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8. 06:51

야곱의 희생제사와 그 의미

창세기 57

(창세기 46:1-27)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예배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먼저 발현되고, 그 은혜와 사랑을 몸소 체험한 자들이 그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예배의 개념은 완전히 이방인의 예배 개념이다. 이런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이지만, 그 복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거나 하나님께 잘 보였을 때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상은 은혜가 아니다. 값 없이 주어지는 것만이 은혜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꾸미지 않았다. 그는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자식 잃은 아픔의 세월을 그저 견디면서 살아왔을 뿐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요셉의 고백에서 드러났듯이,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5,7,8).

 

야곱의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셨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이 곧 인생 가운데 아무런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인생의 신비이다. 성경은 온통 이러한 인생의 신비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들에게 지혜의 창고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들에게 등불인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참척의 고통(자식을 잃은 슬픔, 세상의 슬픔 가운데서 가장 참혹한 슬픔) 가운데 살던 야곱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는다.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애굽의 왕이 야곱의 모든 식구들의 이주를 권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꿈 같은 소식을 들은 야곱은 드디어 애굽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고 짐을 꾸려 애굽으로 떠난다.

 

야곱이 살던 곳은 헤브론이다. 헤브론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려면 브엘세바라는 곳을 꼭 거쳐야 한다. 그런데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가? 브엘세바는 야곱에게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화친을 맺고 언약을 세우며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이며, 할아버지도 거주하던 곳이었고, 아버지도 거주하던 곳이었고, 자기 자신도 거주하던 곳이었다. 삼대에 걸친 인생의 스토리가 가득한 곳이다. 그곳을 지나면서 야곱은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린다.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희생제사는 야곱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삶의 스토리가 담긴 제사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희생제사의 제물로 드리려 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을 준비해 주셨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 아찔한 이야기의 끝은 여호와 이레라는 은혜의 고백으로 마무리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셨던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그의 마음, 곧 그의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행위나 제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삶 그 자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영적 예배의 매개체가 우리 자신의 몸, 즉 우리 자신의 삶 전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류의 타락()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예배자의 참된 예배를 제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가인과 아벨은 동시에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올려 드렸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서 자신이 수확한 곡식으로 제사 드렸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는 자로서 자신이 기른 양을 잡아서 제사 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혹자는 아벨이 피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말한다. 히브리서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 이것은 너무 신약성서의 관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편협한 시각일 뿐이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가인이 드린 곡물이나 아벨이 드린 동물이나 모두 미느하'로 표현하고 있다. ‘미느하' '선물'(膳物)이라는 뜻과 '소제'(素祭; cereal offering)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무엇을 제물로 드렸느냐는 별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의 제사를 갈랐는가?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제물을 받으셨는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4:4-5). 여호와께서 제물을 받으실 때 단순히 제물만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제물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아벨 그리고 가인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예배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제사(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그 제사(예배)를 드리는 자의 삶과 인격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는 제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인격의 차이에서 왔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리고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드리는 자의 삶과 인격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선지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다. 사울 왕의 잘못된 제사를 꾸짖었던 사무엘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북이스라엘의 패역한 제사행위를 꾸짖은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도 각각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1-24).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이사야 선지와, 미가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도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이사야 1:11).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예레미야 7:4-6)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예레미야 7:11, 표준새번역).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 우리는 브엘세바에서 또 한 번 예배자로 나오는 야곱을 발견한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그는 그의 모든 자손들과 함께 제사를 드렸다. 특별히 그 제사에 야곱의 열 한 아들이 참여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세겜과 벧엘에서 제사 드린 후에 그 동안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드렸다는 기사는 없다. 아니 제사드릴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인지 모르겠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야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겜에서 딸 디나가 강간당했고, 그 일로 인해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들을 속여 그들을 도륙함으로 복수했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은 세겜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세겜 사람들의 복수의 칼날이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살던 헤브론에 정착해서 살던 중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남기고 간 아들 요셉마저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고난의 연속 가운데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배자로 나아오려면 희생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삶과 인격이 중요한 것인데 그 동안 야곱의 아들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모습은 전혀 인격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 가운데 치졸한 행동을 일삼았고, 전혀 책임 있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동생을 죽였고(물론 노예에게 팔았지만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아버지에게 거짓말 했고, 무책임한 삶을 살았다. 이들은 전혀 예배자로서 희생제사의 자리에 나올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야곱이 겪은 고난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일어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다는 것이 드러났고, 야곱의 아들들은 기근 때문에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다가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 속에서 삶과 인격의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야곱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릴 '이유'가 생겼고,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릴 '자격'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서, 그리고 희생제물이 아닌 삶과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린 희생제사는 야곱에게 또 한 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사실 야곱은 두려웠다. 낯선 땅 애굽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기 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자기 자신에게 전해진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기근이 들었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간 것은 아니었다. 그때 하나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다. 아버지 이삭도 기근이 들었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야곱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함부로 애굽으로 내려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희생제사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3-4).

 

야곱의 희생제사는 (삶과 인격)으로 드린 거룩한 산 제사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에게 나타나서 현재 야곱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다. “어디에 있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 야곱이 들은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내가 처한 상황과 현실이 어떠하든지, 어떤 두려움 가운데 있든지,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고, 걸어가는 발걸음을 암사슴 같이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가볍게 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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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5. 03:13

함부로 감사하지 말라

욥기 1

(욥기 3:20-26)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너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가주~”

 

봄이 오면 꽃이 핀다. 참 기어코 꽃이 핀다. 우리의 기분이나 환경과는 상관 없이 꽃이 핀다. 그래서 봄꽃은 우리에게 희망을 전달한다. 꽃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저렇게 찬란하게 피어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본다. 그러나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녹녹하지는 않다. 봄에 핀 꽃은 혹독한 겨울을 참아내고 이겨낸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의 꽃은 감사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그 감사의 꽃을 피워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쉬우면 안 된다. 자연인이 꽃을 보며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듯이, 신앙인은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어느 지식보다 오묘하고 그 어느 지혜보다 경이롭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담아내야 하는 신앙인의 감사는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값비싸다. 우리는 그것을 욥의 이야기를 통해 배운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욥기서는 그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그런데 그의 인생에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시련이 닥친다.

 

그에게 시련이 닥치게 된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한 것으로 서술된다. 하늘 나라에서 욥에 대한 참소가 있었다. 사탄은 하나님께 이르기를 욥이 그렇게 밤낮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물이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를 걷어 가시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사탄의 계획을 허락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성경은 언제나 다음의 두 가지 상황을 함께 제시한다. 1)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의 세계. 2) 범재하는 자비한 신의 세계.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은 인간의 불행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인다. 범재하는 자비의 신은 세계를 돌보며 피조물의 입에서 감사가 흘러나게끔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에서 매우 헷갈려 한다.

