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4.06.29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2. 2014.06.26 장자권 쟁탈전
  3. 2014.06.25 이방인 1
  4. 2014.06.25 숙명
  5. 2014.06.15 성령의 교제
  6. 2014.06.14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1
  7. 2014.06.12 주권과 기도
  8. 2014.06.08 존재의 변화
  9. 2014.06.05 위로와 화해
  10. 2014.06.0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29. 22:05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롬 6:12-23)

 

교회 다니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이다. 너무 많이 듣다 보니까 익숙하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 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죄라는 말뿐만이 아니라, ‘라는 말도 많이 듣는다. 그런데 도대체 란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이라는 말은 거부감까지 든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는 말씀까지 있는 것 같은데, 종이라는 말은 왠지 꼬리 중의 상꼬리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증거하는 복음은 말 그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정체성이 바뀐 그리스도인에 대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죄의 종은 무엇이고, ‘의의 종은 무엇인가?

 

우선 죄에 대해서 알아보자. 죄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설명하시겠는가? 죄라는 것을 떠올리면 실정법적인 죄부터 생각할 것이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을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죄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보다 근본적인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죄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메타포이다. 죄라는 말만큼 자기 자신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말도 없다.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죄는 휴브리스라고 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것, 신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 모든 관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것이다(마커스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202).

 

그러니까 죄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부여되는 메타포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과도하게 부풀려서 신 같은 존재로 여기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한 개인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집단이나 국가, 또는 인류 자체에서도 발생한다.

 

교회라는 집단도 스스로를 과도하게 부풀리면 그 자체가 신적인 존재가 되어 거기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적절한 희망을 주고 그에 상응한 과도한 요구를 할 수 있다. 사실 이단들이 이렇게 작동한다. 이단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집단을 과도하게 부풀려서 자신들이 무슨 진리를 담보하고 있는 듯 자기 자신을 꾸미는 것이다. 이단 교주에게서 특히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데,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 거의 신적인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이단 교주의 특징이다.

 

국가라는 집단도 그렇다. 이것은 사무엘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데,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권(국가)의 병폐를 지적하며 왕을 세워달라는 그들을 설득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은 왕이 세워지면 국가가 자신들의 당면한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헛된 바람이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국가는 왕을 내세워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렸고, 그러다가 결국 그 누구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고 만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국가가 하나님을 대신 하지 못했다.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 신과 같이 되려 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 모든 관계의 중심으로 놓으려고 하는 속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태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을까?

 

여기서 용서에 대한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죄의 종을 용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죄의 종이 용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흔히 용서를 눈감아줌정도로 생각한다. 만약 용서가 그런 뜻이라면, 죄의 종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서 신과 같은 존재로 남고 싶어하는 존재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부풀릴 테니까. 이런 경우, 오히려 용서가 그들의 존재의 부풀림을 정당하게 해주는 구실만 마련해 줄 뿐이다. 용서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자기 자신을 부풀려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이단 사이비가 작동하는 기재이다. 용서와 구원을 그런 식으로 수여해준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릴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죄의 종의 상태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그냥 용서해 주고, 그 상태를 그냥 인정(구원)해 주고 만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단 사이비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용서와 구원은 차원이 다르다. 말 그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존재의 변화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변한다는 것은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 18). 여기서 죄로부터 해방되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부풀려서 신처럼 되고자 하는 그 욕망, 상태에서 벗어난 상황을 말한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 바로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함으로 가능하다. 그러면 교훈의 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을 마음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표현한 말이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이다. 그들은 법 아래 있기를 좋아한다. 그 단적인 예를 바리새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게 법은 자기 자신을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남들이 지킬 수 없는 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풀렸다. 법을 지키지 못하는 남들과 같지 아니함을 자랑스러워 하며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시기를 바랬다.

 

사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기 위해서는 남들과 자신들을 경계 짓는 법이 더 필요하다. 대표적인 예가 대학입시이다. 대학입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만드는 이다. 좋은 점수를 받아 소위 명문대학에 가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신처럼 부풀려진 명문대학생들은 그때부터 남들 위에 군림하게 되고 자신이 남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그러한 입시제도를 철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남들과 구별하고 차별하는 그 어떠한 을 완전히 허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무신 분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공부 못하는 이들도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현실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공부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할지.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처사를 얼마나 불공평하다고 느낄지.

 

그러나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관심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놓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말한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구분하는 그 어떠한 (잣대)’을 모두 허무는 일을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와 너의 관계를 정립시켜주는 (잣대)’로 작동하게 끔 하는 것이다.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기러기 떼가 북반구로 날아가는 동안

지구에도 밤은 찾아오고

공원의 벤치에서 홈리스들은 아침을 맞네

 

집이 없는 사람에게

벤치는 집일까 침대일까

잠자면서도 출렁이는 보트피플들은 구유에 담긴

예수처럼 어리고 슬프다

 

기러기를 길들이면 정말로 거위가 될까?

