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4.07.27 오래된 기도
  2. 2014.07.21 가정의 기쁨
  3. 2014.07.17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4. 2014.07.14 고통의 문제
  5. 2014.07.06 사사 시대의 타락과 거룩
  6. 2014.07.03 순종 - 사는 길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27. 22:49

오래된 기도

(마태복음 6:5-13)

 

본문에는 예수의 산상수훈 중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나와 있다. 예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중 눈에 띄는 단어는 은밀함이다. 기도는 은밀해야 하는가? 기도를 은밀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께서는 은밀한 기도와 대조되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에 대해서 말한다.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의 특징은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를 경계하시며, 은밀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6).

 

기도할 수 있는 골방을 만들어 기도할 때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면 은밀한 기도가 되는가? 도대체 은밀한 기도란 무엇인가?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더불어 예수께서 경계하시는 기도는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중언부언의 특징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다. 미사여구를 잔뜩 집어 넣어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나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알맹이는 없고 형식과 자기 자랑만 있는 기도를 경계하시며 은밀한 기도 할 것을 주문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견주어 볼 때 은밀한 기도란 핵심을 찌르는, 그리고 친밀한, 그리고 집중된 기도를 말한다. 형식에 치우친 기도가 아니고 외적인 모습에 치우친 기도가 아니고, 아빠되시는 하나님과 참된 사귐 안에서 하는 기도를 말한다. 그러니까 기도는 근본적으로 관계성이 근본이라는 뜻이다. 아빠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없는 기도를 경계하시는 것이다. ‘은밀한이란 바로 그러한 것을 담고 있는 메타포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기도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가 된다. 당연하지 아니한가? 하나님에게 관심 없는 자들의 기도는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이기적인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버지와 전혀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은 자녀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자녀는 아버지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아버지가 자기의 필요만 채워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를 경계하시며, 은밀한 기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는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보기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 시간마다 외우는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어떠한 주문이 아니다. 주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우는 사람도 있다. 물론 절박한 상황에서 어떠한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모를 때, 그리고 전혀 말이 나오지 않을 때 주기도문을 통해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주기도문 자체에 무슨 특별한 효능이 있는 듯 주문 외우듯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주기도문의 특징은 먼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 계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진정한 관심을 둔 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맺어진 자는 하나님의 이 뜻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한다.

 

기도를 가르치시는 예수의 삶 자체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이었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오게 하시는 일에 헌신하셨다. 그 일을 하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오게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왕국을 세우고 싶어한다. 이것은 세상뿐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도 꿈틀대는 현상이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왕국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자들은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헌신할 줄 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소박함을 지닌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11-13).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와 용서에 대한 실천, 그리고 악에 대한 경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소박한 마음이다.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탐욕이다. 탐욕적인 인간은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축적하고자 한다. 탐욕은 필경 죄악을 낳는다. 죄악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살인을 낳는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생명을 앗아가는 일만큼 추악한 것은 없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 강력 범죄로 분류되는 것들은 모두 남의 것을 탐하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다. 불의를 눈감아주는 용서가 아니라, 불의를 용서하는 방식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불의에 대한 눈감아 줌이 아니다. 용서는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행위이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하고 다시는 불의한 행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랑의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행위 중 가장 지혜로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지혜를 십자가에서 본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결국 하나님의 참된 지혜이다. 십자가는 용서인데, 십자가를 온전히 바라보는 자들은 거기에서 무한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다시는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탐욕스러운 마음을 드러내거나 생명을 헤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지혜인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인간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손함이 베어 있다. 우리는 시험에 든다. 여기에서의 시험은 유혹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받았던 유혹 같은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사탄에게 광야에서 받았던 유혹 같은 것을 말한다. 그 유혹은 하나님 나라를 버리고 자기 왕국을 세우라는 매우 매력적인 유혹이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유혹에 넘어간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하나님 나라를 등진다.

 

그리고 우리는 에 대해서 무력하다.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생명을 제한하고 결국 빼앗아가는 악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에는 모레알처럼 널려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질병과 죽음이다.

