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28. 17:43

노동의 의미 

(데살로니가후서 3:6-15)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0)

 

이 말씀은 참으로 좋은 말씀이지만, 역사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서는 매우 악용되어 온 구절이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권력자가 피권력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가령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서구사회는 노예들에게 이러한 성경의 구절을 들이대며, 그들이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구절은 정말로 그런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이 구절만 뚝 떼어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쓰이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을 더럽히는 신성모독 행위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일까?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이라는 영국의 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20세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데, 그의 이력은 매우 다채롭다. 특별히 이 사람은 수학과 논리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여러가지 공헌한 바가 커서 1950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지도교수로서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며 인류 학문의 발전에 공헌하도록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저서가 많으나(<수학논리> 화이트헤드와 공저), 그 중에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과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왜 무신론자인지, 특별히 왜 기독교인이 아닌지에 대하여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그 중의 한 부분을 보면 이렇다.

"생각건대, 종교는 인간의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종교는 부분적으로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곤경과 분쟁에 있어 내 편을 들어줄 든든한 형의 존재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좋은 세계는 지식, 온정, 용기가 필요하지, 과거에 대한 애석한 동경이나 아주 오래전 무지한 사람들에 의한 자유로운 지성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Religion is based, I think, primarily and mainly upon fear. It is partly the terror of the unknown and partly, as I have said, the wish to feel that you have a kind of elder brother who will stand by you in all your troubles and disputes.... A good world needs knowledge, kindliness, and courage; it does not need a regretful hankering after the past or a fettering of the free intelligence by the words uttered long ago by ignorant men

 

한 사람이 어떠한 신념을 가지기까지는 다양한 영향이 미치지만, 그가 무신론자로 자신을 지시하기까지 그의 삶 속에도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나라에서 활동한 C. S. 루이스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이 어떻게 다른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책은 그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이다. 그냥 책 제목만 보면, 그가 게으름을 예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책 내용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평가절하 되어 있는 게으름과 평가절상 되어 있는 노동의 가치를 뒤집어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노동은 선한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게으름은 악한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 노동은 미덕이고, 게으름은 악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러한 관념을 뒤집어 보려고 시도한다. 그 책에서 러셀은 인간에게 삶을 향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동의 시간은 대체로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4시간의 노동 이후의 남는 여가의 삶을 게으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칼 마르크스가 세상에 기여한 부분이 노동 해방이라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등장하여 노동자 해방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 노동자는 자본가에 의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살았다. 노동자는 여가(게으름)’를 꿈 꿀 수 없었고, ‘여가는 자본가(권력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 이후에,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에 사회는 노동자들(일반 시민들)에게 여가를 선물해 주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여가를 사장님의 전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노동자는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가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버트런드 러셀이 경험한 20세기의 세상보다(그는 1872년에태어나, 1970년에 죽는다.) 훨씬 레디컬한 세상이 되었다. 웬만한 노동은 점점 사람이 아닌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노동력보다 로봇의 노동력이 점점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세상 사는 우리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특히,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는 말씀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가뜩이나 로봇에게 노동의 자리를 빼앗겨 가는 인류에게 이 구절은 로봇보다 못한 인간은 나가 죽어라!’는 말처럼 들린다.

 

성경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오늘 말씀을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지침과 같은 의미로 보면 안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 이것은 굳이 성경을 안 읽어도 자기계발서에서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내용이다. 스티븐 코비의 불후의 명작,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나, 한 때 유행했던 <아침형 인간>(일본작가가 주장했던 것 같은데 작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이라는 책 같은 것을 보면, 성공하기 위한 핵심 사항은 위의 말 그대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라는 것이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 그리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라는 말씀 등이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나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전후서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게으름의 문제가 발생한 정황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극단적인 신학을 견지한 일부 사람들은 어차피 곧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세상이 끝날텐데, 무엇하러 이렇게 일하노!’라며 일하지 않는 사람이 생겼고, 또 다른 문제는, 교회 공동체가 베푸는 선행을 악용하는 무리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 말미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살았다. 이것이 악용된 것이다. 공동체 내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악용하여 악한 게으름이 생겨났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게으름은 현대 교회에서도 빈번히 발생한다. 특별히 소위 대형교회에서는 자주 발생하는 문제다. 대형교회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게으름이 있다. 교회에 가서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그냥 교회 문턱만 드나들어도 대형교회가 제공하는 온갖 영적인 상품들을 힘들이지 않고 혜택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명백한 현대판 게으름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게으름에 대해서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신학에서 온 것이든, 교회 공동체가 제공하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를 악용하는 것이든, 그 어떠한 것도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한 번 물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당신을 이미 구원한 구원의 완성자인가, 아니면, 이제 우리를 구원하러 올 미래의 구원자인가? 재림은 구원의 완성이지, 단순한 시간의 종말이 아니다. 재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이다.

 

종교개혁사 학자인 카터 린드버그는 루터의 신학을 진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이해한 복음의 핵심은 구원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기초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쏟았던 힘과 시간을 이제는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도록 자유케 되었다는 것이다”(유럽의 종교개혁, 203).

 

우리가 왜 수고해야 하는가? 왜 일하기 실어하거든 먹지도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토대이다.

 

여전히 구원이 삶의 목표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삶의 목표가 되어 그것만 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기대감에 현재의 삶을 도외시하며 게으름을 피우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을 이루고 구원을 삶의 토대로 삼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사도에게서 받은 전통대로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기 위하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자기계발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그렇게 해야만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은 구원의 완성을 세상에 증거하는 복음의 빛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토대로 한 노동은 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한다. 우리의 노동이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의 열매, 또는 노동의 질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어떻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정말로 자신의 삶의 토대라면,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오늘도 게으르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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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