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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7. 22:54

멈춤과 나눔

(왕상 10:23-25, 전도서 1:2-3)

 

현대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멈추는 일과 나누는 일이다. 더 힘든 건 멈춰야 하는 것을 알고 나누어야 하는 것을 하는 데 그것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제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개념에 의해서 돌아간다. ‘신자유주의경제 개념의 핵심은 무한경쟁이다. 발전을 위해 경쟁은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무한으로 치달을 때 거기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성 말살이라는 요소이다. 무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람의 가치는 상실되고,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자기 자신 또한 넘어야 할 으로 간주되는 상황에 이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두 무한경쟁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멈추는 것을 싫어한다. 멈추면 짜증난다.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 빨간 신호등에 걸렸을 때 계속 달리지 못하고 서야 하는 것 때문에 짜증난다. 바쁜 시간에 스쿨버스를 만나면 짜증난다. 물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멈춰 서야 하는 것이지만, 전진하지 못하고 서야 하는 상황에 짜증난다. 병원 가서도 몇 분 보지 않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짜증난다.

 

우리들은 어느새 나누는 일 또한 힘들어 하게 됐다. 서로가 다 어려운 시절에는 나누며 사는 게 오히려 미덕이었다. 내가 좀 가진 게 없어도 모두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남들보다 조금 못 가진 것을 못 견뎌 하는 시대가 됐다. 남들보다 좀 못 가지면 인생의 낙오자인 양 매우 불쾌한 생각과 더불어 모멸감을 느끼는 세상이 됐다. 게다가 풍요로운 세상에 살다 보니 나눔에 대한 감각이 거의 죽은 상태가 됐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어려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리고 나눔이라는 가치 또한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자기 포장 수단으로 전락한 것도 문제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풂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주가를 높이려고 한다. 나눔 또한 철저하게 산업화된 것이 현실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성경의 인물 중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솔로몬이 수위를 차지한다. 성경의 인물에 빗대어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솔로몬과 같이 부귀 영화를 누리는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의 저자가 솔로몬의 부귀 영화를 기록한 이유는 솔로몬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을 부러워한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왕상 10:23).

 

실제로 솔로몬의 부와 명성은 에 달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값비싼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을 찾아왔다. 솔로몬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와 명성은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만약 솔로몬에 대한 기록이 열왕기상 10장으로만 끝났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부귀와 영화(부와 명성)’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에 대한 기록을 한 장 더 할애한다. 열왕기상 11장에 기록된 솔로몬은 이전 열 장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솔로몬과 사뭇 다른 솔로몬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 솔로몬이 여색과 우상숭배에 빠져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나라를 두 동강이 낸 주범으로 지목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주극생란 낙극생비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술이 극에 달하면 난리가 나고 쾌락이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는 뜻이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126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이 성어는 전국시대 제() 나라의 종횡가 순우곤(淳于髡)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순우곤(淳于髡)은 제()나라 사람의 데릴사위(지위가 낮아 죄수와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다)였다. 그는 키가 일곱 자도 안 되지만 익살스럽고 변설에 뛰어나 제후들에게 자주 사신으로 갔으나 굴욕을 당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제위왕(齊威王)8년에 초()나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제나라를 쳐들어왔다.

 

제나라 위왕은 순우곤을 사자로 삼아 조()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고, 조나라 왕은 정예 병사 10만 명과 전차 천 승()을 주었다. 초나라는 이 말을 듣고 밤중에 군대를 이끌고 가 버렸다.

 

위왕은 몹시 기뻐하여 후궁에 주연을 준비하여 순우곤을 불러 술을 내려주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어느 정도 마셔야 취하시오?”

 

순우곤이 대답했다.

 

“신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위왕이 말했다.

 

“선생이 한 말을 마시고 취한다면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소? 그 이유를 들려줄 수 있소?”

 

순우곤이 대답했다.

 

“대왕이 계신 앞에서 술을 내려 주신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곁에 서 있고 어사(御史; 문서와 기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뒤에 있어, 신은 몹시 두려워하며 엎드려 마시기 때문에 한 말을 못 넘기고 바로 취합니다.

 

만일 어버이에게 귀한 손님이 있어 신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꿇어앉아 앞에서 모시며 술을 대접하면서, 때때로 끝잔을 받기도 하고 여러 차례 일어나 술잔을 들어 손님의 장수를 빌기라도 하면 두 말을 못 마시기 전에 즉시 취합니다. 만약 사귀던 친구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뜻밖에 만나면 너무 기뻐 지난날 일을 이야기하고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까지 서로 터놓게 되어 대여섯 말을 마시면 취합니다.

 

만약 같은 고향마을에 모여 남녀가 한데 섞여 앉아 서로 상대방에게 술을 돌리며 장기와 투호 놀이를 벌여 짝을 짓고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아도 벌을 받지 않고,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금하는 일이 없으며, 앞에 귀걸이가 떨어지고 뒤에 비녀가 어지럽게 흩어지는 경우라면 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여 여덟 말쯤 마셔도 약간 취기가 돌 뿐입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끝나면 술 단지를 한군데로 모아 놓고 자리를 좁혀 남녀가 한자리에 앉고 신발이 뒤섞이고 술잔과 그릇이 어지럽게 흩어지고(杯盤狼藉) 마루 위의 촛불이 꺼집니다. 주인은 저만을 머물게 하고 다른 손님들을 돌려보냅니다. 이윽고 엷은 비단 속옷의 옷깃이 열리는가 싶더니 은은한 향내가 퍼집니다. 이때 신의 마음이 몹시 즐거워 한 섬은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故曰酒極則亂,樂極則悲).’라고 하는데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사물이란 지나치면 안 되며, 지나치면 반드시 쇠합니다.”