 

최근 한국의 연예인 유채영 씨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가온 질병, 그리고 죽음을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유채영 씨는 결국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온 질병, 죽음 앞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 줄 수 없어서 속만 태우던 가족과 친구들은 허망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냈다. 다음은 사랑하는 딸을 보내고 사랑하는 딸에게 쓴 유채영 씨의 엄마의 편지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 채영아 사랑해. 이 현실이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어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에 시달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곁 떠나기 싫어하던 모습 생각하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다. 너랑 같이 떠나고픈 마음이다. 아빠 없이 너와 함께했는데 나 혼자 남았구나. 정해진 운명의 날이 있는 줄 알았다면 더 많은 시간과 사랑과 행복을 나눴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 때는 우리 행복하게 잘 살자. 엄마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유혹과 악으로부터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의 인생은 나의 계획과는 상관 없이, 어느 때든지 유혹과 악을 통해서 내가 꿈꾸던 삶과는 다른 곳으로 어리석고 비참하게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혹과 악에 너무도 무력한 인간이지만,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자녀는 유혹과 악으로 인해 멸망 받지 않고, ‘유혹과 악으로부터 구원 받는다.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 혼란스럽다. 도무지 하나님 나라를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계속되는 비행기 사고로 인해 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군사적 신경전, 또한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 등을 생각하면 가슴이 탁 막힐 지경이다.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어디 있고, 정의가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일까 의문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간구하고, 그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헌신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일상에 매몰되어서 현재 인간의 평화와 생명을 위협하는 일련의 일들을 남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기도는 일상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기도는 나의 경건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 세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기도는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기도 자체가 일상이 되어야 한다. 다음 기도문은 기도가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파고 들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_이문재, 「오래된 기도」 전문, 『지금 여기가 맨 앞』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에 매몰되어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일상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바라며 그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 일상이 하나님 나라로 승화되도록 은밀한 기도, 친밀한 기도, 소박한 기도, 경건의 모양만 있는 기도가 아니라 삶을 실제로 바꾸는 능력의 기도, 오래된 기도를 쉬지 않고 해야 한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http://www.youtube.com/watch?v=mdZ6yMN109M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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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21. 12:58

가정의 기쁨

(삼상 1:19-28)

 

매년제를 올리러 실로의 성전에 갔을 때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자식이 없는 것 때문에 마음이 몹시도 아팠던 한나의 사정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축복을 빌어 준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

 

간절한 기도 끝에 제사장으로부터 축복의 선언을 들은 한나는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그 일 때문에 더 이상 마음 쓰지 않기로 한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 1:18).

 

간절한 기도에는 응답이 꼭 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얻게 되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다. 옛날에는 성전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교통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 자주 갈 수 없었다.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제를 빠짐 없이 드렸다. 교통 수단이 발달해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로 성전에 와서 예배 드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는 대목이다.

 

예배가 너무 많다 보니 예배가 습관적인 타성으로 전락해 버린 이유도 있겠지만, 그런 중에서도 나의 예배가 습관적인 타성에 젖은 예배인지 아니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 하나는 바로 마음의 간절함이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소원을 하나씩 마음에 품고 예배 드리러 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위이지만, 예배의 행위는 매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어떠한 선물(은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매년제를 드린 다음 날, 성전을 떠나면서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또 한 번의 예배를 드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룩한 합방을 갖는다. 무엇을 하든지 예배(Ritural)’ 의식을 먼저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떠한 행위든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행하려고 하는 일이 거룩함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일례로, 예배 드린 후에 바람 피울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도둑질을 할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늙은 부모를 학대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일을 행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든다.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놓아두고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거룩하다는 증거가 된다. 반면에 어떠한 일을 놓아두고 예배 드리는 것을 피하게 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면 그 일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요즘 시대는 특별히 성(sex)이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이유 중 하나가 성(sex) 때문인데, 이것이 타락하다 보니까 가정이 깨지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성 때문이다. 잠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언 5:18). 엘가나와 한나는 아이를 생산하는데 있어서 을 거룩하게 승화시킨 좋은 예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 후에 아이를 생산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태어난 아기와 가정의 거룩함이 드러난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 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19-20).

 

이렇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행한 일은 기쁨을 낳는다. 사무엘의 탄생을 통해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은 기쁨이 넘쳤다. 그리고 단순히 그 기쁨은 그들의 가정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암울했던 사사시대에도 큰 기쁨이 되었다. 사무엘의 탄생은 길고 긴 터널을 지나던 사사시대에 빛을 던져주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정의 기쁨은 그냥 가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가정의 울타리를 타고 흘러 넘쳐 더 큰 기쁨을 생산해 낸다. 요즘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가족의 기쁨을 위해서 구축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희생시키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너무도 오랫동안 사회는 가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렇다 보니, 가족은 더 이상 혼자만의 힘으로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족이 해체되는 일이 너무도 많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가슴 아픈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전쟁 때문에 엄마를 잃은 이라크의 한 여자 아이가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땅 바닥에 엄마 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 위에서 곤히 잠든 모습이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가정의 행복을 무참히 짓밟는 폭력은 이 땅에 하루 빨리 추방되어야 다.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큰 사회적 문제는 우리가 때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가정에서 가정의 기쁨을 위하여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놓고 한숨만 쉬고 있기 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가정의 기쁨을 한 번 살펴 보자.

