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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16. 05:51

보라, 아들이다!

(레아의 슬픔과 사랑)

창세기 36

(창세기 29:31-35)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가사 전문)

 

교회에서 애창되고 있는 찬양곡이다. 우리는 이 찬양을 함께 부르면서 서로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상대방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가 교회에서 가장 애창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만큼 서로 사랑하면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한다. 잘 지켜지는 것은 강조할 필요 없다.

 

초등학교 시절(1980년대) 미술 시간에 가장 많이 그렸던 그림은 두 가지였다. 반공 포스터와 불조심 포스터. 반공 포스터는 군사독재 시절, 그리고 북한과의 이념 대립에 국가의 에너지를 전부 쏟고 있었던 시절, 반공에 대한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불조심 포스터를 그때 그렇게도 그려댔던 이유는 그만큼 불사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산불만 해도 수 차례 된다. 산불 진화 장비가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라 산불이 한 번 나면 엄청난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잘 지켜지지 않았던 불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생겨난 가장 유명한 불조심 포스터 문구는 바로 이것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잘 지켜지는 것은 강조할 필요 없다. 문제는 잘 지켜지는 것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언제나 문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것에서 발생한다. 결혼생활의 기본은 사랑이다. 그런데, 야곱의 결혼 생활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야곱의 첫 번째 부인인 레아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었다. 이야기는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한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31).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사랑 받지 못했다에 대한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미워하다이다. ,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미워했다. ‘미워하다사랑하지 않는다보다 더 적극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매우 원초적이다. 또 한 가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은 욕망만큼 사랑하고 싶은 욕망도 매우 원초적이다. 사랑의 욕구가 원초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라는 뜻이다. 생명이 존속하려면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은 사랑과 영양분과 휴식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담고 있는 매우 원초적인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1:26-28), 사람(아담과 하와)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다.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사랑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원초적으로 말하자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말은 성관계(Sex)’에 대한 말이다. ‘성관계는 사랑의 다른 말이다. 많은 경우 성()을 타락한 형태로 경험해서 그렇지, 성은 생명에 담긴 매우 원초적인 속성이다. 사랑과 성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것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구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이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성관계를 통해서 유지된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성관계를 많이 가지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 말과 똑 같은 것이다. “많이 사랑하라.” 그러므로 생명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통해서 유지된다. 이것은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매우 원초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지면의 모든 식물과 짐승들을 주시면서 그것들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신다(1:29-30). 생명은 존속하려면 영양분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며 그것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많이 먹으라는 표현이다. 먹고 싶은 욕망은 생명 보존을 위해서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휴식)하신다. 당신의 안식은 모든 피조물에게 전가되어, 안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로 생명 안에 원초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휴식은 옵션이 아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자본주의 산업 사회가 만들어낸 허탄한 신화이다. 쉴 새 없이 기계처럼 자기 몸을 굴려대는습성이 사회에 자리 잡은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적어도 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밤에 일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명의 발달로 비교적 환하게 밤을 대하는 현대인들은 옛날의 밤을 무섭게 덮었던 어둠을 이해하지 못한다. 옛날 밤에 가장 밝은 것은 대보름 달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밤이 되면 사람들은 무조건 쉬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휴식은 옵션이 아니다. 휴식은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속성이다. 사람은 휴식하지 못하면 죽는다. 일 하는 것만 너무 강조하는 사회이다 보니 휴식하는 것에 별로 신경 못쓰는 일이 많은데, 휴식은 게으른 자의 미련함이나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니라 생명의 원초적 욕망이다. 그러므로 휴식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모두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굶고, 쉬지 못하는 일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형상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뭉개지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없다. 거기에는 거룩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거기에 거룩함이 묻어난다.

 

레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하고 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남편 야곱에게 사랑 받고 싶은 레아의 원초적인 욕구는 처절하다. 간절하고 처절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 그리고 레아는 아들을 낳는다.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레아는 아들을 낳은 뒤,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짓는다. ‘르우벤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 슬픔 가운데서 외쳐 나온 레아의 기쁨이었다. 또한 이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위로였다. 그리고 이것은 남편에게 사랑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레아의 소망이었다. 이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는 기대였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32절 후반부).

 

그런데 레아의 소망과 기대와는 달리 레아는 여전히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짓는다. ‘시므온듣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샤마에 명사형 접미사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시므온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비록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태를 열어 또 다른 아들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베어 있는 이름이다. 그러나 여전히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레아는 남편과 진정한 연합을 원했다. 그 동안 레아는 남편과 성관계를 갖긴 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연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의 이름을 레위라고 짓는다. ‘레위의 뜻은 연합된 자이다. 레아가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을 통해서 우리는 레아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34).

 

세 번의 아들을 출산하는 과정을 통해 레아의 신앙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네 번째 출산이다. 레아는 임신해서 네 번째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그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유다찬양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앞의 세 번의 출산과는 달리 더 이상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이다. 만약 그렇다면, 네 번째 아들에게 레아는 유다(찬양하다)’라는 이름보다는 '아자브(떠나다, 포기하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레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것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욕망하던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만족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큰 사랑, 절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작은 사랑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고 받는 사랑은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마음에 깊은 만족을 주는 큰 사랑, 또는 절대 사랑은 되지 못한다. 사랑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주고 받는 인간의 죄성(罪性)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큰 사랑, 절대 사랑을 주고 받게 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기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랑의 원초적 속성뿐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충만하게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할 피조물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가 또한 보여준다.

 

사람은 사랑 없이 못산다. 그래서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완전한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한 자기애, 즉 에로스의 사랑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모두 자기의 욕망에만 근거한 에로스 사랑뿐이다. 그 사랑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생명을 헤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아가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작은 사랑(에로스 사랑) 때문에 실망하여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생명을 위해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절실하다.

 

레아는 세 번의 출산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남편 야곱의 사랑보다 더 크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렇다고 물론 레아에게 남편 야곱의 사랑이 필요 없어졌다거나 남편을 무시하게 됐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더 큰 사랑, 절대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레아는 작은 사랑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레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 그 사랑 안에서 계속해서 복을 받는다. 이후 레아는 두 명의 자녀를 더 출산하고, 자신의 몸종을 통해 두 명의 자녀를 또한 출산한다. 몸종의 자녀까지 합해 총 8명의 자녀를 자신의 발 아래 둔다. 그 뿐만 아니라, 야곱의 자녀들 가운데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레위(레위지파, 제사장지파)와 유다(왕의지파, 그리스도의 조상)는 다름 아닌 레아의 태에서 나온 아들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그만큼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된다. 충만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사랑 하고 사랑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거룩해진다. 그리고 그 생명의 원초적인 욕망인 사랑을 충만하게 나눌 수 있는 길은 큰 사랑이시고 절대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그래서 레아의 이 외침, “보라, 아들이다!(르우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외침이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의 입술에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유다)”를 넣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참 고맙다. 사랑 받지 못하여 슬프지 않기를, 사랑 하지 못하여 슬프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을 때

참 많이 노력해야 했습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울어야 했습니다.

남편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

내가

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화를 내야 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

내가

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참아야 했습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윤리 때문에 ......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을 하니

사랑하는 일이 쉬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기쁨이 됩니다.

사랑하는 일이 감사가 됩니다.

 

(민혜숙의 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전문)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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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