 

사람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의 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신의 존재보다 신의 부재를 경험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일례로, 한국 사회는 세월호 사건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만큼 세월호 충격에 아직도 휩싸여 있다. 아마도 21세기 한국 역사에서 세월호 사건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은 역사의 푯대가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서 한국 사회가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전진하게 되면 세월호 문제를 잘 풀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한국 사회가 후퇴하면 세월호 문제를 잘 풀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미래의 지표가 될 수 밖에 없다.

 

많은 신앙인들이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한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 겪는 비극적인 순간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질문이다.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었을 때도 유대인들은 죽어가며 똑 같은 질문을 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비극적인 일을 겪는 이들에게 그 비극적인 일에서 자신들을 건져줄 메시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들이 평소에 메시야라고 믿으며 찬양했던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야 말로 부재하는 신의 무자비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사탄의 참소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욥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다. 그에게 닥친 고난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간접적인 것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것이다. 우선,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는다. 여기에는 자식들도 포함된다. 모두 소중한 것들임에는 틀림없으나 욥 자신이 아니라 욥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간접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욥은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잃었을 때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사실, 자식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었음에도 이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욥은 이것만 해도 초인적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를 조금만 잃어도 밤잠을 자지 못해 수척해진다. 그런데 이것은 시대의 반영이기도 한 것 같다. 욥기가 씌어진 시대는 지금 시대처럼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덜 했다. 요즘 시대는 소유가 미덕이고 소유가 곧 생명인 시대인 것처럼 세뇌 당한 시대이다. 물질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으니, 요즘 시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욥의 고백을 보면 전혀 이해 가지 않는다. 모든 소유를 저렇게 잃고 어떻게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소유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찬양하는 욥의 모습을 보고 사탄은 한 가지 더 시험하기를 하나님께 청한다. 바로 욥 자신의 몸을 직접적으로 치는 시험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기 2:5,7).

 

모든 소유를 잃고 절망 가운데 있던 욥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직접적인 육신의 고통이 닥쳐온다. 욥은 어떤 질병에 의해 온 몸에 종기가 났고, 그 종기 때문에 육신이 너무 괴로워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었다 (욥기 2:8).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욥의 아내는 신앙을 잃은 듯한 말을 내뱉는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솔직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2:9). 이 진술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고발이요, 다른 하나는 욥의 자기 의에 대한 고발이다. 의로운 욥에게 이러한 고난이 닥쳐 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르게 보면, 욥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불행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고, 이렇게 고통 받으면서 자기 자신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 하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두 번째가 더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솔직히 두 번째 이유 때문에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탄원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크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감사해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욥은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지킨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기 2:10). 사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설교자들의 편집의 함정이 그것이다. 보통 설교자들은 욥기에서 이 부분만 떼내어 설교한다. 그러면서 욥처럼 어느 상황에서도 이렇게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욥기서를 좀 더 읽어 보면 바로 다음 장에서 상황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욥기서 3 1절을 보자.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의 절친 세 명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방문한다. 그러나 친구 세 명은 욥에게 닥친 그 처절한 불행을 직접 눈으로 보고 할 말을 잃는다. 그렇게 친구들과 욥은 칠일 밤낮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욥이 비로소 입을 연 것이다. 그때 욥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감사가 아니라 저주였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휩싸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저주를 퍼붓는다. 태어난 것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고, 삶에 회의를 느낀다. 욥기서 전체를 보면, 욥의 처절한 몸부림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욥의 처절한 몸부림은 감사가 아니라 탄원이다. 욥기서의 저자가 신앙인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감사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탄원의 늪을 지날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욥기서 3장은 신앙인이 꼭 배워야 하는 신앙의 감정이다. 고통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섣부른 감사를 드리기 이전에, 탄원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이 없으면 감사는 값싼 감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지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무조건 감사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는 자를 찾으신다. 고통 당하고 있으면서 그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탄원하지 못하는 자의 입술에서 무슨 신령한 감사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욥기서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의 신비가 아니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입술에서는 섣부른 감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시편 22편 첫 구절이기도 한데,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황을 무조건 받아 들이는 감사의 신앙이 아니라 먼저 그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인간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탄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믿는 신앙인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 불행한 일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한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게 된다.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인간의 불행을 전혀 돌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자비함 앞에 당황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불행한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본의 기독교인이자 문인이었던 엔도 슈샤쿠는 이렇게 묘비를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릅니다.”

 

불행한 일, 그토록 슬프고 외로운 일을 겪으며 이렇게 가련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따져 묻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신앙인은 없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고통에 대하여 따져 묻는 것은 차라리 의로운 일이다. 절대로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다. 욥기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삶을 살면서 어려움을 겪고 불행을 겪어 고통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다른 무엇보다 탄식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오히려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다.

 

고통 당하고 있는데, 불행을 겪고 있는데, 나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는데, 그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께 함부로 감사 드리지 말라. 그냥 지금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라. 욥기서 3장에 나오는 욥의 탄식으로 탄식하라. 그래야 산다. 그래야 마지막 피어나게 될 감사의 꽃이 찬란한 것이다. 그래야 감사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이 순간만큼은

뻔뻔한 욥이 되어라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왜 이처럼 고통에 처해져야 하는지

따져 물었던

용감한 예수가 되어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값싼 감사가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수줍은 어리광이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억지 같은 투쟁이니라

네 비천함에 대한 저항이니라

너의 불행을 방관만 하고 있는,

무자비한,

부재하는 신에 대한 고발이

거꾸로 솟는 핏방울처럼

네 목젖을 힘껏 울리게 하라

가랑비 같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말지어다

폭풍우 같은 분노의 눈물을 흘릴지어다

감사하는 자가 칭찬 받는 시대가 아니니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는 시대이나니

복을 받으려거든

우주의 법정에서

준엄하게

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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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5. 22. 11:59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이 순간만큼은

뻔뻔한 욥이 되어라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왜 이처럼 고통에 처해져야 하는지

따져 물었던

용감한 예수가 되어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값싼 감사가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수줍은 어리광이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억지 같은 투쟁이니라

네 비천함에 대한 저항이니라

너의 불행을 방관만 하고 있는,

무자비한,

부재하는 신에 대한 고발이

거꾸로 솟는 핏방울처럼

네 목젖을 힘껏 울리게 하라

가랑비 같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말지어다

폭풍우 같은 분노의 눈물을 흘릴지어다

감사하는 자가 칭찬 받는 시대가 아니니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는 시대이나니

복을 받으려거든

우주의 법정에서

준엄하게

신을

기.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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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1. 06:41

기쁨의 향연

창세기 56

(창세기 45:16-28)

 

정체를 밝힌 요셉과 형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이제 기쁨의 향연이 벌어진다. 이런 장면을 보는 일은 기쁘다. 살맛 난다. 우리 삶 가운데 이러한 기쁨의 향연이 날마다 벌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고, 우리가 살면서 이루기를 바라는 삶의 모습 아니겠는가. 인생은 환대 받을 때 기쁘다. 예수께서는 모든 자들을 환대하셨다. 환대 받지 못해 외로움에 치를 떨던 자들을 환대 해주셨다.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이었다.

