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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27 약속의 성취 1
  2. 2014.09.19 이삭의 결혼
  3. 2014.09.18 야곱의 하나님 경험
  4. 2014.09.15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5. 2014.09.07 신앙이란 무엇인가?
  6. 2014.09.04 은혜는 은혜다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27. 03:22

약속의 성취

창세기 23

(창세기 23:1-2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0, 12).

 

사라가 죽는다. 돌아보면 수고와 슬픔뿐인 삶을 127년 동안 살다 죽는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종속된 존재로 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도반(길벗)으로서, 그리고 돕는 배필로서, 또한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을 받은 만국의 어머니로서 세상을 살다 죽는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의 담지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징표는 다른 누구의 태가 아닌 바로 사라의 태를 통하여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라는 어머니다. 사라는 여자를 대표하고, 언약의 통로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창조의 약속인데, 하나님의 창조는 어머니 사라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대지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다. 대지가 없으면 생명이 없고, 대지가 오염되면 생명이 위태로운 것처럼, 어머니 사라가 없으면 하나님의 창조도 없고, 그의 믿음이 오염되면 약속도 위태롭다. 그녀가 없으면 약속의 성취도 없다. 그래서 사라는 생명과 창조의 통로인 어머니요 대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창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두 가지, 자손과 땅이었다. 창세기 21장에서는 두 가지 약속 중 자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보았고, 22장에서는 언약의 위기를 보았고, 23장에서는 또 하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본다. 그런데 두 가지 약속이 모두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약속의 자식 이삭이 어머니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에 들어왔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던 약속의 땅이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창조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내 사라의 죽음은 통렬한 것이었다. 사라가 숨을 거둔 장소는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이다. 이곳이 바로 마므레인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진 뒤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대한 약속을 받고 처음 옮겨간 곳이다(13:18). 그때만 해도 아브라함은 땅에 대한 약속이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지게 될 거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준비하시고 계신다. 지금 당장은 막막해 보여도 날마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다 보면 믿음(하나님의 약속)이 형상화되는 날이 온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망자(죽은 자)를 예우하는 일은 죽은 시체를 잘 매장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흙에서 온 인생이 흙 속에 잘 묻히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인생도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 죽은 자들은 땅 속에 묻지 않고 땅 바닥에 놓아 들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그것은 인간이 당하는 수치 가운데 가장 큰 수치 중 하나였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아합과 이세벨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그들에게 전한 예언이 그런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왕상 21:23).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극악무도한 죄의 심판으로 그들은 엘리야의 예언대로 그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한다.

 

아브라함은 평생의 도반(길벗)이자 돕는 배필이었던 아내 사라의 삶을 예우하기 위해서 그녀의 죽음 앞에 슬퍼만 하지 않고 일어나 그녀의 무덤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헷족속에게 가서 죽은 아내를 매장할 땅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제 아브라함은 헷족속과의 긴장감 도는 흥정을 시작한다.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아브라함은 헷족속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입니다”(4). 이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아내 사라를 매장할 수 있는 땅이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목적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 나머지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낮출 준 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낮추면서 헷족속과 교감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핵심을 말한다. “죽은 제 아내를 장사 지낼 수 있게 여러분들의 땅을 제게 좀 나눠 주십시오”(4).

 

이에 대한 헷족속의 반응이 참 다행스럽다. 헷족속은 자기 자신을 낮춘 아브라함을 높여준다. “내 주여, 들어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우리 묘지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돌아가신 부인을 장사 지내십시오. 어른께서 돌아가신 부인을 장사 지내신다는데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기 묘지라고 해서 거절할 사람이 있겠습니까?”(6). 이는 아브라함이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약속의 땅에 살면서 얼마나 덕망 있는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자성어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이 있다. 이는 덕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따르는 무리가 있다라는 뜻이다. 누구를 대할 때 나 자신이 조금 손해 보며 대한다면 반드시 많은 이웃이 생겨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 또한 나 자신보다 약한 자를 돌봐주고 훈훈한 인정을 베풀면 서로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바라 보게 되므로 어찌 외로울 있겠는가. ‘()’이란 자기 희생이다. 덕을 쌓는다는 것은 자기 희생, 즉 사랑을 통해서 쌓는 것이다. 덕은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희생하는 것을 통해 쌓는 것이다. 이렇게 덕스러운 마음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둔 자들에게 오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살면서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헷족속과 충분한 교감을 가졌다. 덕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충분한 교감을 갖는 것은 참 중요하다. 충분한 교감이 없는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교만과 욕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교감을 쌓은 후에 말하는 것은 서로의 것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사귐의 행위가 된다.

 

여기까지 보면 헷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매장할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 값을 충분히 지불하고자 한다. 제 값을 지불하고 합법적이고 영구적인 소유권을 갖기 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라고 공짜로 얻기를 원하거나 헐 값에 땅을 사고자 하지 않는다. 그에 정당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고자 한다. 이것은 십자가에서도 나타나는 대가의 완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구원을 싼 값에 이루시거나 헐값에 이루지 않으신다.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인 이유는 값싸게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 아니라,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온전한 대가를 지불한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신적 능력이다. 그래서 본 회퍼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값비싼 은혜(teure gnade)’라고 부른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윤리를 넘어선 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그런 신앙의 행위와 동떨어질 때가 많다. 거룩한 노동을 '헌신과 봉사'로 탈바꿈시켜 노동력을 착취하는 교회의 비루한 행동은 멈추어야 한다.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목회자의 노동력을 '헌신과 봉사'로 착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때로 교회에는 도대체 인권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것을 훈련으로, 헌신으로, 봉사로 미화시킬 때가 많다. 노동력과 '헌신과 봉사'는 구분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헌신과 봉사는 감사와 찬미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 행위이지만, 교회 안에서의 노동력은 그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되는 것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 행위이다.

