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5.01.30 달팽이 똥 2
  2. 2015.01.30 구운몽
  3. 2015.01.28 죽음의 섬
  4. 2015.01.27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
  5. 2015.01.24 바람 부는 날
  6. 2015.01.24 사람됨이 먼저다
시(詩)2015. 1. 30. 03:56

달팽이 똥

ㅡ 달팽이 똥을 본 적이 없는 少年에게

 

한 십 년쯤 후에나 이야기를 나누자

강산이 한 번쯤은 변해야 너의 뒤통수가 간지러울 것이다

네 내장이 한 번쯤은 뒤집어져야

파란 하늘이 사실은 노오란 색이었다는 것이 보일 것이다

한 십 년쯤 후에나

너는 바람이 훔쳐간 너의 영혼을 도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십 년쯤 후에나

시간은 123456789101112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네 내장이 뒤틀린 만큼이나

굴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만 신신당부 하자

네 몸뚱이를

살살 꾀어내는 아지랑이에게 내어주지 말아라

한 십 년쯤 후에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식곤증처럼 나른한 것이 아니라

네 내장이 쥐어짜낸

노오란꽃을 먹은

달팽이 똥 같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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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1. 30. 03:11

구운몽

 

날아가는 새가 사람의 머리카락을 물고 가면

그 사람은 밤에 날아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ㅡ 중국 고전 <박물지>의 한 구절

 

새들의 서식지에 높이 솟은 나무에 올라

한 움큼 머리카락을 뽑아

바람에 흩날리고 싶다.

날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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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1. 28. 01:43

죽음의 섬

-   뵈클린의 <죽음의 섬>

 

지상 최대의 작전이 수행된다.

 

염세주의자는 아무나 될 수 없다.

흔들리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며 죽음의 손짓을 생각할 수 있는 자,

까마득한 바위절벽을 보며 생() 뒤에 감춰진 사()를 투시할 수 있는 자,

손댈 수 없이 출렁이는 바다를 보며 멀미에 시달리는 사생활들을 토해내는 자,

이들만이 염세주의자가 될 수 있다.

 

지상 최대의 작전은 용병 두 사람에게 맡겨진다.

카론과 뱃사공.

카론에게는 저승으로 영혼을 보내는 일의 임무가 주어지고

뱃사공에게는 죽음의 섬으로 배를 모는 임무가 주어진다.

 

염세주의자들은 관을 하나 짠다.

그리고 그 관 속에 눕힐 존재를 설정한다.

쇼펜하우어는 사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가고

뵈클린은 그림으로 염세주의를 형상화한다.

마지막으로 라흐마니노프는 소리를 통해

사생활의 멀미에 시달리는 자들을 성()의 세계로 초대한다.

 

마침내 지상 최대의 작전은 성공을 거두고,

관을 실은 배가

뱃사공의 노를 따라 죽음의 섬으로 들어가고

흰 옷 입은 카론은 관속에 드러누운 존재를

저승으로 보내는 의식을 관장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이 클라이막스에 다다랐을 때

염세주의자들은 모든 감각의 작용을 일제히 멈추고 일어나

이렇게 외친다.

신은 죽었다!”

 

관 속에 누운 것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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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

 

子曰, 非其鬼而祭之 ,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조상의]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고,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非其鬼而祭之비기귀이제지를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에게 예배하는 행위에 비견할 수 있다. 이런 자에 비견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자이다. 공자는 이런 자를 일컬어 용기 없는 자라고 한다.

 

성경의 증언은 일관되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義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의로움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의와 대면하는 일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의에 죽고 의에 산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를 행하다 불의한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빛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다. 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런데, 이 세상은 어둠이기 때문에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더러 그 빛을 싫어했다. 그래서 세상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것을 보고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의로운 것이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의로운 것) 그것을 전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살았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단행위이다. 그것은 믿는 자가 아니라, 용기 없는 자에 불과하다. 믿음은 결단이다. 절대적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인 파울 틸리히는 이것을 존재에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고도 표현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이다. 세상은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서슴없이 불의를 행한다. 오히려 불의를 행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이다. 즉 비겁한 세상이다. 비겁한 자들이 잘 사는 세상이다. 용기 있는 자는 거지 꼴로 병신취급 받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의로운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포장하는 일은 쉽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것을 보고 행할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용기가 있는가? 그런 용기를 지닌 자에게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를! 아니, 그런 자만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리라.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는 세상에 속한 자요, 의로운 것을 보고서 행하는 용기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 그래서 난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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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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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이름 없는 도시 번지 없는 집에

아무도 모르게 눈이 조금씩 퇴화되어 가는 새들이 산다

어쩌다 차려진 밥상엔

뱃고동 소리만 들리는 소라 게가 올라오고

하루에 반나절도 햇볕을 못 쐐

영양실조에 걸린 산나물이 노랗게 오그리고 있다

눈이 퇴화되면서 방향감각을 잃은 새들은

바람이 부는 날에만 산책을 나간다

바람은 그들의 네비게이션이다

가늘어진 날개를 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안간힘을 쓰며 날개를 펴는 이유는

남은 깃털을 바람에 날려 보내기 위함이다

바람 부는 날

우리는 새들이 나는 것은 볼 수 있어도

그들이 죽는 것은 볼 수 없다

바람 부는 날

바람이 새들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바람을 건너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이 세상과 이별하고 마는 것이다

바람 부는 날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깃털은

희미하게 살다간 어떤 새의 마지막 눈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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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먼저다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

자왈, "제자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증이친이.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는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집을]떠나서는 우애로우며, 삼가고 믿음이 있으며 널리 대중을 아끼면서도 어진[] 사람을 가까이한다. [이것들을]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글(학문)을 배운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공자의 인간론의 핵심은 인()인데,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다움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서 학문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목회하면서 가장 황당한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 믿음 좋은 신앙인이라 여기며 교회 봉사(주일성수, 헌금, 교회의 각종 행사 참여)를 열심히 하는 이를 만날 때이다.

 

한국 교회의 신앙은 '믿음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무엇보다 '믿음'을 갖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사람됨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믿음'을 먼저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급선무이고, 나머지는 구원 받은 후에 해결해도 된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녕 기독교인은 구원에 환장한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소위 정통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구원파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플라톤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이것은 구원을 너무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의 교리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의 교리를 그 시대의 언어로 옮기기 위해 헬라철학을 빌려온 것일 뿐 그렇다고 헬라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헬라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바탕으로 이원론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지만, 정작 성서의 사상은 이원론을 거부하고 전인적이고 종말론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여기서 전인적이라는 말은 소위 육체와 영혼이 구분된다는 이원론적인 사고가 아니라, 육체와 영혼은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성서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육체와 영혼의 통합이다. 그리고 부활은 이 세상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체를 향해 되어져가고 있음에 대한 비전(하나님의 계획)이다.

 

사람됨을 생각지 않는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사람됨 없는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이 아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사람됨의 믿음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사람됨의 구원이다. 믿음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실현하지 않으려는 자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믿음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됨이 먼저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됨에 대한 표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자를 믿음 있는 자라고 부르지, 믿음 있는 자가 곧 사람을 사랑하는 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자라고 하지 않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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