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28. 05:11

무엇이 복인가?

창세기 32

(창세기 27: 24-46)

 

* "무엇이 복인가?"는 질문이 아니라 반문입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한 축복 쟁탈전에서 야곱과 리브가의 계략이 성공을 거둔다. 이삭은 에서로 가장해서 들어온 야곱의 별미를 먹고 야곱을 온 힘 다해서 축복해 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해 줄 때, '그냥 축복해 주면 되지 뭐 이렇게 별미까지 요구하면서 축복해 줄까'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축복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한 의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세계에서 살다 보니, ‘축복이라는 것도 일종의 미신처럼, 그리고 매우 종교적이고 피상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의 영성이 고대인의 영성보다 못하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고대인들은 축복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것은 단순한 말 장난이 아니라, 인생을 실제적으로 받쳐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축복은 일종의 축제였다.

 

이삭이 아들에게 축복을 빌어주기 전에 별미를 가져 오라고 한 것은 축복을 위한 축제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그가 축복을 빌어주기 전에 먹은 음식을 보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25). 이처럼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축제의 한 의식이다. 이렇게 축복을 위한 축제의 의식이 진행되고, 그 축제의 클라이막스인 축복이 선포된다.

 

축복의 첫 번째 내용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다(28). 하늘의 이슬은 비를 의미한다. 가나안 땅은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에 비가 제때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구약 성경에 간간히 등장하는 이른 비’, ‘늦은 비가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이제 이삭이 아들에게 축복하는 것은 하늘의 이슬, 즉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비를 통해 척박한 땅이 기름 진 땅으로 변하여 많은 수확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기름 진 땅에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얻게 되리라는 축복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축복 같지만 이것은 풍요로운 나라에서 먹거리에 대한 별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축복이다. 현대 사회(소위 말하는 제 1세계 또는 산업이 발달한 나라들)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환상들만 주입시키고 있다. 사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현대 사회의 환상과 욕망을 다 걷어내면, 결국에 남는 것은 생명의 가장 기초인 먹거리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결국 우리가 가장 감사해야 할 것은 굶지 않고 먹을 것이 충분이 있다는 것이다. 먹을 것만 있으면 감사의 조건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먹을 것을 앞에 놓아두고도 불평하기 일쑤다.

 

그러므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축복은 매우 애정 어린, 매우 근본적인 축복인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축복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욕심 부릴 것도 없고, 더 이상 불평할 것도 없다. 감사함으로 삶을 누리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풍요로운 먹거리가 오염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 사회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난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머지 않아 지구별에는 식량 폭동이 일어날 거라고 한다. '현재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재앙은 서서히 닥치지 않고 갑작스럽게 닥치는 법이다. 그런 경고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범 세계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안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

 

축복의 두 번째 내용은 복을 받는 자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표현된 언어 자체로만 보면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니리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9). 요즘 한국 사회에서 한창 문제 되고 있는 사회적 용어인 갑을관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축복은 의 위치에 올라서게 될 거라는 축복 같아 보인다. 물론 누구든지 갑의 위치에 서게 되면 좋아한다. 을의 위치에 있을 때 갑의 횡포에 이를 갈던 사람도 갑의 위치에 올라서게 되면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하는 격'이 되고 만다.

 

지금 이삭이 축복하고 있는 것은 야곱이지만, 원래 이삭의 축복은 에서를 위한 것이었다두 번째 축복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삭이 야곱을 위와 같이 축복했지만, 야곱의 삶에서 그 축복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 축복은 애초에 에서를 향한 것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에서는 이삭의 장자이다. 두 번째 축복 내용을 보면 그 축복은 장자를 향한 축복이다. 이삭은 에서에게 장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축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사회적 관계의 질서를 말한다. 장자의 나라가 섬김을 받고, 장자가 아우들의 주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장자가 축복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자에게 함부로 저주 할 수 없고, 장자에게서 축복을 받는 것은 질서이다. 이것이 뒤집히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매우 불편하고 복잡해 진다. 그러므로 야곱의 축복은 갑을관계를 형성하는 폭력적인 축복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질서를 말하는 평화의 축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삭의 축복이 애초부터 에서를 위해 준비되었던 것이라면, 야곱이 굳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도출될 것이다.