 

예수께서는 병에 걸려 사회로부터 버림 받았던 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죄를 지어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던 자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누가복음 19장의 사케오 이야기이다. 사케오는 세리로서 유대인 공동체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소외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케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해주시고, 그를 아브라함 공동체에 복귀시켜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는 이 진술이 가진 정치사회적 함의는 매우 레디컬하다. 여기서 잃어버린 자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는 잃어버린 자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잃어버린 자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은 처음에 애굽의 총리(요셉)에게 환대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두려워했다. 그러나,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의 형제 요셉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고 환대하는 것을 알고 형들은 기뻐했다.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일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제 그들은 환영 받는 상황에서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왕과 신하들도 기뻐하며 그들을 환대해 준다. 왕과 신하들이 요셉의 형제들을 환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요셉 때문이었다. 요셉의 덕과 인품, 그리고 그의 사회적 공헌이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해 결국 버림 받은 요셉이 이렇게 애굽에서 존경 받는 인물로 자라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요셉이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품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색동옷을 입었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의 요셉의 삶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결국 환영 받지 못한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결말이 슬프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은 기쁘지 않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환영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동물도 마음이 움츠러든다. 하물며 사람이랴. 사람은 환영 받지 못하면 마음이 움츠러들고 삐뚤어진다. 대인관계에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은 환영 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좋지 않는 것이 외로움이다. 환영 받지 못하면, 외로워지는데,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상처(정신적 상처)를 준다. 몸이 아픈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다. 범죄를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환영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의 개념도 있지만, 오히려 환영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 자기의 존재감을 그렇게라도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는 아무도 자기를 환영해 주거나 알아주지 않으니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옛날 성경은 이 부분은 독처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독처한다는 것은 혼자서 외롭게 산다는 뜻이다. ,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아담의 돕는 배필인 여자 하와를 창조하신 이유가 사람(아담)은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하는 이유는 생물학적 생산을 위한 것도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외로움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외로움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녀가 만나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오히려 결혼이 외로움을 더 극대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때가 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연약함(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외로움을 극복하도록 하시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을 제정하셨는데 막상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더 큰 외로움을 생산해 내는 것은 인간이 가진 비극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르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2-25).

 

소외감,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인정 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한다는 현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성격(기질)에 따라 그 현실을 체념하거나 그 현실에 공격을 가한다. 체념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이 세상과 작별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자신처럼 아프게 만든다. 둘 다 비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요셉이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고, 소외 당하고 외로움에 처해지고, 결국 버림 받았지만,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체념하거나 공격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한 곳에서만이라도 환영 받는다면, 다른 곳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유지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아버지 야곱 또한 외로움 가운데 살았다. 사랑하는 부인 라헬을 잃고, 사랑하는 부인이 낳은 아들 요셉을 잃고, 그는 외롭게 살았다.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소통이 잘 된 것 같지 않다. 더군다나 야곱은 아들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결국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애굽의 왕과 요셉이 제안한 애굽으로의 이주 소식을 아버지 야곱에게 알리고자 길을 떠난다. 요셉은 형들에게 옷 한 벌씩을 주고, 동생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챙겨 준다. 요셉과 형들 사이의 불화의 원인 중 하나가 이었는데, 바로 그 옷이 화해의 선물이 된다. 참 의미심장하다. 또한 요셉은 형들에게 여러 가지 아름다운 선물과 곡식을 가득 실어 아버지에게 돌려 보낸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겉으로 보면 요셉이 철없는 형들을 걱정해서 말한 것 같으나,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다투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가즈떨다, 흔들리다, 동요하다는 뜻으로, 흔히 두려움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단어다. 그래서 유대인 랍비들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 요셉의 형들이 많은 물품을 싣고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강도들을 만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도록 격려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르우벤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잘못에 대해 서로 탓하지 말라는 당부로 해석한다. 아무튼, 요셉은 끝까지 형들과의 화해가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요셉의 걱정대로, 또는 당부대로, 형들 일행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린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26).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해한다. 여기서 어리둥절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푸그는 문자적으로 무감각해지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에 근거해서 상황을 다시 표현해 보자면, 야곱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할 신빙성이 없는 말로 들었다. "니네들이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안 믿는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과 얼마나 서원한 관계 속에서 외롭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 옛날 요셉이 들판에서 죽었다고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보고할 때, 그들은 피에 젖은 옷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말해 놓고, 이제 와서 요셉이 살아 있고,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다는 것이 어떻게 야곱의 귀에 곧이곧대로 들리겠는가.

 

이 외에도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신뢰를 잃은 일이 많다. 장남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통간을 하질 않았나,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 강간 사건 때 아버지 모르게 세겜 사람들을 모두 도륙내어 아버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게다가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보내 놨더니, 시므온을 볼모로 잡히게 해 놓고 돌아 왔으며, 양식 값을 치르기 위해 준 돈도 자루에 도로 가지고 와 놓고 왜 그것이 여기에 들었는지 모르겠다며 이상한 말을 해댔다. 또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베냐민을 내놓으라고 협박 아닌 협박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 야곱이 어떻게 아들들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여준 환대가 닫혀 있던 야곱의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아들들의 말을 못 믿었지만,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내온 환대(암나귀 열 필에 가득 실린 선물과 양식들)를 보고 야곱은 아들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 상황은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27).

 

그렇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 기운이 소생했다. ‘기운이 소생했다는 말은 영이 살았다는 말이다. , 무감각해졌던 마음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들들을 믿지 못해 외로움 가운데 살았던 야곱의 마음이 다시 환해졌다는 뜻이다. 요셉을 잃고 아픈 가슴을 부여 안고 살았는데, 게다가 이제 베냐민 마저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살았는데, 비로소 야곱의 마음에 기쁨이 돌아온 것이다.

