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25. 06:08

살리는 자

창세기 60

(창세기 47:13-26)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 손자, 손녀 이름 (형님의 아들, )을 지어주셨다.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어주시고, 딸의 이름을 민지라 지어주셨다. 손자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어주시면서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난다. “성경에서 요셉만큼 흠 없고 훌륭한 사람이 없더라.” 정말 그렇다. 요셉이란 인물은 보면 볼수록 신통 방통한 인물이다. 지혜로운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가!

 

어찌보면 요셉은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다. 형들에게 버림받고 노예로 팔려가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었다. 술 맡은 관원장의 배신을 생각하면서 감옥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었다. 마치, <올드보이>의 주인공처럼.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했고,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정말로 가장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내는 구세주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렇게 크게 쓰임 받은 데에는 요셉의 개인적인 성품과 신앙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붙드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성품이나 신앙의 깊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붙드심이다. 우리가 가장 간절히 소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붙드심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린 바 되기를 소망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눈을 떠갈수록 깨달아지는 것은 이 험악한 세월을 헤쳐 나갈만한 지혜가 나에겐 부족하다는 것이다. 살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자기 자신만의 지혜로 온전히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내가 만나는 세상은 언제나 골리앗 같다. 그래서 주저 않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가 많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를 때가 많다. 그렇다고 세상을 막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와 책임도 있고, 무엇보다 한 번 주어진 생명, 인생을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 험악한 세월을 어떻게 헤쳐나가면 되는지 가르쳐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손에 잘 안 잡힌다. 어떻게 보면 무력해 보이고, 어떻게 보면 숙명론자가 되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고통을 무조건 감내하는 메조키스트 같다. 사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 되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 같지는 않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꼭 해내야 하는 일생일대의 최고 미션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래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살아남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애굽과 가나안 땅에 든 기근으로 인해 땅이 황폐하여져서 더 이상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식량문제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세상이 아무리 경제, 경제, 정치, 정치를 외쳐도, 경제와 정치는 곧 인간이 먹고 사는 문제를 정의롭게 잘 해결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요즘엔 정치와 경제가 인간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이고 있는 실정이지만, 원래 정치와 경제는 인간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류 역사에 정치와 경제가 생겨난 이유는 정의로운 분배의 문제 때문이다. 무한대로 있는 게 아닌, 유한한 자원을 어떻게 인류가 정의롭게 나누어 쓸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정치와 경제이다.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 문제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 부자는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있고, 가난한 자는 생존자체에 위협을 받고 있다. 부자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즉 유한한 자원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온갖 권모술수를 다 부리고 있고,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횡포 때문에 고통이 더욱더 가중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생산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정작 그들이 생산한 카카오가 그토록 맛있는 초콜릿의 원료라는 것 자체를 모른다. 한 마디로, 부자는 가난한 자의 피를 빨아 먹으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번영하고 있고, 가난한 자는 그들에게 피를 빨려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

 

요셉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로서 다가올 기근에 대비하기 위해 바로 왕에 의해 온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로 세워진 인물이다. 사람의 진가는 어려울 때 발휘된다. 풍년 동안에 요셉의 진가는 그렇게 드러나지 않았다. 모두들 잘 먹고 잘 살았기 때문에 요셉이 하는 일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요셉은 풍년의 때에 여느 사람들처럼 그 풍요로움을 소비하며 흥청망청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따라 흉년의 때를 대비하여 곡식을 창고에 차곡차곡 모아 들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7년 동안 풍년이 들지만 그 이후에 7년 동안 흉년이 들 거라는 꿈의 해석을 마음에 품고, 풍년의 때에 7년의 흉년을 견뎌낼 수 있도록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

 

바로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7년의 풍년이 끝나고 7년의 흉년이 왔을 때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은 더 이상 곡물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저장해 둔 곡식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바로 그때 지난 날 이 때를 위하여 준비한 요셉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애굽 땅과 가나안 땅 주민들은 돈을 들고 요셉에게 양식을 구하러 온다. 요셉은 돈을 받고 양식을 판다. 그리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 바로 왕을 부요케 만들어 준다. 돈이 다 떨어지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고 와 양식으로 바꾸어 간다. 양식을 사는 데 가축마저 다 소비하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몸과 토지를 내어놓고 요셉에게서 양식을 사 간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양식이다. 일용할 양식.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우리는 살만한 것이다.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하며 사는 시대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양 폄하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는 양 사람들을 부추긴다. 그것을 일컬어 소비심리라 한다. 그 소비심리가 지구환경을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소비심리에 따라 소비욕구만 채우려 든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대로 나가다간 지구가 황폐해져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게 될지 모른다. 다른 그 무엇에 의한 멸망이 아닌, 바로 인간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중이다. 양심 있는 과학자들은 말한다. 지구 멸망의 시간이 1분 남았다고.

 

요셉은 모든 토지를 양식과 바꾸어 사 들인 뒤 바로의 소유가 되게 한다. 그리고 토지개혁을 벌인다. 백성들에게 종자를 주고, 바로의 소유가 된 토지에서 경작을 하여 그 중 5분의 1은 바로에게 바치고, 나머지 5분의 4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고 한다(24). 백성들은 요셉의 이러한 토지개혁법을 반긴다. 그러며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25).

