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4.11.30 낙엽 1
  2. 2014.11.30 너 자신을 알라 2
  3. 2014.11.15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4
  4. 2014.11.10 사랑하다 죽으라 1
  5. 2014.11.08 가을 풍경 1
  6. 2014.11.06 슬픔 1
  7. 2014.11.03 날개 2
  8. 2014.11.02 사랑의 공식 1
시(詩)2014. 11. 30. 06:08

낙엽

 

낙엽이 굴러다닌다.

굴러다니는데 아무것도 필요 없다.

바람만 불어주면 된다.

낙엽은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바람은 '그냥' 분다.

그냥 부는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낙엽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낙엽은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에 몸을 맡길 뿐이다.

낙엽이 굴러다닌다.

바람이 불면 구르고

바람이 안 불면 멈추어 선다.

낙엽은 그렇게 굴러다니다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바람은 낙엽의 환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낙엽은 바람으로 환생하여

낙엽을 자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만남은

저렇게도 서걱대는 것이었구나.

지금

내 눈 앞에서 낙엽을 굴려대는 바람,

어떤 시절을 살던 낙엽이었을까.

낙엽이 굴러다닌다.

바람이 분다.

서걱대는 것이 꼭,

에덴동산의 열매를

한 입,

베어먹을 때 나는 소리 같다.

,

아스라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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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너 자신을 알라

 

교계의 상황을 보면, 개혁의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이런 저런 활동들을 통해 개혁을 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활동은 기득권자들을 향한 저항이 대부분이다. 참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들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들도 결국 새로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개혁의 대상을 향해 외치는 개혁의 주체들은 분명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해 간다.

 

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에서 진정한 개혁이란, 내 생각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흙탕물을 휘저으면 흙탕물은 계속 탁한 상태만 지속될 뿐이다. 흙탕물은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최고다. 그러면 어느 정도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앙금이 가라앉고 투명한 물을 볼 수 있게 된다.

 

자연을 고치겠다고 휘저으면 자연은 더 망가지고 만다. 자연을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사람 손이 타면, 무엇이든 망가지고 마니까.

 

교회 개혁을 위해 뭔가 해보려는 시도들은 참 칭찬할만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그 시도들이 또다른 흙탕물을 생산해 내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꼭 필요한 것 같다.

 

, 그런데, 무엇인가를 가만히 냅두기에는 인생이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를 계속 하려고 드는 것 같다. 결국, 성자란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을 잘 견디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그냥 잠잠히 자기 자신이나 잘 달래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개혁이 아닐까?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주체는 늘 교집합이다. 누가 누구를 개혁하랴.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이 문구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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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대화는 대등한 위치에 섰을 때만 가능하다. 관계가 대등하지 못하면 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만이 발생한다.

 

종교가 과학과 대화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종교와 과학이 대등한 위치에 섰다는 뜻이다. 그 동안 종교는 다른 분야의 학문을 그저 '시녀'로만 보아 왔다. 철학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래서 중세신학자들은 이런 말까지 했다. '철학은 종교(신학)의 시녀이다."

 

물론, 종교가 과학을 자신과 대등한 위치로 인식했다기 보다, 과학이 종교의 수준으로 상승했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옳은 표현 같다. 서로 간의 이해 관계가 어찌되었든, 현재 종교는 과학과 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개봉된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는 그 동안의 종교와 과학 간의 대화의 정점에 서 있는 것 같다. 종교의 독점적 주제인 종말과 구원의 문제가 과학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상황적 배경은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지구인들의 생존 위기이다. 환경 파괴로 인해 더 이상 양식이 없어 모든 생존자들이 곧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절망적인 상황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몸부림이 표현되어 있다.

