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6. 4. 24. 11:06

심판을 구하는 기도
(에스겔 36:31)


나를 심판하소서 주여.
나의 폐부를 찔러 정신이 깨어나게 하소서.
주의 심판만이
더러운 심령을 볼 수 있게
나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주님의 심판만이
나의 죄악과 가증한 일을
스스로 부끄럽게 하시나니,
나를 심판하소서.
주의 심판은 멸망이 아니라
나를 위한 자비이니이다.
심판은 나의 악행을 멈추게 하는
사랑의 행위이니이다.
주께서 나를 심판하지 아니하시면
내 생명은 영원한 불구덩이에 버려지게 되오니,
주여, 어서 빨리 나를 심판하셔서
그만 악행을 멈추고
돌이켜 구원을 받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4. 24. 11:01

주의 생기를 간구하는 기도
(에스겔 37:1~14)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는 주의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마른 뼈 골짜기를 지나며 곤고해진 주의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의 뼈는 마르고 말랐나이다.
나의 영혼은 곤고하고 곤고해졌나이다.
반드시 성취되는 주의 말씀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고 기도하오니,
주여, 주의 생기(루아흐)를 나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그려면 내가 다시 일어나 걷겠나이다.
내가 엘리야처럼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 주의 새로운 사명을 받겠나이다.
내려놨던 십자가를 다시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겠나이다.
주의 생기가 부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오니,
나에게 주의 생기를 부어 주시옵소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주의 생기이오니,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주의 종으로 여기신다면,
주의 생기 이외에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사오니,
오직 주의 생기를 부어 주시옵소서.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는 주의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마른 뼈 골짜기를 지나며 곤고해진 주의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의 생기를 부어 주사,
나의 생명에,
나의 가는 길에 생기가 넘치게 하시옵소서.
주여, 생기를 부어 주시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4. 24. 11:00

고맙다

 

콩팥이 고맙다

아무것도 못해줬는데 노폐물을 걸러내

오줌을 누게 해주는구나

 

대장이 고맙다

아무것도 못해줬는데 먹은 걸 걸러내

대변을 보게 해주는구나

 

허파가 고맙다

아무것도 못해줬는데 산소를 걸러내

숨쉬게 해주는구나

 

심장이 고맙다

아무것도 못해줬는데 피를 걸러내

생기를 돌게 해주는구나

 

뇌가 고맙다

아무것도 못해줬는데 생각을 걸러내

미치지 않게 해주는구나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이렇게 세 번 말했을 뿐인데

나는 죽지않고 살아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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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21세기 과학시대의 기독교

 

인간은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니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가령 신화적 세계관과 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자의 삶과 과학적 세계관과 탈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자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과 가치관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해이다(이를 종말론 또는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역사발전을 논했고,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헤겔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마르크스도 역사발전의 주체를 투쟁계급(프롤레타리아)로 정했을 뿐, 큰 틀에서 역사발전의 방향에서는 헤겔의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1,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보면서, 그리고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대학살의 참상을 보면서 인간 지성은 이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새로운 종말론의 도입을 갈망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신학자가 칼 바르트이고, 그는 기독론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말의 시대를 열어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르트는 종말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의 사후, 그의 종말론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이가 몰트만이다. 다행히도 몰트만은 바르트의 맥락에서 기독교 종말론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제는 바르트에서 시작해 몰트만에서 완성된 기독교 종말론만으로는 이 세계의 종말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바로, 과학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이점을 간파한 몰트만도 바르트의 맥락에서 완성시킨 종말론 이후에, 과학과의 대화를 통한 새로운 기독교신학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다(그래서 나온 책이 <과학과 지혜>이다).

 

우리는 어떻게 끝을 맞게 될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재림이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 거라고 주장하지만, 과학적 발견이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독교의 그런 주장에 대해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과학의 발견에 의하면, 예수의 재림이 아니더라도 45억년만 더 있으면 태양이 수명을 다해 어차피 태양의 폭발과 함께 지구는 끝을 맞이 하게 된다.

 

게다가, 구글의 미래학자 레이먼드 커즈와일에 의하면, 인류는 2029년 정도 쯤 눈부신 과학기술 덕분에 영생을 얻게 될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과 영생은 과학에서 말하는 종말과 영생과 어떻게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이게 단순히 성경을 들이대며 과학의 주장은 마귀의 주장이라고 우겨서 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지금도 '창조과학회'라는 꼴통보수 집단을 필두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지만...) 신학은 확정된 진리가 아니라 '되어져 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과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절대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학은 사이비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어떠한 세계관과 어떠한 가치관을 지니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뭘 잘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예수의 재림과 함께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게 될 거라면 우리는 뭣하러 우리의 인생을 열심히 살겠는가? 광신도들처럼 다 집어치우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 될 것을.

 

반대로, 과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45억년 후에 생명이 자연적으로 멸망 당하게 되거나,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곧 영생의 순간을 맞게 된다면,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 기독교의 종말론(구원론)은 과학의 종말론(구원론)과 어떠한 일치도 없으며 오직 적대적인 관계를 견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과학시대를 살아가며 과학이 주는 편리와 풍요를 다른 인류와 똑같이 누리며 사는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과학이 말하는 종말과 영생의 문제, 즉 구원의 문제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만약 기독교가 과학의 문명을 누리면서 과학의 성과에서 비롯되는 문제제기를 등한시한다면, 이는 물 속에 살면서 물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 안 하다가 물이 더러워져 또는 물의 환경이 변해 거기에 적응 못하고 죽는 물고기와 다를 바 없는 종국을 맞게 될 것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요, 오직 역사의 흐름과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한 자만이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을 좋아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현재 한국 교회는 의지력만 기르고 있을 뿐, 그 어떠한 개념 확립에도 매진하고 있지 않다. 체질은 의지력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개념의 확립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한 문제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줄 개념, 즉 세계관과 가치관의 확립이다. 21세기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맞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게 될 것인가?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21. 01:22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요 10:22-30 / 9:36-43)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을 맞았다. 부활절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주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이 땅에 오시는 성령강림절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하여 부활절기를 지킨다.

 

예수의 부활은 유일회적인 엄청난 사건이다. 세상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사건이다. 인류 역사에서도 보면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역사적 창조사건이 즐비하다. 그런 역사에는 혁명이라는 말을 붙여 표현한다. 예를 들면, 농업 혁명(농경 사회로의 전환 à 수렵 생활 하다, 이제 한 곳에 머물러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바퀴 혁명(운송 수단의 발달, 생활 반경이 넓어졌다), 산업 혁명(기계의 발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인간소외 현상이 발생했다), 과학 혁명(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신화적 세계관 à 과학적 세계관, 달에는 더 이상 방아 찧는 토끼가 살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혁명은 인간의 생활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가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하나님은 왜 예수를 부활시키셨는가? 부활은 악(불의)에 대한 선(정의)의 승리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매일 보는 악이다. 그 악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기지 못한다. 부활이 그것을 증거한다. 세상의 악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예수는 다시 사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심판하시고 이기셨다. 이 사건을 보면서, 악하게 사는 자, 불의를 행하는 자, 힘이 좀 있다고, 돈이 좀 있다고, 배운 게 좀 있다고 교만하게 굴던 자들은 모두 회개하고 선하게 살기로 결단해야 한다.