 

교회의 일꾼(교회에서의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원한 고귀한 직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부당한 노동력 착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신과 봉사'를 빌미로, 교회의 일꾼(담임이든 부담임이든, 전임이든, 파트타임이든, 교회 일반 사무직이든 관리직이든)의 노동력이 착취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 일이 교회에서 얼마나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작정했다'는 신앙적 결단이 곧 인권과 노동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당하고 착취당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매장지이자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땅을 매입하는 데 정당한 대가(상인이 통용하는 은 400 세겔)를 모두 지불하고 헷족속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 땅이 자신의 소유지가 됐음을 선포한다.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18). 헷 족속이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약속의 땅을 한 켠 얻으며 정당한 대가를 모두 지불하려고 했던 것은 약속의 아들을 얻는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정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아브라함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약속의 자식이니까 어렵지 않게 낳을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대가(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모든 대가였다)를 지불하고 약속의 자식을 어렵게 얻었을 뿐만이 아니라, 얻은 자식을 지켜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100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까지 하셨다. 그 모든 시련과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냈을 때 비로소 자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땅을 구입한 것은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이다. 그러나 이것은 약속의 성취일 뿐이지 완성은 아니다. 이것은 성취의 시작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새창조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요 비전인 것처럼, 사라의 매장지는 땅의 약속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요 비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 이제부터 그 비전의 완성을 향해 달음질 해야 하는 것처럼, 사라의 죽음과 매장지의 구입을 통하여 이제 시작된 땅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의 완성을 향해 달려야 하는 그들의 비전인 것이다.

 

사라의 죽음은 남편 아브라함에게도 아들 이삭에게도 큰 아픔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사라의 죽음이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비전과 삶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비통한 것이기도 하지만 축제이기도 하다. 바로 아래의 시처럼.

 

축제

 

축제다

독수리 대여섯 마리의 흥분

날갯짓

쪼는 부리

통통통 구르는 발

 

그들의 축제는

아마딜로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세상이 늘 그렇듯이

아마딜로의 죽음은

이중적이다

 

슬픔이며 기쁨이다

상실이며 기회다

곡이며 흥이다

 

피곤과 지루가 베어 있는 오후

무심한 햇살은

껍데기만 남은 독수리 한 마리가

아마딜로와 같은 운명으로

저만치 널브러져 있는 장면을

조명처럼 비추고 있다

 

저것은 또 누구의 축제 현장이었을까

(장준식 作)

 

과거에 나는 없었고, 미래에도 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는 현재를 시점으로 과거와 미래는 같을 수 없다. 내가 현재에 존재하면서 해야 할 일은 과거와 미래가 동일한 세상으로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나로 인해 과거에는 없었던 그 무엇이 미래에 존재케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기도하고, 사라처럼 헌신하고, 헷족속처럼 협력하는 이 땅의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이전의 세상과 그리스도 이후의 세상은 같지 않다. 그리스도 이전의 세상은 약속의 세상이고, 그리스도 이후의 세상은 약속 성취의 세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후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약속의 성취 안에서 약속의 완성을 향하여 미래를 열어젖히며 살아간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있어 사라 죽음 이전의 세상과 그 이후의 세상은 같지 않다.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열려진 미래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 사라의 생명을 통해 존재하게 된 약속의 자식이 사라의 죽음을 통해 존재하게 된 약속의 땅에서 이제 약속의 완성을 향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라의 죽음은 비통이 아니라, 축제로 승화된다.

 

이처럼 죽음은 단순한 존재의 소멸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악마적인 그 무엇도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믿음으로 끊임 없이 삶의 현실을 뚫고 나간다면, 어느 순간 틀림 없이 맞닥뜨리게 될 죽음은 단순한 사라짐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젖히는 축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삶의 토대를 마련하고 끊임 없이 거기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 부르는데, 바로 그것이 철저한 현실인 죽음을 순간영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삶의 정열 아니겠는가(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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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9. 06:31

이삭의 결혼

아브라함이 받은 범사의 복

창세기 24

(창세기 24: 1-67)

 

사라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한 켠을 차지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헛된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 죽음이 누군가의 인생에는 거름이 되어 새로운 삶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라가 죽기 전에 어떤 유언을 남겼겠는가? 그리고 그의 죽기 전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었겠는가? 아마도,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이 좋은 처자와 결혼하는 것 아니었겠는가. 엄마는 죽었지만, 엄마의 소망은 죽지 않는다.

 

창세기 24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1). 어떻게 보면 참 모순 된 말인 것 같다. “늙음과 복이라는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늙는 것을 부끄럽게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허상일 뿐이다. 늙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신비한 일이다. 다른 말로 늙음은 신비이다. 늙음 속에는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늙었다는 것 자체가 복이다. 복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늙겠는가. 그러므로 현대 사회는 늙음을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고대인의 영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늙음의 신비에 눈 뜰 때, 우리는 늙은 이들을 천대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서 그들을 마음으로 존경하고 우대하게 된다. 늙은이를 존경하는 일은 사회적 규범이나 의무 또는 윤리를 넘어선 신비에 대한 눈뜸이다.

