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을 수 없음

 

시인이 따로 없다. 철학자는 곧 시인이다. 시인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게 끔, 보이는 세계 뒤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기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북극성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만난 한병철은 철학자이라기 보다 시인이다. 그는 철학의 언어로 정확하게 시인의 임무를 해내고 있다. 놀랍다.

 

그가 폭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체제해야 한다의 타자 착취 사회가 아니라 할 수 있어야 한다의 자기 착취 사회이다. 에고는 타자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강요를 당하면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면 일차적으로 에고는 거기에 대해 저항한다. 그러나 한병철은 신자유주의체제 내에서는 해야 한다의 형태로 타자에 의한 강요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다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 의한 강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일에 대한 동기가 타자에 의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생기기 때문에, 에고는 이것을 타자에 의한 강요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내적동기에 의한 자발적 행동이라고 생각하기에 자기 착취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다의 내적 동기에 사로잡힌 에고는 주어진 일에 대한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자기 착취가 일어나고 결국 자기탈진(소진)을 필연적으로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할 수 있어야 한다에 대하여 만약 에고가 할 수 없다고 곧바로 대항하면 이는 타자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 낙오의 의미가 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자기 모멸감이 발생하여 결국 에고는 우울증이나 신경증환자로 전락하여 종국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한병철은 할 수 있어야 한다에 대한 저항은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할 수 있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데, 그것에 대한 부정은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타자에 의한 착취는 저항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의한 착취는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하여 해야 한다는 구호를 감추고, ‘할 수 있다는 구호를 통해 동기를 부여하고 자발성을 이끌어 내며 자기 주도 프로젝트를 조성하여 스스로 자발적인 착취가 일어나도록 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착취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자기를 착취하느라 자기를 소진하고 있다. 성과가 없으면 다른 이를 탓하지 못하고 부족한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된다. ‘할 수 있다의 구호 아래 자기 착취를 행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 내의 사람들은 자기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면 무능력한 낙오자가 될까 봐 밤낮으로 자기를 달달 볶아 댄다. 탓하거나 저항할 상대(타자)가 없기에, 그는 그저 자기 자신만 탓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참으로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 눈에 보이는 적이 없기 때문에 저항할 수도 없고, 공공의 적을 향해 연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우울하고 외롭다. 더 끔찍한 현실은 자신이 지금 그러한 사회 체제 내에서 스스로 붕괴되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 아래 내일을 향해 희망을 품고 열심히달려가지만, 결국 인생의 끝에 남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런 비극적인 삶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소멸되어 가는지도 모른 채 어느 순간 끝장나버리는허무한 삶에서 탈출하여 인생을 의미 있게 마루리지을 수 있을까? 우선, 우리가 어떠한 체제 내에서 살고 있는지를 충분히 숙지하는 일부터 필요한 것 같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니오(Neo)’가 결국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오듯이, 그러한 깨어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신실한 동지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나는 그 길을 간다.


Posted by 장준식

신자유주의적 주체와 교회

 

198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데모'였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취업'이었다. 현재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생존'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낭만'이 있었고, 19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이 있었다. 현재 대학생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한국은 '헬조선'이라 불린다.

 

1997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왕은 '금융자본'이다. 지금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자본()'이 세상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자본이 우리에게 대항해야 할 ''으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심리정치 13).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서운 이유는 눈에 보이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해야 한다'는 외적 강제 대신 '할 수 있다'는 내적 강제를 통해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자기 착취를 하게 끔 유도한다. '할 수 없다'며 내적 강제인 '할 수 있다'에 저항하는 자는 무능력한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데모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공공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넘어야 할 산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따로 각자 알아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자기계발에 힘을 쏟을 뿐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동기,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이다. , 신자유주의 체제에 묶여 있는 주체이다. 한병철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심리정치 11). 여기서 존재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무한한 자유 경쟁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노예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어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박탈 당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이다”(같은 책 12). 결국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인은 우울할 뿐이다.

 

고립에 의한 우울증과 자기 착취에 의한 소진증후군을 겪고 있는 현대인에게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교회가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을 겪고 있는 현대인에게 안정제역할을 하는 데서만 머문다면 마르크스가 했던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종교는 아편이다.”

