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6.01.31 밤 산책
  2. 2016.01.28 잠의 미학
  3. 2016.01.28 슬픈 사랑
  4. 2016.01.27 야로밀의 질문
  5. 2016.01.26 잠 못 이루는 밤
  6. 2016.01.23 엄마의 자궁
  7. 2016.01.22 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 되기
  8. 2016.01.09 제로(nothing)로 놓기
  9. 2016.01.09 케노시스의 일상화 2
시(詩)2016. 1. 31. 12:32

밤 산책

 

깜깜한 밤, 산책을 하며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가다가 길을 잃었거든 저기 북극성을 찾아보렴.

북극성은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 사이에 있단다.

그러니, 가다가 길을 잃더라도 너무 당황하지 말거라.

너희들이 길을 잃더라도

저기 저 하늘의 별은 변함 없이

저기 저 하늘에서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단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밤은 오히려 가야할 길을 가르쳐 주는 별을 품고 있단다.

그러니, 혹시 인생을 살며 밤 길을 걷게 되더라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거라.

밤은 오히려 너희들에게 빛이 되어 줄 거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솜털 살랑이는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의 별을 슬기롭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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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 28. 03:38

잠의 미학

 

잠은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공간이동 하게 하는 블랙홀

자고 일어 났는데

아직도 그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

나는 이제 다른 삶으로 공간이동 하기 위해

수면상태로 들어간다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그래서 영원히 존재할

오늘의 삶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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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 28. 03:36

슬픈 사랑

 

슬프도다, 법정 앞에 선 내 사랑이여!

그 눈망울에서는 분노가 뚝뚝 떨어졌고

그 입술에서는 불안이 맴돌았다.

눈망울은 흔들렸고

입술은 떨어지지 않아

몸속에 흐르던 피가 솟구쳐 올라

얌전하던 몸을 흔들어 댔다.

그것을 바라보던 이들의 시선은 두 갈래로 흩어졌고

판사와 청중들에게는 우스꽝스러웠으나

한 남자의 눈에는 파문을 일으킨 돌처럼 들어와 박혔다.

그 날 이후,

한 남자의 심장은 영원히 내려 앉았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한 남자는 한 여자를

백정이 송아지의 겁먹은 눈을 사랑하듯*

사랑하게 되었다.

 

* 밀란 쿤데라의 <생은 다른 곳에>서 가져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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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1. 27. 02:38

야로밀의 질문

 

  야로밀이 물었다.

"네 안에는 어떤 세계가 있니?"

.

.......

.

"네 안의 세계"

.

나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묻는 사람은 있었어도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

   야로밀이 말했다.

"너는 불쌍한 아이로구나."

.

한 번도 나는 나를 불쌍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나는 내 안에 어떤 세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안에 있는 세계 대한 목마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

"네 바깥 세상은 네 안에 있는 세계에 비하면 누추하고 재미없단다. 네가 만약 네 안에 있는 세계를 발견하고 나면 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거란다. 네 안에 있는 세계 이외의 세계는 모두 신기루란다."

  야로밀이 말했다.

.

내 안의 세계, 불쌍한 아이, 신기루.. 알 수 없는 말들..

내 안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목마르다.

  "너는?"

.

시간이 흘렀다.

내 안의 세계에 대한 목마름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바라본

거울에 비친 내 눈은 목마른 눈빛이 아니라

여전히 바깥 세상에서 그러던 것처럼

내 안의 세계를 염탐질만 하고 있었다.

.

삶은 아득하고,

  탐욕은 끝이 없다.

     삶은 이렇게 신기루로 끝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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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6. 1. 26. 13:35

잠 못 이루는 밤


예전엔 내일이 오는 게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일이 오는 게 싫어졌다. 내일이 오는 게 너무 싫어서 일부러 밤에 잠을 안 잘 때가 많아졌다. 아마도 전도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 박히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 것 같다.


"모든 것이 헛되니,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전도서 2:16-17).


오늘 뭔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희망찬 내일' 또는 '성공'이 오는 게 아니라, 그저 나의 인생은죽음'으로 치닫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내 심장을 짓누른다. 어차피 이제 곧 늙고 병들어 죽게 될 텐데 무엇이 나에게 유익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전도서의 이 말씀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여 그저 하루하루 즐겁고 기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잠언 2:24). /  내 아들이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잠언 12:12).


나는내일이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 제일 좋다. 이제 한 번 가버리고 나면 내 인생에 또다시 오지 않을 오늘만큼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그래서 나는 내 소중한 오늘을 함부로 빼앗는 사람이 제일 싫다.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뿐이다. 그들은 나에게 기쁨을 주므로. 나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 것에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는 것만큼 허무하고 아까운 것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에만 나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으랴. 그것은 허무를 넘어선 악인들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너무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는 것은 쾌락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므로 그것이 선한 일인지 아닌지 또한 살피는 것도 중요한 듯싶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알았고…”(전도서 3:12). , 그래서 나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모든 것은 나의 기쁨이 되므로.