 

아브라함은 범사에 복을 받았다. 이 구절을 영어로 보면 이렇다. “The Lord had blessed Abraham in every way.” 여기서 ‘every way’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이것은 어떤 길을 가든 무엇을 하든 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참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범사에(every way)’에 복 받기를 끊임 없이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길이, 무엇이 복된 길이고 복된 일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을 가고 우리 앞에 놓여진 일을 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예배해 놓으신 복된 길, 복된 일이라면 우리의 발걸음과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범사에 복을 받은 것에 대한 증거가 바로 이삭의 결혼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에 대한 고통을 이겨내고 이제는 아들 이삭의 삶을 돌본다. 이삭을 결혼시키는 것이 나이 많은 아브라함의 마지막 과제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중 땅에 대한 것은 이제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약속은 자손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아들 이삭의 삶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한다. 그 출발점이 결혼이었다. 그러므로 이삭의 결혼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이 중차대한 일을 진행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종들 중 가장 신실한 종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이삭의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맡기면서 이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음의 의식(ritual)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데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어으라”(2).

 

의식(Rituals)은 사소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구원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여 쉴새 없이 정신 없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은 일상의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런 의미 없이 반복하는 듯한 그 지루한 일상은 사실 우리 인생의 전부이다. 인생은 뭔가 특별한 일로 구성된 무엇이 아니라, 일상으로 구성된다. 일상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매우 의미 있고 특별하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우리는 일상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고 식사하고 일하고 누군가와 만나고 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그것을 지루하고 권태롭고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러한 일상생활 때문에 이렇게 생존해 살아가는 것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일상은 매우 소중한 것이고 우리의 삶의 전부이다. 그런 일상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바로 의식(Rituals)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의식을 행한다. 가령 결혼을 한다든지, 졸업을 한다든지, 생일이라든지, 그런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의식을 통하여 그날 또는 그것을 환기시킨다. 의식이 왜 특별한 날에만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의식은 특별한 날에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일상을 사소함에서 구원할 수 있다. 밥 먹기 전에, 잠 자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누군가를 만나기 전, 그 일상이 지장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짧게 의식을 행한다면 우리가 이제 맞닥뜨리게 될 일상은 사소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에서 구원된다.

 

의식을 통하여 어떤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한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이삭의 결혼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 일 수 있으나, 아브라함의 종의 입장에서 이삭의 결혼은 그저 또 하나의 지루한 일상일 수 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일상인데, 이삭의 결혼을 수행해야 하는 종의 입장에서는 이삭의 결혼이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것만큼 중차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수행해야 할 지루한 일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브라함은 종에게 이삭의 결혼을 그냥 맡기지 않고 의식을 통해서 맡긴다. 이삭의 결혼이 얼마큼 중요한 것인지 종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허벅지에 밑에 손을 넣는의식을 통해 아브라함의 종은 그가 맡은 일을 지루한 일상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정신 차리고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중차대한 일로 승화시킨다.

 

의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그의 종에게 내린 명령은 이것이다.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3-4). 종의 임무는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땅이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 하란 땅에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은 그 임무를 받아 들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서 만약 그렇다면 이삭을 그 여자가 살고 있는 땅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5).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지침을 내린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6). 여기서 ‘~하도록 하라는 히브리어 히샤메르 레카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매우 강력한 표현으로써 결코 이삭을 그리로 데라고 가지 말 것에 대한 당부이자 주의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이토록 강력하게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신앙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택을 받아 가나안 땅에 왔고,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땅을 자신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삭은 이 땅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 이삭의 결혼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 땅을 떠나서 결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삭의 아내를 찾는 일은 아브라함 집안의 개인적인 일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결정하고 진행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과연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있는가를 살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의 결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언약도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결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놓고 하나님 보고 그 결정을 인정하시든지 말든지 하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는 데 있어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 시킨다든지, 자신의 고향 땅에서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삭을 그쪽으로 보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결정하고 선택하고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 거룩한 의무가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한 질문을 뒤집어 보면 이런 것이다. 주인님, 왜 쉬운 길이 있는데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십니까? 이삭을 가나안 여인과 결혼시키면 얼마나 쉽습니까? 여자를 주인님의 고향 땅에서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보다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이렇게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십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의 종만이 갖는 의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 갖게 되는 의문이요 유혹이다.

 