 

해방과 자유는 기독교의 존재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현재 당하고 있는 억압과 죽음의 상태에서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이지 현재의 불의한 체제를 견뎌내게 하는 안정제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한 사건은 사회 전복 사건이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에 대한 마음의 안정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개인의 그 어떠한 고립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십자가는 자기 해방이지 자기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누리는 참된 자아의 실현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 있는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경험하는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을 위로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유를 돌려주도록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를 해체시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한다. 자칫 하면 복음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개개인에게 부여하는 할 수 있다를 더 강화시키는 데 오용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위험성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복음이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해방시키는 데 올바로 사용되도록 선지자적 목소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역사는 소통이다

- 걸그룹 AOA '안중근 사건'을 보고

 

역사는 해석이다. 해석은 소통의 핵심이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해석된다. 안중근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 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이겠으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안중근은 영웅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에서 보듯이, 영웅은 한 집단을 규합하는 윤리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그 집단에서 영웅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규범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안중근은 단순한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웅이다. 그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걸그룹 AOA의 지민과 설현이 예능프로그램에서 안중근을 알아맞히지 못해 '뭇매'를 맞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문제를 못 맞힌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공유하는 '윤리'의 범주를 벗어났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중들과 소통에 실패한 것이다. 역사는 소통의 핵심인데, 그 핵심을 잃어버렸으니 비난의 화살이 그들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안중근에 대한 역사의 해석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갈등은 해석의 불일치에서 온다. 아직까지도 5 18일만 되면 '광주민주화투쟁'을 놓아두고 정치적 갈등이 불거지는 이유는 그 사건을 애써 다르게 해석하려는 불온한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역사 공부를 하며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나라의 소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장사를 해서 돈벌이를 하더라도 '소통'에 실패하면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한다. 아이돌 그룹을 통해 장사하는 연예 기획사나, 아이돌 그룹의 당자자들도 이 점을 꼭 숙지해야 한다. 노래하고 춤추는 '예쁨' 자체는 소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대중들의 소비재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러한 소비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떠받쳐주는 '소통'이다.

 

소통에 실패하면 누구나 괴롭다. 인기가 치솟은 걸그룹으로서 뭇매를 맞아 괴롭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무엇이 진정한 소통인가를 배우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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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5. 16. 02:03

영의 사람

(사도행전 2:1-4, 14-21, 로마서 8:14-17)


오늘은 성령강림절이다. 주께서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날이다. ‘승천은 신학적인 의미라고 지난 주 설명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성령이 하늘로부터내려왔다는 것은 성령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늘은 신학적인 의미이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다.

 

성령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은 성령이 하나님과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에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인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성령을 우리가 부릴 수 있는 알라딘 램프의 지니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령이 오라 마라, 성령이 역사해라 마라라면서 성령에게 어떠한 명령을 내릴 때가 많다. 성령을 대하는 매우 잘못된 태도이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더불어 한 위를 구성하고 있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대한 보이는 역사라면, 성령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역사를 눈에 보여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보라.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으나, 결국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였다.

 

하늘로부터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 때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길을 가는 것이 두렵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주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해 주신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의 승천 뒤, 예수님의 지시대로 예루살렘에서 모여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은 드디어 성령이 오신 것을 경험했다. 성령이 오신 것은 그들에게 명백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사건이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건은 그것을 경험하기 전과 경험한 후의 인생의 전혀 달라지게 만든다. 우리의 일상은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이전의 모습과는 달라진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은 그저 그렇게 흘러간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면, 여러분의 인생을 바꾼 사건들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즐비할 것이다. ‘이러한 사건만 없었어도, 내 인생은 지금 다를텐데..’ 또는 이러한 사건만 있었어도, 내 인생은 지금 다를텐데..’라며 아쉬움을 표현할 때가 많다.

 

사건에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우리가 매일같이 뉴스에서 보는 사건은 나에게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나와 상관 없어 보이는 사건이 결국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기후변화의 사건은 현재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으나, 결국 그것 때문에 삶에 큰 제약이 어느 순간 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때를 말한다. 수없이 많은 교통사고 소식을 듣지만, 내가 직접 당하지 않으면 그것을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 교통사고 때문에 장애를 얻게 되면, 그것은 사건이다. 그 사건을 통해 나의 삶이 영원히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부부가 자식을 낳는 일도 사건이다. 이제 자식을 낳은 것 때문에 영원히 속 썩으면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는 거다.

 

사건의 의미를 마음에 품고, 제자들이 겪은 성령강림절 사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들에게 성령강림절 사건은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사건이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자.

 

말씀을 통해 목격할 수 있는 변화는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했다. 성령이 우리의 주님이지, 우리가 성령의 주님이 아니다.