 

축복의 축제 가운데 이삭은 마음껏 아들을 축복한다. 이삭은 마지막 힘을 다해 아낌없이, 남김없이 축복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축제가 끝나자마자 비극이 시작된다. 이삭의 진짜 장남 에서가 사냥감을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 이삭에게 당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31). 이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좀 전에 분명 에서가 해 온 별미를 먹고 에서를 축복했는데, 또 다른 에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삭은 묻는다. “너는 누구냐?”(32).

 

지금 축복을 간구하는 이가 다른 이가 아니라 진짜 에서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삭은 부들부들 떤다. 그런데 이삭이 이렇게 부들부들 떠는 이유는 야곱이 못된 짓을 해서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간 일 때문이 아니라, 축복의 진정성 때문이다. 이처럼 축제로서 진행된 축복은 매우 진지한, 현실이다. 지금 눈 앞에 진짜 에서가 나타났지만, 나타나서 자신에게 복을 빌어줄 것을 간구하고 있지만, 이삭은 좀 전에 속임수로 자신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을 저주하거나 또는 그 축복이 무효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축복은 진지하고 실제적이라는 뜻이다. 이삭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3).

 

이 말을 들은 에서는 오열한다. 그리고 아우 야곱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발한다. 그러나 이삭의 축복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대신 오열하는 에서를 향해 에서의 바람대로 이렇게 축복해 준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39-40). 이것은 이삭이 속이는 자 야곱에게 내렸던 축복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정말 이것은 저주일까?

 

성서 학자들 사이에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있는데, 그들은 이것이 번역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멀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는 인데, 이것은 두 가지로 번역 가능하다. 하나는 부정적인 번역으로 ‘~으로부터 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번역으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글성경은 부정적으로 번역해서 멀다라고 했지만, 전체 문맥에서 볼 때 맞지 않는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너의 거주지가 그 땅의 기름진 곳에 있으며, 위로부터 그 하늘의 이슬이 있는 곳 중에 있을 것이다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멀다라고 번역하면, 에서에 대한 이삭의 축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을 빌어주지는 못할 망정 저주를 내리겠는가? 물론 야곱에게 내린 축복은 매우 진지하고 실제적인 것이었으므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만, 원래 에서를 향해 기획되었던 이삭의 축복은 이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간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41).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복인가?

 

야곱은 속임수를 써가며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축복은 원래 이삭이 에서를 향해 기획된 축복이었다. 형에게 마땅히 내려져야 할 축복을 동생인 야곱이 갖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게다가 그렇게 형을 속여서 받아낸 축복이 야곱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에서가 형을 섬기게 되지도 않고, 오히려 야곱이 에서에게 라고 고백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또한 야곱은 살면서 기근을 겪어 결국 애굽 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무엇 하나 속여서 가로챈 축복이 야곱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축복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히려 그것을 속여 받아 내려 했던 것 때문에 비극만 발생한다. 형 에서와의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으며, 사랑하는 어머니와 결국 헤어져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다시 못 보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복인가?

 

우리는 여기서 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복은 과도한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복은 그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복스럽게 흘러내려야 한다. 야곱처럼 복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오히려 인생을 괴로움에 처하게 한다. 무엇이 복인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복인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의 복을 받으면 무엇 하는가? 무엇이 복인가? 남들에게 섬김을 받으면 복인가? “만민과 열국이 너를 섬기고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면복을 받은 것인가? 무엇이 복인가?

 

오히려 그것보다, 먹을 것이 좀 없더라도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한 평생 사는 것이 복이 아닌가? 누구의 섬김을 받기 보다, 오히려 섬겨주고, 그 섬김 가운데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싹트는 가운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복이 아닌가?

 

우리는 살면서 복에 대한 과도한 욕망 가운데 살아간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복이라면 영혼까지도 팔아먹는 어리석은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무엇이 복인지에 대한 진지한 묵상이 필요하다. 복이 복스럽게 흘러내리도록 감사와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생각하며 참된 복을 누리며 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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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25. 02:06

참 나의 건강이 인생을 좌우한다

(에스겔 37:1-10)

 

<죽은 시인의 사회> 마지막 장면 상연.

