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8. 09:20

식상한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17:11-19)


옛날 아버지께서 목회하실 때, 교인 중에 목사가 설교를 시작하면 고개를 숙이고 주보에 낙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이 그러한 행동을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주보에 나온 성경본문과 제목만 보면,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할지 다 안다고 생각해서이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닌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에 의해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영광과 감사를 표현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본문을 읽으면서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경계를 낮췄을 지 모른다.

 

옛날 같았으면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인격이 없는 사람, 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발달한 뇌과학에 의하면,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과 인격의 문제라기보다, 뇌의 메커니즘의 반영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비난만 할 수 없다.

 

우리 뇌에는 신경세포라 불리는 뉴런이 있다. 뉴런은 어떠한 신호에 반응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두 가지의 행동을 한다. 반응을 보이는 것을 ‘fire’라고 한다. 뇌 과학에는 헵의 학습법칙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뇌 안의 신경세포는 경험을 학습한다라는 것을 말한다.

 

뉴런(신경세포)은 경험한 것, 즉 아는 것에 반응한다.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 한다. 찬양 예배 드릴 때, 아는 찬양이 나올 때 즐거운가, 아니면 모르는 찬양이 나올 때 즐거운가? 영어로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는가, 아니면 한국어로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는가? 우리는 아는 것에 반응한다. 일단, 설교 시간이 재미 있으려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내용을 잘 모르면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해도 아무런 은혜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뇌 과학에서 밝혀낸 뉴런의 메커니즘을 보면, 뇌는 일차적으로 경험한 것, 아는 것에 반응하지만, 반대로 같은 것을 계속 경험하면 지루해 한다. 뇌의 신경세포도 굉장히 게을러서, 똑 같은 것을 반복해서 경험하면 반응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교회를 오래 다녔거나,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의 내용을 잘 안다고 스스로 생각한 사람의 돌발적인 행동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뇌의 메커니즘에 의한 반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리학계에서 심리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세계 3대 심리학자가 있다. 지그문트프로이트, 카를 융, 그리고 알프레드 아들러가 그들이다. 이 중에서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개인심리학에 대해서 주로 연구했지만, 융은 집단심리학 분야를 개척했다. 나는 융의 집단심리학 측면에서 뇌과학의 결과를 적용해 보고자 한다.

 

융은 개인의 마음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집단 무의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행동을 분석하려면 개인의 역사 뿐만 아니라, 집단의 역사도 반드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개인에게는 집단적으로 형성된 심리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통하여 발전된 학문이 신화학, 민속학, 문화인류학이다.

(심리학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아시는 분은 흥미롭지만, 잘 모르시는 분은 뭐래하면서 흥미를 잃으셨을 것이다. 그게 뇌의 메커니즘이다.)

 

나는 요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집단적으로 뇌의 메커니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자주 들어서 지루해진 것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뇌는 똑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으면 지루해 한다.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 또는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으면 반응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짜증까지 낸다.

 

한국의 선교 초기나, 한창 기독교가 부흥 할 때, 거리에 나가서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Jesus loves you!”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반응했다. “? 내 남편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또는, 나는 우리 부모님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예수라는 분이 나를 사랑한다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졌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구원 받은 단 한 사람의 나병환자처럼 반응했다.

 

그런데, 요즘 나가서 누군가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Jesus loves you!”라는 말을 건네보라. 그러면, 그들은 뭐래하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짜증내거나, ‘너나 잘하세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누구도 온 마음을 다해서, 기쁨이 가득하여, 누군가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것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도 그렇고 그들도 그렇고, 모두, 예수의 이름을 식상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라는 이름, 성경이라는 용어,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설교를 하도 많이 들어서, 우리가 성경을 잘 알고 있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이것이다.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교회를 오래 다녔거나, 교회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상관 없이, 성경을 잘 안다고 스스로 착각할 뿐이지 실제로는 성경 지식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바나그룹에서 미국 성서공회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 의하면, 미국 가정들 88퍼센트가 성경을 적어도 하나 이상 갖고 있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 중 82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43퍼센트의 미국 사람들만이 성경의 처음 다섯 권(모세 오경)의 이름을 다 맞추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식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뉴런의 착각이다. 뇌의 메커니즘을 너무 믿지 말라. 우리의 뇌는 예수의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식상한 것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말 예수의 이름은 식상한 것인가?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너무 식상하게 여겨 열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행동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을 지나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소리 높여 외쳤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는 하는가? ‘불쌍히 여겨달라는 절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정용섭).

 

우리는 어떠한가? 살면서 어떠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주님 앞에 나아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높여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을 간절하게 하는가? 인터넷 뒤져보고, 관련 전문가를 만나서 조언을 받는 등, 우리는 다른 궁리부터 하지 않는가?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너무 식상하게 여겨 고침 받은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행동한다. 열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가던 길을 되돌아 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영광은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뜻이고, 감사는 주변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집중하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사는가? 그저 자기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지금 너무도 권태로운 신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권태로우니까, 자극적인 것을 찾아 이 설교 저 설교 듣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닌다. 그런데, 그러한 임기응변식 신앙으로는 이미 식상해져 버린 예수의 이름을 새롭게 경험하지 못한다.

 

뇌는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즐거움,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도 많이 들어서 예수의 이름을 지루한 것이라고 잘못 전달하고 있는 뉴런의 착각을 깨뜨리고, 예수의 이름을 새로운 것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뉴런의 신경체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뉴런에 의해서 축적된 교만을 버려야 한다. 그 동안 우리가 잘 알고 있었다고 착각한 예수의 이름을 새롭게 알기 위하여 이 외침부터 새롭게 배워야 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실제로 성경을 함께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활짝 열어 놓을 때,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 함께 외쳐보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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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