 

이들이 다른 언어로 말했다는 것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어를 쓰는 이들과 말이 통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성령강림의 사건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 25절부터 13절을 보면,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의 오순절 순례를 왔는지 보도하고 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오순절 순례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7-8).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중에는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큰 소리로 설교하는 내용이 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도망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당당하게 나서서 설교한다. 베드로 설교의 핵심은 21절에 담겨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굉장히 대담한 설교였다. 이 당시 그들을 구원해 주는 주님은 로마의 황제였다. 그런데, 제자들은 로마 황제가 주님이 아니라,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빗대어 말하자면, 이는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압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행위와 똑 같은 일이다. 일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유관순 열사가 어떻게 되었은가?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처참하게 죽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일이나, ‘부활승천하신 예수가 주님이시다라고 외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관순 열사가 일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단순한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는 정말로 대한민국이 그의 고국이었기 때문이다. 유관순은 나라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나라가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부활승천하신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진실로 예수를 주님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은 또 하나의 본문인 로마서는 이렇게 증거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는 사도행전보다 성령 사건을 더 밀고 나간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게 됨을 선포한다. 성령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만큼 신비로운 관계가 없다. 자식은 부모의 모든 것을 물려 받는다. 성품, 외모, 그리고 부모가 가지고 있던 재산까지. 그래서 오늘 말씀은 상속자라는 말을 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17).

 

사실, 현대인들에게 상속자 개념은 그렇게 건전하지 못하다. ‘상속자라고 하면 우선 재산을 물려 받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둘러싼 법정다툼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상속자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상속자의 개념과 다르다. 그는 상속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강림절이란 무엇인가? 대략 2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신비한 사건인가? 너무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 우리에게 전혀 영향을 못 끼치는 사건인가?

 

우리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았듯이, 오순절에 성령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새 술에 취한 것처럼기쁨과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했다. 성령강림 사건은 그들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한 뒤, 예수의 부활승천을 확증했으며, 다른 그 무엇이 아닌 바로 부활승천 하신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았다.

 

우리는 성령강림을 경험했는가? 우리는 성령강림사건을 당했는가? 성령강림사건을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것은 교통사고 당하지 않았는데, 절뚝거리며 교통사고 당한 것처럼 사기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모조아기인형을 등에 업고 다니며 아기 낳은 것처럼 거짓말 시키는 것과 같다.

 

성령강림사건을 당하면, 실로 영의 사람이 된다. 육의 사람에서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영의 사람으로 바뀐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여전히, 패리스 힐튼처럼 힐튼 가의 상속자나 되었으면 좋겠다, 또는 이재용 씨처럼 이건희 회장의 상속자, 삼성 가의 상속자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강림사건을 당하지 않아서, 성령을 받아 영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어린 아이일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성인이 되어 모두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린 아이일 때는 장난감이나 인형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에 목숨을 맨다. 그거 없어지면 하루종일 우울해 하고 눈물 흘린다그러나, 성인이 된 여러분 중에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찾는 분이 있는가?

 

오늘은 성령강림절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육의 사람인가, 영의 사람인가?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는가? 아니면 성령에 관심도 없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에도 참여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기가 주님이라고 우리를 강력하게 유혹하는 가짜 주님의 유혹을 물리치고, 부활승천 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주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을 따라 살고 있는가?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돈 많이 버는 데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가? 이 말씀을 다시 선포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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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5. 14. 01:34

정결을 간구하는 기도

( 43:13~27)

 

주여, 정결이 이토록 중요하나이까?

왜 이것을 모르고 살았는지, 부끄럽나이다.

번제단의 정결과 번제물의 정결,

제사 드리는 이의 정결과 제사장의 정결이 연합된 제사만이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사오니,

주께 나오기 전 정결에 대한 깊은 묵상과 실천이 먼저 있게 하옵소서.

주일과 주일 사이,

우리는 정결을 잃어버린 채

더러운 모습으로 주일에 주께 나아오곤 했나이다.

주일과 주일 사이,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몸과 마음, 인생이 더럽혀지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온 인생을 정결하게 만드는 날이어야 함을 알게 하옵소서.

아무렇게나 주 앞에 나아오지 말게 하시고,

오직 정결한 상태로 주 앞에 나오게 하소서.

그것이 주의 기쁨이요, 우리의 복 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주일과 주일 사이, 일상 가운데서 정결을 묵상하나이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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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5. 13. 00:41

믿음을 간구하는 기도

( 9:14~29)

 

주여, 이 세상에 귀신이 너무 많으나

우리에게는 그것을 몰아낼 능력이 부족하나이다.

귀신은 곳곳에서 활동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불과 물에 자주 던져

그들을 죽이려 하나이다.