 

페르조나(persona)’라는 용어가 있다. 심리학자 융이 도입한 개념으로, 자아의 편에 서서 외부세계와 협상하는 의식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연극의 가면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사람은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인생은 연극인가? 그렇기도 하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우선 인생이 연극인 것은 인간은 살아가면서 여러 개의 페르조나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는 하나이지만, 그 자아가 표출되는 사회적 방식은 여러 가지다. , 나는 나의 직위나 직책, 또는 직함 등의 모습으로 사회에 표출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약 1천 개 정도의 페르조나를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결혼한 사람은 집에서 남편으로, 아내로, 아버지로, 엄마로 살아간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사장으로, 종업원으로, 또는 그 중에서도 말단 사원으로, 과장으로, 부장으로, 회사 임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의 선배로 또는 후배로 살아간다. 물론, 교회에서는 목사로, 권사로, 집사로, 또는 무슨 부장으로, 회장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얼마 전 죽은 로빈 윌리암스는 배우로서 세상에 표출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의 한 가지 페르조나에 불과하다, 물론 그 사람에게 있어 배우라는 페르조나는 그 사람의 자아와 거의 동일시 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보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깨달은 듯한 뿌듯함을 가진 기억이 난다. 책상 위에 올라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역설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 역할을 로빈 윌리암스가 맡았었다. 그때부터 로빈 윌리암스는 내 마음에 좋은 이미지로 남았다. 그 이후 로빈 윌리암스가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봤다. 그 중 <굿 윌 헌팅>이나 <패치 아담스>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코끝이 찡한 감동을 준 영화로 아직까지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런데 로빈 윌리암스가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많은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 감동을 주고 꿈과 희망을 안겨준 그가 우울증으로 자살해 죽었다는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배우로서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지만, 생활인으로서 그는 매우 힘들었던 모양이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달처럼 빛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반대편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듯이 빛과 어둠으로 성겨 있는 인간의 삶을 생각할 때,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지만 때로는 빛이 어둠에 밀려버리는 '불안'의 상황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 같다.

 

우리는 살면서 참 나에 대한 질문을 자주 던져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계속해서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즉 페르조나가 아니라 그 가면을 벗었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짜 나의 모습이다. 그 진짜 나의 모습을 영혼(soul)이라는 말로 표현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들여다 볼 때 영혼의 모습을 보기보다 그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의 모습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인생의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페르조나는 세상에서 인정 받고 부러움을 사는 페르조나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페르조나는 세상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내세울 것이 못 되는 페르조나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와 자기 자신을 동일 시 하다 보니, 인생의 희비가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내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와 내 영혼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동일시가 심한 사람일수록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군복무를 하면서 계급이 장군까지 올라간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자신이 장군인 것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람의 직위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군으로서 삶을 사는 것은 그가 군대에서 군인으로서 일 할 때까지만이다. 전역하고 나면 그는 그냥 생활인으로 되돌아 온다. 바로 그때 자기 자신이 장군으로 있었을 때 자기 영혼에 걸쳐 있었던 페르조나인 장군과 자기 자신을 너무 동일시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장군이 아닐 때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전역하고 나면 현역으로 있을 때만큼 장군 대우를 받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은 자기를 장군으로 생각하는데 더 이상 사람들이 자신을 장군 대접해 주지 않을 때, 그 안에서는 분노가 차 오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관계가 정말 힘들어 진다.

 

성경은 페르조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성경은 오직 영혼에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진짜 모습인 영혼이지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또 이런 말씀도 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62:5).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나의 영혼을 들여다 보며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 보다, 그 영혼에 걸쳐 있는 페르조나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주님, 제가 ~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시옵소서!’ 물론 이러한 기도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기도도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늘 근본적인 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는 오히려 나를 상하게 하고 남을 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한다. 겉으로 보기에 그가 쓰고 있던 페르조나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가져다 준 것이고, 오히려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조심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사람의 예를 들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페르조나에 대한 관심은 조금 거두고, ‘참 나(영혼)’에 관심을 더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페르조나의 화려함이 영혼의 초라함을 감출 수 있다. 아니, 영혼의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페르조나를 더 화려하게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걸치고 있었던 페르조나를 벗을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영혼이 만약 에스겔 서의 말씀처럼 뼈만 남은 송장 같은 모습이라면 스스로 그 모습에 놀라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늘 영혼(참 나)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그 속에 생기를 넣는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쉬운 말로, ‘영혼을 살찌우게 한다라고 말한다. 영혼이 말라 있으면, 그 영혼에 걸쳐지는 페르조나는 언젠가 거덜나고 만다. 더 이상 페르조나를 걸치고 있을 기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인생이 힘들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겉으로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의 역할을 잘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페르조나에 너무 집착하느라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어머니들(여자)이 그런 인생의 허무를 많이 느낀다. 결혼해서 자식 낳고, 어머니로서,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의 페르조나를 걸치며 살다 보니, 자신의 영혼(참 나)을 돌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자식이 품을 떠나고, 남편이 속 썩이면 자신의 페르조나가 벗겨져 그 속에 있는 말라버린 영혼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어머니라는 페르조나를 쓰고 살아왔던 인생에 허무가 밀려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가장 쉬운 사람이 목사이다. 목사로서의 페르조나를 쓰고 살다 보면 그 페르조나 안에 있는 참 나(영혼)’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권사, 집사 등 교회의 직분자들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중직일수록 그러한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자기에게 입혀진 페르조나에 신경 쓰다 보니,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저 페르조나의 역할에만 충실하다가 탈진할 때가 많다.

