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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17. 02:16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창세기 29

(창세기 26:12-33)

 

우리는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른다. 오히려 싸워서 이기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손자병법에서도 가장 좋은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매우 이상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다투지 않고번성하는 법은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우리는 다투지 않고서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를뿐더러, 세상은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성경을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법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것은 싸우는 길이 아니라, 평화롭게 사는 길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이야기에서 본다. 이삭은 어떻게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을 살았을까?

 

요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전능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이 가득하다. 돈을 많이 벌어 값비싼 자동차나 개인 비행기 또는 보트를 사는 것이 부의 상징이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것을 가지면 인생이 풍요로울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그렇다면 이삭의 시대에는 무엇이 가장 중요했을까?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과 물이었다. 사실 지금도 인간에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만 현대인들은 발달된 농업과 관계 시설 때문에 식량과 물의 중요성을 망각했을 뿐이다. 망각했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거의 망각 속에 있다.

 

이삭은 기근이라는 현실에 맞서 생존 투쟁을 했다. 그 결과 애굽으로 피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 그랄 땅에 거주하게 된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 땅에 거주했다는 것은 기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삭은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얻는다. 이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삭 사이에 맺어진 계약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약속하시기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라고 하셨다(26:3).

 

이삭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지 보자.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13, 14). 그런데 이것이 그만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산다. 예나 지금이나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일은 드물다. ‘시기는 참 무서운 감정의 상태이다. 시기란 다른 사람의 외모나 소유, 재능 등을 시샘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한다. 시가란 단순히 부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미움이 싹트는 마음이다. 미움이 싹트면 거기에는 어김 없이 폭력이 발생한다.

 

생명을 직접적으로 해치거나, 생명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어떤 것을 해치는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 생명과 직결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과 물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에 대하여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 폭력을 휘두르는데, 이삭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앗아가지는 않지만, 생명과 직결된 물을 빼앗아 가는 것을 통해 이삭에게 폭력을 가한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14, 15).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농사지을 땅까지 빼앗는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16). 이 정도까지 나왔으면, 이삭이 생존을 위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일 만도 하다. 그런데 이삭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잘 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받은 감사를 기억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이삭이 위대한 이유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 일이 잘 풀릴 때 이 약속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 약속은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믿음 있음과 믿음 없음, 참된 감사와 거짓 감사는 잘 됐을 때 상대방에게서 받는 시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통해서 구별할 수 있다. 믿음과 감사에는 다툼이 없다. 믿음과 감사에는 그저 나눔과 양보만 있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잘 된 것이 하나님께 받은 복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나누지 못하고 양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믿음도 감사도 아니다.

 

이삭은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맺은 땅이나, 아버지 때부터 사용해 오던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블레셋과 다투지 않는다. 이삭에게 중요한 것은 백 배의 결실을 맺은 땅이나 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삭은 진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고 사는 믿음의 사람에게 다른 것은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다투지 않는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이사 한 뒤, 거기에서 예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또 팠다. 그러나 이번에도 블레셋 사람들의 횡포가 있었다. 그래서 이삭은 다른 곳에 우물을 팠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과 이삭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 일컬어 에섹(억압하다, 강탈하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곳에 우물을 또 팠다. 그런데 또 다툼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 일컬어 싯나(대적)라고 불렀다.

 

우물로 인해 계속되는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이삭은 삶의 터전을 계속해서 옮겼다. 그가 마지막으로 판 우물은 르호봇(넓은 곳)인데, 이 우물을 팠을 때 드디어 다툼이 없었다. 더 이상의 다툼이 없는 우물을 판 후, 이삭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맺은 브엘세바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판 우물들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며 블레셋 사람들과 다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투지 않고 나누고 양보함으로 다툼이 벌어지지 않을 때까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싸워서 이기는 것만 배운 현대인들이 보기에 답답할 수 있으니, 오히려 이것은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르는 현대인들이 배워야 하는 삶의 다른 길이다.

 

이삭이 걸어간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의 길이 옳았다는 것은 이삭 스스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을 일으킨 상대인 블레셋 사람들이다. 이삭은 그랄 땅에서 브엘세바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거기에서도 우물을 판다. 고대 사회에서 우물을 판다는 것은 요즘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고, 우물을 팔 때마다 성공적이었다.

 

다투지 않고 계속해서 나누고 양보하면서도 번성한 이삭에게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찾아 왔다. “아비멜렉과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브터 이삭에게로 온지라”(26). 자신을 찾아온 블레셋 사람들을 보고 이삭은 또 시비를 걸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삭은 그들에게 거칠게 묻는다.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27).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시비를 걸러 온 것이 아니라, 이삭과 평화 협정을 맺으러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삭과 평화 협정을 맺기로 작정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그러면서 이삭에게 자신들을 해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블레셋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삭이 자신들보다 강성하게 된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삭에게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기 원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블레셋은 참 약은 족속이다. 이삭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계속 훼방을 놓더니, 자신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으니까 이제 와서 평화 조약을 맺어 위협적인 존재를 쫓아버리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블레셋의 약은 꼼수를 몰랐을 리 없었지만 이삭은 그들을 쫓아버리는 대신 오히려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다. 그리고 그들의 제안대로 평화 조약을 맺고 그들을 평안 가운데 보내준다.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낯선 광경이다. 교회 다니면서 수도 없이 믿음과 감사, 나눔과 양보의 삶을 들었음에도 실제 삶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다투지 않고 번성했던 이삭의 삶은 단순히 구약 시대의 가치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다른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을 이 세상과 싸워 이기는 법으로 잘못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다퉈서 번성하는 법과는 다른 삶을 사시다가 이 세상에 의해 죽임 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옳았다는 것을 부활을 통해 확인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삭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태도의 전환이다. 물론 이렇게 살겠다는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손해 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은 나누고 양보하는 것을 미덕이라 보지 않고, 바보스런 짓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십자가의 길을 좁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믿음과 감사에는 다툼이 없다. 무엇이든 거기에서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 하나님 나라의 삶이 들어서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삶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자,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면서 받은 복 때문에 진실되게 감사하는 자, 그런 자는 결코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저 나누고 양보할 뿐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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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