주여, 어쩌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며

때로는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 주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옵소서.

믿음이 없는 것보다

믿음이 없음에도 믿음을 간구하지 못하는 것이 더 불쌍한 일이오니,

무시로 주 앞에 나아와

믿음을 간구하는 '기도하는 자들'이 되도록 이끄시옵소서.

믿음의 기도가 이 세상의 모든 악함을 이겨내는 주의 지혜인 줄로 믿나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옵소서.

내가 믿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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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을 간구하는 기도  (0) 2016.05.07
하나님의 얼굴을 간구하는 기도  (0) 2016.05.06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5. 13. 00:38

소명을 간구하는 기도

(요나서 1:17~2:10)

 

주여, 막막하나이다. 깜깜하나이다. 답답하나이다.

요나가 갖힌 물고기 뱃속이 따로 없나이다.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소명이 상실되었을 때에

삶이 얼마나 깜깜하고 답답한 지 알 것 같나이다.

마땅한 소명을 주옵소서.

그 아무것도 물고기의 입을 다시 벌리게 할 수 없나이다.

오직 소명만이 물고기의 입을 벌려 나를 토해내게 할 수 있나이다.

소명을 저버리고 다시스로 가려했던 비겁한 종을 용서하옵소서.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그 일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키려 했던

이 게으름과 사악함을 용서 하옵소서.

이 어둠 속에서 좌절하지 말게 하시고,

삼일 밤낮을 괴롭게 하사 마음을 돌이켜

주의 소명을 붙들게 하옵소서.

이제 주의 뜻을 붙들었사오니

물고기 뱃속에서 나를 토해내옵소서.

가야할 그 곳 향하여 멀리 토해내옵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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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5. 7. 03:10

비전을 간구하는 기도

(에스겔 40:1~4)

 

주여, 이상 중에 나를 옮겨 주의 마음을 보게 하옵소서. 주께서 회복해 주실 새 예루살렘을 보게 하옵소서.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신 비전이 삶의 원동력이 되게 하셔서, 열정(passion)이 솟아나게 하시고, 소망(hope)이 생기게 하시며, (power)이 샘솟게 하옵소서. 무너진 성전을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 삶 가운데 주의 숨결이 살아나게 하시고, 그 숨결을 가슴에 부여잡고 주께 나아와 예배하게 하옵소서. 빼앗긴 땅을 회복시켜 주셔서, 주께서 허락하신 열매를 거두어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평안히 살게 하옵소서. 회복된 성전에는 주께서 거주하시며, 회복된 땅에서는 주의 백성이 거주하나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서 주와 더불어 살게 되는 그곳이 새 예루살렘이요, 그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인 비전이오니, 이것을 보고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하게 하옵소서. 주여, 주의 비전을 속히 이루어 주옵소서. 속히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5. 6. 03:22

하나님의 얼굴을 간구하는 기도

( 39:21~29)

 

주의 얼굴 보이시옵소서.

주께서 얼굴을 가리시면 우리의 삶에 평안이 없사오니,

주여, 얼굴을 보이시옵소서.

주여, 얼굴을 보여 주의 영광을 열방에 알리시옵고,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옵소서.

다시는 얼굴을 가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옵소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해처럼 빛나는 주의 얼굴이 속히 비추이기를 소망하고 있사오니,

우리의 소망을 꺾지 마시고 주의 사랑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영을 우리에 쏟아 부어 주사,

다시는 심판의 자리에 들어서지 않도록

우리를 주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주의 얼굴을 영원토록 가리지 마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6. 5. 5. 01:18

여호와의 전쟁

(39:1-20)

 

살수록 힘이 부친다. 전쟁이 따로 없이 사는 게 전쟁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이 전쟁같은 인생에서 승리와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삶은 투쟁이다. 히틀러 같은 사람도 자서전인 <나의 투쟁>을 통해 자신의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헤겔은 인생을 인정투쟁으로 보았다. <리바이던>에서 토마스 홉스는 인생에 대하여 이런 말까지 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세상에 던져지는 순간, 투쟁은 인간의 숙명이 된다.

 

성경에는 참으로 기괴한 예언이 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 인자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39:17).

