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10. 16:17

인의 형통과 신앙

(시편 37:1-8)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사촌하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 하물며, 원수가 땅을 사면, 얼마나 배가 아프겠는가. 시편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룬다. 시편은 현실적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유진 피터슨)는 다윗의 영성을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본문에 나타나는 주제는 우리가 현실에서 매일같이 목도하는 문제이다. ‘악인의 형통이 그것이다. ‘이 존재하는 것도 이해 안 되는데, ‘악인이 형통하는 것은 더 이해 안 되는 현실이다. 악이 존재하는 것과,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원망하며, 어떤 이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그들처럼 악한 일을 저지르는 데 동참하려 한다. 본문에 의하면, 이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이고 행동이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의 문제를 놓아두고, 다음 단어를 처음으로 써서 우리의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게 한다. “악일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1). 여기서 쓰인 두 개의 동사는 불평하다시기하다이다. , 악인의 형통을 목도했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평하거나 시기하게 된다.

 

불평하다는 히브리어의 하라라는 말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fret’으로 번역하고 있다. ‘fret’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be constantly or visibly worried or anxious.” ‘불평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게,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가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끊임없이, 눈에 보이게, 걱정하고 근심한다고 해서 악인의 형통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불평은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만 할 뿐이다.

 

그리고, ‘시기하다는 히브리어의 카나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be envious’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부러움의 마음을 나타낸다. 사람이 어떠한 물건을 보고 그 물건을 사게 되는 심리는 부러움이다. 이처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면, 나도 모르게, 악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불평하는 일이나 부러워하는 일은 결코 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악인의 형통을 바꾸지도 못한다. 결국, 악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못 끼칠 뿐더러, 나만 죄를 짓게 되어, 나도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시인이 악인의 형통을 불평하거나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악인의 형통은 잠시 푸르다 마는 풀과 채소 같아서, 곧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진리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악인의 형통은 정당화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불평하는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부러워하는 마음)을 몰아내고, 그 대신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할까? 시인은 크게 네 가지를 제시한다. 1)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2) 여호와를 기뻐하라, 3)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4)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3절에는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는 권고와 더불어, 참으로 시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가 그것이다. 이 말은 간추려서 표현하면, ‘성실을 먹으라는 말이다. 양이 풀을 뜯어 먹는 것처럼, 성실을 먹으라는 뜻이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는 세 가지이다. 식사, 운동, .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이다. 건강을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다. 건강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잠을 잘 자도, 결국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병은 먹는 것 때문에 생긴다. 먹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살려고 먹는데, 그게 오히려 나를 죽일 수 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가장 먼저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은 식이요법이다. , 먹거리를 바꾸는 일이다. (이게 제일 어렵다!)

 

성실을 먹으라는 말에서 성실은 우리의 성실이 아니라, 푸른 초장에 펼쳐진 하나님의 성실이다. ‘하나님의 성실을 먹는 행위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믿음이라고 말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초장에서 무엇을 먹는가? 믿음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이다. 기쁨은 에너지와 같다. 에너지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듯이, 기쁨이 없으면 선을 행할 수 없다. 기쁨 없이 하는 모든 일은 고통이고 폭력이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찬양, 설교, 교제, 모두 기쁨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쁨이 있다면,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선한 일, 만족을 주는 일, 행복을 주는 일,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 된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쁨을 자신의 바깥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그렇게라도 기쁨을 찾으면 다행이지만, 불행하게도 바깥에서 찾은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은 성냥불과 같아서, 바람에 의해 꺼지거나, 바람처럼 사라진다.

 

기쁨은 자신의 바깥에서 찾으면 안 되고, 자신의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의 뜻이다. ‘(데레크)’은 삶의 여정, 태도, 소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외적인 요소가 아니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나의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에 맡길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만 존재한다. 이것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굴리다라는 뜻이다.

 

축구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게 된다. 축구를 하면서 우리는 공을 상대방에게 패스한다. ‘맡기라는 말은 패스와 같은 이미지이다. 공을 패스하듯이, 우리 삶의 여정, 태도, 소망을 하나님께 패스, 굴리라, 맡기라는 뜻이다. 이러한 행위에서 발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쁨이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패스를 제대로 하면, 골을 넣는다. 그런 기쁨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시인이 악인의 형통을 놓아두고, 권면하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것을 두 자로 줄이면, ‘인내이다. 인내란 억지로 참는다는 뜻보다는 평정심을 가지고 가만히 있으라, 그러면서 희망하라는 뜻이다. 인내는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해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만, 인내는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준다.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쉽게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고 부러워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영혼에 베어 있는 습관 같은 것이다. 자신이 어떠한 습관을 지니고 있는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깨닫기 힘들다. 누군가 말해줘야 한다. 시인은 지금 우리의 기울어진 습관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우리의 습관을 한 번 돌아보자. 악인의 형통을 보고, 우리는 얼마나 불평하고 부러워했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을 악인의 길에 살짝 밀어 넣었는가.

 

이제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보고, 그렇게 반응할 필요 없다. 말씀을 통해서, 악인의 형통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얼마나 이슬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지, 얼마나 확실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살아가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장에서 성실을 뜯어 먹고, 나의 삶을 주님께 패스하고, 거기에서 발생되는 기쁨 가운데 선을 부지런히 행하고, 주님의 다스리심을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악인의 형통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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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