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5'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05.25 함부로 감사하지 말라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5. 03:13

함부로 감사하지 말라

욥기 1

(욥기 3:20-26)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너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가주~”

 

봄이 오면 꽃이 핀다. 참 기어코 꽃이 핀다. 우리의 기분이나 환경과는 상관 없이 꽃이 핀다. 그래서 봄꽃은 우리에게 희망을 전달한다. 꽃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저렇게 찬란하게 피어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본다. 그러나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녹녹하지는 않다. 봄에 핀 꽃은 혹독한 겨울을 참아내고 이겨낸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의 꽃은 감사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그 감사의 꽃을 피워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쉬우면 안 된다. 자연인이 꽃을 보며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듯이, 신앙인은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어느 지식보다 오묘하고 그 어느 지혜보다 경이롭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담아내야 하는 신앙인의 감사는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값비싸다. 우리는 그것을 욥의 이야기를 통해 배운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욥기서는 그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그런데 그의 인생에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시련이 닥친다.

 

그에게 시련이 닥치게 된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한 것으로 서술된다. 하늘 나라에서 욥에 대한 참소가 있었다. 사탄은 하나님께 이르기를 욥이 그렇게 밤낮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물이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를 걷어 가시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사탄의 계획을 허락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성경은 언제나 다음의 두 가지 상황을 함께 제시한다. 1)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의 세계. 2) 범재하는 자비한 신의 세계.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은 인간의 불행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인다. 범재하는 자비의 신은 세계를 돌보며 피조물의 입에서 감사가 흘러나게끔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에서 매우 헷갈려 한다.

 

사람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의 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신의 존재보다 신의 부재를 경험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일례로, 한국 사회는 세월호 사건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만큼 세월호 충격에 아직도 휩싸여 있다. 아마도 21세기 한국 역사에서 세월호 사건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은 역사의 푯대가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서 한국 사회가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전진하게 되면 세월호 문제를 잘 풀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한국 사회가 후퇴하면 세월호 문제를 잘 풀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미래의 지표가 될 수 밖에 없다.

 

많은 신앙인들이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한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 겪는 비극적인 순간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질문이다.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었을 때도 유대인들은 죽어가며 똑 같은 질문을 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비극적인 일을 겪는 이들에게 그 비극적인 일에서 자신들을 건져줄 메시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들이 평소에 메시야라고 믿으며 찬양했던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야 말로 부재하는 신의 무자비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사탄의 참소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욥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다. 그에게 닥친 고난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간접적인 것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것이다. 우선,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는다. 여기에는 자식들도 포함된다. 모두 소중한 것들임에는 틀림없으나 욥 자신이 아니라 욥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간접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욥은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잃었을 때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사실, 자식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었음에도 이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욥은 이것만 해도 초인적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를 조금만 잃어도 밤잠을 자지 못해 수척해진다. 그런데 이것은 시대의 반영이기도 한 것 같다. 욥기가 씌어진 시대는 지금 시대처럼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덜 했다. 요즘 시대는 소유가 미덕이고 소유가 곧 생명인 시대인 것처럼 세뇌 당한 시대이다. 물질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으니, 요즘 시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욥의 고백을 보면 전혀 이해 가지 않는다. 모든 소유를 저렇게 잃고 어떻게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소유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찬양하는 욥의 모습을 보고 사탄은 한 가지 더 시험하기를 하나님께 청한다. 바로 욥 자신의 몸을 직접적으로 치는 시험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기 2:5,7).