 

첫째, 예배이다.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매년 모든 가정이 실로에 있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이 가정이 매년성전에서 예배 드렸다는 것은 성실하게 예배 드렸다는 뜻이다. 온 가정(household)이 함께 예배 드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가정 신앙의 트랜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아빠가 가는 교회가 따로 있고, 엄마가 가는 교회가 따로 있고, 특별히 자녀들이 가는 교회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더 심한 경우는 아빠의 종교가 다르고, 엄마의 종교가 다르고, 자녀의 종교가 다른 경우도 있다. 가정 구성원 각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예배는 온 가정이 함께 한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 좋다.

 

또한 공적인 예배에 온 가정이 함께 나와 예배 드리는 것 외에도 각 가정에서 자신들만의 특별한 예배(ritual)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요즘 영성신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각자의 의식(rituals)’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물론 일상이 ritual에 매몰될 정도로 그럴 필요는 없지만, 일상이 너무 아무런 의미 없는, 그야말로 일상으로 매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간단한 ritual들은 우리 일상에 필요하다. 우리는 일상에 너무 매몰되어 있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일상이 그냥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이 아니라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경이로운 것이라는 깨닫기 위해 ritual은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가족 구성원의 생일에 예배를 드린다든지, 가족 여행을 갈 때 짧게 나마 기도를 드린다든지, 자기 전에 부모가 아이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준다든지 하는 것이다. 잠깐의 의식 행위를 통해서 먹는 것에서부터 자는 것까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 그냥 의미 없는 일상으로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가정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금요일 가정에서 성찬식을 행한다. 촛불을 켜놓고 모여 앉아 성찬식을 조촐하게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각자 돌아가면서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나 소원 또는 기도제목을 내놓고, 손을 붙잡고 기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 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한다.

 

예배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 예배는 귀찮은 것이 아니라, 공식적(official)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이름의 높여지는 시간이요, 하나님께 무한한 은총을 받는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없이 피조물인 인간이 평안을 누릴 수는 없다. 가정의 기쁨의 초석은 예배 위에 놓여져야 한다. 가정에서 예배가 귀하게 여김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가정에 기쁨과 평안을 선물(은총)로 주실 것이다.

 

둘째, 사랑이다. 사랑은 존중이라는 형태를 띨 때 그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난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하여 사무엘을 얻었다. 매년 실로의 성전으로 예배를 드리러 간 엘가나의 가정은 사무엘의 탄생 이후에도 어김 없이 그렇게 했다. 그런데, 한나는 엘가나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22). 이러한 한나의 요청에 엘가나는 동의하고 한나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23).

 

그냥 보면 이것이 무슨 존중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에 보면 남편은 아내의 서원에 대해 무효를 선언할 수 있는 법이 있다. “부녀가 혹시 그의 남편의 집에서 서원을 하였다든지 결심하고 서약을 하였다 하자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다 이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은 다 지킬 것이라 그러나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무효하게 되면 그 서원과 결심한 일에 대하여 입술로 말한 것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나니 그의 남편이 그것을 무효하게 하였은즉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시느니라”(30:10-12).

 

엘가나는 이 율법에 근거하여,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한 서원에 대하여 충분히 무효를 선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년 모든 가족이 함께 가는 실로의 제사에 동참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나를 꾸짖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엘가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나의 의견을 존중해서 한나의 뜻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기로 한 서원이 거룩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엘가나는 한나와 함께 사무엘이 젖 떼기까지 정성으로 양육했다.

 

사실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 간의 존중이 으뜸 가치로 드러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정의 기쁨은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 즉 존중의 가치가 드러나는 사랑이 흘러 넘칠 때 온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가족 아닌 사람은 존중하면서 가족 구성원은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서 가장 존중 받아야 할 사람은 가족이다.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존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려 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가족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존중할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가정에서도 가족을 존중할 줄 모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셋째, 감사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약속을 이행한다. 하나님께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뿐만이 아니라, 남편 엘가나에게 아이가 젖 떼면 자신이 직접 실로의 성전에 가서 사무엘을 바치겠다는 약속까지도 이행한다. 이것이 참 쉽지 않다. 흔히 시쳇말로 사람은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화장실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잠깐 살펴본 대로 율법이 서원을 철회하는 데 악용해서 쓰일 수 있다. 엘가나와 한나가 짜고 서원을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나에게는 감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다 보니, 서원한 대로 이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엘가나와 한나는 젖 뗀 사무엘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러 성전에 나아가면서 다음과 같이 서원제 예물을 준비해서 간다.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24). 이것만 보면 이것이 무슨 감사인가 할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에 보면 서원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이렇게 나와 있다. “번제로나 서원을 갚는 제사로나 화목제로 수송아지를 예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반 힌을 섞어 그 수송아지와 함께 드리고 전제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을지니라”(15:8-10).