 

요셉은 정치와 경제의 진수를 보여준다. 요셉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들거나,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 들거나, 원수를 갚은 데 쓰지 않는다. 요셉은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한 번도 망각하지 않는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된 것은 요셉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나도 살고 남도 사는 참된 지혜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요셉은 자신을 거두어준 애굽 왕에게 충성한다. 자기를 부른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종의 최고 가치이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2). 요셉은 참으로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강력했다는 뜻이다. 또한 요셉은 그 부르심에 대한 이해가 확실했다는 뜻이다. 믿음이란 부르심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고, 그 부르심을 바탕으로 한 충성이다. 부르심에 대한 인식과 그에 합당한 충성이 없다면, 그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요셉의 부르심에 대한 인식과 충성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오늘 이야기에서 명확하게 본다.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을 뻔한 생명을 모두 살려내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요셉에게 나아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25). 그 어떤 은혜보다 생명을 건짐 받은 은혜는 가장 값지고 감사한 것이다. 생명을 건짐 받은 백성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바로의 종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비굴한 종이 아니라 기쁨의 종이 되겠다는 뜻이다. 이 종이라는 개념은 신약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종이 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죽기까지 따르는 자이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스스로 자기를 낮춰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따르는 참 종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사실 이것만 제대로 깨닫는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준행하는 자발적인 종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주인이 되어야 성공한 인생인 양 주인이 되도록 해주는 일이라면 영혼까지 팔아먹는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피조물의 장자도 이렇게 자발적인 종이 되셨건만, 하물며 우리들이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듯이, 종이 된다는 것은 비굴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는 위치로 자신을 재배치하는 거룩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발적인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다. 그것으로 어떠한 일이 창조되었는가? 바로 생명이 창조되었다. 새로운 창조가 이 땅 위에 임했다. 이처럼 종이 되는 일은 비굴한 일을 만들어 내는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생명을 창조해 내는 거룩한 일이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존귀한 자였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인생의 질곡을 겪었다. 그는 이방 땅에서 모진 고통과 억압을 받았지만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높이 들림 받은 놋뱀과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바로 왕의 종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으며, 종으로서 충성된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국 요셉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요셉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셨고, 그 일을 잘 감당한 요셉은 많은 생명을 살려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셨거늘,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살리신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비굴한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져 가는 하늘 밑에서 조용히 흘리기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인 종이 되는 일은 살리는 자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창조의 사역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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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21. 23:02

안식을 간구하라 - (친구 3 - 소발)

욥기 4

(욥기 10:20-22)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10:1). 탄식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다. 탄식은 현재 겪는 고통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고통 받고 있는데 고통 받고 있는지 모르는 건 불행한 일이다. 고통은 저항해야 하는 것이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는 고통으로 인해 멸망 받고 만다. 고통에 대하여 저항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약한 존재(미물)라 할지라도 거기에 고통을 가하면 아픔을 느끼는 법이다. 세상엔 두 종류의 존재가 있다. 고통을 가하는 존재와 고통을 받는 존재이다. 고통을 가하는 존재는 강자라 하고, 고통을 받는 존재는 약자라 한다. 강자는 약자를 괴롭힌다. 강자는 약자를 괴롭히며 고통을 감내하라고 한다. 강자는 고통을 가하면서 그것이 고통인 줄 모른다. 고통을 가하면서 고통 당하는 약자가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는 것이 강자의 속성이다. 약자는 대개 강자가 고통을 가해 오면 거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한다. 그렇게 약자는 반복되는 폭력 앞에 몸과 영혼이 죽어간다. 그렇다면 약자가 강자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강자에게 저항하거나, 아니면 강자의 폭력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제로 목숨을 끊는 것과 다른 하나는 고통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즉 고통을 고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서는 것이다. 고통이 극심한 사람에게는 이 상태가 가능하다. 대개 이런 사람은 정신이 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미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하여 저항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감각하지 않고 내면화시키는 일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몸에 감각이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가해져 오는 어떠한 위험으로부터 피하기 위함이다. 일례로, 우리는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뜨거움에 대한 통증을 느낀다. 감각이 그것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본능적으로 손을 떼거나 그 자리를 얼른 피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둥병(한센병)’이 무서운 이유는 그 병에 들면 감각이 없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위험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뜨거운 것을 만져도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한다.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뜨거운 곳에 살을 대면 살은 타 들어가게 마련이고 결국 그것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감각하지 못한다고 괜찮은 것이 아니다. 감각하지 못했지만 감각하지 못한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인생은 종말에 이를 수 있다.

 

성경에는 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온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과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실정법적인 죄의 개념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죄의 개념을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 특별히 성경에는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노예란 가해지는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죄의 노예란 죄가 가하는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죄의 폭력을 내면화시킨 상태를 말한다. 노예는 자신이 지금 어떠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그 폭력의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야 하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저 노예로 살아갈 뿐이다. 이처럼 죄의 노예도 자신이 지금 어떠한 죄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그 폭력의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야 하는지 모른다. 노예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죄의 노예도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구원의 손길인 것이다.