이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려 한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의 시간을 내어주며 기쁨을 얻고 싶을 뿐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묘지에 이런 문구를 새겨 넣었을까?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잠이 안 온다. 비가 와서. 기차가 지나가서. 그리고 하루가 지나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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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 23. 05:45

엄마의 자궁

 

엄마의 자궁을 얕보지 마라.

엄마의 자궁만큼 신성한 곳이 이 세상에 있더냐.

생명은 신성한 곳에서만 잉태되느니라.

에덴동산이 타락했을 때조차도

엄마의 자궁은 신성하게 보존되었느니라.

하느님은 에덴동산을 엄마의 자궁으로 옮겨 놓았느니라.

엄마의 자궁을 얕보지 마라.

엄마의 자궁이 없었다면

에덴동산 이후의 역사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느니라.

태초에 시작된 생명의 역사가 소멸되지 않은 것은

모두 엄마의 신성한 자궁 덕분이니라.

엄마의 자궁이 존재하는 한

생명은 끊이지 않을 것이니라.

이렇게 신성한 엄마의 자궁을 더럽히는 자,

그런 자는 엄마의 자궁에서 잉태된 자가 아니니라.

그런 자를 일컬어 우리는

'사탄'이라 부르나니

그는 생명을 모르느니라.

엄마의 자궁에서 '생명'으로 잉태된 이들이여,

생명을 누릴지니라.

엄마의 자궁을 갈망하고 사랑할지니라.

네 생명이 어디에서 잉태되었는지

잊지 말지니라.

엄마의 자궁이 네 생명의 근원이니라.

신성한 엄마의 자궁에서 '생명'으로 잉태된 너는

신성한 존재이니라.

엄마의 자궁을 얕보지 마라.

네 생명을 잉태한 엄마의 자궁이 바로

에덴동산이니,

거기에 하느님이 거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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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 되기

-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디지털은 혁명이라 할 만큼 많은 것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디지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한병철 교수는 그의 책 <투명사회>에서 디지털 시대의 병폐를 논하며 이런 말을 한다. “, , 진리는 농부의 세계에 속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다. 우리는 사냥꾼이다. 정보의 사냥꾼들은 먹이를 찾아 디지털 사냥터인 인터넷을 쏘다니고 있다. 농부와는 반대로 사냥꾼은 이동성을 지닌다. 그에겐 정착하도록 강제하는 경작지가 없다. 그들은 거주하지 않는다”(171).

 

이러한 정보사회, 디지털 사회, 투명사회를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주의하지 않으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정보의 사냥꾼들로 전락하기 쉽다. 사실, 그러한 일들이 이미 설교가 예배의 중심인 개신교회 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목사의 설교는 정보가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 사회에서 인터넷을 통해 보급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설교는 어느새 정보로 변모한 듯 하다. 이것은 매우 기형적인 현상이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선택된 디지털 매체가 복음의 내용을 바꾼 듯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먀샬 맥루한이 말한 매체가 곧 메시지다의 실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한병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디지털 무리는 그 속에 영혼과 정신이 없다. 기독교인이 디지털 무리에 속하는 순간 그들은 영혼과 정신이 없는 정보만 습득하게 되는 데, 이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접하게 되는 설교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디지털 매체 속의 설교자가 하는 설교는 그것을 듣는 이로 하여금 설교자와의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설교를 자기의 삶에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한 자유를 맛본 디지털 무리 속의 기독교인은 자기 입맛에 맞는 먹잇감(설교)’을 찾아 인터넷을 이리저리 쏘다니게 된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라 사냥꾼으로 변한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5:1). 열매는 그냥 맺어지는 게 아니라, 오랜 수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열매는 정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쌓아야만 얻어지는 지식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기본적으로 열매를 얻기 위해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른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다. 이 땅에 두발 딛고 살며 신과 진리를 찾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더욱더 농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교회는 그의 경작지이다. 농부가 열매를 얻기 위해 경작지에 오래도록 머무르듯이, 그리스도 신앙인은 신앙의 열매를 얻기 위해 경작지인 교회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한 교회에 오래 다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가 가져다 주는 사냥꾼 되기의 습성에서 벗어나 농사 짓듯이 복음을 진지하게 대하며 그 복음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농부가 되기보다 사냥꾼이 되려는 습성이 강하다. 어떻게 이러한 습성에서 벗어나 농부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이 있다.

