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03.21
  2. 2016.03.19 이건 통치가 아니라 모방범죄다
  3. 2016.03.19 젖니 가는 고통
시(詩)2016. 3. 21. 13:46

 

봄,

꽃 피우기 경연대회가 시작되었다.

경연대회 중일 때

누구든

그 안에 꽃을 품은 생명은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꽃을

세상에 펼쳐 보일 수 있다.

 

생명은

안에 쌓여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낼 때

다소 왁자지껄하다.

이것은 미안한 일이 아니라

생명 고유의 성품이다.

 

그러므로

꽃이 얼굴을 드러내며 떨어뜨리는

꽃가루는

시대위를 향한 최루탄처럼

눈물을 만들어 내고

닫힌 공간에 꼭꼭 숨어 있게 만들지만,

그것이 비난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눈물은,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 하는 일은,

이렇게 생명현상에서 오는 것만 허락될 수 있다.

그 외의

눈물, 숨바꼭질은

시위대를 향한 최루탄처럼

생명에 대한 철저한 반역이다.

 

꽃은 피어나며

눈물을 만들어내지만

생명을 헤치지 않는다.

그래서 봄은

생명이 꽃을 마음껏 피워내도록

꽃 피우기 경연대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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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이건 통치가 아니라 모방범죄다

 

모방범죄라는 것이 있다. 어느 누가 지은 범죄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변이가 일어난다. 범죄영화나 범죄드라마, 또는 범죄소설이나 범죄심리 책 같은 것을 보면 단순히 범죄를 나열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조밀하게 분석해 놓는다. 그런데 지능범들은 조밀하게 분석해 놓은 바로 그 범죄를 이용하여 오히려 법 망을 빠져나가거나 그것을 역이용하여 누군가를 옭아매는 데 사용한다.

 

일례를 들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보면 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전체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대중들의 인권을 빼앗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예전에 그의 소설을 읽을 때는 '전체주의라는 것이 이렇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최근에 이 소설을 다시 보니 새로운 게 보인다. , 한국의 박근혜 정부가 하는 일들이 조지 오웰의 소설<1984>에 등장하는 '' '빅 브라더'를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84>에 등장하는의 슬로건은 이렇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은 이 슬로건 아래역사왜곡을 서슴지 않고 벌인다.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행하고 있는역사왜곡과 너무도 닮아 있다. 이뿐 아니라, 소설 속에서은 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대중들을 통제한다. 소설 속에서는골드스타인이라는 증오의 대상이 등장하는데, 대중들은 ‘2분 증오 프로그램(two minute hate program)’을 통해 증오를 발산하며 통제 당한다. 박근혜 정부가 계속하여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내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증오를 통해 대중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소설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사상경찰(Thought Police)’이다. 소설 속에서 사상경찰은텔레스크린이라는 장비를 이용하여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감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이중사고라는 것을 하는데 익숙해 진다. 소설에서 말하는이중사고란 이런 것이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철회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하여 논리에 맞서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고 필요한 순간에만 기억에 떠올렸다가 다시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자체에다 똑 같은 과정을 적용하는 것…”

 

나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박근혜 정부는 모방범죄의 변이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의 실세들은 모두 조지 오웰의 소설을 읽은 것 같다. 박근혜 정부는 이 소설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국민들을 옭아매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역사왜곡을 하고, ‘증오의 대상을 만들어 대중을 통제하고, ‘테러방지법을 만들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들겠는가.

 

 박근혜 정부가 하는 정치는통치가 아니라모방범죄처럼 보인다. 만약 국민들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국민들 모두가 소설에서처럼이중사고를 하며 살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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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6. 3. 19. 02:50

젖니 가는 고통

 

여서 일곱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고통은 젖니를 갈아내는 이빨 빠지는 고통이어야 한다. 어린 영혼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을 겪어서는 안된다.

 

나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여서 일곱살 즈음 울퉁불퉁한 기억이 없다. 젖니 가느라 아팠던 기억, 감나무에 올라가 놀다 내려오는 중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팔이 부러져 한강정형외과에 가서 치료 받으며 아팠던 기억이 전부다. 이것은 나의 부모님께, 또는 하늘에 계신 그분께 감사한 일이다.

 

요즘 심심치 않게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회적 문제가 아동학대이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 심지어 부모에게 학대를 받아 고사리같은 생명을 잃는 여서 일곱살 밖에 안 된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찢어진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사회적 정의의 핵심은 힘 없는 약자를 돌보는 것이다. 그 약자에는 과부와 어린이가 포함된다. 현대사회에서 과부는 더이상 약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지만, 어린이는 여전히 약자일 수 밖에 없다.

 

폭력은 강자와 약자의 힘의 불균형에서 오는 악이다. 더 힘센 사람은 자신보다 힘이 약한 존재에게 자신이 당한 폭력을 대물림하듯 가하는 경향이 있다. 일종의 폭력의 도미노 현상인데, 그 마지막은 항상 어린 아이일 수 밖에 없다.

 

자아가 형성될 시기에 가해지는 폭력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인격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이미 심리학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 속에서만 '성장'할 뿐, 그것을 넘어서면 고통 속에서 익사해 죽고 만다.

 

여서 일곱살 먹은 어린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은 젖니를 갈아낼 때 겪는 고통을 넘어서면 안된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주셨다. 어린 아이의 눈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 새싹처럼 연한 생명을 짓밟는 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으리라.

 

여서 일곱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고통은 젖니를 갈아내는 이빨 빠지는 고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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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