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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17. 06:00

신앙은, 패러독스다

창세기 22

(창세기 22:1-14)

 

패러독스란 모순되어 보이나 진리를 보여주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학자 중에서 신앙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들 중 으뜸은 키에르케고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책 <공포와 전율>을 통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그것을 통해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다른 상황을 설정하는 것으로 신앙을 풀어 나갑니다. 좀 길긴 하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직접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신앙에 대해서 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1)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나귀 등에 안장을 놓고 이삭을 데리고 그의 장막을 떠났다. 사라는 그들이 계속을 내려가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창문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그들은 사흘 동안 묵묵히 나귀를 타고 갔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이 되어서도 아브라함은 역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종들을 뒤에 남겨두고 이삭과 단 둘이서만 손을 잡고 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이 여행이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를 이삭에게 숨기고 싶지가 않다.” 그는 조용히 섰다. 그는 한 손을 이삭의 머리 위에 얹고 그를 축복하였다. 이삭은 그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몸을 구부렸다. 아브라함의 얼굴 모습은 아버지의 사랑 그것이었고, 그의 눈 길은 부드러웠고, 그의 말은 엄하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삭의 마음에는 아무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무릎을 끌어안고 발아래 엎드려 애원하였다. 이삭은 자신의 젊은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아름다운 희망을 위하여 애원하였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집에 있어서의 즐거웠던 일들을 아버지에게 회상시켰다. 이삭은 고뇌와 외로움을 회상시켰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붙들어 일으켜 자식의 손을 잡고 다시 걸었다. 아브라함의 말에는 위로와 격려가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때 순간적으로 이삭은 아버지를 외면하였다. 그러나 이삭은 다시금 아버지 아브라함을 바라보았을 때, 아버지의 얼굴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의 시선은 험상궂었고, 모습은 소름이 끼칠 만큼 창백하였다. 그는 이삭의 가슴팍을 움켜잡고 땅 위에 내던지며 외쳤다. “어리석은 자야! 너는 내가 너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나는 우상숭배자다. 너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믿고 있느냐? 아니다. 이것은 나의 욕망이다!” 그때 이삭은 벌벌 떨며 불안에 싸여 부르짖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땅 위에서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저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용히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늘에 계신 주여, 저는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삭이 당신에 대한 신앙을 잃느니보다는 오히려 그가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믿는 편이 좋습니다.”

 

(2)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그의 늙은 신부 사라와 포옹하였다. 그리고 사라는 자신의 치욕을 제거해 준 이삭에게, 그녀의 자랑이고 모든 후손들을 위한 소망인 이삭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묵묵히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눈길은 땅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나흘 째 되는 날에 가서야, 그는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다시금 땅 위로 돌아갔다. 그는 말없이 불을 지필 장작을 포개놓고, 이삭을 묶고, 말없이 칼을 뽑았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양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 양을 제물로 드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 이날부터 아브라함은 노인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신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삭은 이전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눈이 흐려졌다. 그는 다시금 기쁨을 볼 수 없었다.

 

(3)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젊은 어머니 사라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사라는 그녀의 즐거움, 영원한 기쁨인 이삭에게 입맞춤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생각에 잠겨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그는 이전에 황야로 쫓아버린 하갈과 그의 자식을 생각하였다. 그는 모리아 산에 올랐다. 그리고 칼을 뽑았다.

조용한 저녁나절이었다. 아브라함은 홀로 나귀를 타고 나갔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 이르렀다. 그는 얼굴을 숙였다. 그는 이삭을 바치려고 한 사실,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해 의무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죄를 용서해 주십사 하고 하나님에게 애원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나귀를 타고 혼자서 외로운 길을 다녀왔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최선의 것, 그것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생명을 수천 번이라도 기꺼이 내던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려고 한 일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죄라고 한다면, 만약 그가 그렇게까지 이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용서받을 수 있는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보다 더 무서운 죄가 있을 수 있을까?

 

(4)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는 길을 떠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라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충실한 종 엘리에셀이 그의 길을 인도하였으나, 그는 도중에 다시 되돌아갔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서로 의좋게 나귀를 타고 모리아 산까지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용하고 차분히 번제를 올리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하였다. 그러나 그가 뒤로 돌아서 칼을 뽑았을 때, 이삭은 아브라함의 왼쪽 손이 절망적으로 움켜쥐어져 있으며, 그의 전신에는 전율이 흐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사라는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삭은 신앙을 잃고 말았다. 세상에서는 이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이삭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본 일을 말하지 않았고, 또 아브라함은 그 일을 어느 누가 보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키에르케고르, 공포와 전율, 다산글방, 21-26>

 

우리는 창세기에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가 22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 성서기자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신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1).