거위는 새로 얻는 집을 사랑할까

 

지구의 북반구에서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를

남반구에서 시작하려 한 건 누군가의 잘못

흩날리는 페이지들이 꿈속에서 가벼운

집을 짓는다 나더러 부수라고

 

코와 입과 눈이 섞인 얼굴들이

꿈속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동안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하재연 시집,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중에서>

 

바울 사도는 말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21). 여기서 그 때란, 죄의 종이 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려 자기 자신이 신이 된 양 하면서 살았을 때 결국 거기서 맺어지는 열매는 죄의 열매 밖에 없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실정법에 저촉되는 끔찍한 범죄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부풀려 살다가 좌절하게 되면서 저지르게 되는 죄의 열매들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부풀려서 사는 사람에게 닥치는 것은 사망(죽음)’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이 있으니,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복음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2). 자기 자신을 부풀리는 일을 그만두고, 다시 말해, 다른 사람(존재)과 나 자신을 구분하려는 을 무너뜨리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결국 그 열매의 끝은 영생이다.

 

의가 곧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된다. 영생이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곧 구원의 삶, 영생의 삶이 되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면서 살아봤자,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추긴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이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사실 우리는 의식 못하는 가운데 거기에 놀아나는 것뿐이다. 정신을 좀 차려서 세상을 바라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중요하다. 나 자신을 부풀리면서 살아봤자 결국 내가 두 손으로 얻어낼 수 있는 열매는 죽음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거룩한 삶을 만들어 가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을 약속하신다. 그것을 그냥 선물로 주신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이 세상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면, 이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못 견디는 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의의 종으로 존재의 변화를 이룰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자유함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사(공짜로 주시는 선물)로 주시는 영생(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사 시대의 타락과 거룩  (0) 2014.07.06
순종 - 사는 길  (0) 2014.07.03
장자권 쟁탈전  (0) 2014.06.26
성령의 교제  (0) 2014.06.15
주권과 기도  (0) 2014.06.1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26. 13:08

장자권 쟁탈전

세기 27

(창세기 25:27-34)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자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속성상 하시는 모든 일이 사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별다른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에 주저 없이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이 혼란스러운 신앙을 불러 일으킨다. 특별히 삶을 깡그리 파괴할만한 위력을 지닌 사건이 삶 속에 발생했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한 없이 무력해 보이는 인간에게 그나마 주어진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기도일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해 안 된다고 고래를 절래절래 흔들다가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면 어느 순간 이해가 된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물론 그 기도 또한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특별히 기도복음서라 불리는 누가복음은 겟네마네 동산에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22:44).

 

하나님의 주권은 신비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길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는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기도는 쉽지 않다. 한 번의 기도로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기도는 한 순간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걸어가야 할 순례이다. 이처럼 기도는 인간에게 숙명이다. 기도는 자신의 얄팍한 욕망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에 도달하는 순례이다. 기도가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깨달아도, 이미 기도의 순례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위해서 기도했고, 리브가는 태중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불임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이삭은 기도했고, 하나님은 불임의 신비에 응답해 주셨다. 그래서 리브가는 그 신비를 열어젖히고 잉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리브가의 뱃속에서는 신비로운 일이 또 일어났다. 두 아이가 발을 걷어차며 서로 싸우는 듯한 상황이 매일 연출됐다. 그래서 엄마 리브가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이런 응답을 받았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쟁탈전이 복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엄마 리브가는 하나님의 신비에 마음을 두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하나님의 신비였다. 보통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이 이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는 그 반대였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에 접한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편애 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집중했다는 뜻이다.

 

복중에서의 장자권 쟁탈전은 에서의 승리였다. 에서가 먼저 나왔다. 그러나 쟁탈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쟁탈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세상에 나왔다. 장자권 쟁탈전의 최후 승리자는 누가 될 것인가?

 

에서가 먼저 세상에 나옴으로, 사실 에서는 장자권 쟁탈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서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만다. 장자권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일의 사정은 이렇다. 에서는 사냥꾼이었다.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사냥을 하고 돌아온 에서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마침 쌍둥이 동생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던 에서는 야곱에게 그 죽을 달라고 한다.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야곱은 에서에게 장자권을 팔라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서는 야곱의 제안을 넙죽 받아 든다. 그 이유가 이렇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배고파)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업도록 살피라”(12:16). 히브리서는 음행하는 자와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동급으로 말한다. 음행하는 자란 누구인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음행하는 자는 우상숭배자를 일컫는 말이다. 또는 자기 부인이나 남편을 버리고 다른 여자나 남자에게 관심을 두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우상숭배를 가리킬 때 음행하는 자라는 메타포를 쓰는 이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자나 음행으로 결혼을 파기하는 자나 똑같다. 우상숭배자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고, 음행으로 결혼을 파기하는 자는 자기의 부인이나 남편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다. 결국 에서를 음행하는 자와 동급으로 설명하고 있는 히브리서는 에서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죄를 범했다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는 망령된 자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헛것 취급하는 것만큼 큰 우상숭배가 어디 있는가? 그야말로 에서는 헛된 짓을 하는 망령된 자인 것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그렇다면 장자의 명분이 왜 중요한가? 첫째로, 장자는 두 배의 분깃()을 받는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 받을 때, 만약 아들이 세 있다면 아버지의 재산을 네 등분 해서 두 아들에게 한 분깃씩 나누어 주고, 두 분깃은 장자가 갖는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분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 분깃을 물려 받을 만큼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역사가 장자에게 임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장자는 축복권을 가지고 있다. 뭔가를 나누어 주려면 그만큼 더 많은 풍요로운 속에 있어야 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축복은 장자에게서 나와 그 아래로 흐른다. 장자가 축복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축복을 귀하게 여겨 그대로 복을 내려 주신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장자만이 가지는 권리이다.