 

모든 소유를 잃고 절망 가운데 있던 욥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직접적인 육신의 고통이 닥쳐온다. 욥은 어떤 질병에 의해 온 몸에 종기가 났고, 그 종기 때문에 육신이 너무 괴로워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었다 (욥기 2:8).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욥의 아내는 신앙을 잃은 듯한 말을 내뱉는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솔직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2:9). 이 진술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고발이요, 다른 하나는 욥의 자기 의에 대한 고발이다. 의로운 욥에게 이러한 고난이 닥쳐 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르게 보면, 욥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불행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고, 이렇게 고통 받으면서 자기 자신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 하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두 번째가 더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솔직히 두 번째 이유 때문에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탄원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크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감사해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욥은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지킨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기 2:10). 사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설교자들의 편집의 함정이 그것이다. 보통 설교자들은 욥기에서 이 부분만 떼내어 설교한다. 그러면서 욥처럼 어느 상황에서도 이렇게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욥기서를 좀 더 읽어 보면 바로 다음 장에서 상황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욥기서 3 1절을 보자.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의 절친 세 명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방문한다. 그러나 친구 세 명은 욥에게 닥친 그 처절한 불행을 직접 눈으로 보고 할 말을 잃는다. 그렇게 친구들과 욥은 칠일 밤낮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욥이 비로소 입을 연 것이다. 그때 욥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감사가 아니라 저주였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휩싸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저주를 퍼붓는다. 태어난 것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고, 삶에 회의를 느낀다. 욥기서 전체를 보면, 욥의 처절한 몸부림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욥의 처절한 몸부림은 감사가 아니라 탄원이다. 욥기서의 저자가 신앙인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감사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탄원의 늪을 지날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욥기서 3장은 신앙인이 꼭 배워야 하는 신앙의 감정이다. 고통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섣부른 감사를 드리기 이전에, 탄원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이 없으면 감사는 값싼 감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지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무조건 감사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는 자를 찾으신다. 고통 당하고 있으면서 그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탄원하지 못하는 자의 입술에서 무슨 신령한 감사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욥기서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의 신비가 아니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입술에서는 섣부른 감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시편 22편 첫 구절이기도 한데,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황을 무조건 받아 들이는 감사의 신앙이 아니라 먼저 그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인간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탄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믿는 신앙인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 불행한 일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한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게 된다.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인간의 불행을 전혀 돌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자비함 앞에 당황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불행한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본의 기독교인이자 문인이었던 엔도 슈샤쿠는 이렇게 묘비를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릅니다.”

 

불행한 일, 그토록 슬프고 외로운 일을 겪으며 이렇게 가련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따져 묻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신앙인은 없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고통에 대하여 따져 묻는 것은 차라리 의로운 일이다. 절대로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다. 욥기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삶을 살면서 어려움을 겪고 불행을 겪어 고통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다른 무엇보다 탄식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오히려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다.

 

고통 당하고 있는데, 불행을 겪고 있는데, 나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는데, 그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께 함부로 감사 드리지 말라. 그냥 지금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라. 욥기서 3장에 나오는 욥의 탄식으로 탄식하라. 그래야 산다. 그래야 마지막 피어나게 될 감사의 꽃이 찬란한 것이다. 그래야 감사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이 순간만큼은

뻔뻔한 욥이 되어라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왜 이처럼 고통에 처해져야 하는지

따져 물었던

용감한 예수가 되어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값싼 감사가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수줍은 어리광이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억지 같은 투쟁이니라

네 비천함에 대한 저항이니라

너의 불행을 방관만 하고 있는,

무자비한,

부재하는 신에 대한 고발이

거꾸로 솟는 핏방울처럼

네 목젖을 힘껏 울리게 하라

가랑비 같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말지어다

폭풍우 같은 분노의 눈물을 흘릴지어다

감사하는 자가 칭찬 받는 시대가 아니니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는 시대이나니

복을 받으려거든

우주의 법정에서

준엄하게

신을

...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친구 1 - 엘리바스)  (0) 2015.06.01
야곱의 희생제사와 그 의미  (2) 2015.05.28
기쁨의 향연  (1) 2015.05.21
멈춤과 나눔  (1) 2015.05.17
나는 요셉이라 (구원의 신비)  (1) 2015.05.14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