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5.04.16 배수진
  2. 2015.04.13 오직 한 가지의 즐거움
  3. 2015.04.09 화해는 은혜다 (Art of Reconciliation)
  4. 2015.04.06 '예수 부활하셨다'의 의미 1
  5. 2015.04.02 불혹2 2
  6. 2015.04.01 그것의 바깥 1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16. 04:35

배수진

창세기 52

(창세기 42:29-43:14)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갔던 야곱의 아들들이 돌아온다. 일단 양식을 구해 오는 것에는 성공을 한다. 그러나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둘째 아들 시므온이 함께 돌아오지 못한 채 볼모로 애굽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리고 양식 자루 속에는 돈뭉치가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영락 없이 사기꾼으로 몰린 위기에 처해 있다. 마지막으로 애굽의 총리는 시므온을 구하고 양식을 또 얻기 위해서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야말로 어려움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 온 것이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양식을 구해 돌아온 아들들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아버지 야곱에게 자세하게 말해준다. 애굽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들은 야곱은 비탄에 잠겨 통곡한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 부모에게 자신의 죽음보다 더한 아픔은 자식을 잃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죽지 못해 산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이미 죽은 것처럼 산다. 자기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잃었는데 무슨 낙이 있겠는가.

 

야곱은 그렇게 살았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야곱은 죽은 것처럼 살았다. 그런데 거기에 또 다른 괴로움을 얹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둘째 아들 시므온도 잃게 생겼고, 막내 아들 베냐민도 잃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통을 감지한 장남 르우벤이 나선다. 그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시므온도 찾아오고 양식도 구해오고 베냐민도 도로 데리고 오겠다고 말한다. 만약 그 일에 실패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쩐지 야곱은 장남 르우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추측 건데, 르우벤은 빌하와의 간통 사건 때문에 아버지 야곱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 같다(53:22, 49:4).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신뢰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법이다.

 

해결책에 대한 뾰족한 수가 없는 상태에서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기근은 계속 심해지고, 애굽에서 얻어온 양식마저 떨어진다.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살 궁리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 온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43:2).

 

아버지 야곱의 이 말에 이번에는 넷째 아들 유다가 나선다.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이다. 유다는 베냐민과 함께 가지 못하면 절대로 양식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애굽의 주인이 말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야곱은 괴로워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43:6).

 

유다는 필사적으로 아버지 야곱을 설득한다. 아버지 야곱의 생명뿐만 아니라, 아들들의 생명, 그리고 아들들의 가족들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과 함께 양식을 구하러 가는 것뿐이라고 유다는 말하며 아버지 야곱을 설득한다. 그러면서 아버지 야곱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담보가 될 것과 만약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하면 아버지 앞에서 영원히 죄인으로 살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결단을 재촉한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43:10).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야곱은 유다의 설득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그냥 가지 말고, 그 옛날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랬던 것처럼, 예물을 가져 갈 것과 돈을 두 배 더 가져갈 것을 지시한다.

 

여기에는 배수진을 치는 삶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배수진이란 물을 등진 진지(陣地)라는 말로, 어떤 일에 죽음을 각오하고 대처하는 것을 뜻한다. 배수진을 치고 싸울 때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배수진을 친다. 르우벤은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을 배수진으로 치고 아버지를 설득하고, 유다는 자신의 목숨과 평생 죄인의 낙인을 배수진으로 치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 베냐민을 배수진으로 치고 양식을 구하는 일에 협조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배수진이 한 개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을 보내는 것인데, 사실 베냐민을 보낸다는 것이 곧 베냐민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야곱은 그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야곱은 베냐민을 배수진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만, 그가 베냐민을 보낼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믿음을 지니게 되는 과정은 그렇게 빨리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생득적으로 이런 저런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경지가 신앙이다.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이런 기도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이라는 칭호는 아브라함에게 처음 계시된 것이고(17:1),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도 사용했고(28:3), 야곱에게도 계시된 이름이다(35:11).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다.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에서를 만나기 전에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했다.