 

참 나(영혼)’의 건강이 인생을 좌우한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를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는 참 나(영혼)’의 건강을 위해서지, 페르조나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다. ‘참 나(영혼)’가 건강한 사람은 어떤 페르조나를 걸치더라도 그 페르조나를 잘 소화해 낼 수 있다. 연기력이 좋은 사람은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잘 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연기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어떤 배역을 맡아도 불안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참 나(영혼)’가 건강한 사람은 어떤 페르조나를 걸치더라도 잘 해낼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일평생 살아가면서 걸치게 되는 약 1천 여 개의 페르조나를 버거워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중심이 어디로 향해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페르조나를 걸치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중심은 늘 참 나(영혼)’에게로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나(영혼)’를 살찌우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페르조나를 살찌우게 하는 분이 아니라, 그 페르조나를 근본적으로 잘 감당하게 해 주는 우리의 참 나(영혼)’을 살찌우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영혼에 힘줄을 두시고 살을 입히시고 가죽으로 덮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페르조나(가면)를 벗고 참 나(영혼)’를 보여드리고, 그 영혼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라. 페르조나로 인해 말라버린 우리의 영혼을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금 살찌우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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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17. 23:16

부르심과 새마음

(삼상 10:1-13)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직업을 콜링(calling) 또는 보케이션(vocation)이라고 부른다. 보통 한국 말로 천직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하늘이 내려주신 직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는 직업에 대해서 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서 비롯된 직업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는 신앙관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즉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게 되는 것도 그냥 우연히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따지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삶은 질적으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라는 것은 그렇다고 믿는 게 좋다라는 자기 합리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라는 것은 신앙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신앙체험이 인생 가운데 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성경에서,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많이 만난다.

 

우선, 노아가 그런 경우다. 성경에서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홍수심판을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도 그렇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가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그곳으로의 부르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당신의 특별한 백성을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그 일에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거기에 응답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모세도 그렇다. 모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온통 하나님의 섭리로 가득 차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가운데 물에서 건져냄을 받고 살아나 이집트의 궁전에서 자라게 된다. 그리고 성장하여 자기 인식이 일어날 때쯤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을 받는다. 범죄자로 몰려 왕궁을 떠나 사막에서 은둔 생활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낼 것을 명하신다. 모세는 그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뿌리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경험이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일을 구경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경험하거나, 북극에 가서 오로라는 경험하게 되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사명을 주지는 않는다. 그랜드 캐년이나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그 웅장함에 놀라 입이 딱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사명을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처럼 웅장한 자연을 구경하면서 받는 감동과는 다르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웅장한 자연을 구경하면서 받는 감동 같은 것이 존재하긴 하지만, 하나님 경험은 그 이상이다. 거기에는 뭔가 부르심이 있게 마련이다. 그 부르심은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 경험은 획일적이지 않다.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가장 극적으로 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감옥에 투옥시키고 그들을 처형시키는 일에 열심을 냈던 사람이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어떤 신적 경험을 한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그가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하나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을 하다가 순교 당한다.

 

본문의 사울은 우연히 사무엘을 찾아가게 됐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성경은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리고, 아들 사울을 보내 그것을 찾아오게 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사울은 사무엘에게로 보냄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의 표지는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해서, 내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의 표지는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드러나는가?