 

인간의 기쁨은 외로움이 극복될 때 온다. 환영 받지 못할 때 인간은 외로움에 던져지지만, 환대 받을 때 인간은 외로움을 극복하게 된다. 환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구원의 빛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을 때 죽음에 처해졌지만, 팔려간 애굽에서 환대 받았을 때 자존감을 회복하여 과거의 어두운 상처를 씻어내고 형들과 화해할 수 있었다.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가서 애굽에서 환영 받지 못했을 때 마음이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 받았을 때 기쁘고 즐거운 마음 가운데 그 동안의 죄책감을 씻어 버리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야곱은 외로움 가운데 살았지만,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식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풀고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기쁨의 향연을 보는 일은 가슴 벅차다. 그 기쁨이 바이러스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옮겨지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누구든지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누구든지 환영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자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우선 배제부터 하는 사회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엔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외로움에 던져지지 않으려고, 상대방에게 인정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들의 몸 짓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현대인들의 우울증은 바로 이렇게 소외되어 외로움 가운데 처해지는 데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 진다.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외로움에 처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외로움에 처해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환영해 주었듯이, 우리도 서로 환영하면서 살자. 그것이 그리스도의 기쁨이요 우리의 기쁨이요, 결국 구원의 기쁨이다.

 

Posted by 장준식

가인의 후예에서 아담의 후예로

 

미국은 졸업의 계절이다. 졸업한 이들의 웃음이 담긴 사진이 도처에서 올라온다. 그러나 졸업한 이들의 희망찬 웃음은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현실은 정말 냉혹하기만 하다.

올해인가 작년인가, 연세대학교 졸업식에 이런 현수막이 걸린 적이 있다. "연대 나오면 뭐햐나, 백순데.."

 

요즘엔 아무리 높은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다. 학위가 다 자기만족에 머무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자기 만족이라도 받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인 시대이다. 자기 만족도 없는 사람들은 사회의 낙오자인양 죄책감마저 드는 시대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처럼 그나마 낫다( 3:17). 수고하면 그나마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이런 형벌을 받는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요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라 가인의 후예인 것 같다.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수고한 만큼 먹고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땅을 아무리 갈아도 효력이 나지 않는데, 땅 가는 것 자체로 만족을 얻으며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을 먹을 때 오는 만족만큼 근본적이고 더 큰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자기만족만 누리다가 그렇게 그냥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 즉 일명백수로 살다가 삶을 마감할 수는 없지 않는가.

 

1994년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곡을 발표하여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좀 더 솔직해봐 넌 할 수 있어.”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에서 가방 끈 길게 만들어 주는 데만 관심 있는 한국 교육 현실을 비판했다. 서태지는 가방 끈이 길어야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는 신화를 깨고자 했다. 그런데 과연 깨졌는가?

 

한국 사회의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은 단순히 가방 끈을 늘려 보겠다는 관심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가방 끈이라도 늘려야 빡빡한 현실이 좀 달라질까 시도해 보는 젊은이들의 절박함이 담겨 있는 슬픈 이야기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땅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가인의 후예에서 벗어나, 그래도 평생 수고하면 먹고 살 수는 있었던 아담의 후예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고, 목사 안수를 받아도 갈 데가 없는 답답한 현실에 신음하고있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 솔직히 가장 큰 문제는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현실인식능력을 찾아보기 힘들고, 현실에 처절하게 저항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박약하다는 것인 것같다.

- 사회체제의 불의에 대해 사자후를 토하는 젊은 마르크스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비극적인 삶의 현실을 뚫고 지나가는초인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 사회체제가 불의한데 개개인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불의한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해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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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7. 22:54

멈춤과 나눔

(왕상 10:23-25, 전도서 1:2-3)

 

현대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멈추는 일과 나누는 일이다. 더 힘든 건 멈춰야 하는 것을 알고 나누어야 하는 것을 하는 데 그것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제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개념에 의해서 돌아간다. ‘신자유주의경제 개념의 핵심은 무한경쟁이다. 발전을 위해 경쟁은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무한으로 치달을 때 거기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성 말살이라는 요소이다. 무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람의 가치는 상실되고,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자기 자신 또한 넘어야 할 으로 간주되는 상황에 이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두 무한경쟁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멈추는 것을 싫어한다. 멈추면 짜증난다.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 빨간 신호등에 걸렸을 때 계속 달리지 못하고 서야 하는 것 때문에 짜증난다. 바쁜 시간에 스쿨버스를 만나면 짜증난다. 물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멈춰 서야 하는 것이지만, 전진하지 못하고 서야 하는 상황에 짜증난다. 병원 가서도 몇 분 보지 않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짜증난다.

 

우리들은 어느새 나누는 일 또한 힘들어 하게 됐다. 서로가 다 어려운 시절에는 나누며 사는 게 오히려 미덕이었다. 내가 좀 가진 게 없어도 모두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남들보다 조금 못 가진 것을 못 견뎌 하는 시대가 됐다. 남들보다 좀 못 가지면 인생의 낙오자인 양 매우 불쾌한 생각과 더불어 모멸감을 느끼는 세상이 됐다. 게다가 풍요로운 세상에 살다 보니 나눔에 대한 감각이 거의 죽은 상태가 됐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어려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리고 나눔이라는 가치 또한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자기 포장 수단으로 전락한 것도 문제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풂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주가를 높이려고 한다. 나눔 또한 철저하게 산업화된 것이 현실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성경의 인물 중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솔로몬이 수위를 차지한다. 성경의 인물에 빗대어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솔로몬과 같이 부귀 영화를 누리는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의 저자가 솔로몬의 부귀 영화를 기록한 이유는 솔로몬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을 부러워한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왕상 10:23).

 

실제로 솔로몬의 부와 명성은 에 달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값비싼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을 찾아왔다. 솔로몬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와 명성은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만약 솔로몬에 대한 기록이 열왕기상 10장으로만 끝났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부귀와 영화(부와 명성)’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에 대한 기록을 한 장 더 할애한다. 열왕기상 11장에 기록된 솔로몬은 이전 열 장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솔로몬과 사뭇 다른 솔로몬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 솔로몬이 여색과 우상숭배에 빠져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나라를 두 동강이 낸 주범으로 지목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주극생란 낙극생비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술이 극에 달하면 난리가 나고 쾌락이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는 뜻이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126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이 성어는 전국시대 제() 나라의 종횡가 순우곤(淳于髡)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순우곤(淳于髡)은 제()나라 사람의 데릴사위(지위가 낮아 죄수와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다)였다. 그는 키가 일곱 자도 안 되지만 익살스럽고 변설에 뛰어나 제후들에게 자주 사신으로 갔으나 굴욕을 당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제위왕(齊威王)8년에 초()나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제나라를 쳐들어왔다.

 

제나라 위왕은 순우곤을 사자로 삼아 조()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고, 조나라 왕은 정예 병사 10만 명과 전차 천 승()을 주었다. 초나라는 이 말을 듣고 밤중에 군대를 이끌고 가 버렸다.