 

야곱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와 늘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호칭이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집을 떠날 때 아버지 이삭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들 야곱에게 복 주실 것을 빈 적이 있다(28:3).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 사람들을 도륙한 일로 야곱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한다(35:11). 나중에 죽음을 앞둔 야곱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때도 자신의 인생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관하셨다고 고백한다(48:3).

 

이렇게 야곱에게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찾아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고, 어려울 때마다 찾을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지금, 야곱이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늘 그랬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는 희망이 담긴 기도인 것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한 치 앞의 일도 모른다. 잘 되고 있을 때 곧 닥치게 될 어려움을 모르고, 어려움을 겪을 때 곧 잘 되게 될 것을 모른다. 잘 될 때는 잘 되는 것에 파묻혀 지내고, 어려움을 겪을 때는 그냥 어려움에 괴로워할 뿐이다. 그런 우리의 인생은 참 가련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즐거움이나 괴로움 가운데 조금만 눈을 돌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생을 겸손하게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야곱.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과연 자식을 잃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을 배수진으로 치고,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한 야곱에게 꿈에도 생각 못했던 좋은 일이 일어난다. 자식을 잃게 되기는커녕 잃은 줄로 알았던 자식(요셉)까지도 도로 찾는 일이 일어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배수진, 한 번 쳐 볼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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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13. 05:15

오직 한 가지의 즐거움

(시편 33:1)

 

백지가 하나 있다. 여기에 무엇을 채우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여기에 백지가 하나 있다. 어떤 색깔로 이 백지에 칠하고 싶은가? 미술심리치료라는 분야가 있는데, 미술을 통해서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보고 그것을 치료하는 심리치료의 일종이다. 주로 어린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위해서 쓰이는데, 마음이 어두운 아이는 어두운 색깔을 써서 백지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마음이 밝은 아이는 밝은 색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그것은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의 마음의 눈은 그것을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못 보더라도 자기 자신은 본다. 물론 자기 자신도 못 볼 때가 있다. 자기 자신이 못 보는 경우는 으로 발전된 경우이다. 그래서 전문가를 만나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 자기 자신은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인간은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에 따라 인생을 산다. 겉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것에서 오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은 내면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서 온다. 일례로,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선물 받았다고 하자. 그 부인이 행복하겠는가? 행복이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가져다 주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부부의 관계에서 온다. ,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이 서로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아무리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선물을 주고 받더라도 그들은 행복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은 이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해 즐거움을 삼고 사시는가?

고사성어에,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 -

 

맹자가 말하는 세 가지의 즐거움도 보면, 외적인 것이다. 부모형제의 무고,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 그리고 제자를 키우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외적인 것이다. 부모형제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가?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면 불행한가? 자신을 따르는 자가 없으면 불행한가? 사실, 이런 것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항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인간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가르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이 존재한다. 식량공급과 안보, 그리고 자녀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생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식량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식량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즐거움을 모른 채 죽고 말 것이다.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먹는 것이 얼마나 좋으면,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인생의 반 이상은 먹는 즐거움에 산다. 그래서 반대로 가장 큰 불행은 굶는 것이다. 배고파서 죽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량공급도 안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구약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와 연관이 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 왕을 구한 것도 결국안보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가장 기본적인 식량공급을 위해 힘쓰고 애쓴다. 그러나, 애쓰고 힘써서 얻은 식량을 누군가에 의해 약탈 당할 때의 허탈감이란 곧죽음과 같다.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던 이스라엘은 열심히 식량공급을 위해 일했다. 그런데 추수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주변 나라의 폭군들이 쳐들어와 생명과도 같은 식량을 약탈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안보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그들은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왕을 의지하다, 결국 주변 나라 정세를 잘못 읽는 실수를 범해 나라가 망하고 만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적인 수사법을 동원해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한다. 강하고 오래된 민족이 와서 그들의 삶을 피해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5:17).