아브라함은 쉬운 길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면서, 그리고 쉬운 길을 생각하는 그의 종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그의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He will send his angel before you!)”(7).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하는,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걸어 가야 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면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며 쉬운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의식(Ritual)을 통하여 이제 이삭의 결혼은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종에게나 똑같이 매우 특별한 일상, 중차대한 일로 승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될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를 만나게 된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데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2). 정말 멋진 기도다.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같이 따라 해야 하는 기도이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며 그 길을 가는 우리에겐 끊임 없이 기도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자. 의식을 통해서 이삭의 결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종이 잠시라도 딴 맘을 먹게 되면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일단 길을 떠나면 그 길 떠난 사람의 행방은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는 확인할 길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변변한 교통 수단이 없었던 그 때에, 먼 곳을 여행하며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종이 딴 맘을 품고 얼마쯤 가다가 아무 여인이나 데리고 와서 주인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한 것처럼 일을 꾸민다 해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보라. 언약 가운데서 진행된 이삭의 결혼이 얼마나 은혜 가운데 진행되는지. 아브라함의 믿음과 종의 신실함은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낸다. 아브라함이 종에게 선언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를 아브라함의 종보다 앞서 보내셨고, 종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끊임 없이 기도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선언한대로,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한대로, 종은 한 여인(리브가)을 만나게 되고, 리브가와 그녀의 가족 모두의 동의 하에 은혜롭게 리브가를 하란 땅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온다. 이 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리브가와 그의 가족의 입술에서 나오는 신앙의 고백을 들어보라.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이루어진 이삭의 결혼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삭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오랜 시간 동안 괴로운 시절을 보냈던 이삭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약속의 아내 리브가를 보고 기뻐했다. 엄마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엄마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이삭이 눈 앞에 서 있는 리브가를 더욱더 기쁘게 맞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엄마 때문이었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는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존재가 한 없이 더 귀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리브가를 맞아 아내로 삼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엄마의 죽음이 준 또 다른 선물이다. 참 눈물 나는 장면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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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8. 05:12

야곱의 하나님 경험

창세기 34

(창세기 28:10-22)

 

형 에서의 복을 가로 챈 뒤, 궁지의 몰린 야곱은 엄마 리브가의 권유대로 집을 떠나 하란 땅으로 향한다. 길을 떠나기 전, 다행히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고 가지만, 그 축복이 그의 인생에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길은 멀고 험하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뒤에 나오는 야곱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지팡이 하나만 의지한 채 집을 떠났다(32:10). 아무것도 걸치지 않을 채 엄마의 자궁을 통해 세상에 던져진 인생처럼, 그의 인생은 무(nothing)에서 시작된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마음 속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그가 길을 가다 날이 저물었을 때 어떤 집을 찾아가 유숙을 청하지 않고, 그냥 노숙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이는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모습과 유사하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1). 아무것도 없고, 혼돈과 공허만 가득한 상태, 바로 야곱의 삶과 같다. 이것을 볼 때, 인생은 혼돈과 공허만 가득한 빈 상태(nothing)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창조와 다르지 않다.

 

야곱은 어느 집에 들어가 유숙을 청하지도 못하고, 괴로운 마음에 짓눌려 그냥 거리에서 노숙한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잠을 청해보려고 주변에 있는 돌을 하나 가져다가 베개를 삼아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꿈에서 야곱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를 본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 이것을 무슨 현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

 

야곱은 지금 그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은 비참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가 꿈 꾼 대로 사닥다리가 이 땅에서 저 하늘 꼭대기에 닿았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고 버려진 것 같아도, 그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 결국 이 땅의 인생이 저 하늘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사닥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 의지할 데 없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보호 하고 계신다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들었던 음성과 같은 것이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3-14). 그리고 여기에 더 하여, 그의 고단한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까지 받는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자신의 현실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의지할 데 없는 것 같고, 온통 혼돈과 공허뿐인 것 같았던 인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이렇게 경험하고 나서 인생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그 동안 하나님이 늘 자신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했던 야곱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기 계신다. 나와는 상관 없는 곳,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계신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을 깨달은 야곱의 첫 번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그냥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이다. 귀신 나올 것 같은 등골이 오싹한 기분 나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막혀 있는 오감이 하나님을 향해 전부 열리게 되면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등골이 오싹한 기분 나쁜 두려움은 그 자리를 얼른 피하게 하지만, 거룩한 두려움은 바로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게 한다. 야곱은 거룩한 두려움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바로 그곳에서 제단을 쌓는다.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기둥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한 뒤, 그곳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저 하늘에 있거나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집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만난 곳, 하나님을 만나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한 곳, 하나님을 만나 제단을 쌓는 곳, 하나님을 만나 예배 드리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다. , 하나님은 어디 다른 데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신 분이다.

 

야곱은 거룩한 두려움 가운데 예배 드린 뒤, 하나님께 서원한다. 서원은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신비한 체험에 뒤따르는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이다. 야곱의 서원을 보면, 그는 어떤 조건 하에서 자신의 서원을 이행할 것처럼 보인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20-21).

 

그런데 이것은 어떤 조건이라기 보다, 이미 야곱에게 주어져 있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이미 야곱과 함께 하셨고, 이미 야곱이 바라는 대로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은 조건이 충족되면 성립되는 서원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서원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소원을 아뢰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서원도 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입다의 서원이 그 경우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신을 맞으러 나온 사람 중 첫 번째 나온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의 서원도 그러한 서원이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예레미야서에는 아주 특이한 서원이 나온다. 레갑 족속의 서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명하여 레갑 족속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포도주 마실 것을 권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불러 놓고 포도주를 권한다. 그런데 레갑 족속은 그 권유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35:6-9).

