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4.03.30 눈을 뜬다는 것
  2. 2014.03.30 목마른 세대
  3. 2014.03.27 마음의 문화
  4. 2014.03.22 어린 왕자의 고백 1
  5. 2014.03.20 소알 - 밴댕이 소갈딱지의 최후
  6. 2014.03.16 영원 1
  7. 2014.03.10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8. 2014.03.02 텐트 치고 사순절 맞기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30. 23:01

눈을 뜬다는 것

(요 9:1-12, 5:8-14)

 

레슬링 선수와 소방수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소방수가 이깁니다. 왜요? 소방수는 물불 안 가리니까요! 그러면 소방수와 눈 먼 사람(장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눈 먼 사람(장님)이 이깁니다. 왜요? 보이는 게 없으니까요!

 

50, 60, 70대 남자의 대화

50– 아내한테 배고파서 밥 차려 달랬다 죽는 줄 알았어요.

60– 아내한테 어디 가냐고 물어봤다 죽는 줄 알았어.

70오늘 아침에 눈 떴다고 죽는 줄 알았어.

 

도대체, 눈을 뜬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보지 못하는 자들보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고, 보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부류의 대조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나면서부터 눈 먼 자이고, 다른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눈 먼 자는 나면서부터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눈 먼 것까지 힘겨운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눈멂은 이 사람에게 인생 전체에 새겨진 주홍글씨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나 신체장애는 죄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신체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이죠. 참으로 불합리한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불합리하고 죄악된 생각을 예수님께서 뒤집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종교는 이처럼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서 폭력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폭력이 가해지면 사람들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눈먼 이 사람도 저항하지 못하고, 평생 자기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서 죄책감에 싸여 낮고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길 가시던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을 돌아보셨습니다. 함께 가던 제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맹인으로 난 것은 본인이든 부모이든,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저렇게 맹인으로 난 것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을 보아라!” 예수님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그 당시의 통념을 뒤집으셨습니다. 물론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몰아 넣는 것은 불합리한 종교적 폭력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혹시 질병에 걸렸거나 자기 신변에 우환이 생기면 우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싸인인가?’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죄책감에 싸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좀 잘못된 것이 있다 싶으면,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우리의 죽음의 깊이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는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고,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아주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눈먼 자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빛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확인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눈 뜸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그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보십시오. 맹인은 계속해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바리새인들에게 진술합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은 질문합니다. “그 사람(예수)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답답한 맹인은 이렇게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말에 격분해서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다 눈 뜬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면서 말합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랬더니, 눈 뜬 사람이 한탄하면서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면서 눈 뜬 사람은 그 사람,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납니다.

 

이 일을 듣고 예수님은 그 눈 뜬 사람을 만나 위로해주십니다. 그를 당신의 제자 삼으시고,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았고,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눈을 뜨셨습니까? (웃을 때 눈 뜨고 웃으라!) 여러분은 보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까? 이렇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 우리가 말로는 예수님이 보인다 안 보인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장성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람은 맹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몸에 익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몸에 익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이 눈을 뜨면, 마냥 좋기만 할까요? 제가 지금 눈 뜨지 말고 그냥 맹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야죠, 병이 나아야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눈을 뜨고 병이 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눈을 떴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의 자녀로 살지 못할 거면 오히려 눈을 그냥 감고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필연적으로 빛의 자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안 그럽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와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병든 것들을 고쳐주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지긋지긋한 질병도 좀 나았으면 좋겠고, 지긋지긋한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좀 벗어났으면 좋겠고, 예수님의 은혜로 남편, 부인, 자녀 등 가족이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보기 원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맹인처럼 행동합니다. 어둠에 휩싸여서 어두운 일을 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합니다. 왜요? 맹인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삽니다. 마음이 어둡고 행동이 어둡습니다. 남을 헤칠 생각만 하고, 남을 헐뜯을 생각만 하고, 남을 미워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생각만 하고, 사회(공동체)를 분열시킬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이 거룩한 빛을 비추시는데, 어두운 마음이 들고 어두운 행동을 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에베소서 5 9절 말씀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도와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의 허물을 어떻게 덮어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를 어떻게 용서할까를 생각하고,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하면서 자기 자신을 감출 줄 알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빛이신 예수님이 보이는 건지, 안 보이는 건지. 다른 무엇보다 삶의 열매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하고 세상 사람들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세상 사람들이 이깁니다. 그들은 눈 먼 사람들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물불 안 가리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어차피 집니다. 예수님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싸우느라 괜한 에너지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어둠의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어둠의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빛 가운데 거해서,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눈을 뜨셨습니까?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그러면 빛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 하지 마시고,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빛의 열매가 삶 속에서 맺히게 될 것입니다. 눈 뜨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비추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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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30. 22:58