 

욥은 우리에게 고통에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폭력의 상황에서 받는 고통에 대하여 어떻게 그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저항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욥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에 매몰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묻는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1:2). 욥은 섣불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내면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탄식한다. 탄식은 하나님에게 저지르는 불경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하나님은 까닭 없이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을 괴롭히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까닭만 있다면 피조물을 마음껏 괴롭히시는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 자신이 이러한 고통을 받을만한 악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욥은 고통으로 인해 가까이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평안을 누리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나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10:20).

 

욥이 안식을 구하고 있다. 욥은 왜 안식을 구하는 것일까? 그는 왜 잠시나마 평안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그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있다. 욥은 잠시나마의 평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과 하나님은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안식을 누리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일까?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 25장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안식이다.

 

현대인들에게 쉰다는 개념은 그저 하던 일을 멈추고 일터를 떠나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쉰다는 것을 레져라는 말로 생각한다. 쉬는 것도 소비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쉬는 동안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쉬면서 생명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러했듯이 또 다른 소비에 물들 뿐이다. 현대인들은안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저 이 세상이 이끄는 데로, 소비의 멍에를 짊어진 황소처럼 끌려 다니고 있다.

 

안식은 멈춤이다. 욥이 안식을 간구하는 것은 고통이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멈추지 않으면 쉬는 게 아니다. 고뇌의 멈춤, 미움의 멈춤, 걱정의 멈춤, 아픔의 멈춤, 후회의 멈춤 등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그 어떠한 것이든 모든 것들을 다 멈추는 상태가 안식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어떠한 형태의 고통이든지 그것이 멈춰지는 순간이 바로 안식인데, 그 안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혜이다. 그래서 안식은 곧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이 된다. 레위기에서 특별히 안식일 법을 제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부리는 종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에게 육체적인 쉼을 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안식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의 관심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에 있다. 성경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과 해방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온통 하나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형태든 우리에게서 안식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악한 일()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안식을 빼앗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누군가의 안식을 빼앗은 일은 가장 큰 죄인 것이다.

 

욥의 친구 소발이 저지르는 죄가 바로 이것이다. 소발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다른 말로 욥에게 안식을 주기는커녕 욥에게서 안식을 빼앗고 있다. 소발은 욥의 탄식과 고통에 대하여 어떠한 위로나 동정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욥의 고통이 욥 자신의 죄에 비하면 작은 것이라고 한다. 소발은 욥의 교만한 상태를 보면 지금 가해지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 가운데 처해져야 마땅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만큼만 고통 받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가장 큰 죄악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안식을 잃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상대방의 안식을 빼앗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밧줄을 끊으면 그 밧줄에 의지해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이 죽을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그 밧줄을 끊어내는 사람은 얼마나 사악한가!

 

욥은 무엇보다 안식을 간구했다. 바로 그 안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식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만큼 인생에게 위로가 되고 평안이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어쩌면 인생에게 가장 좋은 안식은 죽음인지도 모르겠다. 욥은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지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10:21-22).

 

인생은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이다. 그런데 상수가 ‘0()’인 곱하기이다. 상수가 ‘0’이기 때문에 그 상수에 무엇을 곱해도 결과는 똑같이 ‘0’으로 나온다. 1곱하기 00이고, 100 곱하기 00이다. 물론 10000 곱하기 0도 영이다. 그러니 인생이란 어차피 0이 되는 곱하기이니,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좀 멋지게 살지 못했어도 괜찮은 것 아니겠는가. 어차피 우리 모두는 다 똑 같은 곳으로 간다. 우리는 모두 땅으로 간다.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에서 안식을 누리를 것이다.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었어도 결국 그것 때문에 영생을 얻는 게 아니라, 모두 똑같은 곳,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은곳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 업적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이것은 인생의 허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업적을 이루지 말고 배짱이처럼 놀고 먹는 게 최고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허무할 수 밖에 없는 인생으로부터 구원 받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그 고통의 강도가 조금씩 다를 뿐, 욥처럼 말할 수 없는, 끊임 없는 고통의 파도 속에서 평안할 날이 없다. 그런 가운데, 욥처럼 하나님께 내 날은 적지 아니하나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소서라며 하나님께 안식을 간구하는 일은 허무한 인생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생, 고통에 저항하고자 하는 인생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안식을 간구하며 탄식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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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18. 06:36

복을 베푸는 자

창세기 59

(창세기 47:1-12)

 

<예언과 성취>는 성경 전반에 흐르는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다. 즉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주 관심사는 예언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예언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독자(신앙인)로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성경의 저자들의 관심사와 행보를 맞추는 것이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땅으로 가게 되는 사건은 예언의 성취이다. 창세기 14장에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보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4:13-14).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이 예언이 오랜 세월이 지나 야곱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예언과 성취>의 구조가 인간의 숙명론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은 신비에 속하는 것이지, ‘숙명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언을 통해 인간의 미래를 속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이지 속박하는 분이 아니시다.

