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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28. 05:11

무엇이 복인가?

창세기 32

(창세기 27: 24-46)

 

* "무엇이 복인가?"는 질문이 아니라 반문입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한 축복 쟁탈전에서 야곱과 리브가의 계략이 성공을 거둔다. 이삭은 에서로 가장해서 들어온 야곱의 별미를 먹고 야곱을 온 힘 다해서 축복해 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해 줄 때, '그냥 축복해 주면 되지 뭐 이렇게 별미까지 요구하면서 축복해 줄까'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축복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한 의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세계에서 살다 보니, ‘축복이라는 것도 일종의 미신처럼, 그리고 매우 종교적이고 피상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의 영성이 고대인의 영성보다 못하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고대인들은 축복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것은 단순한 말 장난이 아니라, 인생을 실제적으로 받쳐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축복은 일종의 축제였다.

 

이삭이 아들에게 축복을 빌어주기 전에 별미를 가져 오라고 한 것은 축복을 위한 축제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그가 축복을 빌어주기 전에 먹은 음식을 보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25). 이처럼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축제의 한 의식이다. 이렇게 축복을 위한 축제의 의식이 진행되고, 그 축제의 클라이막스인 축복이 선포된다.

 

축복의 첫 번째 내용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다(28). 하늘의 이슬은 비를 의미한다. 가나안 땅은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에 비가 제때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구약 성경에 간간히 등장하는 이른 비’, ‘늦은 비가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이제 이삭이 아들에게 축복하는 것은 하늘의 이슬, 즉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비를 통해 척박한 땅이 기름 진 땅으로 변하여 많은 수확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기름 진 땅에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얻게 되리라는 축복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축복 같지만 이것은 풍요로운 나라에서 먹거리에 대한 별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축복이다. 현대 사회(소위 말하는 제 1세계 또는 산업이 발달한 나라들)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환상들만 주입시키고 있다. 사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현대 사회의 환상과 욕망을 다 걷어내면, 결국에 남는 것은 생명의 가장 기초인 먹거리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결국 우리가 가장 감사해야 할 것은 굶지 않고 먹을 것이 충분이 있다는 것이다. 먹을 것만 있으면 감사의 조건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먹을 것을 앞에 놓아두고도 불평하기 일쑤다.

 

그러므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축복은 매우 애정 어린, 매우 근본적인 축복인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축복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욕심 부릴 것도 없고, 더 이상 불평할 것도 없다. 감사함으로 삶을 누리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풍요로운 먹거리가 오염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 사회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난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머지 않아 지구별에는 식량 폭동이 일어날 거라고 한다. '현재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재앙은 서서히 닥치지 않고 갑작스럽게 닥치는 법이다. 그런 경고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범 세계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안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

 

축복의 두 번째 내용은 복을 받는 자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표현된 언어 자체로만 보면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니리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9). 요즘 한국 사회에서 한창 문제 되고 있는 사회적 용어인 갑을관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축복은 의 위치에 올라서게 될 거라는 축복 같아 보인다. 물론 누구든지 갑의 위치에 서게 되면 좋아한다. 을의 위치에 있을 때 갑의 횡포에 이를 갈던 사람도 갑의 위치에 올라서게 되면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하는 격'이 되고 만다.

 

지금 이삭이 축복하고 있는 것은 야곱이지만, 원래 이삭의 축복은 에서를 위한 것이었다두 번째 축복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삭이 야곱을 위와 같이 축복했지만, 야곱의 삶에서 그 축복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 축복은 애초에 에서를 향한 것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에서는 이삭의 장자이다. 두 번째 축복 내용을 보면 그 축복은 장자를 향한 축복이다. 이삭은 에서에게 장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축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사회적 관계의 질서를 말한다. 장자의 나라가 섬김을 받고, 장자가 아우들의 주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장자가 축복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자에게 함부로 저주 할 수 없고, 장자에게서 축복을 받는 것은 질서이다. 이것이 뒤집히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매우 불편하고 복잡해 진다. 그러므로 야곱의 축복은 갑을관계를 형성하는 폭력적인 축복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질서를 말하는 평화의 축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삭의 축복이 애초부터 에서를 위해 준비되었던 것이라면, 야곱이 굳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도출될 것이다.

