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7.16 에브라임과 므낫세
  2. 2015.07.09 야곱의 유언
  3. 2015.07.09 새로운 신앙의 경지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7. 16. 11:45

에브라임과 므낫세

창세기 62

(창세기 48:1-7)

 

유언을 남긴 야곱이 연로하여 병에 든다. 요셉은 이 소식을 듣고 그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대동하고 아버지 문병을 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입양하게 된다.

 

물론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입양이 오늘날과 같은 입양 절차를 걸치는 것은 아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는 것은 자식을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는 근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야곱은 어떠한 결정을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 근거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린다.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려는 순간에도 야곱은 왜 그가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내어놓는다.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3-4).

 

이것이 바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는 배경이다. 야곱은 자신의 욕심에 근거해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근거로 그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기 위해 그러한 결정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을 살면서 선택의 기로에 섰거나, 무슨 일을 감행하게 될 때 무엇을 근거로 해야 복을 받는지에 대해 배운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는 경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다. 특별히 이 구절이 끌린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이 구절을 근거로 생각해볼 때, 야곱에게는 분명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우선 전능하신분이다. 여기서 전능하신이라는 뜻은 엘샤다이인데, 엘샤다이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자신이 정한 말과 법칙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엘샤다이의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이란 약속을 꼭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행한 어떠한 일은 복이 될지 악이 될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 어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그를 도와주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했다고 치자. 부자의 기부는 가난한 자에게 이 될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부자의 기부를 통해 가난한 자에게 행복이 임할 수도 있고, 더 큰 불행에 처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갖는 한계이며 연약함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에게서 무엇인가 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복이 복으로 작용하게 끔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그것을 그대로 복이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그것은 그대로 심판이 된다. 뒤바뀌는 일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다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다. 야곱은 일생을 통해 바로 그것을 경험했다.

 

또한,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결국 이 말씀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인간의 말은 존재의 가벼움을 그대로 반영할 뿐이다. 입에서 나간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 그 말 대로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손가락을 걸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 말이 곧이곧대로 지켜지는가?

 

말이 얼마나 안 지켜지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법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법이라는 것이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별개 아니다. 법이 생겨난 이유는 사람들끼리 서로 간에 한 말을 안 지키기 때문이다. 아무리 준엄하게 선서의식을 행해도 소용 없다. 약속이 깨지는 순간을 보면, 언제 그들이 준엄하게 선서의식을 행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뒤 돌아보지 않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인간의 사악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다르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이유는 그의 말씀은 신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대면하는 자에게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라, 언약(Testament)이다. 그래서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복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경험해야 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 경험이다. 이 사회는 이런 저런 경험 내지 체험을 많이 한 인재를 요구한다. 경험과 체험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유연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과 체험이 많은 사람은 유능한 인재로서 어느 집단에서나 인기가 높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러한 사회적 인재상에 부응하기 위하여 경험과 체험을 많이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한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어학 연수도 떠나고 여행도 떠나고 여러 군데 일터에서 인턴십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사회의 인재상으로 빚어져 간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단 한 가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다.

 

종착역이 좋은 직장이라면, 경험과 체험을 많이 해서 생각이 유연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인재로 성장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경험과 체험의 영역을 넓히는 사람은 놀부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복 받기 위해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치료한 놀부에게 임한 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듯이, 좋은 직장을 위해 경험과 체험의 영역을 넓히는 사람에게 결국 무엇이 올까? 적어도 유연한 생각과 문제 해결 능력이 그들의 참된 인격으로 자리 잡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하나님의 존재성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특별히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에게서 경험되고 있는 하나님을 전한다. 그 하나님을 만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성경을 이토록 열심히 들여다 보는 이유는 거기에 어떠한 신령한 능력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은 나침반이고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리키고 설명해 주고 있는 그곳을 바라보며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내가직접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한 번 물어보자. ‘나에게 하나님 경험이 있는가?’ 이것은 참 도전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어떠한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 경험이 있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하나님 경험을 했다고 스스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단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하나님 경험에 대한 검증을 위해서라도 신앙은 절대적으로 공동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의 교회라는 개념을 통해 교회의 공동체성을 유지해 왔다. 물론 교회 안에는 여러 분파가 있을지라도, 그 분파들에게 공통되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의 신앙을 살피는 것이다. ‘목양이라는 개념도 이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울타리 역할을 해주는 목양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야곱에게는 분명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어떠한 말씀을 받는 것인데, 그러한 경험을 하고 나면 야곱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말씀에 매이게 되어 있다.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어떠한 결정을 하든, 그 말씀이 근거가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경험해보고 체험해봐야 할 것이 정말로 많다. 유연한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려면 다양한 경험과 체험은 기본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유연한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키운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병이 들어 몸이 허약해진 상태였지만, 그런 중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행동을 취한다. 이게 정말 쉽지 않은 거다. 사람은 나이 들고 병들고 죽음을 앞두면 나약해지고 흔들리는 법이다. 그래서 엉뚱한 행동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또는 지인들에게 상처주기 십상이다. 하지 말해야 할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다. 혼란만 가중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말로이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분명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은 끝까지 야곱을 붙들어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그가 끝까지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데 기준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입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내리신 복이기도 하다.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장남으로서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복을 받아야 했으나 르우벤 대신 요셉이 두 배의 복을 받게 된 것이다.