 

이것을 통해서 예레미야가 파멸해가는 이스라엘에게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이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지는 이유는 엉성한 군사대책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던 이스라엘이 당해야 했던 대가는 엄청났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인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보이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다. 우리는 단순히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을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게 보장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이것으로 끝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서양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의 일화이다. 어느 날 헨델이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렸다. 당시에 가발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다. 요즘에도 영국에서도 법관들이 재판을 할 때 가발을 쓴다. 가발은 어떤 권위를 가지게 해주는 물건과도 같다. 한참 동안 난처해 하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의 가발을 찾아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근처 이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였다. 그 후 헨델은 고마운 마음에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자주 보면 정드는 법이다. 그러나 보니 어느덧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헨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주었다. 헨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은 다시 그 이발관을 들렀다. 그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있었다. 이발을 하러 온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다른 이발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갖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관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그 이발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헨델의 명작 메시아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인생인가를 가르쳐 준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백지에 그려야 하는 삶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에 채워야 하는 색깔이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자, 다른 무엇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이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사는 자의 삶을 보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살았던 한 분을 소개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8:20, 9:58). 그러나, 이 분은 행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행복했다. 왜냐하면, 이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것을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즐거움의 원천이 오직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그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줄 아는 자들이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혼란스럽다면,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면,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바로 지금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이다. 그런 분은 그리스도께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는 인생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그러면, 윤동주의 다음 시처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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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9. 03:39

화해는 은혜다

(Art of Reconciliation)

창세기 51

(창세기 42:21-28)

 

인간에게 일어난 일 중 가장 불행한 일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일이다.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서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불행한가!

 

한국 사회는 또다시 토막살인사건의 충격에 휩싸여 있다. 시화호에서 발견된 시신의 몸통 부분과 그 인근에서 발견된 손과 발의 신원을 확인해 본 결과 중국여성동포의 것으로 밝혀졌다. 신원확인을 토대로 범인이 검거되었는데, 범인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남편이 밝힌 범행의 이유는 중국에 있는 계좌로 돈을 부치라는 잔소리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고 홧김에 집에 있던 둔기로 아내를 내리쳐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범행을 숨기기 위해서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아내의 시신을 훼손해서 유기했다고 한다. 머리와 팔, 다리를 몸통에서 분리시켰고, 팔과 다리에서 다시 손과 발을 분리시켰다. 손과 발에서 지문을 채취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렇게 훼손한 아내의 시신을 자전거로 여러 번에 걸쳐 이곳 저곳에 유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 다리를 유기하려다 잠복 중인 경찰에게 긴급 체포되었다. 아내를 죽이고 시신을 훼손 한 뒤, 태연하게 직장에 출근까지 했다고 한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괴물로 만들었을까?

 

거의 20년 가까이 부부로 살아온 이들의 삶이 이렇게 처참한 비극으로 끝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사랑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 상실은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중국 동포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 때문에 중국 동포 사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문제가 계속 발생되고 있는 중국 동포 사회를 끌어 안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국 정부도, 한국 교회도 발벗고 나서야 한다.

 

이런 문제가 연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중국 동포)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모습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자신의 신세를 존재는 한 없이 한탄하며 울고 있다는 뜻이고, 메말라 버린 정서를 어쩌지 못해 신음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어디 중국 동포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아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도 아니고, 명문대에 합격했을 때도 아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랑할 때, 그리고 사랑 받을 때이다. ,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면 다툼이 일어나고 불화가 일어나지만, 사랑의 능력이 회복되고 발휘되면 화해가 일어나고 평화가 일어난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사랑의 능력이 상실되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시기, 질투, 미움이 일어났다. 그래서 형들은 동생 요셉을 죽이려 했다. 르우벤의 반대와 유다의 만류로 요셉을 죽이지는 않지만, 그들은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동, 즉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린다.

 

본문에는 사랑의 능력이 상실된 가운데 죽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때, 그 일을 당한 당사자 요셉의 감정이 나타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여기서 괴로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차라인데, 이것은 극단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단어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을 전멸한 후, 야곱이 그 지역 사람들이 보복할까 봐 두려워 떨면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낼 때(34:30) 쓰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긴 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얼굴을 숨기심으로 그들이 당할 고통을 나타낼 때도 쓰였다(31:17).

