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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21. 23:02

안식을 간구하라 - (친구 3 - 소발)

욥기 4

(욥기 10:20-22)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10:1). 탄식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다. 탄식은 현재 겪는 고통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고통 받고 있는데 고통 받고 있는지 모르는 건 불행한 일이다. 고통은 저항해야 하는 것이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는 고통으로 인해 멸망 받고 만다. 고통에 대하여 저항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약한 존재(미물)라 할지라도 거기에 고통을 가하면 아픔을 느끼는 법이다. 세상엔 두 종류의 존재가 있다. 고통을 가하는 존재와 고통을 받는 존재이다. 고통을 가하는 존재는 강자라 하고, 고통을 받는 존재는 약자라 한다. 강자는 약자를 괴롭힌다. 강자는 약자를 괴롭히며 고통을 감내하라고 한다. 강자는 고통을 가하면서 그것이 고통인 줄 모른다. 고통을 가하면서 고통 당하는 약자가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는 것이 강자의 속성이다. 약자는 대개 강자가 고통을 가해 오면 거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한다. 그렇게 약자는 반복되는 폭력 앞에 몸과 영혼이 죽어간다. 그렇다면 약자가 강자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강자에게 저항하거나, 아니면 강자의 폭력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제로 목숨을 끊는 것과 다른 하나는 고통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즉 고통을 고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서는 것이다. 고통이 극심한 사람에게는 이 상태가 가능하다. 대개 이런 사람은 정신이 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미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하여 저항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감각하지 않고 내면화시키는 일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몸에 감각이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가해져 오는 어떠한 위험으로부터 피하기 위함이다. 일례로, 우리는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뜨거움에 대한 통증을 느낀다. 감각이 그것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본능적으로 손을 떼거나 그 자리를 얼른 피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둥병(한센병)’이 무서운 이유는 그 병에 들면 감각이 없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위험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뜨거운 것을 만져도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한다.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뜨거운 곳에 살을 대면 살은 타 들어가게 마련이고 결국 그것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감각하지 못한다고 괜찮은 것이 아니다. 감각하지 못했지만 감각하지 못한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인생은 종말에 이를 수 있다.

 

성경에는 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온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과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실정법적인 죄의 개념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죄의 개념을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 특별히 성경에는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노예란 가해지는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죄의 노예란 죄가 가하는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죄의 폭력을 내면화시킨 상태를 말한다. 노예는 자신이 지금 어떠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그 폭력의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야 하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저 노예로 살아갈 뿐이다. 이처럼 죄의 노예도 자신이 지금 어떠한 죄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그 폭력의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야 하는지 모른다. 노예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죄의 노예도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구원의 손길인 것이다.

 

욥은 우리에게 고통에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폭력의 상황에서 받는 고통에 대하여 어떻게 그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저항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욥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에 매몰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묻는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1:2). 욥은 섣불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내면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탄식한다. 탄식은 하나님에게 저지르는 불경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하나님은 까닭 없이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을 괴롭히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까닭만 있다면 피조물을 마음껏 괴롭히시는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 자신이 이러한 고통을 받을만한 악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욥은 고통으로 인해 가까이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평안을 누리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나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10:20).

 

욥이 안식을 구하고 있다. 욥은 왜 안식을 구하는 것일까? 그는 왜 잠시나마 평안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그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있다. 욥은 잠시나마의 평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과 하나님은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안식을 누리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일까?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 25장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안식이다.

 

현대인들에게 쉰다는 개념은 그저 하던 일을 멈추고 일터를 떠나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쉰다는 것을 레져라는 말로 생각한다. 쉬는 것도 소비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쉬는 동안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쉬면서 생명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러했듯이 또 다른 소비에 물들 뿐이다. 현대인들은안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저 이 세상이 이끄는 데로, 소비의 멍에를 짊어진 황소처럼 끌려 다니고 있다.

 

안식은 멈춤이다. 욥이 안식을 간구하는 것은 고통이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멈추지 않으면 쉬는 게 아니다. 고뇌의 멈춤, 미움의 멈춤, 걱정의 멈춤, 아픔의 멈춤, 후회의 멈춤 등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그 어떠한 것이든 모든 것들을 다 멈추는 상태가 안식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어떠한 형태의 고통이든지 그것이 멈춰지는 순간이 바로 안식인데, 그 안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혜이다. 그래서 안식은 곧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이 된다. 레위기에서 특별히 안식일 법을 제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부리는 종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에게 육체적인 쉼을 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안식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의 관심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에 있다. 성경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과 해방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온통 하나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형태든 우리에게서 안식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악한 일()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안식을 빼앗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누군가의 안식을 빼앗은 일은 가장 큰 죄인 것이다.

 

욥의 친구 소발이 저지르는 죄가 바로 이것이다. 소발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다른 말로 욥에게 안식을 주기는커녕 욥에게서 안식을 빼앗고 있다. 소발은 욥의 탄식과 고통에 대하여 어떠한 위로나 동정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욥의 고통이 욥 자신의 죄에 비하면 작은 것이라고 한다. 소발은 욥의 교만한 상태를 보면 지금 가해지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 가운데 처해져야 마땅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만큼만 고통 받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가장 큰 죄악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안식을 잃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상대방의 안식을 빼앗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밧줄을 끊으면 그 밧줄에 의지해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이 죽을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그 밧줄을 끊어내는 사람은 얼마나 사악한가!

 

욥은 무엇보다 안식을 간구했다. 바로 그 안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식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만큼 인생에게 위로가 되고 평안이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어쩌면 인생에게 가장 좋은 안식은 죽음인지도 모르겠다. 욥은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지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10:21-22).

 

인생은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이다. 그런데 상수가 ‘0()’인 곱하기이다. 상수가 ‘0’이기 때문에 그 상수에 무엇을 곱해도 결과는 똑같이 ‘0’으로 나온다. 1곱하기 00이고, 100 곱하기 00이다. 물론 10000 곱하기 0도 영이다. 그러니 인생이란 어차피 0이 되는 곱하기이니,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좀 멋지게 살지 못했어도 괜찮은 것 아니겠는가. 어차피 우리 모두는 다 똑 같은 곳으로 간다. 우리는 모두 땅으로 간다.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에서 안식을 누리를 것이다.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었어도 결국 그것 때문에 영생을 얻는 게 아니라, 모두 똑같은 곳,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은곳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 업적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이것은 인생의 허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업적을 이루지 말고 배짱이처럼 놀고 먹는 게 최고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허무할 수 밖에 없는 인생으로부터 구원 받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그 고통의 강도가 조금씩 다를 뿐, 욥처럼 말할 수 없는, 끊임 없는 고통의 파도 속에서 평안할 날이 없다. 그런 가운데, 욥처럼 하나님께 내 날은 적지 아니하나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소서라며 하나님께 안식을 간구하는 일은 허무한 인생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생, 고통에 저항하고자 하는 인생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안식을 간구하며 탄식한다. 고로 존재한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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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