 

이것과 비교해 볼 때 한나는 율법에 나와 있는 것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바친다. 이렇게 가정의 기쁨은 감사로 표현된다. 감사가 넘칠 때 가정은 기쁨 충만한 행복한 가정이 된다.

 

예배와 사랑(존중), 감사는 기쁨이 넘치는 가정의 지표이다. 가정의 기쁨, 그 출발이 예배에서 시작하는 것에 마음을 두라. 예배하는 가정은 서로 존중하게 되고, 서로 존중 받을 때 감사가 넘치게 된다. 그리고 가정의 기쁨은 가정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담장을 타고 넘어 사회와 나라의 기쁨으로 번져나간다.

 

사철에 봄 바람 불어 잇고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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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17. 02:16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창세기 29

(창세기 26:12-33)

 

우리는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른다. 오히려 싸워서 이기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손자병법에서도 가장 좋은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매우 이상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다투지 않고번성하는 법은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우리는 다투지 않고서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를뿐더러, 세상은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성경을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법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것은 싸우는 길이 아니라, 평화롭게 사는 길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이야기에서 본다. 이삭은 어떻게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을 살았을까?

 

요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전능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이 가득하다. 돈을 많이 벌어 값비싼 자동차나 개인 비행기 또는 보트를 사는 것이 부의 상징이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것을 가지면 인생이 풍요로울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그렇다면 이삭의 시대에는 무엇이 가장 중요했을까?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과 물이었다. 사실 지금도 인간에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만 현대인들은 발달된 농업과 관계 시설 때문에 식량과 물의 중요성을 망각했을 뿐이다. 망각했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거의 망각 속에 있다.

 

이삭은 기근이라는 현실에 맞서 생존 투쟁을 했다. 그 결과 애굽으로 피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 그랄 땅에 거주하게 된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 땅에 거주했다는 것은 기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삭은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얻는다. 이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삭 사이에 맺어진 계약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약속하시기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라고 하셨다(26:3).

 

이삭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지 보자.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13, 14). 그런데 이것이 그만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산다. 예나 지금이나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일은 드물다. ‘시기는 참 무서운 감정의 상태이다. 시기란 다른 사람의 외모나 소유, 재능 등을 시샘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한다. 시가란 단순히 부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미움이 싹트는 마음이다. 미움이 싹트면 거기에는 어김 없이 폭력이 발생한다.

 

생명을 직접적으로 해치거나, 생명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어떤 것을 해치는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 생명과 직결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과 물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에 대하여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 폭력을 휘두르는데, 이삭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앗아가지는 않지만, 생명과 직결된 물을 빼앗아 가는 것을 통해 이삭에게 폭력을 가한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14, 15).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농사지을 땅까지 빼앗는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16). 이 정도까지 나왔으면, 이삭이 생존을 위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일 만도 하다. 그런데 이삭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잘 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받은 감사를 기억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이삭이 위대한 이유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 일이 잘 풀릴 때 이 약속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 약속은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믿음 있음과 믿음 없음, 참된 감사와 거짓 감사는 잘 됐을 때 상대방에게서 받는 시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통해서 구별할 수 있다. 믿음과 감사에는 다툼이 없다. 믿음과 감사에는 그저 나눔과 양보만 있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잘 된 것이 하나님께 받은 복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나누지 못하고 양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믿음도 감사도 아니다.

 

이삭은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맺은 땅이나, 아버지 때부터 사용해 오던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블레셋과 다투지 않는다. 이삭에게 중요한 것은 백 배의 결실을 맺은 땅이나 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삭은 진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고 사는 믿음의 사람에게 다른 것은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다투지 않는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이사 한 뒤, 거기에서 예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또 팠다. 그러나 이번에도 블레셋 사람들의 횡포가 있었다. 그래서 이삭은 다른 곳에 우물을 팠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과 이삭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 일컬어 에섹(억압하다, 강탈하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곳에 우물을 또 팠다. 그런데 또 다툼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 일컬어 싯나(대적)라고 불렀다.