 

멸망해 가는 지구인들을 구원할 프로젝트의 이름은 <나자로 프로젝트>이다. 나자로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죽어 장사된 뒤 사흘 만에 예수의 신적 능력을 통해 되살아난 인물이다. 이왕 성서에서 프로젝트의 이름을 따올 거면, 궁극적 부활인 <그리스도 프로젝트>로 할 것이지, <나사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것이 흥미롭다. 어쩌면 이것이 과학이 가지고 있는 예수의 신적 능력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시아의 구원 능력을 표현하기에는 오히려 나자로를 끌어 들이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나자로 프로젝트는 두 개의 플랜을 갖고 있다.  플랜 A는 거대한 우주선을 띄워 생존자를 모아 지구를 탈출하는 방안이다. 플랜 B 1천개의 인공수정란를 외계로 보내 인종을 새롭게 퍼뜨리는 계획이다. 플랜 자체가 과학적이다. 그 어디에서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종말론적 신적 개입이 없다.

 

영화의 재미는 우리가 평소에 접하기 힘든 천체 물리학 이론이 이야기 전개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중력, 상대성이론, 웜홀, 그리고 블랙홀 등이 그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천체 물리학 이론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으로 보여준다. 일례로, 생존에 대한 희망을 품고 우주 여행을 떠난 쿠퍼 일행이 10년 전 정착 가능한 별을 찾아 먼저 떠난 우주비행사의 신호를 좆아 들어간 밀러 행성은 중력으로 인한 시간의 왜곡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쿠퍼 일행은 밀러 행성에 단지 3시간 남짓 머물렀을 뿐인데, 지구 시간으로 23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다. 또한 블랙홀을 통과한 몇 분의 시간이 지구 시간으로 56년을 허비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시간이 시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의 줄거리 중 가장 압권은 쿠퍼가 블랙홀을 통해 사건의 지평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은 시간의 이편과 저편, 또는 시간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빨아들여 새로운 공간인 사건의 지평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책장을 사이에 두고 사건의 지평이 구분되고 있는 장면이 참 흥미로운데, 이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반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책장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사건의 지평의 비밀을 풀어낸 쿠퍼의 딸(머피)은 어릴 적 서재에서 경험했던 신비로운 유령 또는 중력의 작용을 해독함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 젖힌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유레카!”

 

인류는 과학의 힘으로 멸망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블랙홀을 빠져 나온 쿠퍼는 딸(머피)이 창조해 낸 새로운 구원의 세상(구퍼 정거장)으로 구출되어 지구 시간으로 거의 80년 만에 딸(머피)을 만난다. 우주에서 겪은 시간의 왜곡 현상으로 실제 나이는 124세이지만, 여전히 지구를 떠날 때의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쿠퍼는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늙은 딸’(머피)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다.

 

I knew I’d see you again.”

(“나는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아빠가 묻는다.

How?” (“어떻게?”)

“Cause my daddy promised me.”

(“왜냐하면 아빠가 나랑 약속했기 때문이죠.”)

 

종말과 구원을 과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이 영화의 마지막은 차라리 종교적이다. 이 영화가 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종말과 구원은 우리 인류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구원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종교적이냐 과학적이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구원을 실제적으로 가져다 주기 위해서 종교와 과학의 끊임 없는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종교와 과학, 대화의 끝에 발견한 구원의 길을 마주하며 함께 이렇게 외치는 날을 기대한다. 과학적으로 유레카!” 또는 종교적으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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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1. 10. 02:47

사랑하다 죽으라

(레위기 19:1-18)

 