 

참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자만이 신적인 생명인 영생을 누리게 된다. 영생은 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삶, 즉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저 천국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산다.

 

구원이란 이 땅에서 불의하게 죄짓다(쉬운 말로 개같이 살다), 어쩌다 예수 믿어서 저 세상에 있는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사항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전한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제 이 사실 앞에서 우리의 할 일은 이것을 믿든지, 안 믿든지 하는 것이다. 이것을 결단이라 한다. 신앙은 결단 행위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기로 결단한다면, 예수의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세상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고, 예수의 부활을 못 믿겠다면 우리는 여전히 불의와 죄가 가득한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죄가 가득한 곳인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날마다 겪는 일이다. 게다가, 누군가에 의해 아픔을 당해보면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죄가 많은 곳인가를 뼈저리게 알 수 있게 된다. 전쟁, 학살, 억압, 불법, 구체적으로는 위안부 문제’, ‘세월호 참사등을 들여다 보면, 이 세상의 악함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게다가, 우리가 이렇게 살다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의 삶은 참으로 비참하게 만든다.

 

예수의 부활은 이 모든 비참함을 완전히 바꾼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다.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고 편리하게 하는 일은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지만, 그래서 그렇게 혁명을 통해 해왔지만, 그 모든 것 안에 스며 있는 비참함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부활이다. 이것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양을 비유로 들어 복음을 믿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이 아닌 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예수님의 양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욥바라는 도시에 살던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를 여제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예수를 믿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나서기로 결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비다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헬라식으로 번역하면 도르가이다. 뜻은 암사슴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살았던 이 사람을 규정 짓는 문장은 길지 않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who was always doing good and helping the poor.” 그런데, 그에게 힘든 일이 발생했다. 그에게만 힘든 게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37).

 

도르가(다비다)가 죽자, 주변에 함께 예수를 섬기던 또다른 제자들이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가까운 룻다라는 곳에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욥바로 모셔 온다.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해서 죽은 도르가에게 나아갔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를 붙잡고 도르가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울었고, 도르가가 살아 있었을 때에 그들에게 어떻게 선행을 베풀었은지, 증거를 보여주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39).

 

베드로는 그들의 소망을 꺾지 않는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렇게 외친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랬더니,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을 보며, 어떤 이는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안 믿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러나, 그렇게 싸우는 것은 하등의 도움도 안 되고, 필요도 없다. 지금 여기서 성경이 전하고 있는 내용은 다비다가 실제로 죽었다 살아났는지 아닌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에서 부활의 역사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가 도르가를 향해 기도하며 다비다야 일어나라한 것은, 그가 다비다, 즉 도르가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새로운 피조물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기도 대로 도르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워주신 하나님께서는 도르가의 선행을 인정해 주시는 거다. 핵심은 이거다. 지금 여기에서는 죽은 도르가가 다시 살아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 ‘부활의 역사’(선하고 아름다운 일)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 자들의 삶은 완전히 바꾼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양을 잡아 먹던 삶에서, 양을 먹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삶으로 바뀐다. 때로는 놀부처럼 이것을 위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은 도르가 사건에서처럼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 자들의 삶은 꿈이 바뀐다. 그것은 오늘 주보에도 실은 두 사람의 삶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마르크 슐츠와 조나단 에드워즈.

 

예화)

 

미국의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에 두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와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습니다. 한 젊은이는마르크 슐츠’(Marc Schulze)이고 다른 젊은이는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 1758)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신천지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지만 그들의 꿈은 달랐습니다.

 

마르크 슐츠의 꿈은이곳에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 내 자손은 가난을 모르게 부를 자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뉴욕에다 술집을 차려서 열심히 일하여 그의 꿈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나는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음으로 신앙이 자유로운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라 고 생각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50년이 지났고 5대 자손들이 태어났습니다. 뉴욕의 시교육위원회에서는 세간에 자주 이름이 거론되는 두 사람의 가계를 조사하기 위해 그 자손들을 추적 하여 조사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큰돈을 벌어 자손들을 잘 살게 해주겠다는 꿈을 가진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낳았는데 그 자손들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교도소에 서 5년 이상 형을 산 자손이 96.

- 창녀가 된 자손이 65.

- 정신이상이나 알코올 중 독자가 58.

-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가 460,

- 정부의 보조를 받는 극빈자가 286명이었고

그 자손들이 정부의 재산을 축낸 돈이 15천 만 불(1800억 원)이었습니다.

 

한편,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앙생활을 한 조나단 에드워즈느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을 당대에 설립하였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퍼뜨렸습니다.

 

- 자손들 중에 선교사 목사가 116

- 예일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수, 교사가 86, 군인이 76,

- 국가의 고급관리가 80, 문학가가 75, 실업가가 73, 발명가가 21,

- 부통령이 한사람, 상하의원 및 주지사가 나왔고,

- 교회 장로와 집사가 286명 이 나왔답니다. 도합 816명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조나단 가문은 국가에 낸 세금과 지도자로서 미국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정부 재산을 하나도 축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화 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 자들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돈 버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도 전혀 아니다. 예수님의 양은 꿈이 달라진다. 예수의 부활을 믿기 전에는 나의 성공을 위해 양을 잡아 먹는데 혈안이었는데, 이제는 삶의 방향 자체가 달라진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자기를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놓을 줄 알게 된다. 도르가처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사람이 된다. 그야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게 한다.

 

베드로와 도르가는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으로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의 부활의 역사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자기 자신을 헌신했다.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우리는 무슨 꿈을 꾸고 사는가? 양을 잡아 먹고 있는가? 아니면 양을 먹이고 있는가? 내가 있는 곳에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 한 번 따라 해보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주님의 양! 주님, 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 새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꿈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그 안에서 부활을 사시는 믿음의 자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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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미주특별연회 해법

 

시대는 정책을 낳고 정책은 개인들의 삶을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다(자본주의, 가나출판사, 381). 지금 미주특별연회는 총회에서 얻은 자치법 마련 기회를 잘 활용하고 있는가? 정책을 낳아야 하는 시대에 도달했는데, 개인들의 삶(교회와 목회자)을 지배할 정책을 정의롭게 만들어 가고 있는가?