목마른 세대

(출애굽기 17:1-7)

 

<목마른 사슴> 찬양으로 시작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왔던 이스라엘 신광야라는 곳을 지나면서 르비딤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다. 그러나, 이들에게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물이 없었다. 물은 생명에 필수품.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거칠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와 더불어 다퉜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을 치던 그 지팡이로 호렙 산에 있는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을 치니, 거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단순히 물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의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다. 그 뜻은 다투다이다. 이스라엘의 목마름은 단순히 물 없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의 목마름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얼마 전 설교에서, 현대인들이 얼마나 을 안 먹고 사는지, 그래서 몸에 심각한 탈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몸에 탈수현상이 일어나면 건강을 헤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짜증이 자꾸 나기 때문에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기 힘들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 지금 차차 실행하는 것이 있는데, 아이들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는 것이다. 실제로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고, 아이들이 잠을 더 잘 수 있도록 했더니,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훨씬 더 부드러워져서 수업성취도도 좋고, 친구들 간의 다툼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거칠어지게 되어 있다. 힘들고 짜증나니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줄어들고, 오히려 사소한 일에 대해서 다투고 마음 상하게 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식량이나 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영적 빈곤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목마름 중에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심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가장 큰 사회적 문제다. 영적인 목마름. 배고플수록 아무거나 집어 삼키듯이, 영적인 목마름이 심할수록 아무거나 집어삼킨다. 공수부대요원들 산악훈련하면서 아무것도 못 먹고 며칠 굶으면, 지나가는 뱀이 그냥 음식으로 보인단다. 영적인 목마름이 심하니까, 요즘 이단사이비, 미신이 판을 친다. 영적으로 목마르니까, 아무거나 막 삼키는 거다.

 

우리 인생 가운데, 목마름을 채워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영적인 목마름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데 있다.

 

구약의 출애굽기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서신서의 말씀은 로마서인데, 로마서5장에 보면 그것이 잘 나와 있다. 51절과 2절 말씀을 그대로 읽어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픈 배를 채우고 나면, 즐거워진다. 마른 목을 축이고 나면 즐거워 진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채우고 나면, 즐거워지게끔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이다. ,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으면,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픈 배도 채웠고, 마른 목도 축였고, 갖가지 욕망들을 다 채웠는데도 여전히 목마른 자기 자신을 보며 당황해 한다. 온전한 즐거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오늘 다른 말씀과 함께 보기로 되어 있는, 복음서에서 본다.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목마른 여인이 나온다. 이 여인도 자신의 삶에 닥친 여러 가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던 여인이다. 이 여인의 개인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 여인에게는 과거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현재 어떤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여인이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목말랐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삶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인생이 목말랐던 이 여인, 남의 눈을 피해 마른 목을 축이러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길었다. 그리고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목마름을 전혀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다, 한 유대인 남자를 만났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인생에 깊이 베어있는, 그러나 해결할 수 없었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외쳤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삶이 즐거워졌다. 참 신비로운 일이다.

 

지금 이 시대는 목마른 세대다. 물 대신 마실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물로 착각하고 마시다, 심한 탈수증에 시달리는데, 그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자신의 짜증이, 자신의 불만족이, 자신의 어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지금 세대가 겪는 가장 심한 탈수증은, 영적인 탈수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세대다. 광야의 이스라엘 세대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세대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하는 길은 생명의 물인 예수는 마시는 것이다. 그 마시는 행위를 기독교적인 용어로, ‘믿음이라고 한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둘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나고, 우리의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할 수 있다. ,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만족함 가운데, 생명의 온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생명의 물로 내어주어 마시게 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는데도 예수를 생명의 물로 받들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예수를 생명의 물로 마시겠는가?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이 찬양을 부르자.