 

요셉이 이렇게 큰 형 르우벤을 대신하여 장자의 복을 받게 된 이유는 그가 진정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 헌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 헌신하는 자를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 두 배의 복을 내리신다. 이 사실만 알아도, 우리의 헌신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물론, 요셉이 그렇게 모진 고통 가운데서도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도 하나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복이 넘치는 세상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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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7. 9. 06:07

야곱의 유언

창세기 61

(창세기 47:27-31)

 

갖고 온 게 없는데

뭘 가지고 가겠어

 

생각해봐, 그 어렵던 시절

 

생명보다 죽음을 먼저 알았고

평화보다 침략을 먼저 알았고

사랑보다 전쟁을 먼저 알았고

神보다 미신(迷信)을 먼저 알았고

 

그러나 생각해봐, 살아온 시절

 

생명을 만났고

생명을 낳았고

평화를 누렸고

평화를 남겼고

사랑을 입었고

사랑을 나눴고

()을 배웠고

()을 전했고

 

갖고 온 게 없는데

뭘 가지고 가겠어

   

그만큼이면 됐어 그러니

내 누울 자릴랑 남겨두지 말고,,,,,,

                             

불에 태워 한 줌의 재로 만들어

우면산(牛眠山) 기슭에서

마주보며 살게 해줘

 

장준식, <유언> 전문

 

이것은 선친의 유언이 담긴 시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는 죽음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직감이 있는 듯하다. 물론 아버지께서 의사로부터 8개월정도 후에는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는 ‘사형선고’를 받으신 영향도 있겠지만, 사람은 죽기 전까지 죽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 살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살더라도, 인간은 언제 죽게 될지 그 정확한 시간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 안에는 보이지 않는 직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본인이 언제 죽게 될지 그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에게서 정을 뗐다. 일부러 정을 뗀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정을 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얼마 뒤,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자신이 죽으면 매장하지 말고 화장을 해서 우면산 기슭에 뿌려 달라고만 했다. 화장이 그렇게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죽은 뒤 화장해 달라고 고집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매장하면 산소를 찾아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자녀들에게 남기는 것인데, 아버지는 그러한 번거로움마저 자녀들에게 지우고 싶지 않아 했다. 물론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가 죽은 뒤 화장해서 그 유해를 납골당에 모셔놓고 일부를 우면산에 뿌렸지만(모든 유해를 야산에 뿌리는 것은 불법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후회되는 건 아버지의 유언을 곧이곧대로 들어드린 것이다. 아버지 산소가 없으니까, 아버지가 정말로 아무데도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사는 게 힘들어서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어디를 찾아가서 ‘아버지’를 부르며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유언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긴다. 아버지는 참 소박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그 무엇에 욕심 부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지막 유언도 ‘가지고 온 게 없는 뭘 가지고 가겠어!’라며 자신의 산소조차 만들지 말라고 했다. 죽은 뒤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크게 알리고자 산소를 멋지게 꾸미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자신의 산소조차 만들지 말라며, 자녀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것이 평생 소박하게 살아온 아버지가 후손들에게 남긴 마지막 교훈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욕심부릴 수 없다. 소박함을 거부할 수가 없다.

 

야곱도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애굽 땅에 거주 한 지 17년이 지난, 그의 나의 147세 때의 일이다. 죽음을 직감한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실질적으로 장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아들 요셉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유언을 전한다. 그의 유언은 장황하지 않다.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29-30).