 

세계는 지금 고장난 자본주의를 어떻게 고쳐서 써야할까, 고민이 크다. 세계의 모든 경제학자들은 인류가 자본주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다만, 정부도 아닌, 시장도 아닌, 자본주의를 이끌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중심에 국민이 있다. , 국민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이른바, 복지자본주의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패할 자유가 없는 자유란 가치가 없다라고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다. 복지란 미래 불안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다. 복지자본주의란 사회안전망을 두텁게 하는 것이다. 실수의 가능성과 불운을 염두에 두고,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사회가 복지자본주의이다.

 

실패하면 끝인 사회에서 창의가 나올 수 없으며, 창의가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결국 쇠퇴하게 되어 있다. 한국 사회를 말하기 전에, 다른 교단을 말하기 전에, 감리교단을 먼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질문해 보자. 감리교회는 어떠한 복지를 가지고 있는가? 감리교회는 어떠한 사회안전망을 가지고 있는가? 감리교회는 실패한 목회자를 어떻게 끌어 안고 있는가? 감리교회는 젊은 목회자들이 실패를 생각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돕고 있는가?

 

이 문제를 미주특별연회로 좁혀서 생각해 보자. 기독교대한감리회 미주특별연회 소속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영세하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영세하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삶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중직을 가진 목회자가 허다하고, 목회자 사모가 목회를 돕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바깥에 나가 일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 교회는 전쟁터일지 모르나, 이민교회는 지옥이다. 전쟁터에서는 이길 경우 전리품이라도 챙길 희망이 있지만, 지옥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할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은 과연 희망적인가? 미주연회 발전위가 상정한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안을 보면, 최대의 쟁점은 교구제와 감독선거법이다. 교구제는 그동안 연회 안에 존재해 왔던 갈등의 해법을 자처하며 연회를 태평양 교구와 대서양 교구로 둘로 나눠 총리사(가칭)’를 두어 치리 하는 법안이다. 감독선거법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법을 차용하여 선거인단을 구성해 감독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선출한다는 법안이다.

 

지금 미주특별연회는 연회를 앞두고 이 법안들에 대하여 찬반의견이 뜨겁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뜨거운 논의는 법안 자체보다 법안 처리를 앞두고 연회회원권을 둘러싼 행정처리이다. 자치법안을 상정한 상황에서 자치법안 통과를 놓아두고 그 법안을 통과시킬 연회원 자격 문제가 가장 뜨거운 감자이다. 일단, 전년도 1231일까지 연회부담금과 본부부담금을 납부하지 않은 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에게는 회원권이 없다. 그리고 부담금을 납부하지 않은 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는 연회에 참석할 권리가 없으므로, 연회 회비 자체를 받지 않는다. 게다가 연회 회비는 당일 접수가 전혀 되지 않고 연회 이전에 지방회 회계를 통하여 일괄 접수된 것만 유효하다.

 

이렇게 해서 현재 이번 연회에서 연회원의 자격을 박탈 당한 회원의 수가 거의 절반이 된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 통계 낼 수 없는 부분이므로 잘못된 계산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미주특별연회는 연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여러 지방에서 성명서를 내는 등, 열기가 뜨겁다. 연회원의 상당수가 참여하지 못한 표결에서 결정된 정책이 얼마나 실제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갖는 것이다. 또다른 갈등이 발생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복지자본주의를 고민하고 있는 이 시대에, 감리교회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사회안전망을 확대하여 실패한 이들이 재기하고, 창의적인 인재들이 마음껏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만들어 가는 이 시대에, 지옥 같은 곳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을 돕기 위해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안은 무슨 정책을 담아내고 있는가?

 

인도 야무나 공원의 마하트마 간디 추모 공원에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악덕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

 

연회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이다. 연회의 정책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이다. 자치법 마련을 앞두고 미주특별연회에 필요한 것은 헌신이 아니라, ‘철학이다. 철학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 번째 요소이다. 철학 없는 정치는 교회(교단)를 망하게 하는 첫번째 요소이다. 교구제와 감독 선거법이 쟁점인 미주특별연회 자치법안에는 어떠한 철학이 담겨 있는가? ‘철학은 없고, 혹시 예수님이 왕국을 세우면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했던 야고보와 요한처럼 자리에 대한 탐욕만 있는 것은 아닌가?

 

미주특별연회의 자치법은 지옥 같은 곳에서 목회하는 연회원들의 희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는 자치법, 창의적인 목회를 도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는 자치법, 복지목회의 신학이 담긴, 일선 목회자가 중심인 자치법이 절실하다. 그러한 철학,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제정되고 선포되는 미주특별연회의 자치법은 연회원들에게 더 큰 고통만 안겨주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4. 20. 01:24

 

꽃이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꽃 피우더냐

꽃은 무심하다

너의 간절한 바람 때문에 피지 않는다

꽃의 허영이 꽃을 피우게 하지 않는다

꽃은 그냥 핀다

꽃은 발견되기 위해 피지 않기에

아무데서나

햇살만 따스하다면

자기를 꽃피운다

아름다움은 빈 마음이다

자기를 위한 마음도 없고

너를 위한 마음도 없다

그래서 꽃은

누구의 시선이든 받아주고

누구의 곁이라도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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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아름다움에 눈 멀다

 

T. S. 엘리엇이 말하기를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내가 지구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4월에 오고 싶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자연은 겨우내 꽁꽁 숨겨 놓았던 생명의 숨을 트면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기 때문이다.

 

4월이 되면 꽃집이나 정원을 따로 찾아갈 필요 없이, 사방천지가 꽃잔치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밀려오는 아름다움은 숨을 멎게 할 정도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다른 곳을 쳐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오직 아름다움의 대상에게만 집중하게 만든다.

 

4월이 피워내는 아름다움에 눈 멀고 보니, 아름다움이 내게 말을 걸어 온다. 무엇이든지 말을 건네 올 때 그 신비가 벗겨지며 존재가 보이는 것 같다. 아름다움은 결코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초월성이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저만치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움을 발견한 자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아름다움에게로 시선과 생각을 빼앗기게 된다. 이때 발견한 자가 아름다움에게로 다가서는 게 아니라, 발견된 아름다움이 발견한 사람에게로 다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내재성이다. 아름다움은 저만치 있지만, 발견되고 나면 어느새 곁으로 온다.

 

아름다움과의 만남은 수고와 위험을 동반한다. 곁으로 다가온 아름다움은 나도 모르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걷게 하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수행하도록 이끈다. 마치 베드로가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바다 위를 걷듯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부활을 경험하듯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롭고 새로운 세계를 누비게 된다.

 

아름다움에 눈 머는 일은 달콤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때, 눈이 멀어 있을 때 겪게 되는 모든 수고와 위험은 아름다움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이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에서 벗어났을 때, 눈을 다시 뜨게 될 때,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두려움을 느껴 바다에 빠지듯 삶의 수고와 위험 속으로 매몰되고 만다.