 

셋째로, 장자는 예배를 수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예배를 수행한다는 것은 레위 제사장들이 성전의 일을 맡아 보면서 누렸던 은총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대제사장은 공동체를 대표하여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였다. 예배를 수행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뜻이다.

 

장자의 명분이 지니고 있는 이 세 가지의 권리를 종합해 보면, 결국 장자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함으로 삶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식을 얻는 것,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만큼 인생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공허함(emptiness)이다. 인생은 공허하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정말 처절하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별의 별 짓을 다한다. 그러나 채우지 못한다. 솔로몬의 고백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봤지만, 그는 그 어느 것으로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 12:1-2).

 

안식은 오직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텅 빈 마음에 당신의 생기(루아흐)를 불어 넣어주실 때만 비로소 우리는 안식에 거할 수 있다.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아무리 건강하게 살아도,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으로 살아도,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삶 가운데 안식이 없을 때이다. 안식이 없는 삶은 살아 있으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 가까이 함으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의 장자권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서의 장자권을 누린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장자권을 포기할 수 없다. 장자권 쟁탈전에서 승리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로 에서처럼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돈 몇 푼 때문에, 피곤하다고, 귀찮다고,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장자권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의 술수가 매일 같이 삶 속에서 일어난다. 베드로 전서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피 흘리기까지싸워야 한다. 장자권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장자권 쟁탈전에서 승리한 자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에서처럼 망련된 자가 되어 장자권을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에서의 후손이 아니라, 야곱의 후손이다. 장자권 쟁탈전의 승리를 거머쥐어야 한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종 - 사는 길  (0) 2014.07.03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0) 2014.06.29
성령의 교제  (0) 2014.06.15
주권과 기도  (0) 2014.06.12
존재의 변화  (0) 2014.06.08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6. 25. 11:11

이방인

 

나는 발견되지 못한다

너를 발견하지도 못한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 현미경이 필요한 것도

너를 발견하기 위해 망원경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눈 뜨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는

너와 나

그러나 세상은 장님의 눈동자처럼

어둡다

 

아기는 발견되기 위해 울며 태어나고

꽃은 발견되기 위해 예쁘게 피어난다

비는 발견되기 위해 옷을 적시고

바람은 발견되기 위해 창문을 흔들어댄다

 

그러나

아기는 금방 늙고

꽃은 어느새 시들고

비는 지나쳐 가고

바람은 도깨비처럼 자취를 감춘다

 

카프카의 이방인은

발견되기 위해 총을 쐈을까?

가룟 유다는

발견되기 위해 배신 했을까?

그럼 예수는 발견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을까?

 

울어도 웃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듯

눈이 내린다

내리자마자 땅 기운에

녹아버린다

 

너무 까매서 잠 들 수 없는 밤

너무 하얘서 뛰 놀 수 없는 낮

세상은 온통

부조리하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풍경  (1) 2014.11.08
날개  (2) 2014.11.03
숙명  (0) 2014.06.25
어린 왕자의 고백  (1) 2014.03.22
영원  (1) 2014.03.16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6. 25. 09:54

숙명

 

배가 고프다

고통이다

고픈 배를 달래면

고통이 사라질까

숟가락을 든다

식욕의 고통이 사라지고

배고픔의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손과 입은 수 없이 키스한다

뇌하수체가 만족 호르몬을

흘려 보내면

손과 입은 이별하고

또 다른 고통이 밀려 온다

배부르다

고통이다

부른 배를 달래면

고통이 사라질까

점점 빵빵해져

그런 나를

생명이라 부를 수 없다

매일같이

고통과 고통 사이를

오가는 나는

그래서 인간인 거다

천사는 배고프지 않겠지

물론 배부르지도 않겠지

고통은 인간의 숙명이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날개  (2) 2014.11.03
이방인  (1) 2014.06.25
어린 왕자의 고백  (1) 2014.03.22
영원  (1) 2014.03.16
연탄  (1) 2013.08.1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15. 23:19

성령의 교제

(고린도후서 13:11-13)

 

설교 제목이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성령교제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생명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생명의 영,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어떤 다른 존재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다.

 

본문의 마지막, 13절은 이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문구는 예배 말미에 축도로서 사용된다. 한글로는 교통하심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부분이, 바로 교제(코이노니아)’이다. 원문에 충실해서 번역하면, “성령의 교제가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교통이나 교제나 코이노니아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교통은 서로 상호 간에 일어나는 그 무엇을 전제한다. 코이노니아라는 것은 상호 간에 일어나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헬라어이다. 이것을 라틴어로 옮기면 콤뮤니오(communio)’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어의 ‘communion’이 나왔다. ‘COMMUNION’이 무엇인가? 성찬식을 일컬어서 ‘Holy Communion’이라고 한다. 이것을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거룩한 교제가 된다. 성찬식은 거룩한 교제이다. 왜 거룩한 교제인가?

 

성찬식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그것을 통해서 어떠한 마법적인 힘을 수여 받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어떤 사육제의 의식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살을 못 뜯어 먹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식인종이 아니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에 살과 피를 입은 실체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내 눈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실체, 교제, 일치라는 말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 또는 오류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담보 받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수여의 개념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는 말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수여 받는다라는 개념이 아니다. 만약 구원을 수여의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면, 예수와의 교제는 필요 없어진다. 이는 마치 어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적선하는 것과 같아진다. 부자와 가난한 자와의 교제가 없어도,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적선을 통하여 무엇인가 받을 수 있다.