 

야곱의 유언식은 매우 준엄하게 진행된다. 야곱은 요셉을 불러들인 뒤, 유언을 말하기에 앞서 요셉에게 자신의 유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인식시키고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29).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자신의 유언을 준엄하게 실행해 줄 것을 부탁한다.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는 행위는 그 옛날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러 그의 종을 하란 땅으로 보내면서 행했던 의식과 똑같다. 이런 ‘의식(ritual)’은 그 일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같은 말을 해도, 같은 행동을 해도 일상에서 하는 것과 ‘의식’ 안에서 하는 것을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닌다. 어떠한 특정한 말과 행위는 ‘의식’ 속에서만이 우리의 내면 깊이 의식화(意識化)된다. 의식(ritual)은 어떠한 것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는 일을 한다.

 

야곱의 유언, 즉 “내가 죽거든 너는 나를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가나안땅)에 장사하라”는 유언은 야곱에게 있어 단순한 유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험악한 세월’을 견뎌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그렇게 험악한 세월을 견디며 산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다. 야곱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야곱은 그 ‘험악한 세월’을 그토록 잘 견뎌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그의 ‘험악한 세월’을 끝까지 잘 견디도록 해 준 버팀목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 땅에서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실 거라는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귀향’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끝까지 기대어 사는 그의 사명이었다. 게다가 야곱은 요셉의 인도를 따라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오면서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 시도 잊지 않았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46:4).

 

한 사람이 죽기 전, 그가 남기는 유언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유언에는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담길 수 밖에 없다. 마지막에 먹는 음식은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음식일 것이고, 마지막에 방문하고 싶은 장소는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일 것이고, 마지막에 만나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남기는 말(유언)은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담길 수 밖에 없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야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약속)이었다. 그가 왜 아브라함과 이삭에 이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그의 유언이 증명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일컬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일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을 부를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것은 요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원리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것은 그렇게 세속적인 뜻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리 겨루어도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야곱의 유언이 그 뜻을 보여준다. 야곱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다.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28:16). 조급한 마음과 서두르는 마음은 모두 확신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확신이 있는 사람, 믿음 가운데 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고 믿는 이는 절대로 서두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를 기다리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을 밑거름으로 내놓는다.

 

야곱의 유언은 단순히 자기 자신만의 소망이 아니다. 야곱의 유언은 ‘비록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내려왔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귀향>하게 될 거’라는 믿음의 확인이다. 만약 야곱의 유언이 준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창세기의 뒤를 잇는 <출애굽기>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비록 4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야곱은 믿음의 눈으로 미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마중물’이 되어 그의 자손들에게 일어날 일, 즉 가나안 땅으로의 회귀를 자신의 유언을 통해서 미리 실현했던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 11:1). 야곱의 유언은 단순한 ‘말 남김’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었다. 그의 유언은 그의 인생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붙든 삶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믿음의 증거였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일’은 재수없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유언이란 기껏해야 자신이 가진 물질을 어떻게 분배할지에 대한 진술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언은 결코 세속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언은 야곱의 유언처럼 ‘자신이 믿어온 바’에 대한 신앙고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말씀을 받았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떠한 유언을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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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7. 9. 06:05

새로운 신앙의 경지

(하나님의 현현)

욥기 6

(욥기 42:1-6)

 

욥과 친구들의 지난한 논쟁이 끝나고,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정리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은 늘 이렇게 맨 마지막에 등장하신다.

 

인생은 미지의 세계이다. 좀 아는 것 같다가도 모르는 게 투성이다. 이런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이다.

 

고난은 늘 낯설다. 고난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고난은 낯설기 때문에 그 고난의 상황은 늘 우리를 긴장시키고, 힘들게 한다. 그토록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고난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를 아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닥쳤을 때 그 이유도 모른 채, 어쨌든 살아남기 위해 온 몸으로 그 고난과 맞서 싸워야 한다.

 

욥은 의인이었으나, 고난을 당했다. 고난이란 의인이나 악인이나 상관 없이, 인생을 살게 되면 겪게 되는 것이다. 악인의 고난은 그래도 이해가 간다. 누구든지 악인이 고난을 받게 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 얼마큼이나 될까? 그러한 이들은 천벌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정해진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시련이 닥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세월호 사건이라든지, 미국 찰스턴의 총기난사 사건 같은 것이다. 학생들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또는 그들의 부모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그토록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수요일에 모여 성경공부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길래 찰스톤에서는 그렇게 끔찍한 총기사건이 발생한 것일까?

 

욥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값싼 위로를 받으며, 값싼 신앙을 내세우며 하루 빨리 잃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다 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아들과 함께 시골에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던 여주인공(전도연 분)에게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다. 아들이 납치 살해 당한 것이다. 그 사건을 경험하고 여주인공은 거의 반실성상태에 들어서지만, 나름대로 신앙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겐 왜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처절한 저항의 과정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용서받았다고 믿는 범인을 만났을 때,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했냐며 분노에 못 이겨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로 변신한다.