종교는 삶의 의미를 묻는다. 의미를 묻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것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독특한 점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이런 것을, 영적이다,라고 한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의미를 묻다 간다. ‘죽음자체에서도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의미 없는 죽음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 거기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공허함을 느낀다. ‘내가 지금 무엇하는거지?’라며, 힘들어 한다. 인간이 힘들 때는 육체의 노동이 고될 때가 아니다. 노동을 고되게 하는데,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는지, 의미를 못 찾을 때 힘들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인간은 오히려, 그 노동을 즐거워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삶의 의미를 질문하다. 창세기는 내가 왜 태어났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의미에 대답을 준다. 또한 이렇게 태어났는데, ‘왜 세상은 이렇게 어렵고 힘들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삶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그리고, 레위기는 이렇게 해방된 삶을 어떻게 향유해야 행복하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게 해 준다. 우리는 계속, ‘의미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의미를 묻지 않으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물은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능에 의해서 살아갈 뿐이다. 물론,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인간에겐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의미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레위기는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내려가다 처음 봉착하는 난관이 레위기이다. 창세기, 출애굽기는 스토리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레위기는 법전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 쉽지 않다. 그래서 어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사실, 레위기는 우리가 해방된 삶에서 어떻게 인생을 향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꼭 넘어야 하는 산과 같다.

 

레위기는 율법을 기록한 곳인데, 내용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법, 그리고 이웃과 관계 맺는 법이 그것이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인데,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침을 주는 곳이 레위기이다.

 

우리는 대개, ‘에 대해서 오해한다. 법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해다. 물론 억압적인 법도 있다. 자유를 제한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법도 있다. 그것을 악법이라고 한다. 그러한 법에는 철저하게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레위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법은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법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는 법이다.

 

자유는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공공선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공공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자기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자유의 범주에 들어간다. 나 좋자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철저하게 공동체적인 개념이어야 한다. 상호간에 서로 만족할 때, 가장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레위기의 핵심 내용이다.

 

레위기는 제사법부터 시작한다. 제사법은 하나님과의 관계 맺는 법에 대한 것이다. 해방된 삶의 향유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극대화시키신다. 자유의 극대화는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나오는 최고의 선물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통해, 우리의 자유를 극대화시켜 주신다. 죄는 우리의 자유를 옭아 매는 올가미와 같다. 쇠창살이 감옥이 아니라, 죄 자체가 쇠창살 없는 감옥이다. 죄지은 인간은, 용서 받기 전까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쇠창살에 가두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죄를 지으면, 두 다리 뻗고 자기 힘들다. 그러나, 용서 받으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 다리 뻗고 자도록 해주시는 분이다.

 

제사법에 대한 것이 열 장에 거쳐 나오고, 레위기 11장부터 나오는 것은 정결법이다. 정결법은 단순히, 깨끗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정결법은, 본인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이웃의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고, 그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법이다. 본인과 이웃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한 법이다.

 

일례로, 12장에, 산모 정결법이 있다. 산모는 남자 아기를 낳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다. 부정하다는 것은 아무도 그를 만지거나, 그가 아무와도 접촉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출산으로 인해 극도로 약해진 산모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출산으로 극도로 약해진 산모를 못살게 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자 아기를 낳은 산모는 삼십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기 때문에, 30일이 지난 후에다 성물을 만질 수 있고, 성소에도 들어갈 수 있다. , 30일이 지나지 않은 산모는 밖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이것은 산모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다른 예로, 13장과 14장은 나병 환자에 대한 정결법을 진술하고 있다. 나병이라고 확진 된 환자는 격리 수용된다. 그리고, 스스로,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이렇게 외쳐야 한다.”부정하다 부정하다.” 그리고, 부정한 동안 진영 밖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을 나병 환자의 인권 제한이라고 보면 안 된다. 옛날에는 전염병이 돌면, 인구의 대다수가 죽었다. 지금처럼 백신이 잘 발달 되어 있어서, 질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병이 돌면, 무조건 죽었다. 나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것은 나병 환자도 보호하고, 병이 들지 않은 이웃들도 보호하는 법이다. 병 때문에 서로를 제한하고 구속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법을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지만, 모든 법의 근간은 본문말씀에 집약되어 있다. 본문의 1절부터 8절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규례들이고,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규례들이다.

 

하나님을 향한 규례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라는 말씀이다. 거룩함을 이야기하면서, 부모와 안식일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기억하는 것이고, ‘안식일은 쉼에 대한 것이다. 부모님을 기억하라. 부모님에게 잘하라. 이게 현실에서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잘하고 싶어도, 이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분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거룩과 부모와 연관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거룩이 안식일, 쉼과 연관된다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쉬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을 단순히 주일에 교회 나오라는 말로 오해하시면 곤란하다. 쉼이란 단순히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쉼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쉼은 우리의 자유와 직결된다.

