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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7. 23:03

신앙이란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12:7-10)

 

빌 포터 동영상 상영 --> https://www.youtube.com/watch?v=Sk9RR3JajC4

 

신앙은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다각도에서 살펴봐야 한다. 오늘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은 이런 것이다라고 신앙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신앙은 어떤 실체로서 우리가 정복할 수 있는 어떤 것, 손에 넣을 수 있는 어떤 것의 개념이라기 보다, 신앙은 길(Journey)이다. 신앙은 여정이다. 일평생 한 걸음 한 걸은, 꾸역꾸역 걸어야 하는 인생의 여정이다.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들어보셨는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순례길(Camino de Santiago) 또는 산티아고 순례길, 성 야고보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성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 성인으로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순례길이 생겼다고 한다. (출처: 위키디피아)

 

 

 

 

여러 갈래길 가운데 가장 알려져 있고 흔히 거치는 길로 '프랑스 길'이 있는데 절대 만만한 코스가 아니다. 프랑스 남부국경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800km 여정이다. 하루에 26여 킬로미터씩 한 달을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다. 마일로 고치면, 500마일, 하루에 16마일 정도를 한 달 동안 매일 걸어야 하는 거리다. 16마일이면, 5시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다.

 

신앙이란 이런 순례길을 걷는 것처럼, 인생의 순례길을 걷는 것과 같다. 신앙이 이렇게 순례길을 걷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은 짧은 순간에 얻게 되는 쾌락이나 어떤 소유물이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여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목적지가 나올 때까지 그 길을 그냥 걸어가는 것처럼, 신앙이란 삶의 여정을 그냥 그렇게 걸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을 걸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오는 사람들은 대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온다. 그들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현재 인생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인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인생을 값지게, 의미 있게 사는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늘 하게 된다.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 이야기로 되돌아 가 보자. 바울도 인생을 값지고 의미 있게 살고 싶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그때 그는 그의 삶을 그가 생각하는 나름의 의미 있는 곳에 헌신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거나 처형하는 일이었다. 그것에 그는 열성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의미 있는 일’, 즉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처단하려고 의기양양하게 가던 중, ‘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버리고, 헬라식(이방인) 이름인 바울로 불리며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걷게 된다.

 

사울이었을 때 그는 그 나름대로 신앙의 길을 걸으며 의미 있게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정죄하고 감옥에 가두거나 그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 우리는 모두 어떠한 길을 걷고 있지만, 그 길이 다 참된 인생의 길은 아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바울로 바뀌어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걷게 된 신앙의 길은 이전의 길과 다른 길, 즉 생명을 살리는 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길, 삶의 여정을 걸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신앙의 길, 신앙의 여정, 삶의 여정에서는 생명의 일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생명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본문은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가시라는 것이 선척적으로 그가 몸에 지니고 있던 장애는 아니었다. 그는 먼 거리를 걸어서 전도다니던 전도 여행자였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그의 육체는 많이 지쳤고, 그리고 여러 지역의 풍토병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바울이 지니고 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에 대한 학문적 해답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그가 다닌 지역을 고려해서 낸 결과인데, 그것은 만성 말라리아의 한 종류의 병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바울의 복음, 마커스 보그 & 도미닉 크로산)

 

이 만성 말라리아는 계속해서 재발되는 병이었다. 그가 이렇게 만성 말라리아 때문에 고생한 이유는 그가 계속해서 이방지역을 순회했기 때문이다. 요즘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바이러스가 에볼라 바이러스인데, 그런 것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신앙의 여정을 걸으면서 이렇게 힘든 일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의 가시가, 그의 약함이 그의 신앙의 여정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 할 때 한 순간에 얻는 그 무엇(구원) 정도로만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신앙을 인생에서 만나는 어떠한 요행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앙은 신적인 것을 통해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가 아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존재의 고양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본 <빌 포터>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빌 포터는 뇌성마비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행동과 말은 어눌했다. 만약 빌 포터가 신앙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를 가졌다면, 그는 우선 뇌성마비를 고쳐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고쳐달라고,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가시에 막혀버리고 마는 데 있다.

 

빌 포터가 만약 신앙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를 가졌다면 그는 그의 가시를 통해 누군가에게 빌어 먹고 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빌 포터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인간적인 것, 뇌성마비의 가시를 뛰어 넘었다. 그는 자신의 가시 때문에 주저 앉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새로운 삶을 창조했다. 그는 도전했고, 노력했고, 결국 자신의 가시를 뛰어 넘어 값지고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어 갔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 가는 창조사역이다. 신앙은 이처럼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존재의 고양이다.

 

신앙은 그래서 또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신앙은 창조사역이다. 신앙이란 내 삶에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어떤 의미 있고 값진 일, 그리고 생명의 일이 생성되는 창조사역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의 여정, 그의 삶의 여정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을 축출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귀신 들린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쫓겨나 무덤 사이에서 삶을 살았다. 공동체에서 쫓겨나 무덤에서 거주했던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을 지 한 번 상상해 보라. 그는 자신이 귀신 들린 존재라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늘 괴로웠을 것이고, 사람들은 귀신 들린 그 사람을 늘 경계하며 그와 어떠한 교제도 나누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같이 죽고 싶었을 것이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5).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돌보지 않고 늘 내쫓기기만 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의 몸에 들어 있는 군대 귀신을 쫓아내 주신다. 그리고 그를 다시 공동체 안으로 돌려 보내주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의 신앙의 여정을 통해서 이루신 창조의 사역이다.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누구든지,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는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될 거라는 생각 밖에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창조 사역이다.

 

성경은 온통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범죄의 덫에 결렸던 사람들, 즉 세리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 창녀처럼 돈을 벌거나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망가뜨린 사람들, 우리가 대부분 그러하듯 세상을 조금 더 얻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려(팔아버리려) 하는 사람들이 용서 받고 변화되었다”(배제와 포용, 111). 그냥 그렇게 살다가, 손가락질 받으며, 또는 죄책감에 싸여 인생을 자포자기하며 살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통해서 일어나는 창조 사역이다.

 

여러분은 지금 길을 걷고 있는가?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신적인 것을 통해 나의 인간적인 것을 메워보겠다는 얄팍한 신앙인가? 요행을 바라고 있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의 육체의 가시를, 나의 부족한 것을, 나의 인간적인 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그냥 정당화하면서 요행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묵상해야 한다. 신앙은 한 순간에 이루는 그 무엇이 아니라, 길고 지난한, 그러나 걸어야만 하는 여정이다. 길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의 길, 그 여정을 걷겠다고 용감하게 나선 것은 그 여정을 통해서 나의 인간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려지는 존재의 고양을 이루겠다는 결단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의 인생, 존재의 고양을 창조해 낸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신앙은 신적인 것을 통해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가 아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존재의 고양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구어 가는 창조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언제 우리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자.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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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