 

본문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사울은 하루 아침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의 절차를 걸쳐 왕으로 세워진다. 첫째, 사무엘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는다. 이것은 내적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뜻한다. 둘째, 사울은 백성들의 제비뽑기를 통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 왕으로 뽑힌다. 이것은 외적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외적으로 확증해 주는 공동체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울이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것은 열매이다.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을 통해서 왕으로 세워졌지만, 그가 실제적인 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본격적으로 왕의 직위를 감당하게 되는 것은 열매가 맺혀진 후부터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적 소명인데,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증거는 바로 새마음으로 나타난다.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9). 사울은 하나님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새마음을 받았다. (God changed his heart.) 분명 사울은 그 이후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것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 그 다음에 나오는데, 그것은 사울이 예언을 하는 장면이다.

 

사울은 전혀 예언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새마음을 부여 받은 사울은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이것은 사울의 변화에 던지는 놀라움의 표현이다. 사울이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울을 새마음을 받고,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앙의 깊이와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어떤 사람은 신앙이 좋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시원치 않은 원인은 바로 하나님 경험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사명을 받게 되는데, 즉 부르심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삶의 열정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과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큰 잘못은 아니다. 죄도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큰 벼슬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겸손히 섬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을 헤치지 않는다. 남을 정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새마음이 되었고, 그냥 새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살아 움직이는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 3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곳에서 불러내시며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36:25-27).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 새마음의 역사가 있다. 새마음은 돌아섬의 마음이다.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의 돌아섬의 마음이다. 새마음은 굳은 마음에서의 돌아섬의 마음이다. 새마음은 정결한 마음, 겸손한 마음, 섬기는 마음, 부드러운 마음, 온유한 마음, 즉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는 그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냥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 신앙인으로서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 하나님 경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경험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한 갈망이다. 예배도 기도도 찬양도 봉사도, 모두 하나님 경험을 위한 통로이다.

 

하나님 경험은 인생을 바꾼다. 성경은 온통 그 이야기뿐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인생이 바뀌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가.

 

하나님을 경험했는가? 그리고 하나님 경험을 통하여 새마음이 주어졌는가? 그렇다면, 부지런히 그 사명을 감당하시라.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셨는가? 낙망하지 마시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만나고자 부르짖는 자를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셨.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

 

여러분, 믿으시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고,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 원하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시라. 그리고 새롭게 되시라. 그래서 이 말씀을 믿고 나아가시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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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14. 07:38

이삭과 리브가에 대한 진실

창세기 31

(창세기 27:5-23)

 

상황이 매우 급박해 보인다. 장자 에서에게 축복을 내리려는 이삭과, 그에 맞서 이삭의 축복을 야곱이 받게 하려는 리브가의 대립이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삭은 그릇된 일을 하고 리브가는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의 문제와 결부해 보면, 이삭은 신앙이 없어 보이는 것 같고, 리브가는 신앙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삭은 다음의 하나님 말씀에 맞서는 행동을 하는 것 같고,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까? 그리고 이런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왜 리브가는 야곱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삭이 리브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의 말씀을 몰랐을 리 없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신실한 신앙을 물려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야곱을 축복하지 않고 굳이 에서에게 축복하려는 것을 보면 신앙을 잃어버린 듯한 인상을 받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리고 반대로 리브가는 같은 자식인데 에서에게는 마음과 눈길도 주지 않는 못된 어머니 같고, 그저 쌍둥이 작은 아들 야곱에게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같은 배에서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 아들을 차별할 수 있단 말인가?

 