 

구원은 수여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다. 오늘의 핵심 단어로 다시 표현하면, 구원은 교제의 개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수여받는 데서만 그친다. 그렇다 보니, 구원이 무슨 물건 사듯 믿음이라는 재화()’을 통해서 살 수 있는 것처럼 전락하고 말았다.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물건 사듯이,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 속에는 구원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구원과 거룩한 교제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교제 없이 구원을 얻을 길은 없다.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교제 없이 구원만 받기를 바라는 것은 일 하지 않고 임금만 받기 원하는 게으른 종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너무 구원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은 우리의 일차 목표가 될 수 없다. 구원이 일차 목표가 되는 한, 모든 것은 상대화 되고 만다. 구원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은 수단이 되고 만다. 구원이 목표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조차도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러한 오류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구원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구원은 목표가 아니라 선물이다. 우리의 일차 목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는 남녀가 깊은 사랑 가운데 빠지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자녀와 같은 것이다. 자녀를 목표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녀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교제는 성령에 참예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이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은혜는 값 없다라는 뜻이다. 값 없는 은혜는 오직 사랑에서만 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은 은혜다. , 값 없다. ‘값이 없다는 것은 싸구려라는 뜻이 아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는 뜻이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결단코 인간은 값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nature)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향(orientation)이다.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성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역사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무슨 역사를 이루는가? 고린도 후서의 핵심 말씀은 517절에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는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를 이루신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교인들끼리 분열이 심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성령의 교제를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분열이 심한 교인들끼리 서로 잘 지내라는 권고의 측면이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11).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핵심 단어는 이것이다: 기쁨, 온전, 위로, 한마음, 평안.

 

이러한 것들은 그저 이들이 서로 잘 지낸다고 해서 오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표지들(signs)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불러오는 새로운 피조물은 기뻐하고, 온전하며, 위로 받으며, 한마음이 되며(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 평안(안식)하게 된다.

 

교제란 바로 이런 것이다. 교제란 만나서 희희락락거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제, 성령의 교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는 신비이다. 구원이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목표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선물이다.

 

성령의 교제는 성령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령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성도들 가운데 오신다. 성령의 교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문안한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자들은 기뻐하고, 온전하며, 위로 받으며, 한마음이 되며, 평안 가운데 거한다. 그러니 어찌 거룩한 입맞춤으로 성도와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우리를 단순히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서로 잘 지내는 것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 구원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빛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그 새로운 창조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된다. 성령의 교제가 바로 그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얼마나 은혜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0) 2014.06.29
장자권 쟁탈전  (0) 2014.06.26
주권과 기도  (0) 2014.06.12
존재의 변화  (0) 2014.06.08
위로와 화해  (0) 2014.06.05
Posted by 장준식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저는 이 문구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늘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교회라는 것을 빼면 그 무게가 2그램도 안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팔할이나 키워준 교회가 바로 벌떼교회입니다. 서른, 잔치를 시작하기 위해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 제 인생은 온통 벌떼교회와 뒹굴었으니까요. 그래서 벌떼교회는 제게 참 특별합니다.

 

제 인생과 연관된 벌떼교회뿐만이 아니라, 벌떼교회는 그 역사 자체가 참 특별합니다. 벌떼교회를 다니는 모든 분들이 그 특별함을 인식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깊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헌신된 일꾼들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특별함은 1930년 정초, 덕적도에서 있었던 한 부흥집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외갓집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잇는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 서인 계열의 정부 고위관리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덕적도로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외갓집은 덕적도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1930년도 정초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한 겁니다. 감리교 목사로서 한국의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용도 목사가 1930년 정초에 덕적도로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온 겁니다. 외할아버지(오지섭목사님)께서 청소년 시기에 그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셨다가 이용도 목사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외할아버지를 통해 내려진 신앙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결국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신앙의 씨앗은 담쟁이넝쿨이었나 봅니다. 담쟁이넝쿨이 온 담에 퍼지는 것처럼, 외할아버지를 통해 뿌려진 신앙의 씨앗은 금방 온 집안에 퍼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퍼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안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영접을 넘어 외할아버지와 그 자손들이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중에 벌떼교회로서 눈 여겨 볼 수 있는 것은 1954년 여름,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원으로서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벌떼교회(당시 과천하리교회)를 세웠던 학생들 중 송인호, 김광현 두 사람입니다. 송인호(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역임)는 저희 어머니(오세숙 사모)의 당숙이시고, 김광현(정신여고 역사교사 역임)은 저희 어머니의 4촌 오빠입니다. 결국 벌떼교회를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저희 집안 분들이셨던 것이죠.

 

저희 집안은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이어 받아 성장한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께서는 유명한 부흥사셨고, 그 자녀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감리교 역사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많은 목사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특별히 한국 선교사로서 목원대학교를 세운 도익서(찰스 스톡스) 박사 그리고 목원대학교의 초대학장을 지내신 목원이호운 학장(찬송가, ‘부름받아 나선 이몸작사가)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저희 아버지 모두 도익서 장학금으로 신학공부를 하셔서 목회자가 된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용도 목사와 한국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 받고 있는 박재봉 목사는 저희 집안의 사돈이십니다. 박재봉 목사의 집안도 그 형제와 자녀들이 모두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귀한 집안인데, 그 중에서 박재봉 목사의 동생인 박재훈 목사는 한국 찬송가 사()에 길이 남을 분입니다. 그분이 지으신 찬송가로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서 돌아오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등이 있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즐겨 불렀던 수많은 동요들 중 펄펄 눈이 옵니다”, “산골짜기 다람쥐”, 그리고 어머님 은혜등이 그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박재봉 목사의 야사 중 유명한 것은 한국 주먹계를 주름 잡던 시라소니를 전도한 사건입니다. 시라소니 아들도 목회자가 되었는데 현재 저희 집안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교류 중에 있습니다.

