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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8. 06:41

미스바 대성회

(삼상 7:1-11)

 

여호와의 궤가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진다. 에벤에셀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 패하며 빼앗겼던 여호와의 궤가 7개월만에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를 통해 되돌아 왔는데, 벧세메스 주민들의 경솔한 행동(법궤를 열어봄) 때문에 70명이 죽어나가는 일이 발생하자 벧세메스 주민들은 법궤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럇여아림으로 보낸다.

 

법궤는 기럇여아림 주민들 중 아비나답의 집으로 간다. 사실 아비나답의 입장에서 법궤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한 결정이다. 빼앗겼던 법궤를 되찾아 온 일은 기쁜 일이었으나, 법궤가 블레셋 진영에 있던 중에 법궤를 통해 블레셋이 받았던 재앙과 경솔한 행동 때문에 벧세메스 주민들이 받았던 재앙들을 생각하면 법궤를 자신의 집으로 들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법궤가 그 많은 마을 중 기럇여아림으로 가게 됐으며, 또 그 중에서 아비나답의 집으로 가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안 나오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비나답이 평소에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비나답은 법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법궤가 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아들 엘리에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법궤를 지키는 자로 세운다. 여호와의 궤 지키는 일을 잘 수행했는지, 시간은 그렇게 지나 20년이 지난다. 그리고 그 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사무엘이 다시 등장한다.

 

사무엘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정황을 동반하고 일어난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2절 후반부). 여기서 사모하니라는 히브리어의 나하를 옮긴 말인데, 원래 뜻은 울부짓다, 신음하다, 애도하다등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나하를 주로 ‘lament(탄식하다)’로 옮기고 있다. 사모하다와 탄식하다의 의미를 모두 살려서 나하를 풀어보면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마음을 돌리고 도우심을 간구하며 신음하며 울부짖으면서 여호와를 찾았다는 뜻이 된다. 이들은 왜 이렇게 간절하게 여호와를 찾았을까?

 

바로, 블레셋의 압제 때문이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압제 세력이 블레셋인데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사사 삼손을 보내신다. 블레셋의 압제 문제는 삼손 때에 이미 해결되었어야만 한다. 그러나 삼손은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나실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기질을 극복하지 못하고 감정 콘트롤과 여자 문제로 인해 사명을 그르치고 만다.  삼손은 그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죽는다. 이처럼 한 사람의 리더가 또는 한 사람의 사명자가 자신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면 그 실패의 여파는 계속되는 법이다.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울부짖는 이스라엘 앞에 다시 등장한 사무엘은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외친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게 향해 그만을 섬기라!”(3). 그러기 위해서 이들에게 요구된 것은 그들 삶 가운데 있었던 이방신들과 아스다롯과 바알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요구 같지만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고, 다른 신들은 우상이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과 관련 있고, 우상이 추구하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이 있는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문제이다.

 

이방신들과 아스다롯과 바알들, 단순하게 우상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것들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인가? 왜 이러한 우상 숭배가 문제가 되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배타적인 신앙의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고 불리는 것들의 현상의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한 마디로 이방신들은 비윤리, 부도덕, 인간파괴를 야기시켰다. 신앙의 대상이 이러한 문제를 야기시킨다면 그것은 아무리 고상한 것(심지어 하나님이라 불려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에 불과하다. 우상이란 헛것을 말하는데, 헛것이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자신처럼 허망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우상은 생명을 우습게 만들고 파괴한다. 그러한 일들이 바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대신 붙들었던 이방신들, 아스다롯, 바알신들에 대한 신앙에서 나타났다.

 

이방신들을 섬길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헛것들은 성전 창기 제도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 그리고 탐욕을 부추기는 신앙 형태이다. 가나안의 이방신들의 풍습 중 대표되는 것은 성전 창기 제도였다. 다산을 상징하는 바알신 등은 남녀의 정사를 통해서 위안을 받고 그 대가로 비를 내려 옥토를 풍요롭게 한다는 풍습에 따라 신전 창기 제도를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했다. 이는 당연히 성적인 풍기문란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섹스라니! 이것은 성에 대한 완벽한 왜곡에 불과하다. 타락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이방신들은 제물로 자식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은 신학적 함의가 다르다. 물론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는지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실제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신들의 풍습에서는 실제로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증명되었다.

 

또한 우상 숭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탐욕을 끝 간데 없이 부추긴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채워야 할 욕구가 있다. 그러나 어느 이상 넘어가면 그것은 생명을 소멸시키는 악한 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절제가 중요한 것이다. 우상 숭배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겨서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존재(사람이든 사물이든)를 짓밟는 것에 대해서 면죄부를 던져 준다. 탐욕에만 정신이 팔린 우상 숭배자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거칠 것 없는 악마로 변하기 십상이다.

 

무엇이든지 비윤리와 부도덕, 그리고 인간파괴를 야기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그러한 우상들(이방신들, 아스다롯, 바알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정의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생명을 지향하신다. 하나님의 그 어떤 속성도 생명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라는 사무엘의 외침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회복의 외침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이것을 위해 미스바 대성회를 연다. 미스바라는 곳에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들을 불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성별한다. 첫째, 이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다. 물은 예나 지금이나 씻음의 상징을 갖고 있다. 더러운 것이 있으면 물로 씻으면 된다. 이들이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더러워진 마음, 즉 죄를 뉘우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번째, 이들은 금식한다. 금식은 탐욕의 제어를 말한다. 우상숭배로 인해 끝 간데 모를 정도로 부풀어 있던 탐욕을 금식을 통해 제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는 입술의 고백을 드린다.

 

이들은 왜 이렇게 입술의 고백을 드리는 것일까? 어떠한 것을 말로(입술로) 고백한다는 것은 문제성을 인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들이 바보라서 우상숭배를 통해 성전창기, 자식제물, 탐욕의 헛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들어 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전창기와 자식제물, 탐욕의 헛것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실재이고 진리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우물 안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우물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그때 자신이 우물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혼낼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지금 아이가 왜 혼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아동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이가 혼나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모는 아이의 입술로 자신의 문제점을 말해보게 끔 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를 혼내는 것에 대한 효과를 볼 수 있고, 아이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되풀이 해서 그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입술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면 미스바 대성회를 통해서 행한 일련의 퍼포먼스들은 그야말로 그냥 퍼포먼스로 끝날 뿐,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입술의 고백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굉장히 유념해야 할 경건훈련이고 영성훈련이다. 기도를 중언부언하지 말고 정확히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든지 입술로 정확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말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입술의 고백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면 훨씬 더 수월하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갈 수 있다.

 

미스바 대회는 성공적이었는가? 이들은 정말로 미스바 대회를 통해 거듭났는가? 이들의 회개에는 진정성이 있었는가? 사실,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 의식이나, 금식이나, 또는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는 입술의 고백 자체를 통해서 그들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미스바 대성회 이야기 다음에 이어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통해서 미스바 대성회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 집회를 갖고 있을 때 블레셋은 이들이 전투를 준비하는지 착각했는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전투를 일으킨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맨날 지기만 하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승리한 이야기가 미스바 대성회 다음에 나오는 이유는 미스바 대성회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진정성은 이렇게 열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는 미스바 대성회에서 행한 이들의 회개의 열매였다.

 

미스바 대성회를 통해 이방신들, 아스다롯과 바알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블레셋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잃었던 땅(에그론부터 가드)을 회복했고, 블레셋 뿐만이 아니라 산간지역에서 살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또다른 적인 아모리 족속과도 평화롭게 지내게 된다. (삼상 7:13-14)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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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