 

상상해 보라. 형들에 의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졌을 때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거룩한 심정으로 걸러서 보면 안 된다.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현실성 있게 다가 온다. 요셉은 그때 형들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그리고 요셉의 마음은 극심한 괴로움에 떨었다. 사실, 그와 똑 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는 이상 그 마음을 헤아리기는 힘들 것이다.

 

화해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여 발휘하는 것인데, 화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동일한 경험에서 오는 연민(compassion)’이 필요하다. 현재 형들의 위치는 과거 요셉의 위치로 전락한 상황이다. 형들은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와서 정탐꾼으로 몰려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옛날 요셉이 겪었을 괴로움을 생각하며 거기에 빗대어 자신들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형들이 요셉의 괴로움을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자신들이 그러한 괴로움을 동일하게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지만, 그것은 제 삼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일 뿐, 당사자들 간에는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기 십상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대부분 거기에는 피해자만 있지 가해자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서 시인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감추려 한다. 그래서 가해자는 자신을 가해자라고 드러내질 않고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며 자신을 감추려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온전히 구분되는 시점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동일한 고통을 겪게 될 때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행한 극악무도한 일을 자신이 동일하게 당해보기 전까지 인식하지 못한다. 가해자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되는 시점은 피해자와 동일한 피해자의 입장에 처할 때이다. 형들이 동생 요셉에게 가한 일이 얼마나 잘못한 일인가를 깨닫는 순간은 바로 그들이 동생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당하는 괴로움(차라) 때문이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통역을 통해서 형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사실 요셉은 형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들의 괴로움도 들었고, 그가 알지 못하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 큰 형 르우벤은 자신을 죽이는 음모를 반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큰 형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어떤 해결책을 내놓기 보다는 동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니라”(22).

 

자신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들은 요셉은 그 자리를 벗어나 외딴 곳에 가서 운다. 여기에서 화해를 위한 두 번째 과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눈물이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24). 여기서 울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바카인데, 이것은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을 모두 포함하는 울음을 뜻한다.

 

큰 어려움을 겪은 사람의 마음은 폭풍이 치는 바다와 같다가도 평온함이 깃든 잔잔한 바다로 바뀐다. 이것이 반복된다. 이것을 정신의학적 용어로 조울증이라고 한다. 조울증이 깊어지면서 눈물이 마르게 되는데, 눈물이 마른 사람만큼 인생이 어려운 사람이 없다. 눈물은 영혼의 윤활유와도 같은 것인데,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영혼의 작용이 멈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요셉이 울었다는 것은 영혼의 작용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뜻인데, 영혼이 되살아 나야 사랑의 능력이 회복되고 화해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화해의 과정에 서로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눈물은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해주고, 영혼의 얼룩을 씻어주는 세정제 역할을 해준다.

 

요셉은 둘째 형 시므온을 붙잡아 두고 나머지 형들을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열 명의 형들 중 왜 시므온을 붙잡아 두었을까? 일단 큰 형 르우벤을 잡아 두려고 했다가 르우벤 형은 자신 해하려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열외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둘째 형인 시므온을 붙잡아 두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Nahum M. Sarna)는 여동생 디나의 사건을 고려해 볼 때 시므온의 성격 상 그 범죄의 주동자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 요셉을 죽이려 한 범죄를 주동한 것이 시므온이었기 때문에 그를 붙잡아 두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시므온을 뺀 나머지 아홉 형제들은 풀려난다.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한 요셉은 형들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고 부하들을 명해서 형들의 자루에 곡식도 채워주고, 그들의 돈을 다시 자루에 넣고, 길에서 먹을 양식까지 챙겨준다.

 

형들은 요셉이 챙겨둔 보따리를 메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여관에 유숙하게 되는데, 거기서 혼이 나서 떨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름이 아닌 자신들의 돈이 도로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루 속에 돈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28).