 

우물로 인해 계속되는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이삭은 삶의 터전을 계속해서 옮겼다. 그가 마지막으로 판 우물은 르호봇(넓은 곳)인데, 이 우물을 팠을 때 드디어 다툼이 없었다. 더 이상의 다툼이 없는 우물을 판 후, 이삭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맺은 브엘세바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판 우물들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며 블레셋 사람들과 다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투지 않고 나누고 양보함으로 다툼이 벌어지지 않을 때까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싸워서 이기는 것만 배운 현대인들이 보기에 답답할 수 있으니, 오히려 이것은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르는 현대인들이 배워야 하는 삶의 다른 길이다.

 

이삭이 걸어간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의 길이 옳았다는 것은 이삭 스스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을 일으킨 상대인 블레셋 사람들이다. 이삭은 그랄 땅에서 브엘세바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거기에서도 우물을 판다. 고대 사회에서 우물을 판다는 것은 요즘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고, 우물을 팔 때마다 성공적이었다.

 

다투지 않고 계속해서 나누고 양보하면서도 번성한 이삭에게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찾아 왔다. “아비멜렉과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브터 이삭에게로 온지라”(26). 자신을 찾아온 블레셋 사람들을 보고 이삭은 또 시비를 걸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삭은 그들에게 거칠게 묻는다.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27).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시비를 걸러 온 것이 아니라, 이삭과 평화 협정을 맺으러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삭과 평화 협정을 맺기로 작정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그러면서 이삭에게 자신들을 해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블레셋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삭이 자신들보다 강성하게 된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삭에게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기 원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블레셋은 참 약은 족속이다. 이삭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계속 훼방을 놓더니, 자신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으니까 이제 와서 평화 조약을 맺어 위협적인 존재를 쫓아버리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블레셋의 약은 꼼수를 몰랐을 리 없었지만 이삭은 그들을 쫓아버리는 대신 오히려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다. 그리고 그들의 제안대로 평화 조약을 맺고 그들을 평안 가운데 보내준다.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낯선 광경이다. 교회 다니면서 수도 없이 믿음과 감사, 나눔과 양보의 삶을 들었음에도 실제 삶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다투지 않고 번성했던 이삭의 삶은 단순히 구약 시대의 가치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다른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을 이 세상과 싸워 이기는 법으로 잘못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다퉈서 번성하는 법과는 다른 삶을 사시다가 이 세상에 의해 죽임 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옳았다는 것을 부활을 통해 확인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삭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태도의 전환이다. 물론 이렇게 살겠다는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손해 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은 나누고 양보하는 것을 미덕이라 보지 않고, 바보스런 짓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십자가의 길을 좁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믿음과 감사에는 다툼이 없다. 무엇이든 거기에서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 하나님 나라의 삶이 들어서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삶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자,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면서 받은 복 때문에 진실되게 감사하는 자, 그런 자는 결코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저 나누고 양보할 뿐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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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14. 11:23

고통의 문제

(삼상 1:1-18)

 

어두운 사사시대가 가고 있다. 사무엘이 탄생한 시기는 사사시대의 마지막 시기였다. 사사기를 통해 본 이스라엘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룻기를 통해 본 이스라엘은 희망이 싹텄다. 문제는 어둠을 볼 것인가, 희망을 볼 것인가이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어둠을 보고, 어떤 사람은 희망을 본다.

 

희망은 어떻게 오는가?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누군가는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 빛의 세계가 나올 거라는 희망을 갖고 끊임 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희망은 기도와 함께 온다. 기도에 어떤 효력이 있다기 보다, 기도를 통해 희망의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희망의 빛을 주시는 분이다.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오늘 이야기는 그 희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준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이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 가운데 살던 레위 지파 그핫 계열의 후손이었다(대상 6:22). 그에게는 부인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한나고 다른 하나는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고, 브닌나는 자식 없는 한나를 조롱했다. 다시 말해, 불임의 문제와 그로 인한 삶의 고통이 자리잡고 있다. 희망은 그냥 오지 않는다. 이러한 고통-어둠을 뚫고 온다.

 

사무엘은 그냥 태어난 인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태어난 인물이다. 그가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빛을 가져다 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오늘 한나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고통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것은 곧 삶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는 것은 모두 신음한다. 몸부림치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의 삶이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다음의 세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음이 슬프냐”(8),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10),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15). 이처럼 한나의 마음이 마치 전쟁터와 같이 되어서 혹독하고 잔인하게 시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나의 삶이 그렇게 고통 가운데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남편 엘가나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5, 6). 엘가나가 한나에게 얼마나 잘 했는지는 다음 구절이 보여준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8).

 

겉으로 보기에 한나는 오히려 기쁨에 겨운 것처럼 보인다. 남편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하다. 그런데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한나의 삶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나 고통은 다른 곳에서 온다. 삶의 문제는 깊은 곳,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다. 정작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는 누군가와 나누기도 쉽지 않다. 나누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의 깊은 고통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고, 보여준다고 한들 그것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의 경우를 보자. 그의 고통은 자식 없음에서 왔다. 그런데 그러한 고통을 누군가와 나눈다고 한들, 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롱거리가 된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나는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0).