 

레갑 족속의 서원은 매주 자발적인 서원이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매우 고무적이고 의미심장하다. 레갑 족속의 서원은 지극히 준엄한 생활을 하면서 족장들의 간소한 생활방식의 모범을 배우려 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레갑 족속이 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문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받아들인 농경문화는 부를 축적하고 그 안에서 온갖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 가나안의 농경문화는 성적타락은 물론이요 종교적 타락을 불러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저 소비만 하는 문화였다. 과연 현재 소위 선진국들이 지향하고 누리는 소비문화와 다를 바 없다. 레갑 족속은 그러한 타락하고 소비적인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서 서원했던 것이다. 소비를 위해 무분별한 자원 낭비를 조장하는, 그래서 지구온난화 문제로 생태계의 위기를 겪고 있는 현재의 지구적 위기를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 진지하게 이행해 볼만한 서원이다. 저항은 살기 위한, 생명을 위한 몸부림이다.

 

야곱의 서원은 이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시는 은혜에 응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이다였다(21-22). 여기에서 십일조가 나오는데,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로 읽으면 곤란하다.

 

십일조는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대표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십분의 일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은 단지 소유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서 십일조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이행해야 할 의무를 다 했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고 교만이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언제든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응답하여 자기 자신도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겠다는 신앙고백이다. , 야곱은 이제부터 하나님 안에서 삶을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안과 밖은 구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빚어져 가는 거룩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 경험은 그를 구원으로 인도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원의 약속이다. 고대인들에게 땅과 자손은 자신의 생명을 길이 잇는 영생이나 다름 없었다. 땅이 그들의 어머니였고, 자손이 그들의 생명이었다. 그래서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곧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경험은 구원의 경험이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거룩한 두려움의 경험이다.

 

야곱은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을 깨달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경험한다. 그 사닥다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야곱이 꿈 속에서 하나님 경험을 통해 비로서 깨닫게 되었듯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닥다리가 우리의 현실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깨닫고 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현실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게 되고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그리스도인, a follower of Christ)가 될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뜻이 임마누엘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봄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 공허와 혼돈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본다. 그 현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영생(하나님의 생명)의 현실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은 죽음과 혼돈,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이 가득한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새창조의 사역이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며, 우리에게 무한한 생명의 나라를 안겨 주신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 이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밖에 없다. 그 서원은 다름 아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실을 경험하는 자, 하나님과의 일치되는 거룩한 두려움 속에서 영원한 생명(하나님의 영)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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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5. 05:13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 그리스도의 빛에서 보기 -

(삼상 17:41-51)

 

사무엘상 17장은 다윗의 용맹성에 대해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역사에 등장하게 된 다윗은 정신적 병 때문에 고통 받던 사울의 수금 타는 자로 왕궁에 입성하게 된다. 그때 다윗을 수금 타는 자로서 사울에게 소개한 자는 다윗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a mighty man of valor)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삼상 16:18).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의 용기와 무용은 골리앗과의 대면에서 증명된다.

 

사무엘상 14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울 왕의 장남 요나단의 기지로 인해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한 동안 블레셋과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 그런데 이때 블레셋은 골리앗이라고 하는 거인 같은 장수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협한다. 4절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골리앗의 위용은 압도적이다(삼상 17:4-7).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를 보는 것 같다. 골리앗의 위용에 주눅이 든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무도 그와 대적하기 위해 나서는 자가 없었다. 골리앗은 그런 이스라엘 군사들을 조롱했고, 이스라엘 군사의 심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급기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까지 모욕한다.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17:10).

 

싸움을 돋우는 자골리앗의 모욕을 한 창 당하고 있을 무렵,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는 엘라 골짜기에 오게 된다. 다윗의 큰 형 셋이 그 전쟁에 참전하고 있었기에 아버지 이새가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 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골리앗이 싸움을 돋우기 위해 이스라엘의 군대와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 이런 말만 주고 받았다. “(골리앗)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17:25).

 

다윗은 이 상황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골리앗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골리앗과 상대할 의사를 내비친다.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17:26).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과 상대하기 위해 나서려고 하는 이유를 상금 때문에 아니라 신앙 때문임을 밝힌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17:26).

 

다윗은 무엇보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증거이다. 마음 속 깊이 진실되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그것이 진실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린 아이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사랑하는 부모님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만히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다윗의 이런 마음은 사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사울 왕은 다윗을 불러 참전 의사를 확인한다. 그리고 다윗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한다. “(골리앗)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17:32). 다윗의 이러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래도 골리앗과 싸우는 것이 무리하고 생각한 사울 왕은 다시 한 번 묻는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니리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17:33).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이 그저 소년이 아니라, 양을 치면서 양을 잡아 먹으려 하는 사자나 곰 등을 물리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골리앗과 싸워 볼만한 무용을 갖춘 자라는 것을 호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자나 곰을 물리친 것은 단순한 용맹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셨기 때문이라고 신앙고백 한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이리다”(17:37).

 

다윗의 용맹과 신앙을 확인한 사울 왕은 다윗에게 나가서 골리앗과 싸울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과 칼을 내어준다. 그만큼 다윗에게 신뢰를 보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윗은 갑옷과 칼이 불편하다고 말한 뒤,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물매와 돌 다섯개를 손에 쥐고 출전한다.

 

골리앗은 갑옷을 걸치거나 칼을 차지 않은 상태에서 물매만 가지고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나온 다윗을 보고 기가 막혀 한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43). 그러면서 다윗을 저주한 뒤 다윗을 공격하려 한다. 그때 다윗은 담대하게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싸움은 굉장히 싱겁게 끝난다. 그토록 이스라엘 군대를 숨막히게 했던 골리앗이 다윗의 물매 돌 하나에 쓰러지고 만다. 골리앗은 이 싸움에서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는다. 앞에서 전개된 이야기에 비해서 허무하게 결말이 맺어진다. 그렇게 골리앗은 다윗의 물매 돌 하나에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을 사자나 곰보다도 못한 개 한 마리 쓰러뜨리듯이 쉽게 쓰러뜨린다. 골리앗을 앞세워 전쟁에 나섰던 블레셋은 골리앗의 죽음과 함께 사분오열되어 도망친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것이 된다.

