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23. 07:35

나는 일한다

(요한복음 5:9b~18)


데카르트의 대표저서 <방법서설>에는 이런 명제가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그리고 후일, <철학원리>라는 책에서 이것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한다.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명제를 다시 제시한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dubito, ergo cogito, ergo sum.” (근대철학의 인식론 문제)

 

나는 존재하는 존재일까?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이렇게 질문해 보자.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자기 인식을 의심을 통해, 결국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인식의 근거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자기 인식에 도달 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은혜의 집) 연못에 날마다 기거하던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시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더욱 죽이고자 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고,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주장하여 신성모독(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다)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한 것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맞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My Father is always at his work to this very day, and I, too, am working.”(17).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의 명제를 만들어 보면 이렇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아버지(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 ,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한 근거는 바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처럼 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제를 통해서, 이러한 명제를 다시 만들 수 있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아버지(하나님)가 일하신 것처럼 일 한 것을 본받아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일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하고 실행했던 성경의 인물은 단연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일했다.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결코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3-4).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명확해 진다.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믿음을 가지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사랑하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소망이 있으면 인내하게 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다. 믿음을 가지니까, 해야 할 일이 보였다. 38년이나 된 병자를 그냥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병자를 사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수고를 아까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루게 될 줄 믿었기에,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자기의 길(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인내하며 걸어가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데살로니가 교회나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각각 그리스도로, 사도로, 교회로 택하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처럼 일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몸으로 택하심(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

 

내가 33살에 집사람과 단 둘이서 컬럼버스 조지아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여기에 어떻게 오셨어요?” 이 질문의 뉘앙스는 이런 것이었다. ‘젊은 부부가 이런 시골에 와서 고생이 많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와서 목회를 할까?’ 그것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의외로 매우 간단했다. “, 저희는 보내심(파송) 받아서 왔습니다!” 보내심(파송) 받아 온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견디고 그 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깊게 체험하고, 열매를 맺는다

 

나는 부르심(파송) 받아 이곳에 왔다고 믿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교회 생각 뿐이다. 내 목표는 우리 교회를 영적으로(Spiritually), 그리고 물리적으로(Physically) 안전하고 평안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더위가 좀 가시고, 기분 좋은 가을 날씨가 찾아 왔다.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목회자로서 (도의적으로) 많이 죄송하고 속상했다. 이상하게 주일마다 폭염에 시달렸다. (그래서 날씨가 마귀인가 했다. 조지아에서 102개월 동안 목회하며, 주일에 비가 온 적은 기억에 세 네 번 밖에 없었다. 그곳은 비가 자주 온다.)

 

주일에 부르심을 받고 교회로 모인 우리들이 예배드리며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며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날씨가 더운데다 에어컨이 없어서 예배 드리며 더위와 소음(문을 열어 놓다보니)과 싸우며 예배 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주님 제가 돈을 좀 벌어서 에어컨 살 수 있는 헌금을 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냥 내 생각에 우버를 해서 돈을 좀 벌까?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좀 해 볼까?’ 하며 별생각을 다 했다. ‘이젠 교회에 바칠 금도 없는데…’ 우리 애들 돌반지 받은 거 이미 컬럼버스교회 건축할 때 다 드렸다.

 

주님께서는 목사로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응답해 주셨다. 그게 바로 뉴비전 청년부 수련회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제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 돈을 벌어 왔다! (기도 응답이 너무 기뻐서, 사진 찍어놨다.)

 

조지 뮬러 목사님의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뮬러는 400명의 고아와 함께 빈 식탁에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식사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가 끝났을 때, 한 대의 마차가 고아원 앞에 도착했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식으로 그는 평생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조지 뮬러가 따로 있나? 기도해서 응답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믿음이 없고, 사용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는 누구나, 조지 뮬러가 될 수 있다!

 

예배는 단순히 우리가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해산하는 모임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세상으로 파송 받는 의식(Ritual)이다. 우리는 예배로 부르심을 받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 예배의 구성이 그렇다. 예배의 부르심 찬양 말씀 파송

 

파송 받은 자와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의 마음 가짐은 같을 수 없다. 여러분이 하는 직장의 일, 교회의 선교사역, 그리고, 각자의 삶에 자리에서 하는 확장된 사역(어머니학교, 빛과소금중창단, 히엘, 독서모임)은 모두 파송 받아 하는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어야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우리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해서, 우리 공동체의 Spiritual 한 부분과 physical 한 부분을 조금씩 reformation해 나가고 development 해 나가자. 급하지 않게, 조금씩,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가랑비에 옷 젖듯이 ….

 

중요한 것은 반드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교회로 모여, 예배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고 파송 받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는 말씀처럼, 주님께 보냄을 받지 않고 하는 사역은 모두 무면허 사역이다. 그런 사역은 성령의 열매를 절대로 맺을 수 없다. 자기의 의만 드러날 뿐, 자기의 의는 죄의 냄새만 나게 한다.

 

돈을 내지 말라. 교회는 돈 내는 곳이 아니다. 믿음을 드리는 곳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해 보라. ‘내가 돈을 드렸는데, 시간을 드렸는데, 헌신을 드렸는데, 왜 나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그러면서 시험에 든다. 믿음을 드려야지, , 시간, 헌신을 드리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아버지(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믿음의 일이고, 사랑의 수고이고, 소망의 인내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어떻게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증명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가, 믿음의 일,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가운데, 아버지가 일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을 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나와 세상에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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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