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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8. 04:45

차라리 죽었으면 (친구 2 – 빌닷)

욥기 3

(욥기 7:7-10)

 

차라리 죽었으면…”하는 생각은 인간이라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보는 마음이다. 사람은 왜 죽기를 갈망하는가? 죽음을 좋게 보는 문화는 없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사람은 죽음을 갈망한다. 죽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 인간의 삶의 현실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욥은 죽기를 바랐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육체가 고통스러웠고, 마음이 고통스러웠고, 영혼이 고통스러웠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세 가지 차원 모두 고통스러웠다. 육체에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차 올라 괴로웠고, 그 괴로움을 어떻게 해보고자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 온 몸을 긁었다. 그래도 시원치 않았다. 자식과 모든 소유를 잃은 고통은 마음을 조여왔고, 그것을 어쩌지 못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차라리 깨어 있는 게 나았다. 잠을 자면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은 잠을 자면 아픔이 치유된다. 하룻밤 잤다고 치유되는 것은 아니지만, 잠은 치유의 과정에서 필수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말도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2).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자는 편하게 잘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끼면 잠을 잘 수 없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육체와 마음에 고통이 가해질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실 때 가장 괴로워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망은 육체와 마음이 허물어질 때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여 영혼이 허물어질 때 온다. 이게 바로 진짜 죽음의 경험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순교자의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죽음이요, 순교자의 죽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한 죽음이다. 순교자는 죽어가면서 감사했다. 육체와 마음은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을 누렸다. 순교자가 죽어가면서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의 죽음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죽는 죽음은 이미 하나님의 존재가 스며 있는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욥은 고통 가운데서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한다. 고통 가운데 있는 그가 느끼는 인생은 종이나 품꾼의 날 같은 인생살이이다. 종이나 품꾼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인생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떠한 주권도 없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자기의 인생이 이렇다고 느끼는 사람은 의기소침해진다. 그리고 인생을 비관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품은 자가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마지막 선택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욥은 또한 고통 가운데서 자기의 인생을 바람과 구름에 비유한다. 바람은 한 번 불고 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로 모른다. 그야말로 허망한 것이다. 구름 또한 그렇다. 구름도 한 번 생성됐다 사라지면 그만이다. 사라져 없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다. 인생이 이처럼 바람과 구름처럼 허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떠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겠는가? 사는 거나 죽은 거나 별반 다르지 않다면, 사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운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마지막 선택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욥은 죽기를 바랬다. “차라리 죽었으면…”하고 바랬다.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데, 거기에 욥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과녁 삼아 일부러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욥의 입술에서는 다음과 같은 처절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욥기 7:20).

 

이렇게 한 없는 불평을 하나님께 쏟아내고 있는 욥에게 그의 친구 빌닷은 다음과 같이 꾸짖으며 응수한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느냐”(욥기 8:1-2).

 

친구 빌닷의 주장은 보상의 교리를 대변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간절함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전근대적인 신학적 발상이다. 만약 빌닷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노력에 의한 보상으로 주어진다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인간의 자기 의의 결과가 된다. 이것은 기독교 구원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생각이다. 그야말로 이단사상 중 가장 큰 이단사상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여기서 은혜와 믿음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오니까 구원이 무슨 2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인 줄 잘못 전달될 수 있으나, 은혜와 믿음은 같은 말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믿음은 인간 측에서 행하는 어떤 것인 줄로 알면 안 된다. 구원 받는 데 하나님의 은혜도 있어야 하고 믿음도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원은 두 가지가 충족돼야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믿음이지, 인간의 측면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철저한 배타적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은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 받은 자는 은혜 받으려고 죄를 안 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존재 자체가 변했기 때문에 죄를 안 짓는 것이다.

 

빌닷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욥에게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늘어 놓는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기 8:4). 욥의 자녀들이 그렇게 죽은 이유는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빌닷은 인과응보를 주장하고 있다. 욥의 고통은 이유 없는 고통이 아니라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거센 바람과 같은말로 불평할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자기를 청결하고 정직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있는 욥의 인생을 다시 평안하게 해주실 거라고 한다. 그러면서 빌닷은 욥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

 

이 성경구절은 성경구절 중 가장 심하게 훼손되어 쓰이는 것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웬만한 비즈니스 공간에는 이 성경구절이 걸려 있다. 이 성경구절을 구멍가게에 걸어놓으면 이런 뜻이 된다. ‘지금은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나중에는 대기업이 될 것이다’. 전형적인 기복신앙이고, 전형적인 성경말씀의 훼손이다. 이 말 자체는 굉장히 은혜스러운 것일 수 있으나, 빌닷이 한 이 말은 욥의 심장을 후벼 판 옳은 말이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빌닷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욥의 상황을 왕골과 갈대’, ‘거미줄’, 그리고 정원의 식물등에 비유하며 공격한다. 빌닷은 욥의 고통을 위로하기는커녕 욥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불경건한 자들의 삶을 택했기 때문에 그에게 불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거라고 진단한다.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욥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기 9:2). 또한 욥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욥기 9:4).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전능성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닥친 고난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은 자기 자신의 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당할 정도로 자신은 불의한 자가 아니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상황 속에서 욥은 자신에게 세 가지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온갖 불평을 다 던져 버리고 슬픈 얼굴빛을 고쳐서 명랑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고통당하고 있는데 그런들 자신의 죄가 사면 되겠는가?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정결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모른 채 하나님에 의해 악인으로 정죄된 마당에 자신을 정결케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욥은 이것도 헛된 수고가 될 뿐이라고 한탄한다. 셋째, 자신의 상황을 공평하게 중재할 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없다고 토로한다. 이처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선택권 모두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욥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죽음은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에서의 유일한 해방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차라리 죽었으면…”하는 고통이 엄습하는 상황 속에서 차라리 죽으면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해야 하는가?

 

인간의 불행한 삶 만을 들여다 보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죽어야 할 이유들만 보이나,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욥의 세 가지 선택권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얼굴 빛을 고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정결케 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동등한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기독론에서 다루는데, 특별히 이것을 화해론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피조물과 하나님을 화해시키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 모른다. 살아야 할 의미를 아무 데서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음이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의 해방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만이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의 해방구가 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기만 한다면, 덧없어 보이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모든 의문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육체와 마음의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이다. , 인간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 가장 괴롭다. 그때 인간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러나 육체와 마음의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인간은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 가련한 인생들에게 가장 큰 소망이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아무리 지옥 같은 인생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면,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해야 한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만약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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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