 

우선 개인적으로, 디지털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은 나와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목회자의 설교 듣기를 지양하는 일이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인격이다. 복음은 나에게 유익이 되는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나의 삶을 통째로 바꾸게 하는 능력(transformation)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지, 그분의 만 듣는 일이 아니다. <투명사회>에서 말을 빌려와 표현하자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디지털 매체, 특별히 인터넷에는 시선이 없다. 일방적 관음적인 태도밖에는 없다. 디지털 시대에 물든 사냥꾼 같은 교인은 설교가 나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떠나고, 신선한 정보가 없으면 떠나고, 스타일이 자기와 안 맞으면 떠난다. 디지털을 통해 접하는 설교에는 함께 머무르는 시선이 없다. 시선과 인격이 거세된 설교는 우리의 삶을 바꾸는 복음이 되지 못하고, 눈과 귀와 마음만 즐겁게 해주는 외설적 정보로 전락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복음을 정보로만 접하면 행함이 없는신앙인이 되기 십상이다.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디지털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은 설교 중심의 예배를 성례전 중심의 예배로 바꾸는 일이다. 성례전이 가지는 일차적인 의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 받는 일에는 참여가 필수 요소이다. 성례전은 곧 참여이다. 물론 설교학자 메어리 힐커트 같이 설교를 성례전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에게는 설교(말씀)와 성례전을 구분 짓는 것이 불합리해 보일지 몰라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설교는 기본적으로 참여의 요소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배 참석자들은 설교 시간에 목사의 일방적인 선포를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은혜 되는 말(?)’에 그저 아멘정도로 화답하는 것이 참여를 이룬다.

 

성례전 중심의 예배로 바꾸는 일이 디지털 시대에 중요한 이유는 성례전은 기본적으로 머무름거리 두기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성례전은 정보재미감동'에서 떠나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기억(anamnesis)에 머무르게한다. 사냥꾼은 이동하지만, 농부는 머무른다. 사냥꾼은 먹잇감(열매)을 즉시 보지만, 농부는 열매를 상상한다. 사냥꾼은 먹잇감을 찾아 떠돌지만, 농부는 열매를 상상하며 그 상상 안에서 오래 참고 견딘다(참여한다).

 

인터넷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허물어 그들 간에 친밀성을 가져다 준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을 노출시켜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를 만든다고 한병철 교수는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 제의와 예식의 공간에서는 객관적 기호들이 유통된다. 이러한 공간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다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76).

 

인터넷을 통해 시선과 인격이 거세된 설교를 듣는 것과, ‘제의와 예식의 객관적 기호들참여가 없는 예배는 결국 나르시시즘만 가득한 교인을 만들 뿐이다. 성례전은 적극적인 참여(머무름)’인 동시에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놀이와 제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객관적 규칙이지 주관적 심리 상태가 아니다”(75). 성례전은 개인의 주관적 심리상태와는 상관 없이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머무르게 하며 참여하게 한다. 그러므로 친밀성을 가장해서 머무름거리 두기를 제거해 버리는 디지털 시대에 성례전 중심의 예배는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더욱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는 편리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리품 팔아 복음을 들으러 가야 하는 수고 없이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내 입에 딱 맞는 말씀을 편리하게 골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이, 농부로 태어난 우리가 어느새 먹잇감을 찾아 이러저리 쏘다니는 사냥꾼이 되어 간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이다. 복음은 경작지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씨를 뿌려 경작해야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지, 사냥꾼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며 내 입에 맞는 먹잇감고르듯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와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의 설교는 가능한 한 멀리 하자. 그리고 하나님과 나’, ‘이웃과 나’, ‘나와 나사이에 거룩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적극적인 참여를 갈망케 하는 성례전적인 예배를 세워나가자. 이것이 디지털 시대에 농부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제로(nothing)로 놓기

 

나이 들어가며 맛있는 게 없다. 음식 자체가 맛있는 음식은 없고, 그저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최고로 맛있다. 그래서 요즘엔 무엇이든지 맛있게 먹으려고 먼저 속을 비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기쁘고 즐겁고 감사할 때는 기대를 전혀 안 했는데 뜻밖의 무엇인가가 주어졌을 때이다. 특히, 사람에게 상처 받지 않고, 그 사람으로 인해 기쁘고 감사하려면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로 나의 마음을 비워내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인생에서는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원래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원래 벌거벗고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물건이든, 기억이든, 사랑이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

 

모든 것을 제로(nothing)로 놓기, 이것은 인생의 가장 뛰어난 기술(art)이다.


Posted by 장준식

케노시스의 일상화

 

미국 시골에서 목회하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보니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겠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시몬느 베이유가 신비주의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고난" "불행"으로 가득 찼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모습이 별볼일 없고 초라해지는 것을 못 견뎌 한다. 그런데 예수는 일반 인간이 그토록 혐오하는 "케노시스"의 모습을 자신의 삶에 짊어졌다. 그 당시 십자가에서 죽는 것만큼 별볼일 없고 초라한 인생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길을 걸어갔다.

 

삶의 자리는 참으로 수렁과도 같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안 된다. 빠져나오려고 힘 쓸수록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어 감각은 마비되고 어둠은 깊어지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은 고난의 향유가 아니라 케노시스의 일상화이다. 잠시 고난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는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폭력적이고 권세를 잡은 자들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래서 그에겐 자유가 있었다.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는 모두 ''이라는 십자가를 수동적으로 짊어졌다. 살면서 우리는 질병이라는 폭력, 늙어감이라는 폭력, 죽음이라는 폭력에 의해 고통의 자리에 들어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성실하게 마주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질병과 늙어감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케노시스의 일상화를 이루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