사랑이 풍성해진다. 생명이 풍성해진다. 생명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진다. 생명의 완성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의 완성과 성취는 사랑의 완성과 성취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세상을 보라. 우리가 목격하는 사랑과 생명의 풍성함은 매우 적고,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죄악이 충만하다. 몇 일 전(6 12) 한국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경남 양산에서 줄에 매달려 아파트 청소 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추락사를 했다. 사건을 조사해 보니, 청소하며 틀어 놓았던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파트 주민 한 명이 옥상에 올라가서 청소부의 생명줄인 밧줄을 칼로 끊는 바람에 청소부는 곧바로 추락해 죽었다. 안타까운 것은 죽은 청소부가 다섯 남매를 둔 가장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가정은 어떻게 살아가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해와 사랑은 온 데 간 데 없고, 악만 남은 것 같다. 왜 그럴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줄 재물이나 그들의 삶을 빛나게 해줄 명예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들이 생명의 완성이고 성취인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면, 그래서 그들 안에 생명과 사랑이 풍성했다면, 죽음의 죄악이 그곳에 있었겠는가.

 

지난 주 토요일에 있었던 결혼예배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팀 켈러 목사는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탕부라고 말한다. ‘Prodigal’이라는 말은 ‘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이다(탕부 하나님, 20).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을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실 만큼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고 다 내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향하여 생명을 성취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풍성함, 곧 사랑이 넘친다. 다른 것은 다 말릴 수 있어도, 사랑은 못 말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바로 지금, 우리의 몸에, 우리의 삶에 지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산다. 그 심장은 사랑의 심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소망한다. 생명의 풍성함, 사랑의 풍성함을 이기지 못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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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