 

위왕은 몹시 기뻐하여 후궁에 주연을 준비하여 순우곤을 불러 술을 내려주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어느 정도 마셔야 취하시오?”

 

순우곤이 대답했다.

 

“신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위왕이 말했다.

 

“선생이 한 말을 마시고 취한다면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소? 그 이유를 들려줄 수 있소?”

 

순우곤이 대답했다.

 

“대왕이 계신 앞에서 술을 내려 주신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곁에 서 있고 어사(御史; 문서와 기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뒤에 있어, 신은 몹시 두려워하며 엎드려 마시기 때문에 한 말을 못 넘기고 바로 취합니다.

 

만일 어버이에게 귀한 손님이 있어 신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꿇어앉아 앞에서 모시며 술을 대접하면서, 때때로 끝잔을 받기도 하고 여러 차례 일어나 술잔을 들어 손님의 장수를 빌기라도 하면 두 말을 못 마시기 전에 즉시 취합니다. 만약 사귀던 친구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뜻밖에 만나면 너무 기뻐 지난날 일을 이야기하고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까지 서로 터놓게 되어 대여섯 말을 마시면 취합니다.

 

만약 같은 고향마을에 모여 남녀가 한데 섞여 앉아 서로 상대방에게 술을 돌리며 장기와 투호 놀이를 벌여 짝을 짓고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아도 벌을 받지 않고,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금하는 일이 없으며, 앞에 귀걸이가 떨어지고 뒤에 비녀가 어지럽게 흩어지는 경우라면 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여 여덟 말쯤 마셔도 약간 취기가 돌 뿐입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끝나면 술 단지를 한군데로 모아 놓고 자리를 좁혀 남녀가 한자리에 앉고 신발이 뒤섞이고 술잔과 그릇이 어지럽게 흩어지고(杯盤狼藉) 마루 위의 촛불이 꺼집니다. 주인은 저만을 머물게 하고 다른 손님들을 돌려보냅니다. 이윽고 엷은 비단 속옷의 옷깃이 열리는가 싶더니 은은한 향내가 퍼집니다. 이때 신의 마음이 몹시 즐거워 한 섬은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故曰酒極則亂,樂極則悲).’라고 하는데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사물이란 지나치면 안 되며, 지나치면 반드시 쇠합니다.”

 

이러한 말로(위왕에게) 풍간하였다. 위왕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위왕 그 뒤로 밤새워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고, 순우곤에게 제후들 사이의 외교 업무를 맡겼다. 왕실에서 주연이 있을 때마다 순우곤이 항상 왕을 모셨다.

<출처: 김영수의 [나를 세우는 옛 문장들]>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과유불급"의 출전은 《논어(論語)》〈선진편(先進篇)〉에 공자(孔子)와 제자 자공(子貢) 간의 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다른 제자인 자장(子張)과 자하(子夏)에 대해 물었다. "(:자장의 이름)와 상(:자하의 이름)은 누가 어집니까?"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하니, 다시 자공이 반문하기를 "그럼 사가 낫다는 말씀입니까?"하니, 공자는 다시 답하기를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子貢 問師與商也 孰賢,  子曰 師也 過 商也 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고,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모자라고 도달하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는 않지만, 극에 달하고 지나친 것은 그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기억하면서,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진 성경의 다른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전도서에 등장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무엇이든지 극에 달아 슬퍼지는 것, 무엇이든지 지나쳐 인생을 망쳐버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멈춤과 나눔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관리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분량 외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은 모두 욕심이다. 신약성경의 야고보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우리가 사는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체제는 인간을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모두가 욕심가운데 살게 만든다. 멈추고 나누는 것보다 끝까지 질주하고 남들이 따라 올 수 없는 부를 축적하는 것을 미덕인 양 선전한다. 나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일단 쌓아놓고 보는 게 먼저라는 식이다. 기부금도 일단 쌓아 놓고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정도의 기부금을 내야 경쟁에서 온전히 이긴 사람처럼 대우 받는다. 그러니 현대인의 인생이 얼마나 피곤한가. 서로가 서로를 못살게 구는 것을 넘어 자신이 자기를 못살게 군다. 요즘 서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주제의 책은 단연 자기계발서이다. 자신이 잘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결국 자기 자신이 아직 덜 계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계발만 더 잘 되면, 무한경쟁에서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나 자신 또한 나에게 극복해야 할 적이 되어 생명을 향유하지 못하고 생명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진하고 마는 불행한 인생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성경과 교회는 어떠한 메시지를 던져주어야 할까?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통해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이 사회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 성경의 멈춤과 나눔의 메시지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네준 빨간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하는 메시지, 그 메시지를 통해 가상현실(무한경쟁)에서 나와 자신의 삶을 영유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특별히 모세 오경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과 희년 사상인데, 그것이 담고 있는 뜻은 멈춤과 나눔의 가치에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멈추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면 그 가치가 상실된다. 아무리 나쁜 일도 일단 멈추는 데서부터 다시 회복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통해서 안식일의 가치를 실현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이 멈추는 순간이다. 부활은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모여 작은 부활절로서의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의 변혁(변화)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멈추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하고 잠 못 이루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 나누지 못하는 것만큼 가난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멈춘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실존을 깨닫는 일과 같다. 영어단어 ‘handful’손으로 움켜쥘 만큼의 뜻을 가지고 있다. ‘손으로 움켜쥘 만큼많다는 뜻이 아니라 적다는 뜻이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인간의 위()는 자신의 주먹만하다. 주먹만한 위에 채워 넣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그야말로 ‘handful’하다. 그러므로 많이 먹으면 탈이 나지만 적게 먹으면 오히려 편안하다.

 

좋은 것뿐만 아니라 해로운 것도 손으로 움켜쥘 만큼만 하다가 멈춰야 한다. 그래야 몸이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생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이러한 것도 극에 달하면 결국 자기 몸만 상하고 자기의 인생과 상대방의 인생을 망치고 만다. 우리는 복음서의 이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절대로 나누지 못한다. 나눔은 마음이 풍요로운 자가 누리는 생명의 향연이요,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기 삶 속에 구현하는 놀라운 신앙 행위이다.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헌금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금을 많이 내어 놓을 들 무슨 소용이 있나. 물론 그렇게라도 공공선을 이루는 것은 그렇게 나무랄만한 것은 못되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렇게 차선책을 택하도록 이끌지 않고, 삶 자체가 나눔의 삶이 되도록 도전한다. 가령, 회사의 사장이 사장이니까 자기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 교회에 헌금 많이 하고 사회에 기부금을 많이 해서 자기 혼자만 영광 받는 자리에 서지 말고, 자기 자신이 좀 덜 가져가더라도 직원들에게 수익을 더 분배하여 직원들과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이 궁극적인 나눔의 삶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많이 벌어 혼자만 기쁘고 즐거워 하나님께 많이 드리고 사회에 기부 많이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수익분배의 구조를 철저한 나눔의 구조로 혁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풍요로운 듯하면서도 인생이 슬픈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극에 달하도록 우리 모두를 무한경쟁에 치닫게 하는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왜 주일을 지키는 지, 왜 우리는 예배하는 자들로 하나님께 나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는 법이다. 극에 달하면 생명의 가치를 상실하고 결국 상대방을 소모하고 자기 자신을 소모하여 소멸될 뿐이다.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소멸하는 일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 그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자, 그런 자는 주일(안식일)과 예배의 가치가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고 거기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줄 안다. 주일과 예배의 가치는 멈춤과 나눔에 있다. 멈추라, 그리고 나누라.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우리가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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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4. 05:37

