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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07 이것이냐 저것이냐
  2. 2015.05.07 규율(통제)의 가치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7. 06:50

이것이냐 저것이냐

창세기 54

(창세기 44:1-34)

 

그리스 신화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신탁이 내려졌는데, 장차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신탁이었다. 이 신탁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가족들에게 버림 받고, 또한 성장하여 방황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 테베로 가는 중 그 신탁이 실현된다. 오이디푸스는 길에서 만난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와 논쟁 끝에 그가 자신의 아버지인줄도 모르고 그를 죽이고, 테베 왕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어머니인줄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산다.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테베로 오는 중 테베의 오랜 골칫거리인 스핑크스를 만난 오이디푸스는 그 요상한 괴물과 씨름하게 된다. 스핑크스는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다 수수께끼를 냈는데, 그의 수수께끼는 이것이었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맞히는 사람은 살아서 스핑크스의 앞을 통과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혔다. 오이디푸스 또한 이 무시무시한 수수께끼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내놓고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던 스핑크스에게 정답을 내 놓는다. “그것은 인간이다!” 오이디푸스가 정답을 맞히자 스핑크스는 수치심에 괴로워하며 자결한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자신에게 내려진 또 다른 신탁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오이디푸스는 신탁대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것을 알자 어머니이자 부인인 이오카스테가 자결해 죽고 난 뒤 그녀가 하던 브로치로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된다.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게 된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는 스핑크스의 질문 또한 심오한 것이다.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 독수리의 날개와 늑대의 발톱을 갖고 있었다. 즉 스핑크스는 둘이면서 셋, 셋이면서 넷, 넷이면서도 하나의 존재였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형상화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간의 본질 자체가 수수께끼라는 뜻이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혔을 때 스핑크스는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던 인간의 비밀을 오이디푸스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껴 자살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스핑크스의 착각이었다. 정답을 맞히긴 했지만,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고, 그렇게 자기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하여 세상을 보지 못하는 지경으로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눈에 비수를 꽂으며 의식을 잃었던 오이디푸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첫마디는 놀랍게도, “, 빛이여!”였다. 눈이 없는 사람이 빛이라니, 신하들이 무슨 의미인지 묻자 오이디푸스가 대답했다.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그는 비로소 눈이 먼 뒤에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시기심에 불타 노예상에게 팔아버렸던, 그래서 어딘가에서 굶주림과 학대에 못 이겨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동생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자신들 앞에서 이렇게 호령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야곱의 아들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앞에 이렇게 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형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계속해서 시험 거리를 던져주며 형들과의 화해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간다. 화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해는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화해를 청해도 상대방이 화해할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을 오히려 관계를 더 망칠 수 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을 확인하고, 동생 베냐민도 잘 성장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요셉은 이제 마지막 확인 작업을 한다. 그것을 위해 요셉은 형제들에게 함정을 놓는다. 요셉은 청지기에게 시켜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자신이 즐겨 쓰는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도 함께 넣으라고 한다. 그리고, 형제들이 길을 떠나 얼마큼 갔을 때 그들을 따라 가서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며 은잔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추궁하라고 시킨다.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싶었던 형제들은 자신들 중 어느 누구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면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자루를 하나씩 풀어나가자 은잔이 발견된 자루는 베냐민의 자루였다. 그러자 형제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13).

 

요셉은 왜 이런 계략을 꾸몄을까? 이 계략을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형들의 반응 (특히 레아의 아들들)을 보기 위함이었다. 베냐민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뒤, 형들이 베냐민을 향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예전에 형들(레아의 아들들)은 시기 질투에 사로잡혀 곤경에 처한 자신들의 배다른 동생 요셉을 헌신짝 취급하며 노예상에게 팔아 버렸다. 만약 아직까지 형들이 그때와 꼭 같은 마음을 가지고, 동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요셉 쪽에서 화해를 청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런 형들과 화해한 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요셉은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곤경에 처한 베냐민을 버리고 갈 것인가? 아니면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한 것인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게 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던 것처럼 요셉의 계략 또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요셉이 던진 이 인생의 수수께끼에 형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화해가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요셉도 형들처럼 그들의 인생을 죽음에 처하게 할 것인가 판가름 나게 된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형제들의 반응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자 형제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요셉의 거처로 되돌아 온다. 자신들의 맹세에 따라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서이다. 형제들을 대표해서 유다는 요셉에게 나아가 베냐민 구명을 위한 탄원을 한다. 유다의 탄원은 구구절절하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아들 한 명(요셉)을 잃고 얼마나 슬픈 세월을 보냈는지, 그리고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만약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의 총리대신의 요청대로 어쩔 수 없이 함께 데리고 온 베냐민을 아버지에게로 다시 못 데려가는 일이 생기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며 간절히 탄원한다.

 

요셉은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하여 저토록 구구절절하게 탄원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솟구쳐 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낸 계략을 통해 형들이 그 동안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유다는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끝까지 동생 베냐민과 아버지를 지켜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원래 형제가 가져야 할 따뜻한 마음 아니었던가?

 

화해는 마음과 마음의 재결합이다. 화해는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다시 불타오르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서 그 옛날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서 무르익은 성숙한 마음, 즉 아버지와 형제를 돌보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더 큰 가치를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아는 책임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대답을 통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오이디푸스처럼, 형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인간다움을 견지하게 되었을 때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외쳤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다움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나아갈 길은 인간다움이 아닐까.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

규율(통제)의 가치

 

“창조적인 유망주에게는 어른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강한 규율이 필요하다. - 거스 히딩크

 

최근 한국 축구 유망주 이승우 선수의 부적절한 행동을 두고 말이 많은가 보다. 그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 국가대표 이영표 선수와 히팅크 감독이 한 마디씩 했다. 한 매체에서 이영표 선수는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축구선수 아르연 로번을 어떻게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거듭나도록 훈련시켰는지를 소개하며 이승우 선수에게 뼈 있는 충고를 했다.

 

내가 얼마 전 읽은 어떤 심리학자의 글에서도 확인한 바, 어린이가 성장하여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로 커 나갈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과 규율' 두 가지이다. 가장 뒤쳐지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부류는 부모에게 사랑만 받고 '통제' 받지 못한 아이들이고, 오히려 사랑을 못 받고 통제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앞의 아이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사랑과 규율(통제)'이 적절하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가치는 잘 알아도 통제(규율)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회에서 감동 받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이들의 검소함이고(허례허식이 없음) 다른 하나는 이들의 질서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은 자유분방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미국 학교를 다니는데, 실제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보면 강력한 규율 아래 아이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본다. 한 마디로, 학교가 무슨 수도원 같다. 복도를 걸어 다닐 때 뛰어다니거나 시끄럽게 잡답하는 친구가 없으며, 어딘가로 이동수업을 할 때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한국의 초중등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강한 규율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규율을 잊은 채 자기 자식에게 무조건 사랑만을 베풀기에 여념 없고, 학교에서는 부모와 학생의 눈치를 보며 아이들에게 강력한 규율을 적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창조성은 자유분방함에서 오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창조적인 인재를 키워 창조경영의 국가로 도약하고 싶다면,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규율(통제)'에 대한 부분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규율에 자기 자신을 최적화시키는 훈련부터 필요하다. 그 다음에 오는 자유로움이 가치 있는 창조, 방종하지 않는 창조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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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