 

<우물가의 여인처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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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7. 05:54

마음의 문화

창세기 19번째 시간

(창세기 19:30-38)

 

소알로 피신한 롯과 두 딸, 그들은 거기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산에 올라가서 살게 됩니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소알로 가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죠.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롯은 자신의 뜻대로 소알 땅으로 가지만, 결국 못 버티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산으로 쫓겨 갑니다.

 

롯이 살던 고대사회는 현재의 문명과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어 있지만, 옛날 고대사회에서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이사가 자유롭지만, 옛날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고 도전이었습니다. 이미 거기에 형성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소돔 땅에서 거주하던 롯도 겪은 바입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소돔 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비하하면서 그를 헤치려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재물이 많은 상태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소돔 땅에서조차 그럴 진데,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로 피난한 소알 땅에서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죠.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는 것과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간에 무던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롯처럼 이렇게 산으로 쫓겨 갑니다.

 

산으로 쫓겨간 롯의 가족에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요즘 말로 19금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바로 근친상간입니다.

 

근친상간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산으로 도망한 이들은 동굴 속에서 은둔하며 살게 됩니다. 소돔 땅에서 많은 재물을 내세워 떵떵거리며 살던 때와는 완전히 반대의 삶입니다. 거지를 넘어서 거의 짐승처럼 살게 됩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은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을 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 가자”(31, 32).

 

물론 롯의 두 딸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닥친 급작스런 일련의 일들 때문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엄마는 소금기둥이 되어서 죽었죠. 아버지는 소돔을 멸망시킨 재앙 때문에 벌벌 떨고 있죠. 약혼자들은 소돔과 함께 멸망했죠. 자신들이 누리던 풍요는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죠.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자신들의 배필을 구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던 것 같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신 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대처하기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례로, 미국에는 곳곳에서 동물들이 자주 튀어나오는데, 여러분이 운전하다 사슴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사슴이 튀어나오면 무조건 받는다라는 마음을 정해 놓지 않으면, 우물쭈물하다가 사고 날 가능성이 큽니다.

 

큰 일을 겪을 때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면 엉뚱한 결정과 함께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바로 롯의 가족처럼 말이죠. 위기의 상황에서 잘못된 생각을 한 롯의 두 딸은 정말로 온 세상의 도리를 따르지 않고, 이방인들조차도 저지르지 않는 근친상간을 저지릅니다.

 

돌아가는 일을 보십시오. 두 눈 뜨고 보기에 참 민망합니다. 아버지와 동침하기 위해서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입니다. 권력, , , 여색(남색) 등 사람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온통 죄 밖에 낳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언제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모습을 하고 있어 사람을 홀립니다. 창세기에도 그런 기사가 있지만, 영어로 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영웅 서시인 <베어울프>도 그런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몇 년 전 안젤리나 졸리를 주인공으로 해서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어글리한 괴물 그렌델의 어미 역으로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했었는데, 겉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괴물 그렌델 보다 더 흉측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것이 그렌델의 어미였죠.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러 갔던 영웅들은 그렌델의 어미의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결국 그렌델의 어미에게 오히려 농락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 유혹을 이겨내고 결국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는 영웅이 베어울프인데, 그 과정이 정말 힘겹습니다.

 

롯의 두 딸은 이틀 상간으로 차례대로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그와 동침을 한 뒤 아이를 생산합니다. 첫째 딸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모압. 둘째 달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벤암미. 이들은 이스라엘 주변에서 그들을 평생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죽을 까봐 두려워 안전한 곳을 찾아 도시문명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던 시대의 문화는 떠나지 못했습니다.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그들의 타락한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두 천 사가 소돔 땅에 살던 롯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소돔 사람들이 두 천사와 상관하기 위해서 어떻게 거칠게 나왔었는지,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아 알고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문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척도는 눈에 보이는 문명에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에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담지만, 문화는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롯의 가족은 눈에 담았던 문명을 떠날 수는 있었지만, 그래서 산으로 갔지만, 이들은 마음에 담았던 문화는 버릴 수 없었던 것이죠. , 모름지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마음의 문화입니다. 이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했어도 문화가 타락하면 그 문명은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론, 로마 등 역사상 세계를 호령했던 나라들이 모두 그런 절차를 밟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무리 겉으로 보이는 삶이 풍요롭고 남들의 부러움을 살지라도, 즉 개인의 문명이 휘황찬란해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타락해 있으면, 개인이 파산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죠. 우리는 그러한 기사를 종종 접합니다. 특별히 로또에 당첨되어서 일확천금을 쥔 사람들의 비참한 최후를 종종 접합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식상한 것 같지만, 진리를 전하고 있는 잠언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이 마음 속에 이미 들어간 것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마음 속에 타락한 마음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이 마음이 품은 것이 무엇입니까? 탐욕입니까? 두려움입니까? 그렌델의 어미처럼 흉측한 것입니까? 물론 자기를 마음에 품어 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품으라고 핏대를 높여 말하는 것은 오히려 볼품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에 거리껴 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등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그것과 정대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하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정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을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래서 여전히 전쟁터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바탕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어떤 문화가 승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분명 그 운명을 달리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사탄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전쟁이 없기에 오히려 마음이 평안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탄의 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전쟁 상태에 놓여 있어 평안치 못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하나님의 샬롬(평화,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현재 어디에 해당되시는지요?

