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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0. 12:59

하나님 같은 어머니, 어머니 같은 하나님

(이사야 66:13-14, 요한복음 15:4-5)

 

한국에서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55일은 어린이날이고, 58일은 어버이날이고, 5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미국은 1365일을 어린이날로 간주하기 때문에 어린이날이 따로 없다. 미국에서는 510일을 어머니의 날로 지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함께 묶어 어버이날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미국은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따로 지키고 있다. 이것은 문화의 차이가 반영된 것이다. 한국은 유교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집안의 최고 위치에 오랫동안 군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함께 지키는 데 큰 어려움이 많다. 이혼한 가정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가정의 가치를 가장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이혼이 가장 많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며칠 상간으로 있는 것은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부모 자식의 관계는 곧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로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는 평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 익숙하지만, 실상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교리적인 고백이지, 하나님이 인간처럼 을 지닌 분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어,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익숙한 것을 통해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종말에나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리고 이사야서 42장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속성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투영시킨다면, 하나님은 아버지를 닮았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닮았는가? 아마도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씀하실 분이 많을 것이다. 보통 아버지들은 자비롭지 못하고 은혜롭지 못하고 노하기를 불같이 하고 죄를 용서치 않는다. 그래서 흔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무서움이 많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애틋한 경우가 많다. 다음은 박목월 시인의 아들이요,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지내신 박동규 씨의 어머니에 대한 간증이다.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 같은 존재이다. 부모는 자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를 잘 성장하도록 도울 수도 있고, 방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플레르 펠르렝 씨의 이야기를 보자. 플레르 펠르렝은 한국계 프랑스 사람이다. 플레르는 이란 뜻인데, 참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다. 그는 프랑스 문화부장관으로 자랑스런 한국인 2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한국계 인물로 프랑스 정계에 진출한 첫 번째 인물이다. 한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이 여성은 그러나 사실 한국으로부터 버려진 존재였다. 서울 빈민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거리에 버려졌고, 생후 3~4일쯤 됐을 때 거리에서 발견돼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6개월 여 기간 동안 보살핌을 받던 그녀는 운명적으로 프랑스의 한 평범한 가정으로 입양된다.

 

그를 입양한 프랑스 아버지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평소 교육에 대한 아쉬움과 열정이 있던 이 양어머니는 딸에게 자신이 못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남다른 교육열을 보였다. 그런 어머니의 바람대로, 펠르랭은 정말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결국 그녀는 남들보다 2년이나 빠른 16세 때 이미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프랑스의 최고 명문 학교들을 연이어 졸업한다. 경제, 정치, 행정에 관련된 최고 학교들을 다 마친 후 결국 정치에 입문했고, 이제 프랑스 정부의 요직인 프랑스 통상장관에 이어 문화부장관에 오른 기적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신문 시사에서 가져옴)

 

이처럼 부모는 아이를 버릴 수도 있고, 이렇게 잘 키울 수도 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운명은 이처럼 갈린다. 그러니, 부모가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요즘 사회 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아동 학대문제이다. 다음은 작년에 났던 기사다.

 

신우(가명)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친가외가 모두 스무살짜리 아빠와 한살 어린 엄마의 임신과 출산을 질책했다. 환대받지 못한 어린 부부는 우는 아기를 달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다툼이 일상이 됐다. 신우가 태어난 지 한달이 되던 2014 2월 어느 날, 부부는 심하게 다퉜다. "신우를 없애자"는 말을 꺼낸 건 아빠였다. "나가 있으라"는 그의 말에 엄마는 현관으로 향했다. 아빠는 우는 아이를 냉동실에 넣었다.

 

이렇게 아동 학대가 일어나 아이들이 죽는 경우의 시작은 90% 이상이 가정불화라고 한다. 부부 간의 싸움이 시발점이 되어, 결국 부모가 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 불화가 일어나는 원인 중 67%경제 곤란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느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부 간에 화목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게 되기 전에는 서로 간의 사랑이 바탕이 된다. 그러다 아이를 낳으면 관심사가 아이들에게 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생기면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일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놓치고 사는 것이 있다. 아이들도 중요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을 지탱하는 요소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일에 대한 열정도 아니고, 결국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다. 시간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다. 그러나 실상 시간과 돈을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하는 곳은 자녀들이 아니라, 부부 간의 사랑이다. 부부 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혼한 부부들, 아이를 둔 부부들은 자녀를 위한 희생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인생 최대의 보람으로 삼는다. 물론 자녀를 책임져야 할 부모 입장에서는 굉장히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아이들은 따라쟁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운다’. 부모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겠는가? 부모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니, 너무 자식들을 위해 희생만 하지 말고, 부부 간의 행복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시라.

 

우리는 성경에서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 중 대표적인 성경 구절 몇 군데만 함께 보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편 121:3-4)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이사야 66:13-1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1930년에 양주동 박사가 지은 어머니 마음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자.

1: 나실제 괴로움 다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하나님의 모습은 이렇게 어머니를 닮았다. 우리가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성실하게, 온 마음을 다해 할 수 있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 하나님을 알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고,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보고 세상을 돌보는 데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예수 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는 것에 있지 않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데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이미 우리는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처럼사랑이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면, 우리의 삶 구석구석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겠는가?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내 자식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선한 사랑에게만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베풀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볕을 비춰주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기가 제일 중요한 사회이다.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회이다. 자기의 감정이 제일 중요한 사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은 더불어 어울려 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헌신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어울려 살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제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을 위해 너무 자기 자신을 희생만 시키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히 배려할 수 있는 자기조절능력을 갖출 때, 사회는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4-5).

 

하나님 같은 어머니가 되어, 또는 하나님 같은 아버지가 되어 자녀를 돌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보려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들이 포도나무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그때 비로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혹시, 삶에서 하나님 같은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아름다운 열매, 사랑의 열매,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 잘 안 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붙어 있는가를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 같은 어머니, 아버지로서 이 세상에서 많은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가 얼마나 포도나무 되신 하나님께 붙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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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