 

우리는 통쾌해 보이는 이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가? 골리앗과 같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두 물리쳐야 한다? 골리앗과 같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는 가만히 놔두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까, 그 분을 믿기만 하면 우리 삶에 있는 전쟁은 모두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무조건 이긴다?

 

위에서 열거한 것들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교훈일 수 있겠으나, 나는 그것을 넘어서 위의 열거된 교훈의 위험성을 말하고자 한다. 구약성경을 읽는 데 있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에서 읽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다간 성경이 오히려 폭력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보듯이, 그리스도는 폭력을 끝내신 분이지 폭력을 조장하신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조장되고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한 번 보자. 거기서 허용되는 폭력의 메커니즘은 바로 이 문구에서 온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17:26). 여기서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은 할례 받지 않은이라고 존재를 상대화시킨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타자성(otherness)’이라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폭력은 몇 가지 절차를 걸쳐서 이루어지는데, 가장 먼저 행해지는 것이 바로 상대방을 타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할례 받은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할례를 않았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린다.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려면 일단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래야 폭력이 행사되더라도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폭력행사에 대한 거부감을 없앨 수 있다. 지금 다윗이 골리앗을 그야말로 취급하며 한 방의 폭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골리앗을 자신들의 울타리 밖에 있는 할례 받지 않은사람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읽혀지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은 유대인의 고유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고유한 역사의식과 하나님 인식에 대한 이해를 갖지 않고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독교 역사는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의 빛에서, 즉 그리스도의 빛에서 봐야 한다고 늘 강조해 왔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읽으면, 승리는 폭력에 의해서 쟁취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비록 다윗이 골리앗보다 외적으로 보기에 왜소했지만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는 논리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긴다는 것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기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폭력의 극대화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게 하시지는 않는다. 폭력을 통한 승리는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한 것은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의 폭력적인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철저하게 폭력에 저항하고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승리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밖으로 소외되는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안에 있는형제자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자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여기서 더 나아가, ‘죄인까지도 밖으로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때문이다(5:8).

 

우리는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너무도 쉽게 그들과 우리를 구별 짓는다.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쫓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한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그 어떠한 폭력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의 띠로 꼭 묶어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품고 있어야 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그저 다윗의 용기와 무용을 보여주기 위한 에피소드 정도로만 읽은 것이 좋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군으로서 유대인들이 다윗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다윗의 폭력 행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다윗이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다. 그리스도인은 폭력을 조장하는 자들이 아니라, 폭력에 저항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삶을 언제나 비추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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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7. 23:03

신앙이란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12:7-10)

 

빌 포터 동영상 상영 --> https://www.youtube.com/watch?v=Sk9RR3JajC4

 

신앙은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다각도에서 살펴봐야 한다. 오늘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은 이런 것이다라고 신앙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신앙은 어떤 실체로서 우리가 정복할 수 있는 어떤 것, 손에 넣을 수 있는 어떤 것의 개념이라기 보다, 신앙은 길(Journey)이다. 신앙은 여정이다. 일평생 한 걸음 한 걸은, 꾸역꾸역 걸어야 하는 인생의 여정이다.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들어보셨는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순례길(Camino de Santiago) 또는 산티아고 순례길, 성 야고보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성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 성인으로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순례길이 생겼다고 한다. (출처: 위키디피아)

 

 

 

 

여러 갈래길 가운데 가장 알려져 있고 흔히 거치는 길로 '프랑스 길'이 있는데 절대 만만한 코스가 아니다. 프랑스 남부국경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800km 여정이다. 하루에 26여 킬로미터씩 한 달을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다. 마일로 고치면, 500마일, 하루에 16마일 정도를 한 달 동안 매일 걸어야 하는 거리다. 16마일이면, 5시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다.

 

신앙이란 이런 순례길을 걷는 것처럼, 인생의 순례길을 걷는 것과 같다. 신앙이 이렇게 순례길을 걷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은 짧은 순간에 얻게 되는 쾌락이나 어떤 소유물이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여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목적지가 나올 때까지 그 길을 그냥 걸어가는 것처럼, 신앙이란 삶의 여정을 그냥 그렇게 걸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을 걸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오는 사람들은 대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온다. 그들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현재 인생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인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인생을 값지게, 의미 있게 사는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늘 하게 된다.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 이야기로 되돌아 가 보자. 바울도 인생을 값지고 의미 있게 살고 싶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그때 그는 그의 삶을 그가 생각하는 나름의 의미 있는 곳에 헌신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거나 처형하는 일이었다. 그것에 그는 열성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의미 있는 일’, 즉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처단하려고 의기양양하게 가던 중, ‘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버리고, 헬라식(이방인) 이름인 바울로 불리며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걷게 된다.