 

한바탕 마음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 무섭고 귀찮아서, ‘살던 대로 살다 죽을래’,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 인생은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는, 생명이 철철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를 바르게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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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3. 22. 13:51

어린 왕자의 고백

 

애초부터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없다

옆 집 사는 철수는 켄타우로스 별에서 왔다

그래서 걔가 좀 반신반인처럼 별난 데가 있는 거다

초등학교 때 짝꿍 영희는 어떻고?

걔는 전갈자리 별에서 왔다

그래서 걔는 독을 품고 있는 거다 건들면 죽는다

고등학교 때 학생주임, 일명 미친개는

사냥개자리 별에서 왔다

그래서 학생주임은 그렇게 물어댔던 거다

그래서 자기가 온 별이 보이는 북위 42도에만 가면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댔던 거다

어제 안 사실인데

우리 집사람은 토끼자리 별에서 왔단다

어쩐지 가끔 귀여운 구석이 있더라 했더니

우리 집사람은 토끼풀이 그렇게 좋단다

토끼풀꽃반지 끼면 공간이동 할 태세다

 

애초부터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없다

모두 엄마 자궁을 게이트 삼아

우주 공간에서 텔레포트해서 지구에 온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별난 거다

별의 별 사람 다 있는 거다

밤 하늘의 별만큼

별난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지구별을 만들다가도

샛별 같은 미련이 동터 올 때쯤

사경을 헤매는 아지랑이처럼 차르르 사라지는 것은

자기 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거다

 

나는 어느 별에서 왔는지 궁금하다고?

그건 비밀이다

물론 당신이 어느 별에서 왔는지 나에게 말해준다면

나도 내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말해 줄 거다

그런데 그걸 꼭 말해야 아나?

별스런 내가 안 보이나?

그런 걸 물어보려는 당신도 참

까만 밤 한 구석에 팔랑팔랑 박힌 별처럼

총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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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0. 04:03

소알 밴댕이 소갈딱지의 최후

창세기 18

(창세기 19:15-26)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긴박성은 성경의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급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긴박성을 동반합니다.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할 때도 그랬고, 예수님이 이어서 천국을 선포할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온통 긴박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발맞추어 긴박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동틀 때라는 시간 자체도 긴박성을 말해 줍니다. 사건은 두 다리 뻗고 잠든 한 밤 중에 일어나거나, 늘어지게 낮잠 자고 싶은 오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건은 늘 긴박성을 동반하고 일어납니다. 동틀 때, 천사들은 롯을 재촉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그런데 문제는 재촉하는 천사들이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입니다.

 

우선, 생명이 죽고 사는, 이렇게 긴박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결국 롯의 사위들은 롯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긴박성이 잘 전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소통의 실패입니다. 소통의 실패는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천사들은 재촉하는데, 롯은 지체합니다. 천사들의 긴박성이 롯에게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롯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은 롯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천사들은 지체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을 강제로 이끌어 냅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일단 성밖으로 이끌어 낸 후,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그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우리 인간 쪽에서의 책임적인 응답도 필요한 겁니다.

 

롯을 보면 그에게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이 긴급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롯은 계속하여 자기 자신의 형편만 생각합니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을 받아 들고 거기에 온전히 순종하기 보다, 자신의 요구를 말합니다. 이것은 당대 의인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노아의 순종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차이가 나는 반응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는데, 롯은 방주를 지으라는 것도 아니고 산으로 도망치라는, 비교적 쉬운 명령인데도 불구하고 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롯에게 드리운 비극의 그림자들입니다.