 

굉장히 뻔한 말 같지만, 정작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마음에 품고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학대하거나, 또는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를 잊어보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고통의 문제로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결국 우울증을 거쳐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고통의 문제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사회적 고립 상태로 들어선다.

 

한나는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왔다.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구원)해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서원 기도까지 한다.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

 

성경은 한나의 기도 내용을 이렇게 짧게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한나의 기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12). 사실 기도 시간은 내면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의 기도는 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그 간절함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시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실로의 성전에서 드려진 한나의 기도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엘리 제사장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엘리가 보기에 한나는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한나가 취해서 취기에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했다. 엘리는 한나를 이렇게 꾸짖는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14). 엘리의 꾸짖음에 한나는 이렇게 항변한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15).

 

여기서 한나가 엘리를 내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말할 때, ‘통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샤파크인데, 이는 쏟다’, 엎지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는 말은 내 심정을 쏟아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해 준다.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께 나아와 쏟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고통의 문제에 짓눌려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 일에 너무도 서투르다. 내 안에 해결되지 않는 고통의 문제를 안고 살다 보니,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인데도, 거기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생에 평안이 없다. 내 안에 평안도 없고, 대인관계에서도 평안이 없다.

 

사람의 삶의 문제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에 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남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를 지닌 자는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쏟아내야 한다. 그래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한나가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진실되게 쏟아놓은 것을 안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평안을 빌어준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 이에 대해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한 것을 확신한 한나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19). 그리고 한나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다.

 

삶의 희망은 이렇게 고통-어둠을 뚫고 지나갈 때 온다. 왜 인생은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도대체 왜 인생은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고통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 신비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고통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나침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같은 문제를 놓고 상반되게 반응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고통을 통해 어둠을 보고, 어떤 이는 고통을 통해 희망을 본다.

 

십자가의 어둠에서 부활의 희망을 보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십자가의 어둠 앞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의 어둠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와 고통을 쏟아 놓는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예수 믿고 죽은 후에 천당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은 미래적이 아니라, 현재적이다. 언제까지 고통을 쏟아놓지 못해 자신을 괴롭히고, 남을 못살게 굴면서 살아갈 것인가? 언제까지 평안 없이 살 것인가? 바로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오라. 그리고 쏟아 놓으라. 그리고 이 음성을 들으라. “평안히 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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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6. 22:19

사사 시대의 타락과 거룩

(19:22-26, 4:7-12)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은 이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이것은 마지막에만 나오는 구절이 아니라, 사사기 전반에 걸쳐 나오는 사사 시대에 대한 평가이다. 같은 구절이 176절에도 등장하고, 이야기의 말머리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요약된 말로 자주 등장한다.

 

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고,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사기와 룻기는 같은 시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두 곳에서 읽은 이야기는 사뭇 너무도 다르다. 같은 시대에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한쪽은 말 그대로 타락을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말 그대로 거룩을 보여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은 일종의 메타포로 봐야 한다. 물론 이스라엘에 물리적인 왕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정말로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왕정국가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왕이 존재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라는 진술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시내산 계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쉽게 말해, 시내산 계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사사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제 1~3계명을 어긴 것이나 다름 없다. 십계명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상황을 다른 말로 우상숭배라고 부를 수 있다. 우상숭배란 무슨 거창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한 눈 팔 때 생기는 현상이 바로 타락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처음 인간에게서도 나타난 현상이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처음 인간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아 생긴 인간의 타락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니, 그들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왔다. 즉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있어 타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은 그 행위에 있지 않다. 문제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시야에서,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직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었다.

 

타락의 내용은 3무 현상으로 나타난다. 무감각, 무절제, 무질서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무감각이다. 무감각이 무절제와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타락의 내용인 무감각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사사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사사기 본문은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레위인과 그의 일행이 집으로 돌아가던 중 하룻밤 유숙하게 된 베냐민 땅의 기브아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타락에 대한 기사이다. 레위인 일행은 하룻밤 유숙하기 위해 기브아 마을로 갔지만, 거기서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한 노인이 그들을 집으로 맞이했는데, 그는 그곳 기브아 출신이 아니라,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에브라임 출신이었다. 노인 집에서 유숙하며 한창 즐겁게 쉬고 있을 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나타나 이들을 괴롭힌다.