나는 요셉이라 (구원의 신비)

창세기 55

(창세기 45:1-15)

 

하나님은 역전의 용사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이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요셉은 곤경에 처한 동생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으려 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고 이제 자기 자신의 정체를 그들에게 밝혀도 되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물이 서서히 뜨거워지다 임계점에 도달해 수증기를 내뿜으며 끓어 오를 때와 같다. 임계점에 도달한 물이 보글보글 끓어 오르며 공중에 수증기를 풀풀 내뿜듯이, 요셉은 감정의 임계점에 도달해 그 동안 꾹꾹 참았던 눈물을 펑 터뜨린다. 요셉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로의 궁중 사방에 퍼져나갔다.

 

꺼이꺼이 울면서 요셉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형들에게 드러낸다. “나는 요셉이라 (I am Joseph!).” 요셉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형들에게 가장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존재가 요셉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형들은 요셉이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둥절해서 아무런 반응도 못한다.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인간의 속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에게만 오감을 열어 놓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면 인간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고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뒤 허탈한 심정으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과 함께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런데 두 제자는 자신들과 함께 걷고 있는 존재가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들의 오감은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게 된 것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며 그들의 오감을 열어주셨을 때이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24:30-31).

 

신앙이란 닫힌 오감(감각들)을 여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영안을 연다라고 말한다. 처음 인간은 오감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타락이란 오감이 닫혀 버린 것을 말한다. 오감이 닫혀 버린 타락한 인간(죄인)은 더 이상 진리(하나님)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매우 편협한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방자인 것은 우리의 오감을 열어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오감을 회복한 신앙인 요셉의 고백을 들어보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 이것은 평범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신앙 고백이 아니다. 형들에게 두 배로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신앙 고백한다.

 

신앙은 삶의 해석학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이는 신앙(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신앙을 왜곡한 말이다. 물론, 신앙을 아편으로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나 있는 법이다. 일례로 부엌 칼은 요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쓰는 사람도 있다. 부엌 칼은 원래 음식을 만들어 생명을 살리는 데 써야 온전한 것인데, 반대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데 쓰는 사람은 부엌 칼의 용도를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을 심하게 훼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이 바로 신앙을 아편처럼 사용하는 이들이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다.

 

신앙은 오감을 열어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요셉의 스토리를 알거니와, 요셉과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 속에 무슨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요셉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요셉처럼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십중팔구 그 권력을 이용하여 원수 갚는 데 썼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신앙을 통하여 오감을 열어 젖힌 참된 신앙인이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불행으로 보지 않고,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다. 요셉은 타락한 오감을 제대로 회복한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름지기 신앙이란 바로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로의 새창조 역사를 보이는 법이다.

 

요셉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렇게 밝힌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7). 여기서 후손(쉐에리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에리트남은자, 남은 것, 살아남은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 ‘후손은 극심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자를 뜻한다. <생명 보존과 후손> 모티브는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이 모티브이고, 요셉도 결국 이 모티브를 가진 이야기이다. 이후 출애굽 이야기도 같은 모티브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참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구원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타락한 구원을 갈망하는 자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의 극대화를 위한 욕심을 채울 뿐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고,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로의 거듭남이 바로 구원이다. 이러한 거듭남 없이 구원을 논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요셉이 형들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형들을 괴롭혔던 이유는 형들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던 형들이 얼마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존재로 바뀌었는가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요셉은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형들에 의해서 버림 받았다. 그런, 요셉은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 받았다. 또한 베냐민은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비로소 깨달은 형들에 의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형들 자신 또한 그렇게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생명 또한 구원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요셉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설명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끔 형들의 오감을 열어젖히는 작업을 한다. 요셉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12).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비로소 깨달은 형들은 이제 그 동안 막혀 있었던 오감을 열어 현재 자신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받아 들인다. “자기 아우 베냐민을 목에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고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

 

구원 받지 못한 자,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 생명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가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 진리(하나님)를 향해 오감이 열리지 못한 자, 여전히 타락한 자, 죄인은 생명을 헤치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다. 형들이 그랬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어떻게 하면 요셉의 생명을 빼앗을까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생명을 무참히 짓밟았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동생의 울부짖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 울부짖음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둘러 앉아 점심 도시락을 까먹었다.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없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쳤던 군중들도 그랬다. 그들은 예수가 누군지 몰랐다. 그들은 예수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 편승하여 사납게 외쳤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마땅히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아무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로마 총독 빌라도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알고 물은 것이 아니라, 모르고 물은 것이었다. 아니, 비웃음의 물음이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 일리가 없다는 물음이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밝히며 나는 요셉이라!”고 했을 때 형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셨을 때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16:8).

 

신앙은 오감을 여는 작업이다. 오감을 여는 작업은 쉽지 않다. 신앙은 한 순간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동의 장치가 아니고, 산을 오르는 지난한 과정과도 같다. 그래서 신앙을 일컬어 순례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의 작업을 통해 오감이 열린 신앙인은 요셉이 보는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보게 된다. 형들은 요셉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살리시고 그 흉측한 죽음을 생명의 도구로 삼으셨다.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고 그 흉측한 십자가를 생명과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구원의 신비이다.