 

벌떼교회는 태생부터가 참 특별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희망의 촛불을 밝히기 위한 청년들의 선교사업을 통해서 생겨난 교회로서, 그 태생이 선교적입니다. 20세기 신학의 교부로 추앙받고 있는 칼 바르트가 교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들의 공동체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떼교회는 그 증언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로서 태생된 벌떼교회에 그 증언의 역할을 특별하게 감당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담쟁이넝쿨과도 같은 목회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장윤식 목사가 이 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히 역사적입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벌떼교회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저희 집안 어른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그 자손이 우연하게 목회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필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신앙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아우로서 곁에서 지켜본 형님 장윤식 목사는 우리 집안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가장 닮은 목회자입니다. 강직한 성품도 그렇고, 불 같은 메시지도 그렇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열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고백하기를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라고 하지만, 형님 장윤식 목사를 들여다보면 나를 키운 건 십할이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인생에서 교회를 빼고 나면 어떤 인생의 무게가 남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이토록 한 몸, 한 뜻, 한 역사를 지니기는 정말 힘듭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특별한역사하심이 없으면 이토록 절묘한 조합은 나오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지구와 달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주변을 공전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 오묘한 섭리와도 같습니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합니다. 인간의 삶 측면에서 60년은 이제 황혼으로 접어든 시기이지만, 하나님의 타임테이블 가운데 놓여진 벌떼교회는 이제 청춘의 시기로 들어섰다는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성전 건축과 함께 벌떼교회는 이제 막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역사를 지닌 교회, 목회자와 함께 이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만들어 가는 벌떼교회에 몸담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으신 분들입니다.

 

R. M. 크리소스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존경 받는 까닭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 희망으로 탄생한 벌떼교회,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교회가 가진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집니다. 특별한 역사와 사명을 가진 벌떼교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를 부지런히 지켜내는 꿀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떼교회 출신이며

장윤식 목사의 아우이며

컬럼버스감리교회 담임인

喜樂堂 장준식 목사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공식  (1) 2014.11.02
참여 구원론  (2) 2014.10.29
확실한 약속과 불안한 믿음  (0) 2014.01.18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1) 2014.01.11
설교자  (1) 2014.01.0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12. 07:56

주권과 기도

창세기 26

(창세기 25:19-34)

 

파란만장했던 아브라함의 시대가 끝나고 약속의 아들 이삭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신앙사를 형성해 간다. 성경은 이삭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이렇게 알린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19). 아브라함의 족보가 아니라, 이삭의 족보가 등장한다. 물론 그의 족보는 매우 짧다. 아버지는 아브라함이고, 그의 아들은 이제 막 태어난 야곱과 에서이다. 이것이 그의 족보 전부이지만, 이 짧은 족보는 우주보다 크다. 왜냐하면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이 삶 속에 들어오시는 순간, 그 누구든지 그의 삶은 우주보다 큰 삶이 된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을 받아 낳은 아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단순히 아들 하나만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이 번창할 것이고 그의 자손들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그 약속을 믿기에는 참 어려운 일이 또 발생한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불임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불임의 문제는 이삭만 겪은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겪었다. 그런데, 이삭은 그 불임 문제를 대함에 있어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며 여호와께 간구하매”(20). 이삭은 아내의 불임 문제를 놓아두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지극히 당연한 행동인 것 같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기도는 믿는 이에게 늘 과제인데, 두 가지가 성립돼야 온전한 기도가 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개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능자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고, 그분의 존재를 믿더라도 그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 기도는 막연해 진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문제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 자신의 문제를 놓아 두고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가 필요한 누군가에 대한 사랑 없이 기도는 나오지 않는다.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인데, 사랑의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가장 귀한 일은 그 사랑의 대상을 위해 기도하는 행위이다.

 

이삭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다. 아마도 모리아 산에서 그것을 배웠을 것이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여호와 이레를 배웠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그는 모리아 산에서 몸소 체험했다. 또한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사랑했다. 아내 리브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어머니의 죽음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은 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24:67).

 

기도는 믿음과 사랑의 열매이다. 기도를 다른 말로 하면 소망(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 인간이 지녀야 하는 최고의 덕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한 온전한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희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소망(희망)을 잃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전영택 선생이 작사한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 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우리는 바쁘고 피곤한 삶에 젖어 이것을 잊고 산다. 예수 믿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이루어야 할 소망이 무엇인지 잊고 산다. 신앙은 나 자신만 잘 되면 그만인 이기주의를 생산하지 않는다. 신앙은 나를 너머 나의 울타리를 살피게 한다. 신앙은 그냥 즐기고 마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신앙은 변화를 수반한다. 신앙은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아편이 아니다. 신앙은 통증에서의 구원이다.