 

궁금하다. 무엇이 진짜 삶의 현실일까.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며 매일의 삶 가운데 지쳐서 사는 게 삶의 현실일까, 아니면 아름다움에 눈 멀어 수고와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게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며 사는 게 삶의 현실일까.

 

분명한 것은, 아름다움에 눈 멀었다면 차라리 그 아름다움에 모든 것을 사로 잡혀 영원히 아름다움과 사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잔인함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잔인함은 아름다움에 눈 머는 잔인함일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6. 4. 18. 05:17

집게벌레와 한 여름 밤의 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이다. 나는 오늘 집 근처에 있는 캘러웨이 가든(Callaway Garden) 나비관에 가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는 못 봤지만, 대신 박제가 되어버린 집게벌레를 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어느 덧 곤충과 멀어진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나이지만, 박제된 집게벌레를 보니 어린 시절 집게벌레를 잡기 위해 친구들과 한 여름 밤 숲 속을 헤매던 시절로 돌아가는 듯 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우리들에게 곤충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장난감'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모형으로 된 곤충을 가지고 놀지만,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진짜 곤충을 가지고 놀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충은 장수하늘소, 딱정벌레, 쇠똥구리, 잠자리, 매미, 그리고 집게벌레였다. 이 중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곤충은 집게벌레였다. 집게벌레도 여러 종류가 많았는데, 일반 집게벌레와 돼지 집게벌레, 그리고 사슴집게벌레가 대표적이었다. 이 중에서 사슴집게벌레가 가장 멋있고 화려했다. 사슴집게벌레를 잡은 친구는 사슴 뿔 같이 화려한 왕관을 쓴 양 우쭐해 했다.

 

집게벌레를 잡으려면 밤까지 기다려야 했다. 벌레들은 대개 야행성이라 낮에는 잠 자고 밤에 활동한다. 밤에 집게벌레를 잡으러 산에 가는 일은 무서워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낮 동안 친구들과 돌면서 오늘 밤에는 함께 모여서 집게벌레 잡으러 가자는 약속을 한 뒤, 저녁 먹고 해가 지면 놀이터에 모여서 집게벌레를 잡으러 함께 다녔다.

 

집게벌레를 잡으러 깊은 산 속까지는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어릴 때 보통 산에서 놀았기 때문에 어느 곳에 집게벌레가 살만한 나무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단단하고 곧게, 그리고 아무런 상처도 없이 쭉 뻗은 나무에는 집게벌레가 없었다. 좀 허약해 보이고, 특별히 상처가 나 구멍이 뚫려 있거나, 마치 엄마의 자궁인 양 깊이 패인 둥근 아기집을 품은 나무들에게 집게벌레가 붙어 살았다.

 

집게벌레가 살고 있을 만한 나무를 찾으면 우리는 준비해간 후래쉬를 밝게 비추었다. 그러면 영락 없이 집게벌레가 집 밖으로 나와 나무에 붙어 있었다. 행동이 느린 집게벌레는 갑작스런 발각에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미소를 머금고 집게벌레를 두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 준비해간 빈 깡통에 집어 넣었다.

 

집게벌레를 한 번에 많이 잡지는 않았다. 각자 한 두 마리 정도 잡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다음 날 학교 다녀와서 지난 밤 잡은 집게벌레를 가지고 놀이터에 모였다. 그리고 우리는 집게벌레끼리 싸움을 붙여 내기를 하곤 했다. 내기라고 해봤자 동네 수퍼에서 브라보콘이나 바밤바를 사먹는 게 전부였다. 우리는 그렇게 놀았다.

 

요즘엔 곤충도 별로 없을뿐더러, 여름이 되면 곤충을 잡기 위해 친구들과 산으로 삼삼오오 짝지어 다니는 아이들도 없다. 자신들은 그렇게 놀았으면서도 막상 곤충 잡으러 산에 가겠다는 아이들에게 허락해 주는 부모도 없다. 세상이 그만큼 흉흉해졌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점점 자연과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아이들이 곤충을 접하는 것은 자연박물관이나 파브르의 <곤충기>같은 책, 또는 부모의 어릴 적 모험담에서가 전부인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살고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 가기에, 집게벌레 잡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누군가의 한 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이 되어버렸을까. 박제가 되어버린 건, ‘천재, ‘집게벌레도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박제가 되어버린 건, ‘한 여름 밤의 꿈인 것 같다. 박제된 것은 살아 있는 게 아닐 터, 나는 오늘 잃어버린 꿈들이 살아 숨쉬는 그런 세상을 다시 한 번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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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믿는 자여, 사유하라, 그리고 행위하라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그가 재판과정에서 본 아이히만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악은 진심으로 평범하다. 때론 선량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악은 보통 '발견'되지 못한다. 아렌트는 평범한 아이히만이 그렇게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게 된 까닭은 그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를 전혀 안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렌트는 '사유 (생각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유'란 단순히 '깊이 생각하기'가 아니다. 사유란 역역사지(易地思之)를 말한다.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다른 말로 공감이라 할 수 있고, 소통이라 할 수 있고, 연대(solidarity)라 할 수 있다. 아렌트의 용어로는 '행위(action)'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e)을 이루는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한다: 노동, 작업, 행위. 여기에서 '노동'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을 말한다. '작업' '예술'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인간은 단순히 먹고사는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업(예술행위)을 통해 현실 너머의 세상을 꿈꾸고 만나게 된다. '행위'는 타자와 상호작용하고 의사소통하면서 공적 가치를 실현해 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행위'를 다른 말로 하면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정치를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키는 '행위'로 규정한다. 정치를 사유와 결부시켜 말한다면, 정치란 개개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키도록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의 정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사유'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한 그동안의 한국 정치는 성경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다스렸다"( 34:4).

 

무엇보다, 국민들이 '사유'하며 각자의 존엄성을 지키게 끔 내버려두지 않고, 깊은 생각을 못하도록 언론을 조작하고, 스포츠나 스크린이나 때로는 북풍을 통해 정신을 딴데 쏟도록 유도해 왔다.

 

이러한 국가적 ''에 맞서 마땅히 싸워야 할 교회는 어떠했는가?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성경의 말씀을 왜곡시켜 국민인 신자들을 '무사유(無思惟)의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믿음이란 '생각 좀 하고 살아라'는 뜻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것을 '생각 없이 따르다'는 뜻으로 변질시켰다. 예수는 우리의 사유를 막으시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진정 구원이란, '악의 평범성'에 눈을 뜬 후 그에 맞서 '행위'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이다.