 

우선 불량배들의 무감각을 보자. 이들은 노인의 집에 나타나 노인의 집에 유숙하고 있는 사람을 내어 놓으라고 한다. 그들과 관계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관계란 성관계를 의미한다. 그들의 무감각을 보라. 그들의 눈에는 노인의 집에 유숙한 사람들이 극진히 대접해야 할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다. ‘손대접하기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윤리였다. 손님이 손님으로 보이지 않고, ‘관계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들의 감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전혀 상대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무감각의 현상이 불량배들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불량배들의 횡포에 노인과 레위인은 맞서지 않고, 그들의 횡포를 잠재울 방안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는 것이었다. 레위인의 첩과 관련된 이야기는 19장 전반에 걸쳐서 나온다. 그런데 레위인의 첩은 이야기에서 이름도 없고, 말도 없고, 힘도 없는 약자로 그려진다. 상대적으로 강자인 노인과 레위인의 눈에 약자인 레위인의 첩이 인식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어준다.

 

불량배들이나 노인이나 레위인은 상대적으로 강자들이다. 그들이 약자인 레위인의 첩을 철저하게 유린한다. 약자인 레위인의 첩은 사로잡히고, 배반당하고, 능욕당하고, 고문당하고, 끝내 살해당하고, 몸이 찢기고, 몸이 흩어진다. 그야말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비극과 죽음의 시대인 것이다.

 

이처럼 타락이란 단순히 흔히 말하는 죄가 판을 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타락이란 결국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비극과 죽음이 임하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악을 말한다. 구조적으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비극과 죽음을 안겨주는 사회, 개인적으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비극과 죽음을 안겨 주는 삶,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인 이야기가 룻기에 나온다. 같은 시대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날 올 수 있을까, 매우 놀랍다. 룻기의 본문은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보아스가 아내로 맞이하는 룻은 레위인의 첩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였다. 룻은 모압여인이었고(이방인), 남편을 잃어 오갈 데 없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그를 보호해줄 가족이라는 울타리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남편뿐만 아니라 시아버지 그리고 시아주버니까지도 모두 세상을 떠나, 홀로된 시어머니와 생계를 꾸려갔다. 룻은 그야말로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런데 룻기의 이야기는 사사기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 룻이 보아스라는 경건한 이스라엘의 한 남자의 눈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름 없는 자, 약한 자가 이름 있는 자로 바뀌는 지를 말해 준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진술이 거짓 진술인 것처럼, 보아스는 늘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살았는지, 그가 처음 자기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 하는 인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일꾼들에게 먼저 복을 빌어 준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기시를 원하노라”(2:4). 사사기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기브아의 노인이나 레위인, 그리고 불량배들은 처음 만남에서 여호와의 복을 비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필요, 관심사만 늘어 놓았다. 특별히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복을 비는 말과는 전혀 반대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가! 이와 대조되는 보아스의 축복은 이 얼마나 경건한 모습인가!

 

하나님에 대한 보아스의 집중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고엘법)’의 율법에 따라 룻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데, 그 과정을 살펴 보면 절대로 질서를 어기거나 인내심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라고 함부로 룻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3:6-15).

 

기업 무를 자, 고엘법은 룻처럼 약자를 보호하는 법인데, 궁핍한 때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가까운 친척의 의무였다(25:25-54). 룻과 나오미는 궁핍하여 죽은 시아버지의 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땅을 누군가가 사줘야 하는데, 그 땅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땅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땅으로 먹고 살던 룻과 나오미까지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척이긴 했지만, 고엘법을 준수해야 할 첫 번째 의무자는 아니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존재했다. 고엘법을 준수해야 할 입장에서 보아스가 마음대로 고엘법을 실행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아스는 동분서주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무질서하게 행동하지 않고 고엘법을 시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가까운 친척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벌인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이 고엘법 시행 의무를 포기한 후, 자기에게 차례가 돌아왔을 때 합법적으로 고엘법을 시행한다. 엘리멜렉의 땅을 샀을 뿐더러, 그 땅을 통해 먹고 살던 룻과 나오미까지 거둔다.

 

거룩이란 이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행복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타락이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비극과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인 것과는 매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사는 것인데, 그것은 실제의 삶에서 거룩한 삶을 일구는 것을 말한다. 거룩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인데,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가 있다. 거룩이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다. 그들을 착취하고 유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빵을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행복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사사 시대에 걸쳐 있는 타락은 그들의 부도덕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가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와 쾌락만을 위해 오히려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희생시키는 일만 했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하는 타락한 마음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착취하고 유린하게 되어 있다. 상대방을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둔 경건한 자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을 아름답게 여겨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상대방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 안다.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가꾸어 간다.

