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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8. 06:51

야곱의 희생제사와 그 의미

창세기 57

(창세기 46:1-27)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예배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먼저 발현되고, 그 은혜와 사랑을 몸소 체험한 자들이 그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예배의 개념은 완전히 이방인의 예배 개념이다. 이런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이지만, 그 복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거나 하나님께 잘 보였을 때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상은 은혜가 아니다. 값 없이 주어지는 것만이 은혜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꾸미지 않았다. 그는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자식 잃은 아픔의 세월을 그저 견디면서 살아왔을 뿐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요셉의 고백에서 드러났듯이,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5,7,8).

 

야곱의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셨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이 곧 인생 가운데 아무런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인생의 신비이다. 성경은 온통 이러한 인생의 신비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들에게 지혜의 창고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들에게 등불인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참척의 고통(자식을 잃은 슬픔, 세상의 슬픔 가운데서 가장 참혹한 슬픔) 가운데 살던 야곱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는다.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애굽의 왕이 야곱의 모든 식구들의 이주를 권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꿈 같은 소식을 들은 야곱은 드디어 애굽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고 짐을 꾸려 애굽으로 떠난다.

 

야곱이 살던 곳은 헤브론이다. 헤브론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려면 브엘세바라는 곳을 꼭 거쳐야 한다. 그런데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가? 브엘세바는 야곱에게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화친을 맺고 언약을 세우며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이며, 할아버지도 거주하던 곳이었고, 아버지도 거주하던 곳이었고, 자기 자신도 거주하던 곳이었다. 삼대에 걸친 인생의 스토리가 가득한 곳이다. 그곳을 지나면서 야곱은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린다.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희생제사는 야곱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삶의 스토리가 담긴 제사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희생제사의 제물로 드리려 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을 준비해 주셨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 아찔한 이야기의 끝은 여호와 이레라는 은혜의 고백으로 마무리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셨던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그의 마음, 곧 그의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행위나 제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삶 그 자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영적 예배의 매개체가 우리 자신의 몸, 즉 우리 자신의 삶 전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류의 타락()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예배자의 참된 예배를 제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가인과 아벨은 동시에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올려 드렸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서 자신이 수확한 곡식으로 제사 드렸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는 자로서 자신이 기른 양을 잡아서 제사 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혹자는 아벨이 피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말한다. 히브리서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 이것은 너무 신약성서의 관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편협한 시각일 뿐이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가인이 드린 곡물이나 아벨이 드린 동물이나 모두 미느하'로 표현하고 있다. ‘미느하' '선물'(膳物)이라는 뜻과 '소제'(素祭; cereal offering)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무엇을 제물로 드렸느냐는 별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의 제사를 갈랐는가?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제물을 받으셨는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4:4-5). 여호와께서 제물을 받으실 때 단순히 제물만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제물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아벨 그리고 가인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예배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제사(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그 제사(예배)를 드리는 자의 삶과 인격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는 제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인격의 차이에서 왔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리고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드리는 자의 삶과 인격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선지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다. 사울 왕의 잘못된 제사를 꾸짖었던 사무엘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북이스라엘의 패역한 제사행위를 꾸짖은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도 각각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1-24).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이사야 선지와, 미가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도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이사야 1:11).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예레미야 7:4-6)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예레미야 7:11, 표준새번역).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 우리는 브엘세바에서 또 한 번 예배자로 나오는 야곱을 발견한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그는 그의 모든 자손들과 함께 제사를 드렸다. 특별히 그 제사에 야곱의 열 한 아들이 참여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세겜과 벧엘에서 제사 드린 후에 그 동안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드렸다는 기사는 없다. 아니 제사드릴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인지 모르겠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야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겜에서 딸 디나가 강간당했고, 그 일로 인해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들을 속여 그들을 도륙함으로 복수했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은 세겜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세겜 사람들의 복수의 칼날이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살던 헤브론에 정착해서 살던 중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남기고 간 아들 요셉마저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고난의 연속 가운데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배자로 나아오려면 희생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삶과 인격이 중요한 것인데 그 동안 야곱의 아들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모습은 전혀 인격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 가운데 치졸한 행동을 일삼았고, 전혀 책임 있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동생을 죽였고(물론 노예에게 팔았지만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아버지에게 거짓말 했고, 무책임한 삶을 살았다. 이들은 전혀 예배자로서 희생제사의 자리에 나올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야곱이 겪은 고난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일어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다는 것이 드러났고, 야곱의 아들들은 기근 때문에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다가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 속에서 삶과 인격의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야곱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릴 '이유'가 생겼고,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릴 '자격'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서, 그리고 희생제물이 아닌 삶과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린 희생제사는 야곱에게 또 한 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사실 야곱은 두려웠다. 낯선 땅 애굽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기 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자기 자신에게 전해진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기근이 들었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간 것은 아니었다. 그때 하나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다. 아버지 이삭도 기근이 들었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야곱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함부로 애굽으로 내려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희생제사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3-4).

 

야곱의 희생제사는 (삶과 인격)으로 드린 거룩한 산 제사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에게 나타나서 현재 야곱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다. “어디에 있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 야곱이 들은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내가 처한 상황과 현실이 어떠하든지, 어떤 두려움 가운데 있든지,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고, 걸어가는 발걸음을 암사슴 같이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가볍게 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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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