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22. 16:25

광야로 가자

(마가복음 1:12-15)


우리가 하도 성경 이야기를 들어서 그렇지 성경의 세계는 참 낯선 세계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중동의 세계를 잘 모른다. 중동은 한국 사람이 가장 낯설어 하는 문명이다. 그래서 다른 문명은 잘 받아 들이는데, 이슬람 문명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중동의 문명은 기본적으로 광야 문명이다. 낙타가 대표적인 예인데, 낙타만큼 광야(사막)에 적합한 동물이 없다. 오늘 말씀 제목이, ‘광야로 가자이지만, 우리는 이게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다. ‘광야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광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약간 이해라도 하지만,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광야라는 개념을 갖기 힘들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정말로 아름다운 시이지만,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광야에서의 목축업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그리고,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성경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간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을 들려주신 후, 어떻게 그를 광야로 몰고 가시는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나, 의문이 든다. 사랑하는 아들인데, 다른 좋은 곳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광야인가?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Midbar)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mi’다바르dabar’의 합성어이다. 히브리어로 다바르(dabar)’말씀이라는 뜻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단어를 더 보자. 히브리어로 성전은 미크다쉬(Mikdash)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mi’거룩을 뜻하는 카도쉬(kadosh)’의 합성어이다. , 히브리어에서 어떠한 단어 앞에 mi’자가 붙으면, 그 단어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뜻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거룩함(카도쉬)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성전(미크다쉬)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 임하는 곳이 광야(미드바르)인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광야의 개념과 고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광야의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광야로 나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요,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성취이다.

 

출애굽기서에 보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힘든 인생을 살았다. 노예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인생을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노예의 신세를 벗어나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은 그들이 출애굽하여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이다.

 

개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의 인생을 보면 알 수 있다. 모세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된 것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는 왕궁에서 성장한다. 모세는 자라나면서 자기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의식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왕궁 밖에서 불의한 장면을 목격한다.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과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위해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인다. “그렇게 하면 너한테 칭찬 받을 거라 생각했어.”

 

그 다음 날, 모세는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는 것을 목격한다. 그래서 모세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시시비비를 가리려 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모세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런 나도 죽이려느느냐?” 이 말을 듣고, 모세는 결국 두려움에 사려 잡혀, 왕궁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도망친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그가 왕궁에서 왕의 교육을 받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언 광야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양을 치고 있을 때, 광야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이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같은 것을 목격한다. 블레셋의 위협 때문에 세워진 왕 사울은 여느 때와 같이 블레셋과 대치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버티고 있어서,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울은 백방으로 적장과 싸워 이길 이스라엘의 장수를 찾고 있었지만, 아무도 거인 골리앗과 상대하겠다는 장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심부름을 갔던 목동 소년 다윗이 사울 왕에게 나아가 적장 골리앗과 싸우게 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내어주지만, 다윗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평소에 즐겨 쓰던 물매와 돌 다섯개를 주워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선다. 그러면서 다윗은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5, 47).

 

다윗은 골리앗을 넘어뜨린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한 것을 무슨 군사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다윗은 평소 광야에서 양을 치며, 곰과 사자가 덤빌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물매로 그들을 물리쳤고, 광야에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배웠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 다윗은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키웠다. 그리고, 광야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법을 배웠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으로 가장 혼탁한 시대를 살았던 엘리야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지켜내기 위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 뒤에, 이세벨의 살해 위협 소식을 듣고 도망치던 엘리야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던 사명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도망치던 중간에 탈진하여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한다. “자기 자신이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그렇게 죽기를 간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루만져 살리신 후, 그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하여, 결국 엘리야는 광야 깊은 한 곳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영적인 침체에서 회복하여 새로운 사명을 받고 세상으로 나시 나온다.

 

모세가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왕궁 교육 때문이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다윗이 아무도 이기지 못했던 골리앗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군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영적 침체에 빠져 죽기를 간구할 정도로 힘든 상황 속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여 모든 인류의 구원의 소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가 무수히 나온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광야는 물리적 장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다. , 신앙의 선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광야로 나가거나, 광야로 불러내어졌다.

 

우리는 자녀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온갖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마땅하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온갖 좋은 곳을 다 구경 시켜주고, 좋은 곳을 다 데리고 간다. 할 수 있거든, 더 많이 하시라. 그러나, 우리가 광야의 영성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아이들을 광야로 보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자녀들이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중요한 삶의 문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문제는 도서관에서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서 조언을 구한다 해도 풀지 못한다. 광야로 나가, 적막한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

 

현대인들의 삶이 불안하고 힘든 이유는 삶 속에서 광야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마땅히 존재해야 할 광야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려한 불빛의 도시만이 자리 잡고 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바벨에 세워진 성읍과 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들의 지혜로 살아가겠다고 하나님을 대적한 인간들의 교만을 고발한다.

 

실제로 도시의 삶 자체는 먹고 사는 데만 몰두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광야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도시의 문화가 그것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 일례로, 지난 수요일은 214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재의 수요일로 지키며 사순절에 들어갔음을 인식하고 공포해야 하지만, 그날은 발렌타인데이였기 때문에 교회보다는 레스토랑이 붐볐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를 생각하기 보다는 초콜릿을 훨씬 더 많이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광야로 나가야 하는 절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절기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리스도의 이 선포가 진지하게 들린다면, 성령께 간구하라. “나를 광야로 데려가 주세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새창조의 역사가 삶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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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