 

9절부터 나오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규례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와 상대방에 대한 폭력 금지, 그리고 상대방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잘못했을 때, 견책하는 것(꾸짖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려주는 것)을 주문한다. 견책하는 이유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인지 인식하게 해서 또 다시 잘못으로 인해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줄여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규례와 이웃에 대한 규례를 종합하면, 해방된 삶을 어떻게 향유해야 의미 있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인데, 한 단어로 집약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삶의 가치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남녀간의 사랑으로 너무 축약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말처럼 사랑은 굉장히 광범위하고 심오한 개념이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 마음껏 사랑하고 계신가? 내가 정말, 자유롭다는 것은, 마음껏 사랑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는, 마음껏 사랑한다. 이 마음에 가장 샘솟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는,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고, 미움에 사로잡혀 괴로운 날을 보낸다. 미움은 자유 하지 못한 자에게서 나오는 죄악의 올가미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이 마음에 미움이 가득하신가?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해방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이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신가? 그냥 누구를 보든,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예뻐 보이시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해방, 구원, 자유를 누리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짧다. 의미를 찾기 전에, 아니, 의미를 묻기도 전에 훅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짧은 인생, 우리는 무엇을 하다 갈 것인가?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일에, 이 짧은 인생을 허비하기에는 너무도 아깝고, 어리석다. 사랑만 하다 가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인데,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사랑할 시간이 얼마나 없는지 한 번 보시라.

 

동영상 상영 --> https://www.youtube.com/watch?v=I0e-7qRBuj0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특별히, 여러분의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 없다. 우리의 기대수명은 80살 정도이다. 계산해 보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나 없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죽는다. 먼 훗날 죽는 것이 아니라, 곧 죽는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미워하다?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사랑하다 죽으라.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자유를 누리는 자만이 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참 자유를 얻으셨는가? 구원 받으셨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사랑하다, 죽으라. 서로, 사랑하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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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11. 8. 05:06

가을 풍경

 

눈물 어린 눈동자 같이 투명한 하늘로

푸드득 날아오른 새가 

털어낸 깃털이

허공을 떠돈다

 

예쁘게 늙어가고 있는 단풍나무는

하늘을 마주보며

수줍은 듯

살며시 떨고 있다

 

일 마친 일꾼들은

도구를 손질하고 있는데

얼굴에 미소를 띈 것이

오늘밤 한바탕 마셔제낄 모양이다

 

낙엽이 뒹굴다 내 앞에 섰다

밟아 본다

바스락 하는 것이

간지러워 낄낄대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저녁 메뉴는 연어구이라지?

쩝쩝대며 연어속살을 파먹을

식구들의 식탁은 마침내

알래스카 불곰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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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슬픔

ㅡ 내 슬픔을 누구에게 호소하리?

 

러시아의 문호, 안똔 체호프의 <슬픔>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부 이오나이다. 마부 이오나는 얼마 전 아들을 잃었다. 그것이 그가 최근에 겪은 사건이다. 그러나 그에게 그 사건 자체가 어떤 긴장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그는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 간 아들의 죽음을 주님의 뜻으로 돌린다. 물론 이것은 신앙고백적 차원이라기 보다, 아들의 허무한 죽음에 대한 아픔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부 이오나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혼자서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누군가와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마차를 탄 손님들과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긴장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자신의 아픔을 나누고 싶어하는 한 아버지의 애달픈 마음과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 사이에서 묘한 긴장이 흐른다. 이제 긴장은 아들이 죽은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하려는 사람과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 사이에서 온다.