 

믿는 자여, 사유(思惟)하라. 그리고 행위(action)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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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단발머리

 

구글에서 단발머리를 검색하면 걸그룹 AOA의 노래 단발머리가 제일 먼저 뜬다. 그런데 사실 80년대의 대중문화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AOA단발머리보다는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먼저 뜨길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바뀐 탓인지,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검색하려면 단발머리 앞이나 뒤에 조용필을 함께 검색어로 붙여 넣어야 한다.

 

AOA의 노래 단발머리는 스타 작곡가 용감한 형제의 곡이다. 대중가요 작곡가인 그가 자신의 만든 곡에 단발머리라는 제목을 붙일 때 조용필의 대히트곡 단발머리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발머리라는 제목을 붙여 곡을 낸 이유는, 아마도,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가 지니고 있는 아성에 도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용감한 형제의 단발머리는 제목은 같지만 곡이 추구하는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1979년에 발매된 조용필의 단발머리는 과거지향적이다. 이 곡에서는 한 남자가 자신에게 꽃을 건네던 단발머리 여자(소녀)를 추억한다. 핵심 가사는 이렇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싶을까,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그러나 2014년에 발매된 용감한 형제의 단발머리는 미래지향적이다. 이 곡에서는 여러 명의 다양한 직업군의 여자들(AOA 멤버들로 대표되는)이 역경을 딛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열망을 노래한다. 핵심 가사는 이렇다. “단발머리 하고 지난 날은 잊고 나 새롭게 태어날 거에요…”

 

하지만, 두 곡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발머리의 모티브는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7,80년대의 단발머리는 소위 신여성을 상징했다. 게다가, 조용필의 단발머리에서 노래 되고 있듯이 꽃다발을 건넨 건 남자가 아니라 단발머리 여자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깨는 일이다. 보통 꽃다발은 남자가 여자에게 건넨다. 그 당시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사회적 통념이었다. 그러나 조용필이 그리워하는 여인은 그 사회적 통념을 깨고 꽃다발을 남자에게 건넨다. 조용필의 단발머리의 화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단발머리 여인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을 과감하게 깬 그 여인의 도전정신인지 모르겠다.

 

조용필의 단발머리에서는 사회적 통념을 깨는 도전정신이 감추어져 표현되고 있지만, 용감한 형제의 단발머리에서는 그것이 바깥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뭔가 변화를 꾀하고, 통념을 깨는 행위로서의 의식(ritual)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뮤직비디오를 통해서 표현되는데,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들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은 일을 잠시 내려 놓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단발머리로 헤어스타일을 바꾼다.

 

두 노래의 뒷면에 흐르는 사회적 합의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단발머리는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의식을 담아내는 메타포이다. 그렇다. ‘단발머리도전정신이다. 머리를 싹둑 잘라내는 마음, 그러한 결정적인 순간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잘라낼 머리는 없지만, 나는 답답한 현실에 축 늘어진 나의 마음을 싹둑 잘라 단발머리를 만들려 한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흥얼거린다. “단발머리 하고 지난 날은 잊고 나 새롭게 태어날 거에요날씨 참 좋아요 분위기 참 좋아요…”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34

믿음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5:1-8)

 

성경에서 개념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란 구원에서 필수 요소이다. 의는 신체의 피와 같다. 피를 다 흘리면 죽는 것과 같이, 의가 없으면 죽는다. ‘저 사람은 피가 달라할 때 쓰는 것처럼, ‘란 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성경에서의 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다. ‘신적인 의를 말한다. 문제는, 를 어떻게 감지하고,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삼느냐이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다. 피를 몸 속에 유지하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인 것과 같다.

 

로마서에서는 의가 세 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통해서, 둘째는, 율법에서,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로마서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58절에 드러나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선, 죄인이라는 개념을 보자. 죄는 매우 신학적인 개념이다. 죄는 매우 아슬아슬한 개념이다. 죄는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관련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런 거다

 

아버지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죄인가 아닌가?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것은 죄인가 아닌가?

 

통상적인 개념에서는 이 모두 죄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일을 말하고 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는 아브라함이다. 시아버지와 동침한 이는 다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을 오히려, 의인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다말의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향해 그는 나보다 옳도다(의롭도다)”라고 말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아브라함과 다말의 이야기가 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의인의 이야기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모두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 죽여 놓고 하나님이 시킨거야!’, 그러거나, 간음을 해 놓고, ‘하나님이 시킨거야!’, 이러면 안 된다. 그래서, 죄라는 개념은 아슬아슬 한거다.

 

여기서 핵심은, ‘란 철저하게 신학적 용어라는 뜻이다. 죄는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상태에서의 죄는 참으로 비참하다. 우리의 생명을 파괴한다.

 

말씀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어둠 속에 내던져진 상태이다. 어떠한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한국의 전례 동화 중에, <해와 달>이라는 전례 동화가 있다. 엄마가 시장에 가서 아이들을 주려고 떡을 사오는데, 그만 산길을 걷는 중 해가 지고 말았다. 얼마나 불안한가. 죄의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컴컴한 밤에 산 길을 헤매는 것과 같다. 밤 중에 산길을 걷는 엄마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호랑이가 나타나서 엄마를 위협한다. 호랑이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하면서 엄마를 괴롭힌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들이 난무한 가운데, 그 거짓말에 의해 인생이 망치게 된다. 호랑이는 진실인 것처럼 꾸며서 계속 엄마에게 떡을 요구한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엄마는 호랑이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고, 그 말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얼마나 가련한가? 호랑이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호랑이의 요구를 들어준다.

 

그런데, 어떠한가? 호랑이가 떡을 자신에게 건네준 엄마를 살려주는가? 결국,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는다. 죄란 이런 것이다. 죄 가운데 있으면, 거기에서 어떠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속임수에 넘어가 그곳을 떠돌다, 결국 죄 속에서 죽게 된다. 죄의 끝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의 위협, 호랑이의 위협은 계속된다.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과 딸은 어둠 속에서 가슴 조리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엄마가 왔다. 아이들은 엄마가 떡을 사오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그런데, 도착한 것은 호랑이였다. 그들도, 어둠 속에서 호랑이에게 꼼짝 없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동화줄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정말로 하늘에서 동화줄이 내려왔다. 호랑이도 기도했다. ‘하나님, 동화줄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정말로 하늘에서 동화줄이 내려왔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내려온 동화줄은 튼튼한 동화줄이었고, 호랑이에게 내린 줄은 썩은 동화줄이었다. 아이들은 튼튼한 동화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구원 받았고, 호랑이는 썩은 동화줄을 타고 올라가다 허공에서 그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

 

아이들에게 동화줄은 구원이지만, 호랑이에게 동화줄은 심판이었다. 왜 그런가? 아이들에게는 가 있고, 호랑이에게는 가 있기 때문이다.