 

롯이 천사들에게 부탁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그 성읍의 이름은 소알입니다. 소알의 뜻은 작다는 뜻입니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말이 그것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자가 작을 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실 문자적으로 아무런 관련은 없습니다. 영어로 소알은 ‘zoar’로 표시합니다.

 

작은 도시 소알로 도피하고자 한 롯, ‘소알이라는 도시가 그의 마음을 나타내주는 그림언어(메타포)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드넓으신 은혜를 담아내기엔 얼마나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순종하지도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하여 롯을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천사들은 롯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롯이 소알에 도착할 때까지 소돔과 고모라에게 내릴 유황과 불을 잠시 유보합니다. 그리고 롯이 소알에 도착한 것을 확인 한 뒤 비로소 유황과 불을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다 엎어 멸하십니다.

 

그런데 소알로 도피하던 중, 롯의 가족에게 비극이 발생합니다. 사실 이것은 예견된 일입니다. 본문에 나온 말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26). 천사들이 이르기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롯과 그의 가족은 처음부터 천사들이 내리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스스로 탈락하게 된 겁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롯이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곳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29). 롯이 구원받은 것은 롯 자신 때문에 아니라,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감사드릴 일이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주체적으로 응답하지 못하면 롯처럼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지체하게됩니다. 그것 자체가 스스로의 인생에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롯과 그의 가족은 천사들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나오면서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겁니다. 욕심은 인간의 마음을 작게 만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혼동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올바른 선택하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로 보전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욕심으로 작아진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만으로 만족을 못합니다. 아니 그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큰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그 작은 마음이 담아내지 못합니다. 담아내지 못하니까 결국 그 작은 마음이 담아낼 수 있는 분량의 탐욕스러운 작은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겠죠.

 

구원의 장소로 롯이 택한 곳이 소알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화적입니다. ‘작은 것이라는 뜻을 가진 소알로 목숨을 부지하러 달려가다 결국 작은 것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리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 그녀만이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지만, 그것은 롯과 그의 가족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렇게, 소알 밴댕이 소갈딱지의 최후는 비극적이고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밴댕이라는 물고기는 하도 성질이 급해서 사람에게 잡히자 마자 죽어버린답니다. 그만큼 속이 좁아서 스트레스를 받자마자 죽는 것이죠. 소갈딱지는 마음속의 속된 말인데, 밴댕이가 작은 물고기라 그 내장이 작은 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 속이 하늘처럼 드넓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지 못하면, 우리가 롯의 가족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그 최후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썩어져 갈지라도, 그 마음은 하늘을 담아낼 정도로 드넓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긴박성을 갖고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긴박하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때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소알에서 있었던 롯의 가족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좀 길지만 중요한 말씀이니 그 말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17:28-33).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긴박하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작은 것에 집착하느라 작아져서 드넓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담아내지 못하는 소알과 같은 밴댕이 소갈딱지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최후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최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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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3. 16. 02:56

영원

 

시를 읽지 않고 보낸 날들

그 날들을 생각하면

내 삶이 왜 시적이지 못한 지를 알겠다

무한으로 치닫는 삶

결국 죽음과 충돌하게 될 운명 앞에서

영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건

내가 영원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봄에 기어코 피어나는 잡초들도 아는 것을

나는 왜 모를까

그래서 나는 잡초보다 잘 난 것이 없다

 

따스한 봄날

햇살을 향해 가슴을 열어놓으니

엽록소가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

그리고 나는 시를 읽는다

이제 곧 광합성작용이 일어날 것 같다

그러면 마음이 푸르러질까?

 

잡초만큼만이라도 푸르러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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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10. 05:02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 2:15-17; 3:1-7)

 