 

이런 점에서 이방인의 점치는 행위와 하나님의 예언은 분명히 다르다. 점치는 행위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위함이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함이다. 점치는 행위는 숙명론에 사로잡히는 우상행위이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참 해방의 길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해주는 힘의 원동력이 된다. 하나님의 예언(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희망 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능히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된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주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기근이 있을 때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계획을 갖는다.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강구할 때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도 기근 때에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했다. 이삭도 기근 때에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내려가지 못했다. 그런데, 유독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모든 여건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은 야곱의 때였다. 그 일은 형들의 시기를 사 애굽으로 팔려 간 요셉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야곱은 결국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방 땅(애굽)에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모든 식솔들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고센 땅에 도착한 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과 극적인 재회를 한다. 그리고 몇몇 자녀들과 함께 애굽의 왕을 알현하게 된다. 애굽 왕과 야곱의 만남은 야곱의 인생이 얼마나 드라마틱 했는지를 짧고 강렬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야곱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7). 야곱은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야곱의 신과 바로의 신은 달랐다. 쉽게 말해서, 불자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독교 신자 앞에서 불자가 부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존중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축복하는 일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야곱은 애굽 왕 앞에서 당당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한다. 야곱의 축복을 받은 애굽 왕은 야곱에게 나이를 묻는다. “네 나이가 얼마냐?” 한글 성경은 애굽 왕이 야곱에게 매우 거만하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번역이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영어 성경만 봐도 애굽 왕이 야곱에게 얼마나 예의를 갖추어 나이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How many years have you lived?” , “당신의 삶의 연수가 얼마나 되느냐?”라고 묻는다. 굉장히 공손한 표현이다.

 

이에 대한 야곱의 대답에는 깊은 연륜이 묻어난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나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두 단어로 표현한다. “나그네와 험악한 세월이 그것이다. 나그네는 마고르라는 히브리어로 거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야곱은 고향이 아닌 곳에서 거주했다는 뜻이다. 야곱의 고향은 브엘세바였다. 그라나 야곱은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피신한 뒤, 늘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을 꾸려야만 했다.

 

또한 야곱의 세월은 참으로 험악했다. 홀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삼촌의 속임수 아래 험한 세월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뒤 야곱의 삶은 고통과 아픔의 연속이었다. 사랑하는 딸 자식의 강간 사건을 겪어야 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야 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이 낳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야곱이 이렇게 초면인 사람, 그것도 애굽의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을 나그네와 험악한 세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그의 인생이 나그네 인생이었고 그의 삶이 험악한 삶이었지만 그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야곱이 당당하게 애굽 왕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순히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네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그네 인생과 험악한 세월은 오히려 인간의 자아를 망가뜨리고 고십불통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야곱이 나그네 인생과 험악한 세월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 앞에서 당당하게 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게 임했기 때문이다.

 

야곱은 애굽 왕에게 들어가면서 복을 빌고, 나오면서 복을 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10). 이 장면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사실 이 장면은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놀라운 장면이다.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남의 복을 빼앗는 사람이었다. 야곱의 이름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야곱은 발 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다. 이는 남의 복을 가로채는 자라는 뜻이다. 남의 복을 가로채는 자만큼 비열한 인생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남의 복을 가로채는 자’, 발 뒤꿈치를 잡은 자가 아니라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 야곱은 더 이상 남의 복을 빼앗는 자가 아니라, 복을 베푸는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이런 기적을 베푸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야곱이 그 동안 하나님의 손에서 얼마나 연단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야곱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 이름이 지닌 뜻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예언은 인간을 숙명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또한 그 말씀 안에 있는 자는 어떠한 어려움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자의 비유와 같다. 밭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거기에서 보화를 발견한 자는 그 보화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모든 것을 다 팔아도, 그 보화만 있으면 그 아무 것도 부럽거나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 베푸는 자가 되지 않는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가 베푸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진 보화, 즉 하나님의 말씀, 예언을 발견한 자가 베푸는 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게된 것은 그가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그 자신을 메시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언은 인식하는 자에서 성취된다. 예언의 신비는 그것을 인식하는 자에게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성취된다. 그리고 예언의 성취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베푼다. 참 자유를 주고, 생명을 구원하고, 삶을 풍성하게 한다.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자의 삶은 어찌 보면 나그네 인생이고 험악한 세월을 보낸다. 야곱만 특별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고난과 고통의 연속 가운데서 삶을 산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야곱처럼 이스라엘이 되어서 예언을 성취하고, 빼앗는 자(철 없는 자)에서 베푸는 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겪어도 철 들지 못하고 여전히 빼앗는 자로 남의 발뒤꿈치를 잡은 인생으로 사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자들은 세상에 희망을 안겨주기는커녕 탄식 소리만 늘려놓는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남의 발뒤꿈치를 더 효과적으로 잡는 인생이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예언의 성취가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내 삶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야곱처럼 발뒤꿈치를 잡는 자(남의 것을 빼앗는 자)에서 복을 베푸는 자로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의 연수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연륜은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야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베푸는 자로 잘 자라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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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8. 04:45

차라리 죽었으면 (친구 2 – 빌닷)

욥기 3

(욥기 7:7-10)

 