우선, ‘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까에 대한 문제부터 살펴보자. 첫째,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측면에서 이삭의 마음을 들여다 보자. 이삭은 하나님의 뜻, 즉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거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인간이 어떻게 뒤집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알았던 이삭은 에서에게 측은지심을 느꼇던 것 같다. 형 에서가 장자권을 갖는 것이 이치상 맞지만, 이상하게 이 쌍둥이에게는 그 이치가 뒤집어졌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차피 장자권은 야곱의 것이다.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야곱이 받을 축복은 정해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미 그 삶 안에 담지하고 있는 아들이다. 그러나 에서는 무엇인가? 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버지 이삭은 마음은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를 보며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이삭은 측은한 마음으로 에서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축복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을 엿 볼 수 있다. 축복 쟁탈전이 일어나기 전, 에서의 결혼 기사가 나온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에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되었더라”(26:34-35).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얻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삭도 자신의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먼 곳 하란 땅에 가서 리브가를 데려왔다. 이는 배타적인 민족성을 형성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수 신앙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이 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한 존재(문화)와 한 존재(문화)가 충돌하는 것과 같다. 정현종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의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자신의 존재 영역 안으로 맞이하는 일은 우주와 우주가 충동하는 것처럼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는 일이다. 많은 에너지가 들고, 또는 또다른 에너지가 생성되는 일이기도 하다.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이방 여인이 지니고 있던 이방 문화를 함께 수용하게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흔들 수 있는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방 여인은 분명 자신들이 섬기던 신에 대한 신앙을 함께 가지고 에서에게로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삭과 리브가는 이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이러한 에서의 행동, 즉 이방인과 결혼한 에서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보면, 에서의 이러한 행동이 결국 장자권을 상실하고 축복권을 상실했다는 외적인 증거가 되는 지 모르겠다. 이삭은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장자권과 축복권을 담지한 장자 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이미 그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이삭의 마음은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도 에서는 이삭의 장자가 아닌가! 그런 장자를 이삭은 손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그토록 애써 에서를 축복하려 했다.

 

셋째, 이삭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시험(test)하고자 했던 것 같다. 사시 시대의 기드온처럼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인지 시험해 보고자 했다. 정말로 장자권과 축복을 야곱이 다 가져가는 것일까?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이삭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 했다.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가 아무리 에서를 축복한 들 하나님의 축복이 에서에게로 가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지 않겠는가?

 

‘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까에 대한 위의 세가지 추론을 통하여 결국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삭의 성품이다. 이삭은 원래 온유한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처럼,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끊고자했던 것처럼, 이삭도 에서의 마음을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그것이 폭력처럼 군림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신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삭의 신앙은 온유함이 가득 베어 있는 신앙이었던 것이다. 온유함은 이처럼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그리고 폭력적이지 않고 섭리에 맞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끔 한다.

 

이번에는 왜 리브가는 야곱에게 집착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첫째로, 리브가는 말씀의 수호자의 역할을 자청하는 것 같다. 복중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었다. 그때 받은 말씀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이것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리브가가 보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그 말씀이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이삭이 엉뚱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브가는 말씀을 수호하기 위해서 남편을 속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었다.

 

둘째로, 리브가는 힘 없는 자를 보호하고 있다. 성경은 장자 에서와 차자 야곱에 대한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25:27). 쌍둥이였지만 정말 달랐다. 에서는 외향적이고 남자답게 힘이 셌다. 그러나 야곱은 내성적이고 힘이 약했다. 이 둘이 자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힘이 약한 야곱은 힘이 센 에서에게 늘 당하면서 컸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성장 환경이 야곱을 속이는 자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힘으로 정면 승부해서 이길 수 없으니, 속여서라도 승리를 쟁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리브가는 늘 야곱에게 마음을 두었다. 그것은 세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추론인 어머님의 마음과도 같다. 엄마의 마음은 늘 허약한 자식에게 가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마음을 둔다. 그러나 엄마는 가장 힘이 약한 자식(또는 막내)에게 마음을 둔다. 리브가는 아주 생득적인 어머니의 마음을 갖고 야곱을 보호한 것이다.

 

리브가의 어머니의 마음은 다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장자권 쟁탈전을 꾸미는 중에 허약한 야곱이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나서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을까 걱정할 때에 어머니 리브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13).

 

이것은 어머니의 마음의 절정이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한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식을 입히고 먹이고 싶어 한다. 모든 잘못된 저주는 자신이 담당하더라도 자식에게는 축복만 주고 싶어 한다. 이런 마음을 잘 담아낸 노래가 어머니의 마음이다. 양주동 박사가 작사하고, 이흥렬 씨가 작곡했다.

 

1: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왜 리브가는 야곱에게 집착할까에 대한 위의 세가지 추론을 통하여 결국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리브가의 성품이다. 리브가는 신실한 사람이다. 신실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실행하고자 했다. 신실한 사람은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엄마로서의 임무, 신앙인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

 

신앙의 측면에서 보자면, 리브가의 신앙은 신실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신실함은 이처럼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원동력이 된다. 어머니로서 리브가는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키셨고, 신앙인으로서 리브가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했다.