 

가정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삶의 토대인데,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믿음의 가정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나 혼자 믿는 것은 오히려 큰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래서 전도(예수님을 전하는 것)는 개인에게 일어나기 보다 가정 단위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풀려났을 때 감옥 간수를 전도하면서 선포한 내용은 이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네 집이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의 구원 선포가 있은 후, 간수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도록 한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16:32-33).

 

가정의 행복은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가족을 향한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소망이다. 이 소망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가족을 사랑하는가? 나이 많은 요한은 말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에 두고, 우리의 창조자시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의 대표 증거이다.

 

남편의 삶을 위하여, 아내의 삶을 위하여, 자녀의 삶을 위하여, 형제의 삶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할 것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나오지 못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을 아닐까? 나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느라 몸이 피곤해서 기도의 자리에 못나오는 경우도 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사실 기도는 자칫 잘못하다간 말의 잔치로 끝날 수 있다. 기도의 자리에 나온다 하더라도 기도라는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삶이라고 하는 경건의 능력이 실현되지 않으면 기도만큼 헛된 것도 없다.

 

기도의 자리에 나와 기도하는 것과 더불어 행해져야 할 것은 삶의 기도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삶의 자리가 곧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을 위해 일터에 나가 일하면서 그 일을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일 하는 것을 기쁨과 감사로 여기는 태도 말이다. 노동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고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열매의 질이 달라진다.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과 자신의 노동이 곧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사람은 그 열매가 다르다.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노동은 그것 자체가 거룩한 기도이다. 기도가 삶으로 구현된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것을 최고의 기도라고 여긴다.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이다. 노동과 기도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삭은 아내를 위하여 기도 드렸다. 그의 기도가 말과 혀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의 기도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증명해 주신다.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하였더니”(21).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루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이고 주권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사랑의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에 동참하길 바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기도는 인간의 숙명이다.

 

기도의 응답으로 임신하게 된 리브가는 또 한 번 인간의 숙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22). 뱃속에 잉태된 두 자녀를 사랑한 리브가는 엄마로서 자녀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뱃속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개될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싸움이 태 속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한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이것이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만날 때 어리둥절해 한다. 리브가의 배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어리둥절한 일이고, 하나님의 말씀도 어리둥절한 말씀이다. 특별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은 참으로 어리둥절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눈에 보기에 굉장히 불합리해 보일 때가 많다. 하나님의 주권은 오직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신비이다.

 

이삭은 자손 번창에 대한 약속이 불임으로 막혔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약속을 이어나갔다. 리브가는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기도함으로 태중에서부터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드린 이삭과 리브가의 기도 가운데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쌍둥이였고, 다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양 누가 먼저 나왔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발 뒤꿈치를 잡고 연달아 태어났다. 이들의 싸움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자권 쟁탈전  (0) 2014.06.26
성령의 교제  (0) 2014.06.15
존재의 변화  (0) 2014.06.08
위로와 화해  (0) 2014.06.0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0) 2014.06.01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8. 22:56

존재의 변화

(사도행전 2:14-21)

 

승천주일에 살펴본 예수의 승천 이야기는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우주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갔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존재가 바뀌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로마 당국에 의해 처형 당한 예수는 승천(높이 올려짐)을 통하여 주님으로 선포됩니다. 예수 당시 주님은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주님인 로마의 황제가 예수를 처형시켰으므로 황제가 예수보다 힘 세고 높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부활과 승천으로 인하여서 그 결과가 뒤집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과 승천은 누가 이 세상의 주님이냐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 세상의 주님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라는 것이죠.

 

