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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1. 10. 02:47

사랑하다 죽으라

(레위기 19:1-18)

 

종교는 삶의 의미를 묻는다. 의미를 묻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것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독특한 점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이런 것을, 영적이다,라고 한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의미를 묻다 간다. ‘죽음자체에서도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의미 없는 죽음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 거기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공허함을 느낀다. ‘내가 지금 무엇하는거지?’라며, 힘들어 한다. 인간이 힘들 때는 육체의 노동이 고될 때가 아니다. 노동을 고되게 하는데,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는지, 의미를 못 찾을 때 힘들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인간은 오히려, 그 노동을 즐거워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삶의 의미를 질문하다. 창세기는 내가 왜 태어났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의미에 대답을 준다. 또한 이렇게 태어났는데, ‘왜 세상은 이렇게 어렵고 힘들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삶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그리고, 레위기는 이렇게 해방된 삶을 어떻게 향유해야 행복하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게 해 준다. 우리는 계속, ‘의미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의미를 묻지 않으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물은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능에 의해서 살아갈 뿐이다. 물론,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인간에겐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의미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레위기는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내려가다 처음 봉착하는 난관이 레위기이다. 창세기, 출애굽기는 스토리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레위기는 법전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 쉽지 않다. 그래서 어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사실, 레위기는 우리가 해방된 삶에서 어떻게 인생을 향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꼭 넘어야 하는 산과 같다.

 

레위기는 율법을 기록한 곳인데, 내용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법, 그리고 이웃과 관계 맺는 법이 그것이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인데,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침을 주는 곳이 레위기이다.

 

우리는 대개, ‘에 대해서 오해한다. 법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해다. 물론 억압적인 법도 있다. 자유를 제한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법도 있다. 그것을 악법이라고 한다. 그러한 법에는 철저하게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레위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법은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법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는 법이다.

 

자유는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공공선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공공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자기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자유의 범주에 들어간다. 나 좋자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철저하게 공동체적인 개념이어야 한다. 상호간에 서로 만족할 때, 가장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레위기의 핵심 내용이다.

 

레위기는 제사법부터 시작한다. 제사법은 하나님과의 관계 맺는 법에 대한 것이다. 해방된 삶의 향유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극대화시키신다. 자유의 극대화는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나오는 최고의 선물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통해, 우리의 자유를 극대화시켜 주신다. 죄는 우리의 자유를 옭아 매는 올가미와 같다. 쇠창살이 감옥이 아니라, 죄 자체가 쇠창살 없는 감옥이다. 죄지은 인간은, 용서 받기 전까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쇠창살에 가두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죄를 지으면, 두 다리 뻗고 자기 힘들다. 그러나, 용서 받으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 다리 뻗고 자도록 해주시는 분이다.

 

제사법에 대한 것이 열 장에 거쳐 나오고, 레위기 11장부터 나오는 것은 정결법이다. 정결법은 단순히, 깨끗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정결법은, 본인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이웃의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고, 그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법이다. 본인과 이웃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한 법이다.

 

일례로, 12장에, 산모 정결법이 있다. 산모는 남자 아기를 낳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다. 부정하다는 것은 아무도 그를 만지거나, 그가 아무와도 접촉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출산으로 인해 극도로 약해진 산모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출산으로 극도로 약해진 산모를 못살게 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자 아기를 낳은 산모는 삼십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기 때문에, 30일이 지난 후에다 성물을 만질 수 있고, 성소에도 들어갈 수 있다. , 30일이 지나지 않은 산모는 밖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이것은 산모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다른 예로, 13장과 14장은 나병 환자에 대한 정결법을 진술하고 있다. 나병이라고 확진 된 환자는 격리 수용된다. 그리고, 스스로,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이렇게 외쳐야 한다.”부정하다 부정하다.” 그리고, 부정한 동안 진영 밖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을 나병 환자의 인권 제한이라고 보면 안 된다. 옛날에는 전염병이 돌면, 인구의 대다수가 죽었다. 지금처럼 백신이 잘 발달 되어 있어서, 질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병이 돌면, 무조건 죽었다. 나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것은 나병 환자도 보호하고, 병이 들지 않은 이웃들도 보호하는 법이다. 병 때문에 서로를 제한하고 구속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법을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지만, 모든 법의 근간은 본문말씀에 집약되어 있다. 본문의 1절부터 8절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규례들이고,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규례들이다.

 

하나님을 향한 규례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라는 말씀이다. 거룩함을 이야기하면서, 부모와 안식일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기억하는 것이고, ‘안식일은 쉼에 대한 것이다. 부모님을 기억하라. 부모님에게 잘하라. 이게 현실에서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잘하고 싶어도, 이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분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거룩과 부모와 연관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거룩이 안식일, 쉼과 연관된다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쉬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을 단순히 주일에 교회 나오라는 말로 오해하시면 곤란하다. 쉼이란 단순히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쉼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쉼은 우리의 자유와 직결된다.

 

9절부터 나오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규례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와 상대방에 대한 폭력 금지, 그리고 상대방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잘못했을 때, 견책하는 것(꾸짖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려주는 것)을 주문한다. 견책하는 이유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인지 인식하게 해서 또 다시 잘못으로 인해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줄여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규례와 이웃에 대한 규례를 종합하면, 해방된 삶을 어떻게 향유해야 의미 있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인데, 한 단어로 집약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삶의 가치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남녀간의 사랑으로 너무 축약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말처럼 사랑은 굉장히 광범위하고 심오한 개념이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 마음껏 사랑하고 계신가? 내가 정말, 자유롭다는 것은, 마음껏 사랑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는, 마음껏 사랑한다. 이 마음에 가장 샘솟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는,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고, 미움에 사로잡혀 괴로운 날을 보낸다. 미움은 자유 하지 못한 자에게서 나오는 죄악의 올가미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이 마음에 미움이 가득하신가?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해방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이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신가? 그냥 누구를 보든,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예뻐 보이시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해방, 구원, 자유를 누리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짧다. 의미를 찾기 전에, 아니, 의미를 묻기도 전에 훅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짧은 인생, 우리는 무엇을 하다 갈 것인가?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일에, 이 짧은 인생을 허비하기에는 너무도 아깝고, 어리석다. 사랑만 하다 가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인데,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사랑할 시간이 얼마나 없는지 한 번 보시라.

 

동영상 상영 --> https://www.youtube.com/watch?v=I0e-7qRBuj0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특별히, 여러분의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 없다. 우리의 기대수명은 80살 정도이다. 계산해 보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나 없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죽는다. 먼 훗날 죽는 것이 아니라, 곧 죽는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미워하다?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사랑하다 죽으라.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자유를 누리는 자만이 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참 자유를 얻으셨는가? 구원 받으셨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사랑하다, 죽으라. 서로, 사랑하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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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