 

축복의 축제 가운데 이삭은 마음껏 아들을 축복한다. 이삭은 마지막 힘을 다해 아낌없이, 남김없이 축복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축제가 끝나자마자 비극이 시작된다. 이삭의 진짜 장남 에서가 사냥감을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 이삭에게 당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31). 이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좀 전에 분명 에서가 해 온 별미를 먹고 에서를 축복했는데, 또 다른 에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삭은 묻는다. “너는 누구냐?”(32).

 

지금 축복을 간구하는 이가 다른 이가 아니라 진짜 에서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삭은 부들부들 떤다. 그런데 이삭이 이렇게 부들부들 떠는 이유는 야곱이 못된 짓을 해서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간 일 때문이 아니라, 축복의 진정성 때문이다. 이처럼 축제로서 진행된 축복은 매우 진지한, 현실이다. 지금 눈 앞에 진짜 에서가 나타났지만, 나타나서 자신에게 복을 빌어줄 것을 간구하고 있지만, 이삭은 좀 전에 속임수로 자신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을 저주하거나 또는 그 축복이 무효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축복은 진지하고 실제적이라는 뜻이다. 이삭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3).

 

이 말을 들은 에서는 오열한다. 그리고 아우 야곱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발한다. 그러나 이삭의 축복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대신 오열하는 에서를 향해 에서의 바람대로 이렇게 축복해 준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39-40). 이것은 이삭이 속이는 자 야곱에게 내렸던 축복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정말 이것은 저주일까?

 

성서 학자들 사이에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있는데, 그들은 이것이 번역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멀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는 인데, 이것은 두 가지로 번역 가능하다. 하나는 부정적인 번역으로 ‘~으로부터 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번역으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글성경은 부정적으로 번역해서 멀다라고 했지만, 전체 문맥에서 볼 때 맞지 않는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너의 거주지가 그 땅의 기름진 곳에 있으며, 위로부터 그 하늘의 이슬이 있는 곳 중에 있을 것이다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멀다라고 번역하면, 에서에 대한 이삭의 축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을 빌어주지는 못할 망정 저주를 내리겠는가? 물론 야곱에게 내린 축복은 매우 진지하고 실제적인 것이었으므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만, 원래 에서를 향해 기획되었던 이삭의 축복은 이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간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41).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복인가?

 

야곱은 속임수를 써가며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축복은 원래 이삭이 에서를 향해 기획된 축복이었다. 형에게 마땅히 내려져야 할 축복을 동생인 야곱이 갖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게다가 그렇게 형을 속여서 받아낸 축복이 야곱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에서가 형을 섬기게 되지도 않고, 오히려 야곱이 에서에게 라고 고백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또한 야곱은 살면서 기근을 겪어 결국 애굽 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무엇 하나 속여서 가로챈 축복이 야곱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축복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히려 그것을 속여 받아 내려 했던 것 때문에 비극만 발생한다. 형 에서와의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으며, 사랑하는 어머니와 결국 헤어져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다시 못 보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복인가?

 

우리는 여기서 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복은 과도한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복은 그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복스럽게 흘러내려야 한다. 야곱처럼 복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오히려 인생을 괴로움에 처하게 한다. 무엇이 복인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복인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의 복을 받으면 무엇 하는가? 무엇이 복인가? 남들에게 섬김을 받으면 복인가? “만민과 열국이 너를 섬기고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면복을 받은 것인가? 무엇이 복인가?

 

오히려 그것보다, 먹을 것이 좀 없더라도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한 평생 사는 것이 복이 아닌가? 누구의 섬김을 받기 보다, 오히려 섬겨주고, 그 섬김 가운데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싹트는 가운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복이 아닌가?

 

우리는 살면서 복에 대한 과도한 욕망 가운데 살아간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복이라면 영혼까지도 팔아먹는 어리석은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무엇이 복인지에 대한 진지한 묵상이 필요하다. 복이 복스럽게 흘러내리도록 감사와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생각하며 참된 복을 누리며 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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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