 

사울이었을 때 그는 그 나름대로 신앙의 길을 걸으며 의미 있게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정죄하고 감옥에 가두거나 그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 우리는 모두 어떠한 길을 걷고 있지만, 그 길이 다 참된 인생의 길은 아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바울로 바뀌어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걷게 된 신앙의 길은 이전의 길과 다른 길, 즉 생명을 살리는 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길, 삶의 여정을 걸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신앙의 길, 신앙의 여정, 삶의 여정에서는 생명의 일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생명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본문은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가시라는 것이 선척적으로 그가 몸에 지니고 있던 장애는 아니었다. 그는 먼 거리를 걸어서 전도다니던 전도 여행자였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그의 육체는 많이 지쳤고, 그리고 여러 지역의 풍토병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바울이 지니고 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에 대한 학문적 해답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그가 다닌 지역을 고려해서 낸 결과인데, 그것은 만성 말라리아의 한 종류의 병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바울의 복음, 마커스 보그 & 도미닉 크로산)

 

이 만성 말라리아는 계속해서 재발되는 병이었다. 그가 이렇게 만성 말라리아 때문에 고생한 이유는 그가 계속해서 이방지역을 순회했기 때문이다. 요즘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바이러스가 에볼라 바이러스인데, 그런 것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신앙의 여정을 걸으면서 이렇게 힘든 일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의 가시가, 그의 약함이 그의 신앙의 여정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 할 때 한 순간에 얻는 그 무엇(구원) 정도로만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신앙을 인생에서 만나는 어떠한 요행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앙은 신적인 것을 통해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가 아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존재의 고양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본 <빌 포터>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빌 포터는 뇌성마비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행동과 말은 어눌했다. 만약 빌 포터가 신앙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를 가졌다면, 그는 우선 뇌성마비를 고쳐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고쳐달라고,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가시에 막혀버리고 마는 데 있다.

 

빌 포터가 만약 신앙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를 가졌다면 그는 그의 가시를 통해 누군가에게 빌어 먹고 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빌 포터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인간적인 것, 뇌성마비의 가시를 뛰어 넘었다. 그는 자신의 가시 때문에 주저 앉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새로운 삶을 창조했다. 그는 도전했고, 노력했고, 결국 자신의 가시를 뛰어 넘어 값지고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어 갔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 가는 창조사역이다. 신앙은 이처럼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존재의 고양이다.

 

신앙은 그래서 또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신앙은 창조사역이다. 신앙이란 내 삶에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어떤 의미 있고 값진 일, 그리고 생명의 일이 생성되는 창조사역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의 여정, 그의 삶의 여정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을 축출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귀신 들린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쫓겨나 무덤 사이에서 삶을 살았다. 공동체에서 쫓겨나 무덤에서 거주했던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을 지 한 번 상상해 보라. 그는 자신이 귀신 들린 존재라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늘 괴로웠을 것이고, 사람들은 귀신 들린 그 사람을 늘 경계하며 그와 어떠한 교제도 나누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같이 죽고 싶었을 것이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5).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돌보지 않고 늘 내쫓기기만 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의 몸에 들어 있는 군대 귀신을 쫓아내 주신다. 그리고 그를 다시 공동체 안으로 돌려 보내주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의 신앙의 여정을 통해서 이루신 창조의 사역이다.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누구든지,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는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될 거라는 생각 밖에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창조 사역이다.

 

성경은 온통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범죄의 덫에 결렸던 사람들, 즉 세리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 창녀처럼 돈을 벌거나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망가뜨린 사람들, 우리가 대부분 그러하듯 세상을 조금 더 얻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려(팔아버리려) 하는 사람들이 용서 받고 변화되었다”(배제와 포용, 111). 그냥 그렇게 살다가, 손가락질 받으며, 또는 죄책감에 싸여 인생을 자포자기하며 살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통해서 일어나는 창조 사역이다.

 

여러분은 지금 길을 걷고 있는가?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신적인 것을 통해 나의 인간적인 것을 메워보겠다는 얄팍한 신앙인가? 요행을 바라고 있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의 육체의 가시를, 나의 부족한 것을, 나의 인간적인 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그냥 정당화하면서 요행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묵상해야 한다. 신앙은 한 순간에 이루는 그 무엇이 아니라, 길고 지난한, 그러나 걸어야만 하는 여정이다. 길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의 길, 그 여정을 걷겠다고 용감하게 나선 것은 그 여정을 통해서 나의 인간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려지는 존재의 고양을 이루겠다는 결단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의 인생, 존재의 고양을 창조해 낸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신앙은 신적인 것을 통해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가 아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존재의 고양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구어 가는 창조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언제 우리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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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4. 05:02

은혜는 은혜다

창세기 33

(창세기 28:1-9)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에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26:34-35).

 

이삭과 리브가는 에서가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한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축복 쟁탈전을 한 바탕 치르고 야곱에 대한 에서의 복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리브가는 이삭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야곱을 피신시킨다.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I am tired of living because of the daughters of Heth; if Jacob takes a wife from the daughters of Heth, like these, from the daughters of the land, what good will my life be to me?”(27:46).

 

리브가는 야곱을 형 에서의 복수로부터 피신시키기 위해 다시 한 번 속임수를 쓴다. 물론 리브가가 며느리들 때문에 삶에 낙이 없다고 말한 것이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 삼아 야곱을 멀리 떠나가게 한 것은 속임수였다. 야곱을 에서에게서 멀리 떨어뜨리려는 술수였다. 그런데 이삭도 리브가처럼 며느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리브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야곱을 불러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외조부와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에 가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당부하며 그를 떠나 보낸다.