차라리 죽었으면…”하는 생각은 인간이라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보는 마음이다. 사람은 왜 죽기를 갈망하는가? 죽음을 좋게 보는 문화는 없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사람은 죽음을 갈망한다. 죽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 인간의 삶의 현실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욥은 죽기를 바랐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육체가 고통스러웠고, 마음이 고통스러웠고, 영혼이 고통스러웠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세 가지 차원 모두 고통스러웠다. 육체에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차 올라 괴로웠고, 그 괴로움을 어떻게 해보고자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 온 몸을 긁었다. 그래도 시원치 않았다. 자식과 모든 소유를 잃은 고통은 마음을 조여왔고, 그것을 어쩌지 못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차라리 깨어 있는 게 나았다. 잠을 자면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은 잠을 자면 아픔이 치유된다. 하룻밤 잤다고 치유되는 것은 아니지만, 잠은 치유의 과정에서 필수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말도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2).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자는 편하게 잘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끼면 잠을 잘 수 없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육체와 마음에 고통이 가해질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실 때 가장 괴로워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망은 육체와 마음이 허물어질 때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여 영혼이 허물어질 때 온다. 이게 바로 진짜 죽음의 경험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순교자의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죽음이요, 순교자의 죽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한 죽음이다. 순교자는 죽어가면서 감사했다. 육체와 마음은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을 누렸다. 순교자가 죽어가면서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의 죽음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죽는 죽음은 이미 하나님의 존재가 스며 있는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욥은 고통 가운데서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한다. 고통 가운데 있는 그가 느끼는 인생은 종이나 품꾼의 날 같은 인생살이이다. 종이나 품꾼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인생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떠한 주권도 없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자기의 인생이 이렇다고 느끼는 사람은 의기소침해진다. 그리고 인생을 비관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품은 자가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마지막 선택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욥은 또한 고통 가운데서 자기의 인생을 바람과 구름에 비유한다. 바람은 한 번 불고 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로 모른다. 그야말로 허망한 것이다. 구름 또한 그렇다. 구름도 한 번 생성됐다 사라지면 그만이다. 사라져 없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다. 인생이 이처럼 바람과 구름처럼 허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떠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겠는가? 사는 거나 죽은 거나 별반 다르지 않다면, 사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운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마지막 선택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욥은 죽기를 바랬다. “차라리 죽었으면…”하고 바랬다.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데, 거기에 욥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과녁 삼아 일부러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욥의 입술에서는 다음과 같은 처절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욥기 7:20).

 

이렇게 한 없는 불평을 하나님께 쏟아내고 있는 욥에게 그의 친구 빌닷은 다음과 같이 꾸짖으며 응수한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느냐”(욥기 8:1-2).

 

친구 빌닷의 주장은 보상의 교리를 대변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간절함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전근대적인 신학적 발상이다. 만약 빌닷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노력에 의한 보상으로 주어진다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인간의 자기 의의 결과가 된다. 이것은 기독교 구원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생각이다. 그야말로 이단사상 중 가장 큰 이단사상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여기서 은혜와 믿음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오니까 구원이 무슨 2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인 줄 잘못 전달될 수 있으나, 은혜와 믿음은 같은 말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믿음은 인간 측에서 행하는 어떤 것인 줄로 알면 안 된다. 구원 받는 데 하나님의 은혜도 있어야 하고 믿음도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원은 두 가지가 충족돼야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믿음이지, 인간의 측면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철저한 배타적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은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 받은 자는 은혜 받으려고 죄를 안 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존재 자체가 변했기 때문에 죄를 안 짓는 것이다.

 

빌닷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욥에게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늘어 놓는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기 8:4). 욥의 자녀들이 그렇게 죽은 이유는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빌닷은 인과응보를 주장하고 있다. 욥의 고통은 이유 없는 고통이 아니라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거센 바람과 같은말로 불평할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자기를 청결하고 정직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있는 욥의 인생을 다시 평안하게 해주실 거라고 한다. 그러면서 빌닷은 욥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

 

이 성경구절은 성경구절 중 가장 심하게 훼손되어 쓰이는 것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웬만한 비즈니스 공간에는 이 성경구절이 걸려 있다. 이 성경구절을 구멍가게에 걸어놓으면 이런 뜻이 된다. ‘지금은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나중에는 대기업이 될 것이다’. 전형적인 기복신앙이고, 전형적인 성경말씀의 훼손이다. 이 말 자체는 굉장히 은혜스러운 것일 수 있으나, 빌닷이 한 이 말은 욥의 심장을 후벼 판 옳은 말이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빌닷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욥의 상황을 왕골과 갈대’, ‘거미줄’, 그리고 정원의 식물등에 비유하며 공격한다. 빌닷은 욥의 고통을 위로하기는커녕 욥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불경건한 자들의 삶을 택했기 때문에 그에게 불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거라고 진단한다.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욥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기 9:2). 또한 욥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욥기 9:4).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전능성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닥친 고난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은 자기 자신의 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당할 정도로 자신은 불의한 자가 아니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상황 속에서 욥은 자신에게 세 가지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온갖 불평을 다 던져 버리고 슬픈 얼굴빛을 고쳐서 명랑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고통당하고 있는데 그런들 자신의 죄가 사면 되겠는가?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정결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모른 채 하나님에 의해 악인으로 정죄된 마당에 자신을 정결케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욥은 이것도 헛된 수고가 될 뿐이라고 한탄한다. 셋째, 자신의 상황을 공평하게 중재할 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없다고 토로한다. 이처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선택권 모두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욥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죽음은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에서의 유일한 해방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차라리 죽었으면…”하는 고통이 엄습하는 상황 속에서 차라리 죽으면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해야 하는가?