 

악마(악마 같은 인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악마 같은 존재(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들)는 처음부터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에게 일어난 비극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물론, 비극(고난, 고통)을 경험한 이들이 그 비극을 잘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쩌면 죽기보다 더 힘든 일인지 모르겠다. 트라우마가 발생하면 그것은 평생 그것을 당한 이들에는 몸의 가시로 존재한다.

 

얼마 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던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가 있다. 완전히 미국적인 영화인데, 911 사건 등 테러단체들에 의해 희생당하는 자국민이나 군인들에 대한 뉴스를 접한 어떤 젊은이가 애국심에 불타 특수부대에 지원하여 스나이퍼가 되어 전장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의 전쟁 경험은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애국심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나약함과 참상이 있다. 특별히 아이를 이용하여 테러를 저지르는 테러단체의 악마성 앞에서 그는 큰 충격에 빠진다. 폭탄을 들어 뛰어드는 테러단체의 어린 아이를 스나이퍼로서 총으로 쏴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갈등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쏴 죽인다. 그는 스나이퍼로서 명성을 날리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은 자꾸 파탄으로 치닫는다. 아내와의 관계가 서먹해지고, 자꾸 정신이상 증세가 발생한다. 그는 결국 제대한 뒤,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힘쓴 결과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자신처럼 전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예비역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신이상자였던 한 예비역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우리 삶의 비극은 이렇게 자꾸 악순환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비극이 넘쳐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내가 경험한 비극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해야 헤어나올 수 있을까?

 

욥이 가르쳐 주는 것은 이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고난, 비극, 고통에 순응하지 말고 끝까지 저항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절대로 내면화시키지 말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고 끝까지 하나님께 따져 물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저항하고 따져 물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주신다는 것이다.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끝까지 맞서 저항했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당한 고난을 넘어서는 어떤 신비로운 경험을 주신다.

 

물론, 욥기서에서도 왜 욥이 그러한 고난을 당했는지에 대한 인과율적인 대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을 깨달아 알았을 때, 욥은 더 이상 왜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인과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비그 자체라는 것이다. 신비는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감추어져 있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거나 질문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비극, 고통)을 극복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선 것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 이것은 욥이 진짜로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뵈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욥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가졌다는 뜻이다.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백문이 물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뜻이다.

 

“overview effect”라는 말이 있다. 우주인인 Frank White가 만든 말인데,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모든 게 달라 보인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경험한 모든 이들이 동일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모두 “overview effect”를 경험했는데,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지구의 실제 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지구는 굉장히 작고, 쉽게 깨질 것 같은 생명체 같은 것이었는데, 종이처럼 얇은 대기에 의해서 보호되고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연약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국가 간의 경제는 사라지고, 사람들을 나누던 갈등은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바라보니,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한 그들은 다시 지구로 돌아왔을 때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지구 안에서만 아옹다옹 살던 때에 가졌던 생각 속에서 살지 않는다. 우주를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야말로 ‘overview effect’가 발생하여 이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영원히 바뀐다.

 

욥은 지금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뀐 ‘overview effect’를 경험한 것이다.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고난의 문제가 다르게 다가 온다. 그렇게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고난(비극, 고통)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당당히 극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 욥이 취하는 자세를 보자. 그는 우선 하나님 앞에서 회개부터 한다. 욥의 회개는 싸구려 회개가 아니다. 단순히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의 갈구가 아니다. 욥의 회개는 ‘overview effect’를 경험한 자로서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겸손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욥은 자신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었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했던 친구들과 화해한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친구들과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들과 아옹다옹 싸우는 것도 무의미하다. 우리는 무의미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벌이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순종을 하게 된다. 욥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원수같은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순종하지 못할 것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기만 한다면, 우리도 욥처럼 깊은 순종의 도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욥은 참된 안식에 거하게 된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나니, 욥은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받는다. 고난을 당하며 욥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 바로 안식이었다. 욥은 안식을 달라고, 죽기를 갈망했었다. 죽는 게 오히려 낫다고 했다. 그게 오히려 안식을 누리는 길이라고 토로했었다. 그런데, 욥은 이제 그가 그토록 바라던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기 42:10).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기 42:16-17).

 

욥의 인생에 이토록 안식과 평안이 넘쳤다. 그의 마지막 죽음도 안식과 평안에 싸여 있다. 욥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는 안식과 평안을 누렸다.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길은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것 밖에는 없는 듯 하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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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