 

그 구원의 신비는 온통 생명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신앙인은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방식이다. 그것을 보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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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5. 12. 10:42

이방인

 

나는 누군가에게 이방인이다

아니 나는 모두에게 이방인이다

저녁거리,

그 쓸쓸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노을로

고개를 돌리는 건

여기에서는 불경한 짓이다

그 너머 있는

무지개 마을을 상상하는 건

여기에서는 교수형감이다

이들에게 어제는 먼 미래와 같고

먼 미래는 태초와 같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마음조차

괴로운 상상인 것은

이들에게 내일은

아직 경험되지 못한

감각의 바깥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석양에 기울어지는 그림자만

나를 바싹 뒤쫓았을 뿐,

내가 거리를 돌며 본 건

옛날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발견한 오싹한 느낌,

그들은 모두 예전에

죽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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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0. 12:59

하나님 같은 어머니, 어머니 같은 하나님

(이사야 66:13-14, 요한복음 15:4-5)

 

한국에서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55일은 어린이날이고, 58일은 어버이날이고, 5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미국은 1365일을 어린이날로 간주하기 때문에 어린이날이 따로 없다. 미국에서는 510일을 어머니의 날로 지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함께 묶어 어버이날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미국은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따로 지키고 있다. 이것은 문화의 차이가 반영된 것이다. 한국은 유교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집안의 최고 위치에 오랫동안 군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함께 지키는 데 큰 어려움이 많다. 이혼한 가정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가정의 가치를 가장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이혼이 가장 많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며칠 상간으로 있는 것은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부모 자식의 관계는 곧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로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는 평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 익숙하지만, 실상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교리적인 고백이지, 하나님이 인간처럼 을 지닌 분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어,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익숙한 것을 통해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종말에나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리고 이사야서 42장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속성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투영시킨다면, 하나님은 아버지를 닮았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닮았는가? 아마도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씀하실 분이 많을 것이다. 보통 아버지들은 자비롭지 못하고 은혜롭지 못하고 노하기를 불같이 하고 죄를 용서치 않는다. 그래서 흔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무서움이 많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애틋한 경우가 많다. 다음은 박목월 시인의 아들이요,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지내신 박동규 씨의 어머니에 대한 간증이다.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 같은 존재이다. 부모는 자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를 잘 성장하도록 도울 수도 있고, 방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플레르 펠르렝 씨의 이야기를 보자. 플레르 펠르렝은 한국계 프랑스 사람이다. 플레르는 이란 뜻인데, 참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다. 그는 프랑스 문화부장관으로 자랑스런 한국인 2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한국계 인물로 프랑스 정계에 진출한 첫 번째 인물이다. 한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이 여성은 그러나 사실 한국으로부터 버려진 존재였다. 서울 빈민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거리에 버려졌고, 생후 3~4일쯤 됐을 때 거리에서 발견돼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6개월 여 기간 동안 보살핌을 받던 그녀는 운명적으로 프랑스의 한 평범한 가정으로 입양된다.

 

그를 입양한 프랑스 아버지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평소 교육에 대한 아쉬움과 열정이 있던 이 양어머니는 딸에게 자신이 못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남다른 교육열을 보였다. 그런 어머니의 바람대로, 펠르랭은 정말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결국 그녀는 남들보다 2년이나 빠른 16세 때 이미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프랑스의 최고 명문 학교들을 연이어 졸업한다. 경제, 정치, 행정에 관련된 최고 학교들을 다 마친 후 결국 정치에 입문했고, 이제 프랑스 정부의 요직인 프랑스 통상장관에 이어 문화부장관에 오른 기적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신문 시사에서 가져옴)

 

이처럼 부모는 아이를 버릴 수도 있고, 이렇게 잘 키울 수도 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운명은 이처럼 갈린다. 그러니, 부모가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요즘 사회 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아동 학대문제이다. 다음은 작년에 났던 기사다.

 

신우(가명)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친가외가 모두 스무살짜리 아빠와 한살 어린 엄마의 임신과 출산을 질책했다. 환대받지 못한 어린 부부는 우는 아기를 달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다툼이 일상이 됐다. 신우가 태어난 지 한달이 되던 2014 2월 어느 날, 부부는 심하게 다퉜다. "신우를 없애자"는 말을 꺼낸 건 아빠였다. "나가 있으라"는 그의 말에 엄마는 현관으로 향했다. 아빠는 우는 아이를 냉동실에 넣었다.

 

이렇게 아동 학대가 일어나 아이들이 죽는 경우의 시작은 90% 이상이 가정불화라고 한다. 부부 간의 싸움이 시발점이 되어, 결국 부모가 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 불화가 일어나는 원인 중 67%경제 곤란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느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부 간에 화목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게 되기 전에는 서로 간의 사랑이 바탕이 된다. 그러다 아이를 낳으면 관심사가 아이들에게 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생기면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일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놓치고 사는 것이 있다. 아이들도 중요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을 지탱하는 요소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일에 대한 열정도 아니고, 결국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다. 시간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다. 그러나 실상 시간과 돈을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하는 곳은 자녀들이 아니라, 부부 간의 사랑이다. 부부 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혼한 부부들, 아이를 둔 부부들은 자녀를 위한 희생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인생 최대의 보람으로 삼는다. 물론 자녀를 책임져야 할 부모 입장에서는 굉장히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아이들은 따라쟁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운다’. 부모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겠는가? 부모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니, 너무 자식들을 위해 희생만 하지 말고, 부부 간의 행복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시라.

 

우리는 성경에서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 중 대표적인 성경 구절 몇 군데만 함께 보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편 121:3-4)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이사야 66:13-1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1930년에 양주동 박사가 지은 어머니 마음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자.

1: 나실제 괴로움 다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하나님의 모습은 이렇게 어머니를 닮았다. 우리가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성실하게, 온 마음을 다해 할 수 있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 하나님을 알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고,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보고 세상을 돌보는 데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예수 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는 것에 있지 않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데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이미 우리는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처럼사랑이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면, 우리의 삶 구석구석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겠는가?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내 자식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선한 사랑에게만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베풀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볕을 비춰주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기가 제일 중요한 사회이다.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회이다. 자기의 감정이 제일 중요한 사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은 더불어 어울려 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헌신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어울려 살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제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을 위해 너무 자기 자신을 희생만 시키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히 배려할 수 있는 자기조절능력을 갖출 때, 사회는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4-5).