지난 수요일, 참회의 수요일 (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합니다. 참회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주일은 빼고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여기서 중간중간 끼어 있는 주일40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기도 할 때, 주일은 금식기도를 안 하는 것도 좋습니다. 금식기도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거나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십니까? 춘분이 지나 오는 보름달 후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 입니다. 춘분은 대개 3 21일쯤 됩니다. 그 후 보름달이 얼마나 빨리 뜨느냐에 따라서 부활절이 빨리 오느냐 좀 늦게 오느냐 결정되는 것이죠. 올해 같은 경우는 춘분인 3 21일을 지나, 보름달이 뜨는 날이 4 14일이기 때문에, 보름달이 뜬 그 날 이후 첫 번째로 맞는 주일이 4 20일이기 때문에 부활절이 4 20일로 정해진 것이죠. 이 법칙만 알면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 스스로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참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40년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금식하시며 하나님을 만난 기간이 40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마귀의 유혹이 왔습니다. 교회가 40일을 정해 사순절로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40일 간의 영적 훈련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유혹이 들어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고,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부분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만 읽었고, 복음서의 말씀은 대부분의 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이야기라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엮여 선포될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 주신 후 어떻게 우리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죄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왜 죄가 당신의 창조세계에 들어오게 놓아두셨는지, 등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창세기가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창세기는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어온 것은 미스터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미스터리는 신비인데, 이는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체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 파악되어 가는 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종말론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종말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도 드러날 것이고, 죄의 신비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현재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등한히 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실체를 알아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와 복음서의 이야기는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론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우선 창세기에서 보면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뭔가 솔깃한 것을 인간에게 던져주어서 그것을 덥석 물게끔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가 제시하는 솔깃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었습니다.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하며 꼬드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피조물로 살기보다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뭔가를 좀 아는 것처럼 살게 된다는 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입니다.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의 야다라는 말인데, 부부관계에서 서로를 알듯이 훤히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우리의 인생이 불안하고 답답한 이유는 우리는 한치 앞도 우리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당이나 점집이 잘 되는 겁니다.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와 앞날을 알려주는 무속의 기능이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그들은 정말로 무엇인가를 알게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3:7a).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낭만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첫 번째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인 것을 보면 말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이런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시장에 가서 거위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다음날 거위가 낳은 알을 가져다가 요리 해 먹으려고 거위 집에 갔는데, 가서 보니 거위가 낳은 알이 그냥 알이 아니라 황금알이었습니다. 너무도 신난 농부는 아내를 불러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위는 하루에 한 개씩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덕분에 농부 부부는 점차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 부부는 서로 말하기를, 하루에 한 개씩만 황금알을 낳으니까 감질 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거위의 배를 가르면 거기에는 수 많은 황금이 들어 있을 거고, 그것을 차지하면 감질나게 하루에 한 개씩 황금알을 가질 필요 없이 한 번에 엄청난 부자가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칼을 가져다가 거위의 배를 가릅니다. 물론 거위는 죽었죠. 그러나 거위의 배를 들여다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위도 잃고, 황금도 못 찾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족합니다. 한 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한 눈 팔게 하는 유혹들이 엄청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이 타락의 순간이고 죄악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스스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교만이 싹트는 순간인 것이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 이야기 나오는 사탄의 유혹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1.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2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네가 땅에 닿기도 전에 너를 받들어 줄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는 교만한 마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우쭐해지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의존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 산다는 뜻이지, 하나님처럼 스스로 복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유혹 받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양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를 아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되는 법, 그리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는 것과 똑 같은 시험이 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우리 상식에서도 십자가에서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바라보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알아듣고 볼 수 있도록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더 잘 믿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신적인 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무력한 죽음만이 십자가에 걸려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만족하는 법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굉장한 겁니다. 지식과 생명의 일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부끄러움(shame)’만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생명이 자꾸 일치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곤욕이고 아픔입니다.

 

일례로 노벨상의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통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자기가 발명한 다이나마이트가 새 문명을 건설해가는 어려운 공사에 이바지되는 것은 기뻤으나 전쟁에 이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생명과 일치하지 못하고, 결국 생명을 헤치는 일에 쓰이는 것을 보고 절망한 것이죠.

 

우리는 내가 뭔가를 좀 아는 것을 가지고 삶을 꾸려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풍성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참된 지식, 지혜는 우리는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데, 우리가 가진 지식은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바로 이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순종. 순종이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어쩐지 생명으로 나를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를 참된 생명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 그것이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알량한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맡겼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그랬더니 거기에서 생명이 꽃처럼 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태초의 인류 때부터 그런 일이 인류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과 생명의 일치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참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터득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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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 23:10