 

여기에서 화해의 세 번째 과정이 발견되는 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이것을 에덴동산 이야기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이것을 탕자 이야기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제시하는 인간론의 기본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상황, 즉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황을 일컬어 원죄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단순히 인간의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경의 진술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 사랑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고,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할 때 가장 불행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이다.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할 가능성은 없다. 요셉과 형들 사이에 화해가 발생하는 시점은 이렇게 형들이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안에 있었다. 하나님 안에 있었던 요셉과 이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온 형들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는 은혜다. 어떻게 보면 요셉의 인생은 진노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형들이 요셉의 일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거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노가 은혜로 바뀌는 순간은 바로 그들 모두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그 순간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는 은혜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 같으나,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죽임 당한 것 같으나, 그의 죽음은 진노의 죽음이 아니라 은혜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화해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화해는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이다. 화해는 우선 동일한 경험에서 오는 연민(compassion)’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찌꺼기가 껴서 움직이지 못하는 영혼을 맑게 해주는 카타르시스의 눈물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깨닫는 일(하나님과의 합일)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화해를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one of us), 눈물로 발을 씻도록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은 우리 인간에겐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가장 큰 표지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하는 일이다.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화해가 일어나고 있는가? 행복한가? 화해는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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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6. 06:49

'예수 부활하셨다'의 의미

(눅 15:11-24)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우리가 찬양했듯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우리는 이 날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치며,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일단, 외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사실을 담고 있다는 뜻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유레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찾았다라는 뜻이다. 기원전 25년경, 지금으로부터 2 2 20년 전 살았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물질의 밀도가 물질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일화로 알려진 말이다. 아르키메데스는 그 원리로 왕관에 금이 아닌 다른 물질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금세공사가 속임수를 썼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뭔가 어려운 일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유레카!”를 외친다. 아르키메데스가유레카!”를 외쳤을 때, “유레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찾은 그 원리가 중요한 것이다. 그 원리는물질의 밀도가 물질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라고 외칠 때, “예수 부활하셨다!”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He is Risen!)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어떤 현상에 대한 진술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라는 현상은 그냥 신기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세상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만큼 신기한 일이 많다. 죽은 자가 살아날 확률이 많은 가? 아니면,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뒤집혔는데 거기서 살아날 확률이 많은가? 실제로 옛날에 바다에 빠져서 죽게 됐는데 거북이가 등에 태워 뭍으로 실어다 준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라고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신기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건은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무엇인가 아주 큰 의미와 변화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예수의 부활은 지금도 계속해서 해석되고 있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예수의 부활이 진리인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진리는 확정된 원리가 아니라, 끊임 없이 해석을 요구하는 신비를 말한다. 더 이상 해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놓아두고, 그 부활 사건을 경험한 예수의 제자들이 해석한 것은 예수의 부활이 구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우리(인류)를 구원한 구원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개념도 아주 광범위한 개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는언어의 범주에서 구원은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고 예수의 부활과 관련된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아주 보편적인 기독교의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구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죄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죄의 개념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의 개념은범죄를 주로 의미한다. 나쁜 짓, 즉 윤리 도적적인 범주를 벗어난 일을 죄라고 한다. 그래서 죄를 지은 자는 사회적 지탄(손가락질)을 받고, 그 값을 어떤 형태로든 치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의 개념은 윤리 도덕적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의 죄는 신학적 죄의 개념인데, 여기서신학적이라는 말은하나님과 관련된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학적 죄는 하나님과 관련된 죄의 개념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은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아주 유명한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예수님 버전(또는 누가복음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탕자의 비유 이야기에는 세 명의 주연급 인물이 등장한다. 아버지, 큰아들, 둘째 아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흔히 말하는 탕자는 작은 아들을 가리킨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그리고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나누어준 모든 분깃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난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후려 아들 놈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통념으로,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재산을 요구하거나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없는 자 취급했다는 뜻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신학적 죄의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은 것이 당연한 것처럼, 창세기 말씀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순히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은인간은 하나님의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보자, 어떻게 행동하는가?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와 분리되어서 마치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는가?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은 그때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단순히 시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완전히 무너진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하고 만다. 돼지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혐오하던 동물이다. 율법에 돼지고기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다. 율법에서 금하는 동물은 부정한 동물이요 혐오 동물이다. 그런데, 그 돼지를 치는 것으로 모자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가!