 

인간의 불행한 삶 만을 들여다 보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죽어야 할 이유들만 보이나,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욥의 세 가지 선택권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얼굴 빛을 고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정결케 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동등한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기독론에서 다루는데, 특별히 이것을 화해론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피조물과 하나님을 화해시키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 모른다. 살아야 할 의미를 아무 데서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음이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의 해방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만이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의 해방구가 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기만 한다면, 덧없어 보이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모든 의문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육체와 마음의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이다. , 인간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 가장 괴롭다. 그때 인간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러나 육체와 마음의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인간은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 가련한 인생들에게 가장 큰 소망이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아무리 지옥 같은 인생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면,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해야 한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만약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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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4. 07:29

요셉의 지혜

창세기 58

(창세기 46:28-34)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는 사랑과 관련 있다. 그 상대가 무엇인지는 상관 없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단절될 때 인간은 슬퍼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사랑이 단전될 때 인간은 더욱 슬퍼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들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를 위한 장미>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섬뜩한 사랑을 그린 소설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몰락한 미국 남부의 명문가의 마지막 후예인 에밀리는 아버지가 죽은 뒤 시에서 세금면제의 예우를 받으며 남부의 자존심의 대명사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도로 포장공사의 현장감독으로 온 호머 베른이라는 호탕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남부 귀족의 딸과 한갓 북부 노동자에 불과한 그들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에밀리는 약국에서 쥐약을 사고, 상점에서 남자용 옷가지도 사들인다. 그러한 에밀리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은 못마땅한 듯 수군거린다. 그 날, 호머 베른이 에밀리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지만 그 뒤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를 버리고 떠난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가끔 창문 안쪽에서 에밀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 시간이 흘러 그녀의 머리카락은 철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에밀리는 마침내 세상을 떠난다. 마을 사람들은 에밀리의 장례를 위해 그녀의 집으로 몰려 가는데, 그들은 굳게 닫혀 있던 2층 방 침대에서 오래된 백골 한 구가 웃는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는 누군가 계속해서 누워 있었던 것처럼 움푹 들어간 자리를 발견한다.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베개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들어 올렸는데, 그것은 에밀리의 철회색 머리카락이었다.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집요하다.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 때문에 연인과의 사랑이 좌절을 겪게 되자, 에밀리는 쥐약으로 연인 호머 베른을 죽인 뒤, 자신의 침대 위에 눕혀 놓고 그의 곁에서 평생을 지냈던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독약을 마시고 죽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보다 더 애절하고 섬뜩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도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마음껏 사랑을 나누게 될 때 한없는 행복에 젖는다. 인간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더불어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극 한 편을 보게 된다. 아들이 죽을 줄로만 알고 통한의 세월을 살았던 아버지 야곱과 당당하게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어 나타난 아들 요셉의 재회이다.

 

20여년이 지난 뒤, 극적으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은 목을 어긋맞춰 안고 오랜 시간 동안 펑펑 운다. 이들의 울음에는 단순히 보고 싶은 그리움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움보다 더 큰 아픔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 야곱의 눈물에는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이 담겨 있었고, 아들 요셉에게는 형들에게 버림 받은 상처의 고통이 담겨 있었다. 이들의 눈물은 그 어느 눈물보다 뜨거웠다. 살아 있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을 겪은 후 흘리게 되는 눈물이 다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재회는 기쁨보다 아픔이 앞섰다.

 

눈물은 마음의 고름이다. 육체에 상처가 났을 때 고름이 차오르듯이, 마음에 상처가 나면 눈물이 차오른다. 육체에 고인 고름을 다 짜내야 상처가 낫듯이, 마음에 고인 눈물을 다 흘려야 마음의 상처가 낫는 법이다. 육체의 고름을 짜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듯, 마음의 고음을 짜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고름도 무르익어야 짜내지는 법이다. 지금, 야곱과 요셉의 마음의 고름은 무르익어 철철 흘러나오고 있다.

 

마음의 고름을 다 짜내어 아픔이 진정되자,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감동적인 말을 한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 한을 품으면 눈 감기 어렵다. 눈을 감아야 할 때 망설임 없이 눈을 감을 수 있는 것만큼 복된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축복 가운데 눈을 감는 사람이 얼마큼이나 되겠는가.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도 그게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 것 같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러한 축복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는 감사의 언어가 흘러 나왔다. 이보다 아름다운 언어가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사는 동안 끊임 없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복이다. 오늘 눈 감게 되더라도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는 감사의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복된 것이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요셉은 아버지가 거느리고 온 70명의 식솔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아버지와 형들을 위한 현실적인 계획을 마련한다. 애굽의 바로 왕은 전에 말하기를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고 했지만, 아버지 야곱은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내려왔다. 애굽 왕은 야곱 가족들에게 몸만 와도 된다고 했지만, 목축업이 가업인 야곱은 식솔들뿐 아니라 모든 가축들도 끌고 내려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셉은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요셉의 계획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었다. 우선, 그는 애굽 왕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형들이 왕의 윤허대로 애굽 땅에 도착한 것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하고자 했다.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32). ‘몸만 오라고명령했던 애굽 왕의 명령에 반하여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는데, 이것은 애굽 왕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 왕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그들이 몸만 오지 않고 모든 소유를 이끌고 온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은 목자들, 즉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에게 애굽 왕이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묻거든 목축업을 하는 자들이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쳐 준다. 그러면서 단순히 목축업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대대로 목축업을 하는 집안 인 것을 강조하라고 말한다.