 

이삭은 작은 아들 야곱을 떠나 보내면서 축복을 베푼다. 그런데 그 축복 내용을 보면 원래 야곱이 받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속임수에 의해서 야곱이 이삭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원래 에서를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보편적인 현실의 복이 담겨 있는 반면에, 이제 고향을 떠나면서 야곱이 받는 복은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 즉 후손과 땅의 소유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복이 담겨 있다. 사실 야곱과 리브가가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 복은 바로 이 복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특별한 복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목해서 봐야 할 장면이다. 우리는 복 받기 원하지만 사실상 우리가 관심을 갖는 복은 하늘의 복이 아니라 이 땅의 복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특별한 복, 하늘 나라의 복을 사모하기 보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보편적인 현실의 복을 추구한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삶을 자꾸 어렵게 만든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야곱은 선택 받은 자녀였다. 그는 형 에서처럼 이 땅에서의 보편적인 현실의 복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거였다. 선택 받은 야곱이 추구해야 하는 복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특별한 복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야곱과 리브가는 엉뚱한 것을 탐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가족 관계가 어그러지고,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신학적 관점과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은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다. 그리고 기독론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제요, 새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하늘의 복은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실한 자의식이 부족하다 보니,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야곱과 리브가가 추구했던 것처럼 에서의 복, 즉 이 땅에서의 보편적인 현실의 복만 가로채려 드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제요, 새 이스라엘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사모해야 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5장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복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마태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3-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특별히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평소에 추구하는 복과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복 있는 자들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야곱과 리브가처럼 헛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다름 없다. 우리는 에서에게 내려질 것을 어떻게 해서라고 빼앗으려 하는 욕심쟁이처럼 보일 때가 많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현실의 복은 그들이 그냥 받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받는 보편적인 현실의 복은 굳이 빌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더해 주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야곱은 이제서야 자신이 빌고 받아야 할 복이 무엇인지 알았고,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었던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4).

 

에서는 저만치 서서 아버지 이삭이 동생 야곱에게 축복하는 장면을 모두 지켜 보았다. 에서는 그 장면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저렇게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여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참으로 처량하고 애처로운 장면이다. 살면서 이런 경험과 똑 같은 감정을 느낀 분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인정 받고 싶어 하는 욕구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인정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형제들로부터 비교되기 시작하면서 받는 인정에 대한 욕구 불만이다.

 

요즘에는 자식을 많이 낳지 않는 세대고, 형제와 비교되며 자라는 것이 드물기 때문에 가정에서 이러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현상이 더 큰 문제를 낳는 것 같기도 하다. 형제와 비교되지는 않지만, 남의 자녀와 비교 되기 때문이다. 형제와 비교되면 물로 그것도 마음 아픈 상처로 남지만 그래도 그것이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물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발전되는 경우도 있다.) 남의 자녀와 비교되는 것은 자녀에게도 곤욕이고 부모에게도 곤욕이다. 남에게 뒤지지 않는 자녀를 만들려고부모는 자녀를 닦달하고 자녀는 그 닦달에 인생이 피곤해 진다. 자녀 또한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욕심에 부모를 닦달한다. 친구가 좋은 옷을 입으면 자신도 입어야 하고, 친구가 비싼 학원에 다니면 자신도 다녀야 하고, 친구가 어학 연수를 하면 자신도 어학 연수를 해야 한다. 그 비용을 모두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부모는 인생이 없다. 자녀들도 인생이 없다. 모두 인생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에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축복 받지 못한 원인을 자신의 결혼에서 찾았다. 에서에게는 그 말만 들리고 그것만 보였다. 물론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할 때 에서가 봤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어야 한다. 그런데 에서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에서의 한계였다. 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만 봤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을 보자.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6). 그리고 자신이 본 것에 근거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 보았을 때 이것이 보였다.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8).

 

이처럼 에서가 본 것은 매우 육적인 것이었다. 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보지 못했다. 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이 야곱에게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에서는 자신이 본 것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한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9). 에서는 부모님의 친척과 결혼하는 것이 부모님의 호의를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로운 장면이다.

 

이스마엘이 누구인가? 물론 이스마엘은 아버지 이삭의 형이었다. , 자신의 삼촌이었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신학적 측면에서, 이스마엘은 선택 받은 자손이 아니었다. 그런데, 에서는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그저 부모님의 친척과 결혼하기만 하면 부모님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스마엘의 후손이며 자신의 동족인 마할랏과 결혼한다.

 

은혜는 은혜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이해 가고, 그것으로 인해 헛된 욕망을 저버릴 수 있다. 야곱이나 에서나 모두 이 점에서는 부족했다. 야곱도 자신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헛된 방법으로 축복을 차지하려 했다. 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 야곱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분노를 살 것도, 부러움을 살 것도, 그리고 억울해 할 것도 아니다.

 

은혜는 그저 은혜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일 뿐이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그저 감사하면 되고,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그것도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절망하거나 희망을 잃을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추구해야 할 복이 무엇인지 산상수훈의 말씀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야곱처럼 에서처럼 이방인이 구하는 것들만 구하게 된다.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고, 복을 쟁취하려 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불필요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은혜는 은혜다. 은혜를 은혜로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현실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복을 사모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에게 들었거든, 여러분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3-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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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