텐트(장막) 치고 사순절 맞기

마태복음 17:1-9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신인가? 예수라는 이름은 지난 2천 년 동안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거리를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갈릴리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끊임없이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왔습니다. 기독교회가 내린 최고의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다. Vere Homo, Vere Deus. 이 말은 50%는 인간이고, 50%는 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 중에는 그런 존재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 말은 100% 인간, 100% 신이라는 뜻입니다. AD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확정된 교리입니다. 이후로,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정통이 아닌, not 나쁜놈)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각각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통해서 선포해왔습니다. 우리는 별로 생각 없이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보내지만, 사실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교회력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참 사람됨을 증거합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예수는 여느 사람들처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 물론 신성을 증명하는 요소가 가미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긴 태어나는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동정녀탄생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인성(사람됨)이 성탄절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예수의 신성(하나님됨)이 주현절기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현절기는 동방박사의 이야기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식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오늘, 주현절기가 끝나면서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또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해서 주현절기는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신성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예수의 신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 산상변모사건을 전해주고 있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의 하나님 됨을 깊이 묵상합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진술에 의하면,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신 뒤 엿새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장면은 분명히 구약의 두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과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처럼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상대로 씌어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늘 이런식으로 구약과의 연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즉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예수께서 높은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전해진 하나님의 의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예언이 바로 예수에게서 성취될 거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갔던 세 제자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희한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는 장면입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에스겔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고,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베드로는 횡설수설하면서 예수님께 제언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우리도 중요한 장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은 비디오나 사진으로 담아두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러한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습에는 그것을 저장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절기(일종의 기억장치)입니다. 일례로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우리가 비디오나 사진에 담아두는 것처럼 담아둡니다.

 

이스라엘에는 장막절(초막절, 수장절)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들은 이 절기를 통해서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생활 한 것을 기념했습니다. 광야에서 텐트를 치며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죠. 광야생활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위대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기간이었죠.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을 셋 지어서 여기에 있자고 하는 것은 바로 장막절에 지었던 그 텐트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초실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입니다. 이 유대인의 절기 중, 장막절(초막절)이 가장 큰 절기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는 변모사건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님, 기념 사진 하나 찍어 놓죠!” 정도가 될 겁니다.

 

이런 가운데 놀라운 일이 연속하여 벌어집니다.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은 신적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는 구름이 몰려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구름 속에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십니다.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눈 앞에 여전히 서 계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고,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것은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 사건이 바로 구원 사건입니다.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변모사건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보지 않으면, 변모 사건도 그 빛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은 뒤, 베드로가 어떻게 이 변모사건을 증거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이 변모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베드로후서 1 16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은 분명히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음성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들은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려진 이 음성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과 똑같이 들은 분은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구원자로, 예수를 주님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내 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요, 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고백입니다. 내 살과 내 피가, 내 살이 아니고 내 피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살이고 그리스도의 피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부활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변모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내 몸과 내 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로 삽니다. 그게 나에게 의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에 있는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시간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간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 앞에 다가온 사순절 동안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요즘 텐트 치며 야영하는 레저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텐트는 장막인데,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장 가까이 체험한 것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의식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로운 요즘, 우리는 광야와 같은 삶의 조건을 일부러 조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조건을 다 갖추어 놓고 살면,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만족을 조장합니다. 참된 만족이 없으면서도 우리는 만족을 조장합니다. 특별히 세상에서 말하는 풍요로움을 통해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마치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이렇게 만족을 조장합니다. “내가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영혼아 여러 해 쓸 문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8-19).

 

우리는 재물의 풍족함에 취해, 영혼의 빈곤함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삽니다. 이와 같았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은 선언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2:20-21).

 

재물에 집착할수록 영혼이 빈곤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람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만족이 없을 때 어딘가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하나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드리십시오. 밥도 좀 굶어보고, 잠도 좀 안 자보고, 가난한 자에게 가진 것을 일부러 나누어 주고 좀 빈털터리로 살아 보기도 하고, 자발적인가난에 한 번 처해 보십시오. 만족이 없으면서 애써 만족하는 것처럼 재물로서 만족을 조장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만족이 없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보자는 겁니다. 즉 우리의 삶을 광야와 같은 삶으로 한 번 만들어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지, 즉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족시키시는지 한 번 체험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순절기를 맞는 것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의 심정으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받을 때의 심정으로,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몸소 체험하겠다는 영적인 갈급함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사순절기 동안 여러분이 각자 치시게 될 텐트는 다르겠지만, 여러분이 만나게 될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사순절기가 눈 앞에 왔습니다. 텐트 치고 사순절기를 맞읍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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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