 

의의 속성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우리가 캄캄한 밤 가운데에서,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동화줄을 내려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 아이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동화줄을 내려 주실 거라고 믿었다. 의심하지 않았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다. 믿음이란 바로 이 안에서 작동한다. 믿음은 그에 대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랑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아무리 기도해도 동화줄이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화줄이 내려오기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사랑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호랑이처럼, 동화줄을 타고 올라가 아이들을 잡아 먹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동화줄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음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듣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여러분의 욕망을 믿음이라는 것에 덧입혀 낭비하지 말라. 호랑이의 마음을 버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가지라.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그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바로 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참으로 의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셨는가? 그 사랑 안에 거하시겠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 있는 자이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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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29

교회의 터 (바울의 교회론)

(고린도전서 3:16-23)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600장에 보면 <교회의 참된 터는>이라는 찬송이다. 거기의 첫 가사는 이렇다.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 그 귀한 말씀 위에 이 교회 세웠네 주 예수 강림하사 피 흘려 샀으니 땅 위에 모든 교회 주님의 신부라.”

 

이 찬송은 우리가 오늘 살펴볼 고린도전서 3장 중에서 11절을 가사화한 찬송가이다. 고린도전서 311절은 이렇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린도교회는 파당이 여럿 있었다. 하나는 바울파, 다른 하나는 아볼로파, 또 하나는 게바파이다.

1) 바울파: 유대교 율법주의와 전통적인 헬라철학에 거부감을 가졌던 그룹

2) 아볼로파: 엘리트 그룹, 인간의 지혜와 세상 학문 강조

3) 게바파: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들의 그룹, 율법중심주의

 

, 고린도교회 분열의 근본 원인은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그 터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아볼로파는 세상이 지혜 중심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을 거시고, 게바파는 율법을 중심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터로 삼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교회의 터로 삼는 우매함을 보인다.

 

우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교회 내에 존재하는 신령한 자들육신에 속한 자들에 대하여 말한다. ‘신령한 자들이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들이다. 사실, 교회에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평안하겠는가? 그런데, 현실교회에는 육신에 속한 자들도 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이란 믿기는 하지만 성령보다는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이게 고린도전서 31절과 2절의 내용이다.

 

신령한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살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산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 이것은 갈라디아서 522절에 아주 잘 나와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와는 대조적으로, ‘육신에 속한 자들이 맺는 육신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19-21절에 잘 나와 있다. “육신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들은 안 믿는 자들이 아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믿기는 믿되, 아직도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자들을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런 자들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의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어린아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 자라지 못한 존재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함이지만, ‘어린아이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스도 안에서 망나니’.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주목하는 육신의 열매시기와 분쟁이다.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가장 큰 문제가 시기와 분쟁이었다는 뜻이다. 각 파당끼리, 서로 시기와 분쟁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에 평안이 있었겠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내세우고 있는 원리가 십자가의 도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강조하기를, 각 파당이 추종하고 있는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는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사역자들이라고 한다. 사역자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이는 주의 복음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는 서로 경쟁이나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는 것이다.

 

사역자를 추종하지 마시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된, 새로운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이다. 사역자를 추종하지 말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라. 주의 복음을 위해 서로 섬기고 봉사하시라.

 

사도 바울은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통해서 세워져 가는 교회를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9). 여기서 하나님의 밭은 수많은 곡식과 열매를 기대하게 하고, ‘하나님의 집은 가족과 평안과 보호를 생각하게 하는 비유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곡식과 열매를 맺는가?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가족, 평안, 보호’, 이러한 단어가 떠오르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이 더 쉬운지 아시는가? 사실, 사역자를 추종하는 것이 더 쉽다. 그리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사역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게 가장 어렵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를 예수 그리스도로 하더라도, 각기 다른 건축 자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생각해 보자. 건축의 질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건축자재로 결정 난다.

 

<돼지삼형제>라는 동화를 아실 것이다. 돼지삼형제가 살았는데, 각자 집을 지어 살았다. 첫째 돼지는 초가집을 지었고, 둘째 돼지는 나무로 된 집을 지었고, 셋째 돼지는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집을 지었다. 늑대가 돼지삼형제를 잡아 먹으러 왔을 때, 첫째 돼지의 초가집과 둘째 돼지의 나무집은 늑대의 초강력 바람에 훅 날아가버리다. 그러나,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셋째 돼지네 집은 늑대의 초강력 바람을 견뎌내고, 결국 돼지삼형제를 늑대로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준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비유를 쓴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13).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의 건축 자재를 말한다.

1) ,,보석: 이것은 최고의 건축재료이다.

2) 나무: 이것은 보통의 건축재료이다.

3) 풀이나 짚: 이것은 임시 건축재료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건축 자재는 성도들의 교회생활의 질 또는 믿음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최고의 건축 자재인 금,,보석으로 집을 짓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건함과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 가운데 기쁨으로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보통의 건축 자재인 나무로 집을 짓듯이, 특별한 열심이나 정성 없이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임시 건축 재료인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듯이,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불신자들과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지금 내가 어떠한 건축 자재로 성전을 지어 신앙생활(교회생활)하고 있는지는 위의 돼지삼형제의 이야기에서처럼, 바람이 훅 한 번 불면, 하나님의 불(시험, 연단)이 한 번 임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14, 15).

 

엉성한 건축 자재로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침을 준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6, 17).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지적하고 있는 교회공동체 최고의 적으로 자기 자랑 그리고 자기기만을 지목한다. ‘자랑은 고린도교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자랑의 핵심은 세상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보이는 현상이 자기기만이다. 기만이란 속이는 행위인데, 자기기만이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신앙생활(교회생활)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파당을 짖고 분쟁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스스로 속이는 자들, 즉 스스로 속고 있는 자들, 자기의 지혜, 지식이 얼마나 형편 없고 조잡하고 어리석은지 모르고, 자기의 지식과 지혜가 맞다고 착각하여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런 자들을 자기기만에 빠진 자들이라 한다.)은 약도 없다. 전형적인 사람들이 기독교 이단들이다. 그리고 스스로 도를 깨우친 양 공동체와 섞이지 못하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18절에서 20절의 말씀에 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우리가 알듯이,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지혜가 되고 구원이 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교회의 터를 삼고 있는가? 우리는 때로, 교회는 이래야 돼, 저래야 돼, 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토대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한다. 교회의 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앙은 절대적으로 이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건축 자재를 통해 교회를 세워 나가는가? 금은보석?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 나무? 특별한 열심이나 정성 없이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풀이나 짚? 불신자들과 거의 구별이 안될 정도로 신앙생활 하는가?

 

우리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자.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는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평안 가운데 살게 될 줄로 믿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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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23

부활이란 무엇인가?