 

죄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 수 없도록 창조된 존재인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처럼 귀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살아가는 그 존재 자체를 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원죄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 분리되어 살던 존재가, 다시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원죄는 우리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원죄는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죽은 자가 자기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가 해주어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셔야 한다.

 

둘째 아들의 상황을 잠시 더 보자. 둘째 아들은 궁핍한 지경 (죄의 상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삶을 살아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상태에 이른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지금 이 스토리의 전체 상황을 신학적인 용어로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회개는 단순히, ‘아이고 내가 잘못했소!’라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돌이켜서 완전히 방향을 틀어, 하나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의 제자들이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바로, ‘구원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살던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과 다시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야말로구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 사건은 둘째 아들이 17절에서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했을 때처럼, “!!”라고 하는 깨달음의 사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던, 즉 죄 가운데 살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은 열어준 구원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 아버지께로 돌아온 아들의 삶을 보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것은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비유란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게끔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분리되어 살고 있다는 것도 눈에 안 보이고, 깨닫는 순간도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과의 합일된 삶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뇌과학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순전히 뇌의 작용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뇌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정도만 보고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인지할 수 없다.

 

일례로, 개는 세상을 우리처럼 컬러플(colorful)하게 보지 못한다. 흑백으로만 세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개는 우리 인간이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듣는 소리의 범위와 개가 듣는 소리의 범위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박쥐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생활한지 오래 되었으므로 눈이 퇴화되었다. , 박쥐는 장님이다. 그들은 세상을 초음파로 인식한다. 우리처럼 눈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초음파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쉽게 생각해 보자. 눈 먼 자가 눈 외의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눈이 보이는 자가 빛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세계가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착각 중의 가장 큰 착각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인식하는 능력을영성이라고 한다. 빛이 없으면 우리 눈을 절대로 아무것도 못 본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절대적인 이유는 빛 때문이다. 그것처럼, 성령의 빛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은 어느 무식한 종교업자가 말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 구원 사건, 즉 진리의 사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진리의 빛인 것이다.

 

오늘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친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빛이 비추어, 영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가 보이게 되길 바란다.

 

* 실제 설교에서는 "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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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4. 2. 04:52

불혹2

 

만인에 대한 나만의 투쟁

시끄러운 아우성

질풍노도의 늦은 시기

술고래가 되는 것으로도 부족한

이 허무의 바다에서

나는 다시 스무 살이 되는 꿈을 꾼다

가을 하늘만 공활한 것이 아니라

공활한 것으로 치자면

삼십역을 지나 오십역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 탄,

그것도 세월의 차장에게 떠밀려

삼등열차 칸에 겨우 발을 디딘

불 같은 혹을 주렁주렁 단 혹부리 아저씨

가랑이 사이만큼이랴

이것이 차라리 입영열차였으면 좋겠다는

부질 없는 생각보다 더 부질 없는 것은

이제 깎아낼 머리카락 조차 없다는 것

이다

이제 아저씨의 철로는

아저씨의 배가 나온 만큼 가팔라질 거에요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 가파름 또한 젊은 시절만큼

일장춘몽일 테니까요

혹부리 아저씨가 탄 기차가 달려간다

악소리 나는 경적을 울려대며

담배를 뻑뻑 피워 대는 듯

희뿌연 연기를 머리에 껴 얹으며

종착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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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4. 1. 17:54

그것의 바깥

 

그것의 바깥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시간과 공간이 비틀어진 곳에 가면

상대적으로

아니 훨씬 신비롭게

시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흐르는

그것의 바깥 공간이 있다

새벽 세 시쯤 잠에서 깨어나면

마주하게 되는 우주의 중력이 있는데

그것에 존재를 터놓는 순간

나는 꿈을 꾸듯 공간 이동을 한다

거기에 가면 언어를 잃어버리는데

온갖 의미를 언어적으로 만질 수 있고

거기에 가면 감각이 멈추는데

표현이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의 바깥,

거기에 가면 가장 좋은 것은

동심의 시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인데

거기에 한 번 다녀오는 날이면

나는 어린 왕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 날이면

분명

모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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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