예수가 이 세상의 주님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앎의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실천의 차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냥 말로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외칠 수 있지만, 정말로 인생을 살면서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뜻은 그 분께 집중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삶을 좇아 소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인데, 그것이 좀처럼 우리 삶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승천에 이어 벌어지는 사건인 성령강림은 바로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인식된 예수는 곧 우리의 존재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성령이 부어지는 성령강림 사건은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인정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은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 당연한 사건이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변화되는 매우 실존적인 사건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알려면, 우선 성령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어떤 마성적인 힘이나 우리가 흔히 귀신이라 부르는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성령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예수와 연관됩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일컬어 하나님의, 예수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3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고후 3:17-18).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반지의 제왕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령강림은 곧 왕의 귀환인 것이죠. 성경강림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각 사람 마음에 부어지는 사건입니다. 그야말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의 실현이 바로 성령강림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던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강림을 통하여 예수와의 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신비롭고 결정적인 경험인데, 이것을 통하여 그들은 온전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즉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의 혀로서 내려온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의 언어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의 변화는 엄청난 일을 몰고 옵니다. 이것이 단순히 고운 말 공손한 말을 쓰게 되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불의 혀로서 내려온 성령이 임한 제자들이 말할 때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제자들의 말 속에서 그들의 언어를 듣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쓰는 두 사람이 서로 각자의 말을 하는데도 그들이 서로 알아듣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바벨이라는 말의 뜻은 혼란입니다. 영어의 ‘babble’이 거기서 왔는데, 이는 횡설수설을 가리킵니다. 바벨탑 사건 이전에 온 인류는 한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인류의 언어는 뒤섞여 버려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각자의 언어와 민족으로 갈라졌고, 거기에는 오해와 대립 그리고 갈등만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바벨탑의 사건과 정반대의 상황을 그리는 것이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인류는 다시 통합되기 시작한 것이죠. 오해와 대립, 갈등 대신에 이해와 화해, 그리고 협력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강림을 통해 시작된 이해와 화해 그리고 협력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가2 44절 이하에 나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람은 기본적으로 손을 움켜쥐고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움켜지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 참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움켜진 손을 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자랑하고, 보이는 것을 손에 움켜쥐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움켜쥐려 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보여줄 수는 없으나, 그 어느 부자보다 더 풍요롭습니다. 우리가 움켜쥐려고 하는 것들은 모두 어느 시점이 되면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한 번 움켜잡으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이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한 번 손을 움켜쥐어 보십시오. 주먹이 됩니다. 움켜쥐려는 사람은 인생을 주먹질 하다 끝냅니다. 움켜쥐려다 보니, 남을 해치지 않고는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움켜쥐려는 것을 다 내려놓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이렇게 기도하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움켜쥐려는 것을 내려놓고, 이렇게 기도하는 손을 가진 사람은, 주먹을 쥐고 남을 해치려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남의 삶을 복되게 하는 기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성령강림을 통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요엘서의 말씀이 실현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대중들 앞에 서서 요엘서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합니다. 요엘서의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성령강림)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여기서 예언, 환상, 등의 그림언어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관련된 말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로 주님으로 일컬어지는 로마 황제가 하는 일은 당장 눈에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협적입니다. 특별히 소위 평화를 위해서 가해지는 폭력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 넣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이나 늙은이들이나 남종이나 여종들이 보는 환상이나 꿈그리고 그들이 하는 예언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들은 로마 황제의 극악무도한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리고 그 우편에서 주님으로 고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게 되는 가장 큰 것은 이 세상의 구원자, 주인, 주님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성령강림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성령강림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읽습니다만, 그것을 보면서 그저 신기한 일 구경한 것처럼 하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성령강림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게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건을 겪어야 존재가 변화됩니다. 성령강림이 사건으로 다가와야 우리의 존재가 변화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교제  (0) 2014.06.15
주권과 기도  (0) 2014.06.12
위로와 화해  (0) 2014.06.0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0) 2014.06.01
기드온 이야기가 주는 교훈  (0) 2014.05.2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5. 05:41

위로와 화해

창세기 25

(창세기 25:1-18)

 

인간이 겪는 아픔 중 가장 큰 아픔은 상실의 아픔입니다. 무엇인가를 상실한다는 것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을 말합니다. 그 중에서 사람에 대한 상실이 가장 큰 슬픔이죠. 부모님이 죽었다든지, 배우자가 죽었다든지, 자식이 죽었다든지 하는 상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위로란 바로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상실감이 컸습니다. 자식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은 그 스트레스 지수가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이삭도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힘들어 했지만, 사실 어머니를 잃은 이삭보다 아내를 잃은 아브라함이 더 힘들었을 겁니다. 이삭은 부인을 얻음으로 해서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대한 위로를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치유할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후처(그두라)를 얻습니다.

 

사라는 12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 사라가 세상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137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175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브라함은 38년 정도를 더 산 것이지요. 38년 동안 더 살며 아브라함은 후처를 얻어 많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중에는 미디안 족속의 조상이 되는 미디안이 있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족속으로 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38년간 더 살면서 후처를 얻어 자식만 낳은 것이 아니라, 이삭을 보호하기 위한 대비책도 잘 마련해 둡니다. 후처를 얻어 자식을 많이 낳았지만, 그것은 그저 위로였지 어떠한 언약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죠. 그 옛날 약속의 자식이 아닌 이스라엘을 낳았다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어,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식 이삭과 위로의 자식들 간에 분명한 선긋기를 합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 모든 소유를 물려 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25:5). 여기서 소유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모든 소유란 영원한 복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영원한이란 하나님의’, ‘신적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영원한 복까지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던 것이 그대로 이삭에게도 물려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약속의 아들과 위로의 아들들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잣대이기도 합니다. ‘복이 된다는 것은 이삭이 복을 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대로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축복권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이 갖게 되는 축복권의 원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축복권은 이렇게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물려받음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문화 가운데서는 장자가 그 축복권을 물려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보면, ‘장자가 축복권을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축복권을 물려 받은 이가 장자의 권리를 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뒤 이어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아니라 11번째 아들인 요셉이 축복권을 물려 받아 장자의 지위를 누리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건넸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자식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이삭에게서 멀리 떠나가게 만듭니다. 같이 살아감으로 인해서 발생될 수 있는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남은 날 동안 후처를 통하여 위로 받으면서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수행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영적 기강과 질서를 잡아 주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재산만 물려준다고 자식들이 서로 잘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기강과 질서를 바로 잡아 줘야 부모가 죽은 후에도 자식들 간에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꼭 눈 여겨 봐야 할 아브라함의 죽기 전 행보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습니다. 그의 죽음 또한 하나님의 복이 넘칩니다.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25:8). 이 문장을 영어로 보니까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Abraham breathed his last and died in a ripe old age, and old man and satisfied with life; and he was gathered to his people”(NASB).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아브라함의 죽음을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고, 열매가 잘 익은 것처럼 그렇게 늙어 죽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끝이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한 때 잘 나갔어도 끝이 비참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한 때 비참했어도 끝에 가서 복스러우면 모든 이들의 칭송과 부러움을 삽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복스러운 것이겠지요.