(고전 15:12-19)

 

일단, 부활이란 무엇인지를 오늘 다 말할 수도 없고, 평생을 다 말해도 알 수 없는 것임을 먼저 말씀 드리고 싶다. 우리는 부활 자체를 안다기 보다,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부활을 알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는 부활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

 

우리는 금요일에 성금요일 예배를 드렸다. 성금요일을 영어로 ‘Good Friday’라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오면서, 엄마가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Good Friday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다.” 그랬더니, 작은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Good이야?”

 

아이가 똑똑한가? 사실, 똑똑하다기 보다, 순진한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도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도 아이이다. 그만큼,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봐야, 세상은 더 잘 보이는 법이다. , 아이처럼 우리는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질문할 줄 모른다와 동의어다. 나이를 먹으며 질문이 줄어드는 이유는 세상에 대하여 많이 알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눈과 귀를 닫기 때문이다.

 

어떤 분과 카톡으로 나눈 대화인데, 좋은 교육 교재가 될 수 있기에 사용한다.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마시라. 이분을 정죄하기 위해서 이것을 사용하는 게 아니다. 순전히 교육용으로 쓰는 것이다. 오타는 내가 수정한 것이다.)

 

잘 보았습니다. 부활이란 죽었다 다시 사는 것인데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은 부활이 아닌 것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요. 인간의 풍습으로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은 진정한 참 숭배가 아님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승인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기념하라고 부탁하심을 그저 따르기만 해도 되는 것을 구태여 온갖 불필요한 것들로 대신하는게 과연 올바른 숭배일까요? 부활절이란 성서에도 없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교행위인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죠. 예수의 생일도 기록되지 않아 고대 태양신을 섬기던 날로 예수 생일이라 만들어 행하고 있는 것도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자중해야 할 일입니다. 원래 하느님 백성은 생일을 지내지 않았습니다. 성서에도 생일 때 살해사건이 두 번 나오는데 그 왕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부처는 생일이 기록돼 그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예수의 생일을 경축하기을 원했다면 성서에 그날이 기록되어 있었겠지요. 성탄절을 만들어 지키는 일은 하느님을 모르는 불교와 뭐가 다르겠어요. 성서에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들만 알려준다고 봐야죠. 보내주신 카톡 고마웠어요. 성서와 하느님에 관한 토론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이 도전하고 있는 문제는 첫째, 부활절 달걀 사용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부활절기와 성탄절기 같은 것을 왜 만들어서 지키느냐 이다. 모두다 이교도들이 하던 일이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나는 이분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는지 모르겠다. 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았으면 좋겠다.

 

부활절에 달걀을 사용하게 된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실 때 잠시 십자가를 대신 져준 구레네 시몬의 직업이 달걀장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뒤 그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암탉들이 낳은 달걀이 모두 무지갯빛으로 변해 있었기에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꼭 이런 전설때문에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나라가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지도 않는다.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가 부활절에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는 데는 구한말에 있었던 독특한 경험 때문이다.

 

구한말 가장 흔한 병이었던 학질(말라리아)에 특효약인 키니네(quinine·한자로 금계랍·金鷄蠟)를 당시 무역상사가 수입을 했고 이를 다시 전도사들이 사들인 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방에 되팔기도 했다. 약을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닭이 그려진 약병과 복음서를 함께 샀기 때문에 복음서나 예수교를 생각하면 닭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금계랍을 먹고 병이 나으면 복음서를 읽게 되니 닭은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그 닭이 가져다 준 달걀이야말로 하나의 큰 선물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가난하던 시절, 달걀 하나만 먹어도 영양이 보충되던 때에 달걀이 가져다준 의미는 매우 컸다. 옛날 옛적 어린 시절, 달걀은 그 자체가 부()의 상징이었다.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라도 들어있으면 행복했다. (소풍 갈 때 빼놓지 않은 메뉴가 삶은 달걀이었다.)

 

복음은 언제나 이렇게 그 지역의 문화를 그릇 삼아서 전파된다. 이것을 복음과 문화(기독교와 문화, 또는 토착화 신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성례전신학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공식적인 성례전은 두 가지 (가톨릭은 7가지)인데, 그것이 세례와 성만찬이다.

 

성례전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은혜의 경험을 말한다.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에게 경험이란 아주 절대적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 즉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져보거나 하지 않은 것을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오해한다. 가장 오해가 많은 기독교 용어가 믿음이다. 바로 이 말씀 때문에 그렇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굉장한 오해이고, 틀린 말이다. 기독교는 망상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경험의 종교이다. 왜 그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성육신 한 하나님이다. 성육신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헛되이 믿는 허망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보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이는 것을 믿느냐 못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믿기 때문이다. 그것을 욕심 또는 욕망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어른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니, 벌거벗은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야 임금님에게 벌 받지 않으니까.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이는 어린아이다. 그래서 성경은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복된 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부활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 허망한 것이 아니다. 예수를 통해 눈에 보이게 끔 드러난, 하나님의 생명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인류는)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신, 2천년 전 유대 땅에서 태어나시고, 갈릴리에서 활동 하시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한 사람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했다.

 

성경에 ‘yadah(야다)’라는 단어가 있다. ‘안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인데, 이 말은 경험하다’, ‘성관계를 맺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통달하다는 뜻과도 같다. 누가 나를 가장 잘 알까? 부모님과 남편(아내)이다. 부모님은 나를 통달하고 있다. 나를 낳으셨기 때문이다. 남편(아내)는 나를 통달하고 있다. 서로 알몸을 드러내놓고 서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메타포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부부관계(결혼관계)로 표현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경험한다, 통달한다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간다. 부모님은 우리를 통달하기만 하셨는가? 부부끼리는 경험만 하는가? 아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부부끼리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은 통달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경험하고, 그리고 그 경험한 것을 사랑할 때 비로소 그 상대를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나느냐?” 사도 바울은 말한다. “예수의 부활이 전파되었다.” ‘전파되었다는 것은 15절 전반부에서 말하고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셨다는 뜻이다. , 제자들과 몇몇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했다.

 

부활의 증언을 듣는 우리들도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부활한 예수의 몸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는 위에서 어느 누가 제게 카톡으로 문제제기를 했듯이 이교도의 풍습을 지키는 우상숭배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끔,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 경험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그것을 눈으로, 모든 감각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야로밀의 질문이라는 글이 있다.

야로밀이 물었다.

"네 안에는 어떤 세계가 있니?"

.

.......

.

"내 안의 세계?"

.

나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묻는 사람은 있었어도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

야로밀이 말했다.

"너는 불쌍한 아이로구나."

.

한 번도 나는 나를 불쌍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나는 내 안에 어떤 세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안에 있는 세계 대한 목마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

"네 바깥 세상은 네 안에 있는 세계에 비하면 누추하고 재미없단다. 네가 만약 네 안에 있는 세계를 발견하고 나면 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거란다. 네 안에 있는 세계 이외의 세계는 모두 신기루란다."

