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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5. 23:12

계시: 해와 율법과 그리스도

(시편 19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 “계시(Revelation)”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까?

 

시인은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토라)이다.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하는 인식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게는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3). 말을 해야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존재를 가슴 속 깊이 느끼듯이, 피조물은 조물주의 사랑을 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시인이 주목하는 피조물은 해이다. 해를 통해서 시인은 자연의 질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시인은 아침이 되어 해 뜨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해를 위해 하늘에 장막(텐트, )을 지어 주셔서 밤새껏 해가 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보금자리에서 밤새껏 쉬다가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전해주는가! 아침에 떠오른 해는 저녁이 돼서 질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나누어 준다. 그 열기, 그 사랑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6)

 

자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것을 노래한 시를 소개한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한 박두진의 <>라는 시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평론가들은 박두진의 시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일종의 '메시아'의 상징이며,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매개적 존재로 표현된다.” 자연이 인간에게 일종의 메시아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숨결 때문이다. 물론 자연 자체는 (메시아)’이 아니다. 자연 자체를 신으로 보는 사상을 범신론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이 바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연은 하나님의 숨결을 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이것을 일컬어 범재신론이라고 한다. 범재신론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담아낸 신론으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잘 설명해 준다.

 

시편 기자처럼, 또는 박두진 시인처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는 일은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너머의 것을 형상화시킬 줄 아는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우리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시인이다. 만약 이 찬송가를 사랑한다면 이미 시인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찬송가 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시인은 다음으로 율법에 주목한다. 시인에게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할 어떤 규율, 법이 아니다. 율법은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율법 자체에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계시되고 있는, 율법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베풀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참된 지혜를 주며, 참 기쁨과 의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래서 시인은 율법을 사모한다. 그것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더러, 율법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바울 서신에 보면(로마서, 갈라디아서), 율법과 복음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기독교인들은 복음은 좋은 것이고 율법은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은 복음으로 받는 것이지 율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을 잘못 이해한 탓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율법은 지식(우리가 이것을 해서는 안된다)이라는 힘을 주지만, 그 지식은 함께 본래적으로 복종할 힘(우리는 이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마커스보그, 첫 번째 바울의 복음, 235). 반면에 신앙은 안에서 그 법에 따를 힘을 불러일으킨다”(같은 책 235). ,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우선성이지 율법의 폐지가 아니다. 율법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 배제된 상태로 인간의 삶에 주어진다면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숨결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경우를 보자. 2012년 대한민국의 보성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고,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명, ‘보성 삼남매 사건이다. 한 교회의 목사가 자신의 자녀 셋을 죽인 사건이다. 그가 자신의 자녀 셋을 죽인 이유가 어처구니없다. 다음의성경구절이 그들의 행동을 부추겼단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기 아니하리라”(잠언 24:13).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Sheol 죽음)에서 구원하리라”(잠언 24:14).

 

죽은 삼남매 중 어느 한 명이 죽기 전 이러한 일기를 남겼다. “2012 1 20일 목요일 TV를 보았다 재미있다 런닝맨이 재밌었다.” 런닝맨을 재미있게 본 아이들이성경에 의해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었다. 숨지기 열흘 전부터 축귀 의식이 아이들에게 행해졌고, 금식 명령이 내려졌다. 결국 몸이 허약해진 아이들은허리띠와 파리채로 채벌을 당하다 쇼크사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을에서 구원하기 위한 행위였다고 부모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성경이 런닝맨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한 순간이다. 런닝맨은 아이들에게 재미라도 줬다. 그러나 이 경우, 성경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죽음을 주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이것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숨결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율법은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우리가 경전으로 생각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성경은 복음의 율법이다. ,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기독교의 여러 종파 중, 특별히 개신교는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을 만큼 성경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 영혼이 소생되고, 지혜롭고, 마음이 기쁘고, 눈이 밝아 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성경 공부를 그렇게도 많이 하고 설교 말씀을 그렇게도 많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영혼이 소생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고, 마음이 기쁘지 못하고 눈이 오히려 어두워졌다면, 그래서 스스로 괴로움을 느끼고 여전히 남을 정죄하고, 악한 일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면, 그는 신앙이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과 율법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시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면 무슨 고백을 했을까? 이런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드러남은 모두 여기에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이 아니라, 궁극적인 계시, 즉 하나님 스스로를 세상에 보이신 절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자연도 율법도 그 빛을 잃고 우리의 모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 그 자체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땅에서 활동하실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신 빵을 얻어 먹기 위하여 예수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하늘에 내려온 산 떡이라는 비유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에게서 을 얻어 먹을 수 없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예수를 떠나간다. 그 모습을 모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을 다가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은 배타적인 말씀이 아니라, 매우 포괄적이고 긍정적인 말씀이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이 말은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배타적인 진술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생명이시다라고 하는 우주적인 선포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 생명, 즉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가르침), 죽음(십자가)와 부활에 관심을 집중하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생명을 건다. 그것이 곧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1장에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짧은 비유라서 그것을 그대로 옮겨 본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28-32).

 

우리는 어떻게 자연과 율법과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이처럼, 신앙 있는 자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워하며 찬양하는 자가 신앙 있는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율법(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소생되고 지혜롭게 되고 마음이 기쁘고 눈이 밝아진 자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열매를 보면 그가 신앙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12장이 증거하는 메시지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12:33-37)

 

(자연)와 율법(성경)과 그리스도에 드러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정말로 만났는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관심이 있는가? 거기에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무엇보다 궁극적 생명 사건이고,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시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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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