 

얼핏 보면 이삭과 리브가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대립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이 고유 지니고 있는 성품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성품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을 헌신했던 것이다. 이삭은 온유함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인도했으며, 온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리브가는 신실함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인도했으며,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이삭의 온유함과 리브가의 신실함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성품들을 지니고 살아간다. 어떤 성품이 어떤 성품보다 좋거나 나쁘지 않다. 이삭의 온유한 성품이, 리브가의 신실한 성품보다 좋다고 말할 수 없고, 리브가의 신실한 성품이 이삭의 온유한 성품보다 좋다고 말 할 수 없다. 그저 이삭은 온유한 성품을 타고난 것뿐이고, 리브가는 성실한 성품을 타고난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타고난 성품으로 살아가면 된다. 다른 사람의 성품을 부러워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품을 미워하거나 버리려 애쓰지 말고, 그리고 자기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성품을 애써 표출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신의 성품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멋진 인생이 될 수 있고, 가장 행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타고난 중심으로부터 생명의 꽃을 활짝 피워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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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8. 06:41

미스바 대성회

(삼상 7:1-11)

 

여호와의 궤가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진다. 에벤에셀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 패하며 빼앗겼던 여호와의 궤가 7개월만에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를 통해 되돌아 왔는데, 벧세메스 주민들의 경솔한 행동(법궤를 열어봄) 때문에 70명이 죽어나가는 일이 발생하자 벧세메스 주민들은 법궤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럇여아림으로 보낸다.

 

법궤는 기럇여아림 주민들 중 아비나답의 집으로 간다. 사실 아비나답의 입장에서 법궤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한 결정이다. 빼앗겼던 법궤를 되찾아 온 일은 기쁜 일이었으나, 법궤가 블레셋 진영에 있던 중에 법궤를 통해 블레셋이 받았던 재앙과 경솔한 행동 때문에 벧세메스 주민들이 받았던 재앙들을 생각하면 법궤를 자신의 집으로 들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법궤가 그 많은 마을 중 기럇여아림으로 가게 됐으며, 또 그 중에서 아비나답의 집으로 가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안 나오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비나답이 평소에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비나답은 법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법궤가 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아들 엘리에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법궤를 지키는 자로 세운다. 여호와의 궤 지키는 일을 잘 수행했는지, 시간은 그렇게 지나 20년이 지난다. 그리고 그 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사무엘이 다시 등장한다.

 

사무엘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정황을 동반하고 일어난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2절 후반부). 여기서 사모하니라는 히브리어의 나하를 옮긴 말인데, 원래 뜻은 울부짓다, 신음하다, 애도하다등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나하를 주로 ‘lament(탄식하다)’로 옮기고 있다. 사모하다와 탄식하다의 의미를 모두 살려서 나하를 풀어보면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마음을 돌리고 도우심을 간구하며 신음하며 울부짖으면서 여호와를 찾았다는 뜻이 된다. 이들은 왜 이렇게 간절하게 여호와를 찾았을까?

 

바로, 블레셋의 압제 때문이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압제 세력이 블레셋인데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사사 삼손을 보내신다. 블레셋의 압제 문제는 삼손 때에 이미 해결되었어야만 한다. 그러나 삼손은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나실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기질을 극복하지 못하고 감정 콘트롤과 여자 문제로 인해 사명을 그르치고 만다.  삼손은 그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죽는다. 이처럼 한 사람의 리더가 또는 한 사람의 사명자가 자신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면 그 실패의 여파는 계속되는 법이다.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울부짖는 이스라엘 앞에 다시 등장한 사무엘은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외친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게 향해 그만을 섬기라!”(3). 그러기 위해서 이들에게 요구된 것은 그들 삶 가운데 있었던 이방신들과 아스다롯과 바알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요구 같지만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고, 다른 신들은 우상이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과 관련 있고, 우상이 추구하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이 있는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문제이다.

 

이방신들과 아스다롯과 바알들, 단순하게 우상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것들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인가? 왜 이러한 우상 숭배가 문제가 되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배타적인 신앙의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고 불리는 것들의 현상의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한 마디로 이방신들은 비윤리, 부도덕, 인간파괴를 야기시켰다. 신앙의 대상이 이러한 문제를 야기시킨다면 그것은 아무리 고상한 것(심지어 하나님이라 불려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에 불과하다. 우상이란 헛것을 말하는데, 헛것이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자신처럼 허망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우상은 생명을 우습게 만들고 파괴한다. 그러한 일들이 바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대신 붙들었던 이방신들, 아스다롯, 바알신들에 대한 신앙에서 나타났다.