 

모 인터넷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가 믿었던 신앙이 나를 배신했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한 어머니의 슬픔에 관한 기사이다. 그런데 기사를 보면, 그의 슬픔은 세월호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려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위 소설의 주인공인 이오나의 상황과 똑같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그 어머니에게서 새롭게 생겨난 긴장은 이렇게 표출되고 있었다. “말로는 아픔을 같이한다고 했다. 공감한다고 했다.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데 말뿐이었다. 행동이 없었다. 기도로만 아픔을 풀어 가고, 기도로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나와 유가족을 상처가 있는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들의 틀 안에 우리를 가두어 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고, 한 형제자매라고 말하지만 뒤돌아서면 남이었다. 우리를 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요할 때만 형제자매이고, 정작 내가 어렵고 힘든 때가 되니 등을 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관심이었다.”

 

체호프가 그의 소설 <슬픔>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만 남을 뿐이다.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쩌지 못한다. 그것이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다만 피해자는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말하고 싶어한다. 혼자 생각하면 끔찍하니까 누군가와 함께 그 슬픔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회복의 메커니즘이다.

 

지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정부도 국회도 교회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사건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유가족들에게도 체념이라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부나 국회를 보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닌 사건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긴장이 생겨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슬픔을 나누는 일이다. 체호프가 주목했듯이, 정부와 국회 그리고 교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유가족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슬픔을 나누고 싶어하는 유가족들에게 그만 말하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나쁜 사람이다. 소설 <슬픔>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들이 죽은 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가는데, 그는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바로 이런 마음일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만 말하라니? 소설 속에서 아들을 잃은 이오나는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인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에는 아들 생각을 할 수 있지만, 혼자서 생각하거나 아들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두렵다……”

 

왜 대통령은 국회 연설 하러 가면서, 자신들의 슬픔을 들어달라는 유가족들의 절규를 그냥 지나치는가? 왜 국회의원들은 유가족들의 슬픔을 들어주지 않고, 일어난 사건에만 집중하는가? 왜 교회는 그들의 슬픔을 들어주지 못하고, 그들과 제대로 말 한 번 나눠보지도 않고, 서둘러 귀를 닫는가? 유가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들은 그들의 슬픔은 말하고 싶어한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그들의 슬픔을 제대로들어주자. 혼자 방구석에서 눈물 흘리며 가슴을 치며 벽에 대고 말하게끔 내버려 두지 말자. 제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을 견디고 있는그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들의 슬픔은 아직 충분히 말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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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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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서 한 남자가 외쳤다.

드넓은 툰드라 지역,

그곳에 사는 동물들은 그곳의 혹독한 겨울을 피할 수 없어

온몸으로 그 혹독함을 이겨낸다.

처절하다.

그 처절함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 한 종의 동물만이 그 혹독함을 피한다.

바로 새.

다른 동물들은 짧은 다리로 드넓은 툰드라를 벗어날 수 없어

그곳에 적응해 산다.

그러나 새는 드넓은 툰드라 지역을 벗어나게 해 주는

날개를 가졌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날 수 있는 새만이 혹독한 겨울을

혹독하지 않게 벗어날 수 있다.

지루한 일상의 툰드라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

날개를 달을지어다.

고단한 일상의 툰드라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 오를지어다.

날개가 돋아 오르는 자만이

탈출할 수 있으리라.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

날갯죽지가 간지러워,

난 지금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으로 간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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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사랑의 공식

 

사랑은 삶의 예술입니다.

그것이 존재케 하려면 창조의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지요.

신뢰라는 토대도 있어야 하고,

용서라는 버리기의 기술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함께 시간 보내기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술이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듯이,

사랑도 삶에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입니다.

사랑은 존재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상태로 존재합니다.

사랑은 창조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형상을 드러내는 신비입니다.

저절로 빚어지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눈물과 땀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맛 있고, 그 잎사귀는 묘약입니다.

우리를 배부르게 하고, 아픈 곳을 치료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따스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 부릅니다.

사랑은 수고의 열매라는 것,

잊어서는 안 되는 공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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