 

우리의 일상에서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것은 실정법 상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를 제지할 것이고, 그를 일컬어 미친놈이라고 할 것입니다. 일상에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어나면 분명히 손가락질 밖에 못 받을 이러한 일에 대해서 성경은 왜 기록하고 있을까요? 아들을 바친 아버지의 이야기를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신앙이란 미친짓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미친짓 같은 신앙을 갖느니, 그냥 평범한 선한 양심대로 세상을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시험하고자 하신 그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1절 말씀은 그 일 후에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 일이 무엇인지 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후, 하갈과 이스마엘 사건 때문에 한 바탕 어려움을 겪습니다.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문제는 잘 해결된 듯 보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들과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그 내용은 창세기 2122절부터 30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도 받았고, 집안의 불화의 싹이었던 하갈과 이스마엘 문제도 잘 해결되었고, 게다가 정착해 살고 있는 블레셋 땅의 주민들과도 평화조약을 맺어,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누릴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평안을 달라고 하나님을 그렇게 찾아대다가도 막상 평안에 이르면 그 평안을 가져다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언약함입니다. 그렇다고, 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살겠다고 자신에게 평안이 이르는 것을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잠언 30장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처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를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 듯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구했을 때 그것이 내게 주어졌는데, 그것이 헛된 것인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인지 알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사모하게 되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금방 잊어버리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매우 고무적인 겁니다.

 

사람은 평화로울 때 또는 만사가 잘 풀릴 때 그 마음을 달아볼 수 없습니다. ‘시험의 때에 그 마음이 보이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그 시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달아보시는 시험이었습니다. 1절에서 쓰인 시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니싸인데, 이것은 시험하다, 입증하다, 증명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나옵니다만, 하나님의 시험은 누군가의 신앙을 잃어버리게 하고 사악한 의도를 가진 시험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달아보고 하나님께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은혜의 시험인 것입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아브라함에게 그야말로 시험이 닥쳤습니다.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 정말 눈에 넣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든 겁니다. 그냥 보기에도 참 불합리한 명령을 받아 든 아브라함, 한 번 저항해 볼만도 한데, 성서기자는 그가 어떠한 고민도 한 흔적이 없는 것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번제 장소까지는 3일이 걸렸습니다. 그 삼일 동안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을 하며 갔을까요? 아마도 수많은 고통의 파도가 가슴을 요동쳤을 겁니다. 그러한 마음을 상상해서 옮겨놓은 것이 위에 있는 키에르케고르의 글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에게 감정이입을 해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이란 불합리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무지막지한 명령 앞에서 그것을 의연하게 실행한다는 것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신앙은 패러독스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려고 온 힘을 다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땅의 한 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종들을 세워두고 아들 이삭과 단 둘이 산으로 올라가면서 이곳에 온 목적이 예배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온전히 준행할 목적이었다면, 여기서 우리가라는 말은 빠져야 합니다. 돌아올 때 이삭은 없고 아브라함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19절에서 아주 명쾌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를 위해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올라갑니다. 아들 이삭은 번제를 위해 나무를 지고 올라갑니다. 그때 이삭은 아버지에게 질문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장을 파고 드는 질문이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대답을 해줍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번제단을 쌓는 것이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은 것으로 시작해서, 나무를 벌여 놓고’, 이삭을 묶고’,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을 죽이기 위해 칼을 잡아 빼 듭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수많은 화가의 상상력을 자극시켰습니다.  그 중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가장 유명한데, 그의 그림을 보면 이삭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공포에 질린 표정을 너무도 잘 표현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바로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멈춰 세웁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두 번 부른 것은 상황이 그만큼 긴박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즉각 반응합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사실 이러한 반응은 보이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두고 있지 않거나 깨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도 이러한 반응은 보기 불가능합니다. 사무엘도 엘리 제사장 문하생으로 제사장 수업을 받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죠. 엘리 제사장의 가르침을 받고서야 비로서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늘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마음을 허탄한 데 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의 이삭 번제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것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조상은 불완전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을 일컬을 때도 쓰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신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 자체는 굉장히 패러독스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인간의 부족한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은 양 막무가내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신앙이란 패러독스해 보이지만,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능력입니다. 신앙 사건 중 가장 패러독스한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말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구원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요? 그것이 구원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께서 끝까지 하나님께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면서까지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한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그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우리의 주님으로 높여 주셨습니다.

 

명확히 이해되고, 기분 좋게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임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패러독스이기 때문에 불합리한 형태로 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적분별력이 필요한 거고, 그 능력을 입기 위해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일이 필요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것(아들)과 바꿀 수 없었습니다. 신앙 없는 우리는 자주 그런 실수를 범합니다. 유한한 것을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희생시킵니다.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택할 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우리의 인생에게 필요한 것들을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 주십니다. 그러나, 유한한 것을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그 유한한 것이 오늘 피었다 지는 들에 핀 꽃과 같은 우리네 인생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패러독스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당황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함으로 여호와 이레의 만복을 누리시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