야로밀이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나면, , 하나님의 참 생명을 경험하고 나면, 이 세상의 일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 거다. 여기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있다. 눈으로 보여주는 데도 믿지 못하는 믿음 없는 자들이 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눈에 보이게 끔 해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 생명을 경험해 보시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라. 그러면, 여러분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정말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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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1:02

눈감고 눈뜨기

(행 9:1-6 / 21:15-17)


우리는 예수의 부활 이후의 삶을 산다. 부활 이전의 삶과 부활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성령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 세상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지난 주에 말했다.

 

잠시 눈을 감아보자. 다시 떠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아무 것도 안 보이는가? 이번에 다시 눈을 감아보자. 다시 떠보자.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예수님이 보이는가?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오늘 설교를 마쳐도 된다.

 

어디에 눈뜨고 있었는가? 대개 우리는 자기 일에 눈 뜨고 산다. 대개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먹고 사느라 바쁘다. 다른 곳을 돌아볼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자신도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거라고 위안을 한다.

 

1년 동안 한 권의 책 이상 읽은 비율을 따지는 것을 독서율이라고 한다. OECD 국가 중 한국의 독서율은 74.4%(2013년 기준)이다. 이것은 15세 이상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성인을 기준으로 하면, 독서율은 65% 정도다. 다른 말로 하면, 성인 10명 중, 3-4명 정도는 일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은 책을 잘 안 읽는다. 그런데, 서점가에서 유독 잘 팔리는 책이 있다. 바로 자기계발서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살다 보니, 남들보다 더 뛰어난 그 무엇인가를 계발하기 위해서, 자기계발서를 줄기 차게 읽는다. 자기계발서의 기본 철학은 자기 자신을 들들 볶아서 남들보다 한 수 위의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되자이다. 그러면서, 성공은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는 자의 것이라 자기 의를 부추긴다.

 

자기 의라는 말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자기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 구원을 실현한 만큼 자신이 행복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고,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자기 의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다.

 

그런데, 자기 의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 특별히 무한경쟁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신기루같은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경제체제에서 자기 의를 통한 자기 구원은 절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몇몇 성공한 사람들을 토대로 권세 잡은 자들이 일반대중에게 던져주는 떡밥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속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의는 한마디로 헛일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소위 영적인 일이라는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특별히 신약성경)은 이 점을 줄기차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르고, 아직도 현실 생활에서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자기 의를 쌓는 데 여념이 없다.

 

자기 의가 헛일이고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각 나라에서 통용되는 돈을 예로 들어 보자. 한국에서는 원화를 쓰고, 미국에서는 달러화를 쓴다. 각 나라마다 자신들이 쓰는 돈이 다르다. 한국에서 원화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그것을 미국에서 쓸 수 없다.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우리가 모아야 하는 것은 달러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미국에 살기를 바라면서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원화를 모으기만 한다면, 그것은 헛일이다. 원화를 아무리 많이 싸 짊어지고 미국으로 와도 그것을 달러로 바꾸지 못하면, 그가 모은 원화는 종이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헛일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이다. 예수 만난 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는 사울은 자기 의를 쌓는 데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사람이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혈통이 좋다),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으며(학식이 좋다), 바리새인이었다(권력이 있다). 게다가 그는 열정이 넘쳐났다. 혈통 좋고, 학식 있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열정이 넘쳐나면, 그가 어떠한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예상치 못한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역량을 나사렛 예수 일당들을 때려 잡는 데 썼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일을 하는 중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 일당을 모두 때려 잡고, 지방에 숨어 있는 예수 일당을 때려 잡기 위해 대제사장(공의회)에게 공식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의기양양하게 길을 떠났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굳게 믿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의를 쌓아 하나님께 인정받고 구원 받은 백성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에게 참으로 신비한 일이 벌어진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자신에게 비추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눈이 먼다(눈을 감게 된다). 그 상태에서 그가 들은 음성은 이런 것이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 이 음성을 들은 사울은 질문한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가 들은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 이 사건을 겪은 이후에, 사울은 자신이 행하던 헛일자기 의를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한다.

 

지금 우리는 부활절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 사울의 이 사건도 예수의 부활이 있은 후에 벌어진 일이다. ‘자기 의를 쌓기에 열심이던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데, 우리에게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있는가? 먹고 살기에 바빠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가? 그러한 일은 먹고 살기 바쁜데 방해가 되는 쓸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부활의 사건 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눈감기의 순간이 꼭 있어야 한다. 이전의 것에 대하여 눈을 감지 못하면, 새로운 것에 대하여 눈을 뜰 수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이전 것을 보고 있으면서,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새로워진 세상을 보기 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의 부활로 인해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에 눈을 떠야 한다.

 

사울을 보라. 눈감기 전과 눈감았다 떴을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 눈감기 전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그 일에 아주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에게 구원은 어떻게 왔는가? 눈을 감았다 떠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게 되었을 때에 왔다. 그는 눈을 뜬 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열심이 그도 구원하고, 다른 이도 구원했다.

 

오늘 또다른 본문인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특히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눈감기 전과 눈을 떴을 때 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 눈감기 전에 그는 그물을 던져도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21:3). 헛일을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눈을 감고 헛일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히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5-6).

 

사울이 자기 의를 쌓는 헛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도로 거듭나 참된 구원을 실현한 것, 그리고 제자들이 밤새도록 수고하여도 고기 한 마리도 못 잡는 헛일을 버리고 수많은 고기를 잡게 되는 일이 어느 때 발생하는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될 때이다.

 

우리는 어디에 눈을 뜨고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헛일이 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헛일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헛일에 대하여 눈을 감으라. 그리고, 나에게 참된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뜨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뜬 후의 삶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목양이라는 것이다. 대개 목양은 목사들이 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목양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베드로와 예수께서는 이러한 대화를 나누신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21:15-17). 예수께서는 이것을 세 번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이것을 세 번 반복했다는 것은 목양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을 깊이 새기기 위함이다.

 

우리는 양을 잡아 먹는 자들이 아니라, 양을 먹이는 자들이다. 아직도 눈감고 눈뜨기를 못한 자는 양을 잡아 먹으며 자기 자신을 살찌우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지만, 눈을 감았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뜬 자들은 양을 먹이는 일에 자기 자신을 헌신할 것이다.

 

여러분은 누구인가? 어디에 눈을 뜨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자기 의’, 헛일을 하는가? 양을 잡아 먹고 있는가? 아니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 눈을 뜨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의 양을 먹이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아보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자기 의’, 헛일에 대하여 이렇게 눈을 감으라. 이제 눈을 떠보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는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 지금 여러분들이 눈을 떠 보고 있는 그 예수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이시다. 그러니, 예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그의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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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