 

누가 여러분의 왕인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왕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삶을 사시라. 거룩이란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있다. 그러니,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복되게 하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괴롭히는 타락한 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복되게 하는 거룩한 자로 살 것인가? 도대체 누가 여러분의 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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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3. 04:32

순종 - 사는 길

창세기 28

(창세기 26:1-11)

 

아브라함의 시대는 가고, 이삭의 시대가 왔다. 아버지가 죽고 자기 자신만 남았다는 것은 이제 자기 자신이 삶의 어려운 결정들을 홀로 감당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우리 삶에는 어려운 일들이 참 많다. 감당해야 할 어려운 일들도 많지만, 선택해야 할 어려운 일들도 많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는 올바른 선택이다. 어떤 선택이 내 삶을 온전하게 이끌 것인가?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이삭에게 어려운 문제가 닥쳤다. 아버지 때처럼 기근이 닥친 것이다. 이 기근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삭에게는 굉장히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하고 싶은 심리가 있다. 왜냐하면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것이 아들에게는 일종의 전설로 새겨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행동과 말은 아들에게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은 아버지의 삶의 여정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그 옛날 기근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겪은 일과 거기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은혜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겪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삶의 지혜를 하나씩 전수해 주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러한 가르침을 마음 속에 간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삭은 아버지 때처럼 기근이라는 어려움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이삭이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당연히 아버지의 가르침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기근이 왔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었다. 이삭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자신도 가족들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래서 여장을 꾸려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랄이라는 지역에 이르렀다. 거기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을 만났다.

 

그런데 성경은 그랄 땅에서 이삭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명령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약속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이 땅에 거류하면”, 즉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거주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순종은 참 신비스러운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가 일러준 삶의 지혜에 순종했다. 그래서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삭은 참된 지혜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순종의 가치를 잘 모른다. 순종은 불편하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모를까, 부모든 스승이든 지도자든 사람들이 하는 말에 순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많다.

 

물론 때로 순종이 부조리해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순종의 가치는 그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그 마음 자체에 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신다.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다. “기근이 나면 애굽으로 내려가라!” 하나님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한 이삭의 마음을 보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나아갈 바가 무엇인지 온전히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지시하신 사항은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랄 땅에 머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그 이유는 아내 리브가 때문이었다. 그랄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리브가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이삭은 고민됐다.

 

그런데 이삭의 고민은 아버지의 해결 방법과 똑 같은 것이었다. 그 옛날 아버지 아브라함도 기근 때문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인 일이 있었다. 물론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기근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건도 들었을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처럼 자기의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아버지 아브라함의 처신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삭이 그렇게 한 이유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가벼운 두려움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낀 두려움이었다. 치안과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추어진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무엇인지 마음에 잘 와 닿지 않겠지만,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인간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경우에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생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드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방어체계이다.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것은 이성적인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다. 그런데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우선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무엇이든지 생명을 건질만한 변명을 에둘러대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일러준 삶의 지혜가 크게 작동한다. 그 결과, 이삭은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 속이고,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이라 속인 것 때문에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리브가를 누군가에게 실제로 빼앗길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한 위험 속에서 이삭은 리브가와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우연히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그것을 목격한다.

 

순종의 힘은 여기서 발휘된다. 일이 상식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을 알게 된 아비멜렉의 상식적인 행동은 누이라고 속인 이삭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처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이 상식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일로 인해 이삭은 오히려 두려움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가 부부 사이라는 것을 확신한 아비멜렉은 이삭을 왕궁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따져 묻는다. “그가 분명이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으냐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9, 10). 이에 대해 이삭은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9).

 

일의 정황을 모두 파악한 아비멜렉은 이렇게 선포한다.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11). 애굽 땅이 아닌 그랄 땅에 거주하게 된 이삭과 리브가가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순종의 가치를 발견한다. 순종이 바로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순종을 배웠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배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구원이다. 실제로 이삭은 삶 속에서 순종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신비롭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벌벌 떨던 이삭과 리브가는 순종을 통해서 마침내 안위를 보장 받는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어쩌면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전해준 인생의 지혜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고, 실제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그랄 땅에 거주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삭은 오히려 거기서 안위와 평안을 맛보는, 그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순종은 어렵지만, 어려운 길이 아니다. 오히려 순종은 죽을 것 같지만 사는 길이다. 무엇이 나를 살게 할 것인가 고민될 때 두 눈 딱 감고 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사는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게 사는 길이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곧 사는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만나주신다.

 

순종의 신비는 십자가에서도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런데 거기에서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순종에 살고 순종에 죽는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자는 순종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순종이 곧 사는 길이다. 순종의 신비가 우리의 인생을 신비롭게 이끌어 줄 것이다. 사는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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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