 

이방신들을 섬길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헛것들은 성전 창기 제도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 그리고 탐욕을 부추기는 신앙 형태이다. 가나안의 이방신들의 풍습 중 대표되는 것은 성전 창기 제도였다. 다산을 상징하는 바알신 등은 남녀의 정사를 통해서 위안을 받고 그 대가로 비를 내려 옥토를 풍요롭게 한다는 풍습에 따라 신전 창기 제도를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했다. 이는 당연히 성적인 풍기문란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섹스라니! 이것은 성에 대한 완벽한 왜곡에 불과하다. 타락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이방신들은 제물로 자식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은 신학적 함의가 다르다. 물론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는지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실제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신들의 풍습에서는 실제로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증명되었다.

 

또한 우상 숭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탐욕을 끝 간데 없이 부추긴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채워야 할 욕구가 있다. 그러나 어느 이상 넘어가면 그것은 생명을 소멸시키는 악한 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절제가 중요한 것이다. 우상 숭배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겨서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존재(사람이든 사물이든)를 짓밟는 것에 대해서 면죄부를 던져 준다. 탐욕에만 정신이 팔린 우상 숭배자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거칠 것 없는 악마로 변하기 십상이다.

 

무엇이든지 비윤리와 부도덕, 그리고 인간파괴를 야기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그러한 우상들(이방신들, 아스다롯, 바알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정의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생명을 지향하신다. 하나님의 그 어떤 속성도 생명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라는 사무엘의 외침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회복의 외침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이것을 위해 미스바 대성회를 연다. 미스바라는 곳에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들을 불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성별한다. 첫째, 이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다. 물은 예나 지금이나 씻음의 상징을 갖고 있다. 더러운 것이 있으면 물로 씻으면 된다. 이들이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더러워진 마음, 즉 죄를 뉘우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번째, 이들은 금식한다. 금식은 탐욕의 제어를 말한다. 우상숭배로 인해 끝 간데 모를 정도로 부풀어 있던 탐욕을 금식을 통해 제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는 입술의 고백을 드린다.

 

이들은 왜 이렇게 입술의 고백을 드리는 것일까? 어떠한 것을 말로(입술로) 고백한다는 것은 문제성을 인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들이 바보라서 우상숭배를 통해 성전창기, 자식제물, 탐욕의 헛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들어 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전창기와 자식제물, 탐욕의 헛것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실재이고 진리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우물 안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우물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그때 자신이 우물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혼낼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지금 아이가 왜 혼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아동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이가 혼나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모는 아이의 입술로 자신의 문제점을 말해보게 끔 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를 혼내는 것에 대한 효과를 볼 수 있고, 아이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되풀이 해서 그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입술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면 미스바 대성회를 통해서 행한 일련의 퍼포먼스들은 그야말로 그냥 퍼포먼스로 끝날 뿐,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입술의 고백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굉장히 유념해야 할 경건훈련이고 영성훈련이다. 기도를 중언부언하지 말고 정확히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든지 입술로 정확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말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입술의 고백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면 훨씬 더 수월하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갈 수 있다.

 

미스바 대회는 성공적이었는가? 이들은 정말로 미스바 대회를 통해 거듭났는가? 이들의 회개에는 진정성이 있었는가? 사실,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 의식이나, 금식이나, 또는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는 입술의 고백 자체를 통해서 그들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미스바 대성회 이야기 다음에 이어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통해서 미스바 대성회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 집회를 갖고 있을 때 블레셋은 이들이 전투를 준비하는지 착각했는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전투를 일으킨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맨날 지기만 하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승리한 이야기가 미스바 대성회 다음에 나오는 이유는 미스바 대성회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진정성은 이렇게 열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는 미스바 대성회에서 행한 이들의 회개의 열매였다.

 

미스바 대성회를 통해 이방신들, 아스다롯과 바알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블레셋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잃었던 땅(에그론부터 가드)을 회복했고, 블레셋 뿐만이 아니라 산간지역에서 살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또다른 적인 아모리 족속과도 평화롭게 지내게 된다. (삼상 7:13-14)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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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