 

요셉이 이렇게 계획을 꾸민 이유는 그래야 아버지와 그의 식솔들이 고센 땅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센 땅은 목축업을 하기에 좋은 땅이었다. 게다가 애굽의 총리 대신의 가족들이 대거 애굽 땅으로 이주해 온 것을 모든 사람이 환영해 줄리 만무하다. 사람들은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면 거칠어지는 법이다. 요셉의 가족들이 목축업을 하는 목자라는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자들에게 안심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목축업을 하는 목자라는 말은 그들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애굽인들과 히브리인들이 함께 섞여 사는 것은 많은 갈등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오히려 이렇게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이 평화롭게 사는 방법이었다. 일례로, 종교적인 측면에서 애굽인들은 소를 신성시한 데 반해 히브리인들은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 한쪽에서는 소를 신성시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들이 신성시 하는 소를 죽여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한다면, 이는 불 보듯 뻔한 갈등을 유발시키는 요소였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다른 사람이 사소하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법인데, 종교적인 문제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끔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요셉의 계획은 매우 지혜로웠다. 이렇게 요셉이 지혜로운 계획을 마련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주된 관심사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총리 대신 자리를 보존하는 것도 아니고, 부와 명성을 유지해 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개인적인 꿈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애굽의 왕에게 충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요셉의 주된 관심사는 아버지와 그의 모든 가족이 애굽에서 안전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요셉이 자기 가족만 챙기겠다는 가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요셉에게 가족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가족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신앙의 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야곱은 애굽으로 이주를 결심한 뒤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음성을 듣지 아니했던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46:3).

 

지혜는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 때 생겨난다. 요셉에게 당면한 문제는 아버지와 그들의 가족들의 안전이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큰 민족을 이루려면 가족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바로 그것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집중했을 때 요셉에게서는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지혜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살면서 지혜롭지 못할 때가 많다. 지혜롭지 못하여 일을 그르치고 한탄의 세월을 보내게 될 때가 있다. 그러한 때를 생각해 보면 모두 지혜롭게 일을 대처하지 못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다 보면 잠깐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몰라도, 결국에는 더 큰 일이 발생하며 공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드리는 데 부름 받는 자들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에는 그러한 저급한 신앙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곧 나 자신의 이익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생명과 평화이다. 요셉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할 때 지혜가 생겨 모든 가족들을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생명과 평화의 뜻을 마음 속에 품고 집중한다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 평화’, 여기에 집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요, 하나님의 지혜를 폭포수 같이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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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1. 02:51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친구 1 - 엘리바스)

욥기 2

(욥기 6:24-30)

 

욥기는 지혜문헌이다. 지혜는 하루 아침에 축적되지 않는다. 욥기가 지혜문헌이라는 뜻은 욥기에 제시되고 있는 지혜가 하루 아침에 깨달아진 진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삶을 꿰뚫고 나온 진리라는 뜻이다.

 

욥기서는 총 4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구성이 매우 짜임새 있고 촘촘하다. 욥은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 같다. 거기에는 주연과 조연들이 있는데, 주연은 욥이고, 조연은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라는 지혜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이야기 전체의 줄거리는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는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실하고 부유했던 그의 삶이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갈등을 그렸다. 그가 그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는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는데, 사탄의 참소에 의한 하나님의 허락이 작용한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에 동의하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지만, 욥기가 씌어진 시대는 대개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욥이 겪은 어려움이 보이지 않는 힘(신 또는 사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인식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신앙을 가진 자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믿지만, 신앙이 없는 자들은 그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섭리든 우연이든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져오고 그 어려움 가운데 어떠한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도 허무해진다는 것이다. 즉 고통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삶의 현실이라는 뜻이다.

 

욥이 재산과 자식을 잃고, 그리고 몸에 병까지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친구 세 명이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온다. 욥기서의 이야기는 욥과 그 친구 세 명이 주고 받는 지혜의 언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언변의 관점 포인트는 자신의 의로움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욥과 그러한 욥의 불의함을 지적하는 친구들의 지혜이다.

 

욥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자신에게서 어떠한 불의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욥은 더 고통스러워 한다. 어떻게 의인이 이렇게 고통을 당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욥의 관점은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 의인이 어떻게 고난 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고난은 의인이 받으면 안 되고 악인이 받아야 한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예수의 십자가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특별히 신명기서에는 이런 말까지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3).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도 논증하고 있는 내용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구원)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예수가 죽은 후 당돌하게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강력히 요청한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배경은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인데, 경건한 유대인이란 율법을 잘 알고 율법 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뜻한다. 신명기서 21장에보면 나무에 달린 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율법적 지침이 나온다. 그 부분을 직접 보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2-23).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당돌하게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한 것은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주님)로 고백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을 온전히 준행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의 그러한 행동이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 된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의 아들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부활 역사 때문이다.