 

이러한 말로(위왕에게) 풍간하였다. 위왕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위왕 그 뒤로 밤새워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고, 순우곤에게 제후들 사이의 외교 업무를 맡겼다. 왕실에서 주연이 있을 때마다 순우곤이 항상 왕을 모셨다.

<출처: 김영수의 [나를 세우는 옛 문장들]>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과유불급"의 출전은 《논어(論語)》〈선진편(先進篇)〉에 공자(孔子)와 제자 자공(子貢) 간의 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다른 제자인 자장(子張)과 자하(子夏)에 대해 물었다. "(:자장의 이름)와 상(:자하의 이름)은 누가 어집니까?"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하니, 다시 자공이 반문하기를 "그럼 사가 낫다는 말씀입니까?"하니, 공자는 다시 답하기를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子貢 問師與商也 孰賢,  子曰 師也 過 商也 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고,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모자라고 도달하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는 않지만, 극에 달하고 지나친 것은 그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기억하면서,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진 성경의 다른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전도서에 등장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무엇이든지 극에 달아 슬퍼지는 것, 무엇이든지 지나쳐 인생을 망쳐버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멈춤과 나눔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관리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분량 외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은 모두 욕심이다. 신약성경의 야고보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우리가 사는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체제는 인간을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모두가 욕심가운데 살게 만든다. 멈추고 나누는 것보다 끝까지 질주하고 남들이 따라 올 수 없는 부를 축적하는 것을 미덕인 양 선전한다. 나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일단 쌓아놓고 보는 게 먼저라는 식이다. 기부금도 일단 쌓아 놓고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정도의 기부금을 내야 경쟁에서 온전히 이긴 사람처럼 대우 받는다. 그러니 현대인의 인생이 얼마나 피곤한가. 서로가 서로를 못살게 구는 것을 넘어 자신이 자기를 못살게 군다. 요즘 서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주제의 책은 단연 자기계발서이다. 자신이 잘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결국 자기 자신이 아직 덜 계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계발만 더 잘 되면, 무한경쟁에서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나 자신 또한 나에게 극복해야 할 적이 되어 생명을 향유하지 못하고 생명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진하고 마는 불행한 인생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성경과 교회는 어떠한 메시지를 던져주어야 할까?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통해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이 사회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 성경의 멈춤과 나눔의 메시지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네준 빨간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하는 메시지, 그 메시지를 통해 가상현실(무한경쟁)에서 나와 자신의 삶을 영유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특별히 모세 오경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과 희년 사상인데, 그것이 담고 있는 뜻은 멈춤과 나눔의 가치에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멈추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면 그 가치가 상실된다. 아무리 나쁜 일도 일단 멈추는 데서부터 다시 회복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통해서 안식일의 가치를 실현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이 멈추는 순간이다. 부활은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모여 작은 부활절로서의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의 변혁(변화)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멈추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하고 잠 못 이루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 나누지 못하는 것만큼 가난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멈춘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실존을 깨닫는 일과 같다. 영어단어 ‘handful’손으로 움켜쥘 만큼의 뜻을 가지고 있다. ‘손으로 움켜쥘 만큼많다는 뜻이 아니라 적다는 뜻이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인간의 위()는 자신의 주먹만하다. 주먹만한 위에 채워 넣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그야말로 ‘handful’하다. 그러므로 많이 먹으면 탈이 나지만 적게 먹으면 오히려 편안하다.

 

좋은 것뿐만 아니라 해로운 것도 손으로 움켜쥘 만큼만 하다가 멈춰야 한다. 그래야 몸이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생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이러한 것도 극에 달하면 결국 자기 몸만 상하고 자기의 인생과 상대방의 인생을 망치고 만다. 우리는 복음서의 이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절대로 나누지 못한다. 나눔은 마음이 풍요로운 자가 누리는 생명의 향연이요,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기 삶 속에 구현하는 놀라운 신앙 행위이다.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헌금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금을 많이 내어 놓을 들 무슨 소용이 있나. 물론 그렇게라도 공공선을 이루는 것은 그렇게 나무랄만한 것은 못되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렇게 차선책을 택하도록 이끌지 않고, 삶 자체가 나눔의 삶이 되도록 도전한다. 가령, 회사의 사장이 사장이니까 자기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 교회에 헌금 많이 하고 사회에 기부금을 많이 해서 자기 혼자만 영광 받는 자리에 서지 말고, 자기 자신이 좀 덜 가져가더라도 직원들에게 수익을 더 분배하여 직원들과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이 궁극적인 나눔의 삶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많이 벌어 혼자만 기쁘고 즐거워 하나님께 많이 드리고 사회에 기부 많이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수익분배의 구조를 철저한 나눔의 구조로 혁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풍요로운 듯하면서도 인생이 슬픈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극에 달하도록 우리 모두를 무한경쟁에 치닫게 하는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왜 주일을 지키는 지, 왜 우리는 예배하는 자들로 하나님께 나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는 법이다. 극에 달하면 생명의 가치를 상실하고 결국 상대방을 소모하고 자기 자신을 소모하여 소멸될 뿐이다.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소멸하는 일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 그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자, 그런 자는 주일(안식일)과 예배의 가치가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고 거기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줄 안다. 주일과 예배의 가치는 멈춤과 나눔에 있다. 멈추라, 그리고 나누라.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우리가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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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