 

아브라함의 죽음은 그냥 복된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 가장 서원한 관계가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였습니다. 이삭 때문에 광야로 내쫓김을 당했던 이스마엘이 이삭에 대하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 때문에 이스마엘과 이삭 간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장사하였으니”(25:9).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이삭과 이스마엘이 힘을 모은 것입니다.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인해 화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은 참 신비로운 겁니다. 인간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평소에 일어나기 힘든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화해와 평화는 죽음의 자리에서만 일어나는 신비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자아의 죽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두려운 것이라기 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말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약속의 성취를 상징하는 헤브론 땅의 막벨라 굴에 사라와 함께 묻힙니다. 그 이후 이삭과 리브가도 야곱과 레아도 모두 이곳에 묻힙니다. 약속의 땅에 약속의 자존들이 함께 묻히게 되는 일은 참 보기에도 흐뭇합니다. 헤브론은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이 왕이 되어 76개월 동안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다스리던 곳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유서 깊은 곳이지요.

 

아브라함이 죽은 뒤,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이 약속대로 이삭에게 임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25:11). 이삭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그의 족보가 나오는데, 이스마엘의 후손이 열 두 족속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 두 지도자들이었더라”(25:16). 이스마엘이 열 두 족속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입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숫자 12는 완전수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12명의 아들을 낳아 12지파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말년과 죽음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기 때문이고, 그의 죽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화해”, 이것만큼 가슴을 짠하게 하는 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 받게 된 우리들의 소망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말년과 기필코 맞이하게 될 죽음이 위로와 화해의 장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이러한 꿈을 꾸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위로와 화해가 넘치는 삶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끝이 아름다운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권과 기도  (0) 2014.06.12
존재의 변화  (0) 2014.06.08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0) 2014.06.01
기드온 이야기가 주는 교훈  (0) 2014.05.25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2) 2014.04.1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1. 13:5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24:44-53, 1:1-11)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은 하늘에 가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가린의 경험을 인용하여 흐루시초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주인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거짓말이다!” 참 바보 같은 말이죠. 하나님을 하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요! 이것은 달에 가서 토끼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거나 똑 같은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사시는 것일까요? 이 질문 자체가 지극히 인간적인 겁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늘’, 즉 하나님이 살고 계신다고 믿는 하늘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거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공간적인 저 하늘에 살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처를 그냥 하늘이라는 개념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개념을 들여다 봐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승천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입니다. 승천을 정말로 우주비행선이 하늘로 올라가듯이 그렇게 하늘로 올려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만드는 겁니다. ‘승천이란 그 행위에 중점이 있는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승천이란, 말 그대로, ‘하늘로 올려졌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지금도 전세계 선진국에서는 온갖 인공위성들이나 우주선이 하늘로 올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승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을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하늘로 올려지듯이 그런 식으로 하늘로 올려졌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무슨 귀신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2451절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 기사입니다. 같은 저자에 의해서 씌어진 사도행전도 같은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되더라”(1:9). 물론,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라는 것을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그렇게 하늘로 올려지셨다라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승천 기사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하는 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예수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예수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가 그냥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기이한 사건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에 의한 구원 사건이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늘로 올려지신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은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이 예수를 경배한 일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24:52).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승천한 예수를 경배한 것 자체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승천을 지켜본 초대교회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제 1, 2계명이기도 합니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철저한 금지 사항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유대인들이 예수를 경배했다면 이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거나, 아니면 예수가 하나님이거나.

 

제자들은 예수를 우상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그가 참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신후 그를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십계명의 1, 2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올바로 지킨 것입니다. 참 하나님께 온전한 경배를 올려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천이 가져다 주는 의미입니다. 수없이 많은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하늘로 올려지는이 때에, 예수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행위를 믿는 것은 오히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로 올려지신 예수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성경의 증언은 믿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모든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변함 없으시고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그 무엇에 제한 받지 않으시고 영원하시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인간 세계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의 승천 뒤 하나님인 예수를 경배하고 있는 제제들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외로움과 배반, 거절, 목마름, 심지어 죽음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바로 승천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인간 상황과 완전히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늘로 올려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는 하나님이 연약하고 심지어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우리 인간이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저 먼 곳에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분이 아니라, 단순히 위로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함께 연대하며 바로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십자가 사건이 구원 사건인 이유, 그것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인 이유는 바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인 예수가 우리 피조물이 지닌 연약함과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시고 피조물의 가장 연약한 모습인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들은 고통이나 불행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 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승천은 이렇게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승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비겁함과 연약함을 탓하신 것이 아니라,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4:36).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이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복음으로 전해집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24:47-48).

 

십자가는 죄사함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회개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 이것을 두 자로 줄이면, ‘용서입니다. 용서란 관계를 다시 정립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도망쳤습니다. 예수에게 있어 제자들은 배신자인 것이죠.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신 것은 그들을 용서하신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배신자로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형제 자매로용납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나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로 모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용서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로 인하여,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 아니라,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모든 일에 우리가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저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증언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 즉 용서의 능력이듯이, 우리도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서 모든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도록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습니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는 것,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인 용서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믿습니다. ‘하늘로 올려지신그분을 경배하십니까? 그러면 기쁨 가운데 돌아가십시오. 가서 용서의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에 처해 있든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희망 가운데 사십시오.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재의 변화  (0) 2014.06.08
위로와 화해  (0) 2014.06.05
기드온 이야기가 주는 교훈  (0) 2014.05.25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2) 2014.04.18
신앙은, 패러독스다  (2) 2014.04.1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