 

이처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가르침 가운데 살았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인식하기에는 매우 큰 어려움이 존재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예수가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라면, 또한 그가 정말로 의인이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사람들의 신앙을 방해한다. 이러한 의문을 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경건하고 건전하게 갖기 위해서라도 욥기서에 제시되고 있는 고난 받는 의인에 대한 통렬한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꼭 필요하다.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토로하는 욥에 맞서 그의 친구 세 명(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을 정죄한다. 그들의 논점은 이것이다. 고난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다. , 그들은 인과응보론을 주장한다. 욥이 이렇게 고난 당하는 이유는 그에게 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래서 욥의 세 친구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에 맞서 욥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욥기서의 구성은 매우 탄탄한데, 그 이유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일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욥기서의 이야기 전개는 우선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탄식을 늘어 놓으면, 그에 대하여 욥의 친구가 한 명씩 대응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두 세트가 진행되고 나서, 엘리후라는 젊은 지혜자가 등장하여 욥과 세 친구들의 잘못에 대하여 지적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끝으로 하나님이 등장하여서 모든 문제를 정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욥기서를 읽으면서 견지해야 할 자세는 일단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욥기서이기 때문에 욥의 편에 서서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없고, 욥의 주장과 세 친구의 주장을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분석하는 것이 제일 좋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의 주장이 인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지혜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욥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로운 데도 고난 가운데 처하기도 하고, 우리의 연약함 또는 죄 때문에 고난 가운데 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욥기서 3장에서 욥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견지하며,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대하여 읍소한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고, 삶에 회의를 느끼는데, 결코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러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더 괴롭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당황해 한다. 그의 탄식은 고난 받는 의인의 탄식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통 신앙생활 하면서 이러한 것에 대한 가르침은 별로 없다. 우리가 삶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 그저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며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탓하며 우선 회개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죄의식부터 갖고 보는 것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다. 물론 살다 보면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많지만 인생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의 뜻(의지)과는 상관 없이 나에게 닥쳐 오는 불행과 어려움이 많다.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을 모두 자기 자신의 부족함 때문인 것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우선 그 상황에 대해서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탄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문제 자체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가질 수 있다.

 

이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대개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칼 융이 이런 말을 했다.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은 운명이 된다.”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의식되지 않는 불행은 운명이 된다.” 어떤 사람이 불행을 겪고 있는데 그 불행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 불행을 반복하게 되거나 그 불행 가운데서 헤어나오질 못하게 된다. 대개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인식 능력은 형편 없이 결여되어 있다. 일례로 알코올 중독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지금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는 인식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거기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자기는 지금 괜찮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주는 건강에 좋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알코올 중독 가운데 살다가 그렇게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죄의식이 그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작용하기 때문이다. 배우 성유리가 주연한 누나라는 영화에서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극중 성유리는 물에 빠지는데 자기를 구하고 죽은 동생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의식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그 폭력을 통해 자신의 죄의식을 씻으려 하는 행동패턴을 보인다. 이것은 불행한 일보다 더 불행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 자신의 불행을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 그 불행을 자기의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에 저항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간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욥기서에서 욥이 견지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배울 필요가 있다.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 금방 돌려 버리면, 우리는 평생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불행을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불행이 일상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에 대하여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사한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그러면서 그는 욥에게 자신의 죄로 인한 징계를 인정하라고 촉구한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5:17).

 

이러한 주장을 펴는 엘리바스의 입에서 인생에 대하여 큰 통찰을 주는 지혜의 말이 쏟아진다.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5:6-7). 이 지혜는 불교의 그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라고 부른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러한 를 느낀다. 그래서 고개를 끄떡이게 되지만, 정말 인생이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우리는 왜 이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내야만 하는가?

 

욥은 엘리바스의 권고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물론 욥은 엘리바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엘리바스의 인생에 대한 통찰도 모두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통찰이 욥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욥의 항변이 정곡을 찌른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6:25).

 

우리는 남을 쉽게 정죄한다. 특별히 고통을 겪는 자들에 대해 쉽게 말을 내뱉는다. 물론 그들을 정죄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욥이 말하는 것처럼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지’, 옳은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옳은 말조차 삼갈 필요가 있다.

 

인생은 어렵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도 아닐뿐더러,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도 아니다. 욥기서를 읽으면서 가져야 할 가장 큰 자세는 열린 마음이 아닌가 싶다. 욥의 주장도 맞고, 친구들의 주장도 맞다.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자신의 문제를 다각도로 진단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도 죄의식에 물들어 버린 현대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욥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뻔뻔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되지 않는 불행은 운명이 된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불행을 온전히 인식하는 인식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불행이 인식되지 않으면, 불행이 불행인지 모르고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행복이지 불행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품 안에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길 원하신다. 그 행복의 시작은 내 삶 안에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일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욥처럼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것이다. 욥은 말한다.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6:29).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새겨들어야 하는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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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