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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4. 05:37

나는 요셉이라 (구원의 신비)

창세기 55

(창세기 45:1-15)

 

하나님은 역전의 용사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이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요셉은 곤경에 처한 동생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으려 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고 이제 자기 자신의 정체를 그들에게 밝혀도 되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물이 서서히 뜨거워지다 임계점에 도달해 수증기를 내뿜으며 끓어 오를 때와 같다. 임계점에 도달한 물이 보글보글 끓어 오르며 공중에 수증기를 풀풀 내뿜듯이, 요셉은 감정의 임계점에 도달해 그 동안 꾹꾹 참았던 눈물을 펑 터뜨린다. 요셉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로의 궁중 사방에 퍼져나갔다.

 

꺼이꺼이 울면서 요셉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형들에게 드러낸다. “나는 요셉이라 (I am Joseph!).” 요셉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형들에게 가장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존재가 요셉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형들은 요셉이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둥절해서 아무런 반응도 못한다.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인간의 속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에게만 오감을 열어 놓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면 인간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고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뒤 허탈한 심정으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과 함께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런데 두 제자는 자신들과 함께 걷고 있는 존재가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들의 오감은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게 된 것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며 그들의 오감을 열어주셨을 때이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24:30-31).

 

신앙이란 닫힌 오감(감각들)을 여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영안을 연다라고 말한다. 처음 인간은 오감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타락이란 오감이 닫혀 버린 것을 말한다. 오감이 닫혀 버린 타락한 인간(죄인)은 더 이상 진리(하나님)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매우 편협한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방자인 것은 우리의 오감을 열어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오감을 회복한 신앙인 요셉의 고백을 들어보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 이것은 평범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신앙 고백이 아니다. 형들에게 두 배로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신앙 고백한다.

 

신앙은 삶의 해석학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이는 신앙(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신앙을 왜곡한 말이다. 물론, 신앙을 아편으로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나 있는 법이다. 일례로 부엌 칼은 요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쓰는 사람도 있다. 부엌 칼은 원래 음식을 만들어 생명을 살리는 데 써야 온전한 것인데, 반대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데 쓰는 사람은 부엌 칼의 용도를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을 심하게 훼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이 바로 신앙을 아편처럼 사용하는 이들이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다.

 

신앙은 오감을 열어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요셉의 스토리를 알거니와, 요셉과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 속에 무슨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요셉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요셉처럼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십중팔구 그 권력을 이용하여 원수 갚는 데 썼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신앙을 통하여 오감을 열어 젖힌 참된 신앙인이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불행으로 보지 않고,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다. 요셉은 타락한 오감을 제대로 회복한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름지기 신앙이란 바로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로의 새창조 역사를 보이는 법이다.

 

요셉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렇게 밝힌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7). 여기서 후손(쉐에리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에리트남은자, 남은 것, 살아남은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 ‘후손은 극심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자를 뜻한다. <생명 보존과 후손> 모티브는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이 모티브이고, 요셉도 결국 이 모티브를 가진 이야기이다. 이후 출애굽 이야기도 같은 모티브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참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구원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타락한 구원을 갈망하는 자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의 극대화를 위한 욕심을 채울 뿐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고,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로의 거듭남이 바로 구원이다. 이러한 거듭남 없이 구원을 논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요셉이 형들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형들을 괴롭혔던 이유는 형들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던 형들이 얼마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존재로 바뀌었는가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요셉은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형들에 의해서 버림 받았다. 그런, 요셉은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 받았다. 또한 베냐민은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비로소 깨달은 형들에 의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형들 자신 또한 그렇게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생명 또한 구원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요셉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설명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끔 형들의 오감을 열어젖히는 작업을 한다. 요셉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12).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비로소 깨달은 형들은 이제 그 동안 막혀 있었던 오감을 열어 현재 자신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받아 들인다. “자기 아우 베냐민을 목에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고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

 

구원 받지 못한 자,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 생명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가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 진리(하나님)를 향해 오감이 열리지 못한 자, 여전히 타락한 자, 죄인은 생명을 헤치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다. 형들이 그랬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어떻게 하면 요셉의 생명을 빼앗을까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생명을 무참히 짓밟았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동생의 울부짖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 울부짖음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둘러 앉아 점심 도시락을 까먹었다.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없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쳤던 군중들도 그랬다. 그들은 예수가 누군지 몰랐다. 그들은 예수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 편승하여 사납게 외쳤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마땅히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아무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로마 총독 빌라도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알고 물은 것이 아니라, 모르고 물은 것이었다. 아니, 비웃음의 물음이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 일리가 없다는 물음이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밝히며 나는 요셉이라!”고 했을 때 형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셨을 때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16:8).

 

신앙은 오감을 여는 작업이다. 오감을 여는 작업은 쉽지 않다. 신앙은 한 순간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동의 장치가 아니고, 산을 오르는 지난한 과정과도 같다. 그래서 신앙을 일컬어 순례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의 작업을 통해 오감이 열린 신앙인은 요셉이 보는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보게 된다. 형들은 요셉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살리시고 그 흉측한 죽음을 생명의 도구로 삼으셨다.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고 그 흉측한 십자가를 생명과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구원의 신비이다.

 

그 구원의 신비는 온통 생명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신앙인은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방식이다. 그것을 보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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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