 

하나님 같은 어머니가 되어, 또는 하나님 같은 아버지가 되어 자녀를 돌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보려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들이 포도나무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그때 비로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혹시, 삶에서 하나님 같은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아름다운 열매, 사랑의 열매,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 잘 안 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붙어 있는가를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 같은 어머니, 아버지로서 이 세상에서 많은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가 얼마나 포도나무 되신 하나님께 붙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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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7. 06:50

이것이냐 저것이냐

창세기 54

(창세기 44:1-34)

 

그리스 신화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신탁이 내려졌는데, 장차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신탁이었다. 이 신탁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가족들에게 버림 받고, 또한 성장하여 방황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 테베로 가는 중 그 신탁이 실현된다. 오이디푸스는 길에서 만난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와 논쟁 끝에 그가 자신의 아버지인줄도 모르고 그를 죽이고, 테베 왕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어머니인줄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산다.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테베로 오는 중 테베의 오랜 골칫거리인 스핑크스를 만난 오이디푸스는 그 요상한 괴물과 씨름하게 된다. 스핑크스는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다 수수께끼를 냈는데, 그의 수수께끼는 이것이었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맞히는 사람은 살아서 스핑크스의 앞을 통과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혔다. 오이디푸스 또한 이 무시무시한 수수께끼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내놓고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던 스핑크스에게 정답을 내 놓는다. “그것은 인간이다!” 오이디푸스가 정답을 맞히자 스핑크스는 수치심에 괴로워하며 자결한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자신에게 내려진 또 다른 신탁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오이디푸스는 신탁대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것을 알자 어머니이자 부인인 이오카스테가 자결해 죽고 난 뒤 그녀가 하던 브로치로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된다.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게 된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는 스핑크스의 질문 또한 심오한 것이다.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 독수리의 날개와 늑대의 발톱을 갖고 있었다. 즉 스핑크스는 둘이면서 셋, 셋이면서 넷, 넷이면서도 하나의 존재였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형상화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간의 본질 자체가 수수께끼라는 뜻이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혔을 때 스핑크스는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던 인간의 비밀을 오이디푸스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껴 자살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스핑크스의 착각이었다. 정답을 맞히긴 했지만,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고, 그렇게 자기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하여 세상을 보지 못하는 지경으로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눈에 비수를 꽂으며 의식을 잃었던 오이디푸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첫마디는 놀랍게도, “, 빛이여!”였다. 눈이 없는 사람이 빛이라니, 신하들이 무슨 의미인지 묻자 오이디푸스가 대답했다.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그는 비로소 눈이 먼 뒤에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시기심에 불타 노예상에게 팔아버렸던, 그래서 어딘가에서 굶주림과 학대에 못 이겨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동생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자신들 앞에서 이렇게 호령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야곱의 아들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앞에 이렇게 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형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계속해서 시험 거리를 던져주며 형들과의 화해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간다. 화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해는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화해를 청해도 상대방이 화해할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을 오히려 관계를 더 망칠 수 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을 확인하고, 동생 베냐민도 잘 성장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요셉은 이제 마지막 확인 작업을 한다. 그것을 위해 요셉은 형제들에게 함정을 놓는다. 요셉은 청지기에게 시켜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자신이 즐겨 쓰는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도 함께 넣으라고 한다. 그리고, 형제들이 길을 떠나 얼마큼 갔을 때 그들을 따라 가서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며 은잔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추궁하라고 시킨다.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싶었던 형제들은 자신들 중 어느 누구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면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자루를 하나씩 풀어나가자 은잔이 발견된 자루는 베냐민의 자루였다. 그러자 형제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13).

 

요셉은 왜 이런 계략을 꾸몄을까? 이 계략을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형들의 반응 (특히 레아의 아들들)을 보기 위함이었다. 베냐민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뒤, 형들이 베냐민을 향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예전에 형들(레아의 아들들)은 시기 질투에 사로잡혀 곤경에 처한 자신들의 배다른 동생 요셉을 헌신짝 취급하며 노예상에게 팔아 버렸다. 만약 아직까지 형들이 그때와 꼭 같은 마음을 가지고, 동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요셉 쪽에서 화해를 청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런 형들과 화해한 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요셉은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곤경에 처한 베냐민을 버리고 갈 것인가? 아니면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한 것인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게 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던 것처럼 요셉의 계략 또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요셉이 던진 이 인생의 수수께끼에 형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화해가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요셉도 형들처럼 그들의 인생을 죽음에 처하게 할 것인가 판가름 나게 된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형제들의 반응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자 형제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요셉의 거처로 되돌아 온다. 자신들의 맹세에 따라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서이다. 형제들을 대표해서 유다는 요셉에게 나아가 베냐민 구명을 위한 탄원을 한다. 유다의 탄원은 구구절절하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아들 한 명(요셉)을 잃고 얼마나 슬픈 세월을 보냈는지, 그리고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만약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의 총리대신의 요청대로 어쩔 수 없이 함께 데리고 온 베냐민을 아버지에게로 다시 못 데려가는 일이 생기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며 간절히 탄원한다.

 

요셉은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하여 저토록 구구절절하게 탄원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솟구쳐 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낸 계략을 통해 형들이 그 동안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유다는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끝까지 동생 베냐민과 아버지를 지켜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원래 형제가 가져야 할 따뜻한 마음 아니었던가?

 

화해는 마음과 마음의 재결합이다. 화해는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다시 불타오르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서 그 옛날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서 무르익은 성숙한 마음, 즉 아버지와 형제를 돌보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더 큰 가치를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아는 책임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대답을 통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오이디푸스처럼, 형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인간다움을 견지하게 되었을 때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외쳤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다움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나아갈 길은 인간다움이 아닐까.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

규율(통제)의 가치

 

“창조적인 유망주에게는 어른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강한 규율이 필요하다. - 거스 히딩크

 

최근 한국 축구 유망주 이승우 선수의 부적절한 행동을 두고 말이 많은가 보다. 그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 국가대표 이영표 선수와 히팅크 감독이 한 마디씩 했다. 한 매체에서 이영표 선수는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축구선수 아르연 로번을 어떻게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거듭나도록 훈련시켰는지를 소개하며 이승우 선수에게 뼈 있는 충고를 했다.

 

내가 얼마 전 읽은 어떤 심리학자의 글에서도 확인한 바, 어린이가 성장하여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로 커 나갈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과 규율' 두 가지이다. 가장 뒤쳐지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부류는 부모에게 사랑만 받고 '통제' 받지 못한 아이들이고, 오히려 사랑을 못 받고 통제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앞의 아이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사랑과 규율(통제)'이 적절하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가치는 잘 알아도 통제(규율)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회에서 감동 받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이들의 검소함이고(허례허식이 없음) 다른 하나는 이들의 질서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은 자유분방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미국 학교를 다니는데, 실제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보면 강력한 규율 아래 아이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본다. 한 마디로, 학교가 무슨 수도원 같다. 복도를 걸어 다닐 때 뛰어다니거나 시끄럽게 잡답하는 친구가 없으며, 어딘가로 이동수업을 할 때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한국의 초중등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강한 규율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규율을 잊은 채 자기 자식에게 무조건 사랑만을 베풀기에 여념 없고, 학교에서는 부모와 학생의 눈치를 보며 아이들에게 강력한 규율을 적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창조성은 자유분방함에서 오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창조적인 인재를 키워 창조경영의 국가로 도약하고 싶다면,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규율(통제)'에 대한 부분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규율에 자기 자신을 최적화시키는 훈련부터 필요하다. 그 다음에 오는 자유로움이 가치 있는 창조, 방종하지 않는 창조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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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