 

이 말씀은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중에 나오는 예언이다. 에스겔 36장과 37장 두 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시고, 회복된 이스라엘을 침략한 곡과 이방동맹군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신다. 하나님은 회복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대적하여 이스라엘을 대신해 전쟁에 나서신다. 자기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전쟁에 나서는 것을 여호와의 전쟁(Divine War)’라 부른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이제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였기에 그들은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주하는 백성이 되었다(38:11).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침략하려는 곡과 그의 동맹국들에 맞서 이스라엘의 성벽과 문과 빗장이 되어 대신 싸워 주신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시는 전쟁에서 곡과 그의 동맹국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코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없다.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다. 이스라엘은 대적들의 침략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그들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진과 칼, 자연재해(전염병, 폭우, 큰 우박, , 유황)를 들어 곡을 물리치신다. 대적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 이루어져 곡의 군대는 전멸하고, 이스라엘은 전멸한 곡의 군대를 수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곡의 군대가 전멸하며 남긴 무기를 불태우는 데 7년이 소요될 것이며(39:8-10), 죽은 시체를 처리하는 데 7개월이 걸릴 것이다(39:11-16). 7년과 7개월, 이렇게 ‘7’이라는 숫자를 동원하는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완전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에스겔 39장에 등장하는 기괴한 이야기는 전쟁 같은 삶을 사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기괴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되는 삶의 풍성함을 전하고 있다. 패배한 곡의 군대는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서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된다. 레위기의 제사법에 보면, 화목제물은 제물을 드린 자가 제사장과 이웃들과 더불어 드린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축제를 벌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인생은 전쟁터이다. 어떻게 전쟁 같은 인생에서 승리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 곡에 대한 심판의 말씀은 그에 대한 해답을 준다.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겨,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전쟁을 대신 치르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고 승리의 비결이다. 그런 인생을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쟁의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된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리품이다. 하나님의 전리품이기에 그것은 거룩하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전리품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거룩한 일에 힘쓸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어떠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나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치르시도록 나의 인생을 내어드려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여호와의 전쟁은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 그 잔치가 얼마나 풍성한 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용사의 살을 먹으며 세상 왕들의 피를 마시기를 바산의 살진 짐승 곧 숫양이나 어린 양이나 염소나 수송아지를 먹듯 할지라”(39:18). 하나님은 결단코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싸우신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는 일은 투쟁이 숙명인 인간에게 최고의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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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5. 4. 23:47

주의 전쟁(Divine War)을 간구하는 기도

( 39:1~20)

 

주여, 전쟁터가 따로 없이 우리의 인생이 전쟁터이오니이다.

오셔서 이 전쟁을 대신 치르어 주소서.

우리의 육신은 나날이 약해져 가고 우리의 정신은 희미해져 가서

모든 것에 힘이 부치오니, 주여,

오셔서 대신 싸워 주소서.

우리에게는 성벽도 없고 빗장도 없고 문도 없어

대적들이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오나이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시옵소서.

주께서 오셔서 대신 싸워주시면

이 전쟁같은 인생에 승리가 넘치고 평안이 깃들겠나이다.

주께서 대신 싸워 이긴 인생의 전쟁터에서 취한 모든 것은

주의 것이오니,

거룩한 제물로 받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며

우리는 그 제사 안에서 거룩해지며

축제를 벌이며 기뻐하겠나이다.

주께서 대신 인생의 전쟁을 치르시도록

우리의 인생을 주께 내어드리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요 승리의 비결이오니,

오셔서 대신 싸워 주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5. 4. 23:41

대적을 물리쳐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 38:1~23)

 

주여,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주께서 주신 이 평안을 지켜 주시옵소서.

오직 주만을 의지하는 이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에게는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도 없나이다.

오직 주만이 나의 성벽이시요 문이고 빗장이시오니

저들이 감히 성벽과 문과 빗장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옵소서.

지진을 일으키시고 칼을 뽑으시고

전염병과 폭우와 큰우박과 불과 유황을 쏟아내사

주께서 주신 땅과 평안을 위협하는 대적들을

속히 물리쳐 주시옵소서.

나는 오직 주만 바라나이다.

주는 나의 구원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5. 4. 00:51

지팡이 같은 목사가 되기를 구하는 기도

(시편 23)

 

주여, 절박한 사람들에게 말씀 가지고 사기치는

사이비 목사가 되지 말게 하소서.

절박한 이들이 말씀을 잘 분별하여

주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삶의 평안을 찾아가도록 돕는 목사가 되게 하소서.

주의 말씀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요

쓰러진 자를 부둥켜 안고 일으켜 세워주는 지팡이이오니,

말씀 가지고 매직쇼 벌이는 사이비 목사 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절박한 자들과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일어서는

지팡이 같은 목사가 되게 하소서.

주여, 마른 지팡이와 같은 이 부족한 사람을

주의 종 삼아 주셨사오니,

누구든 길 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는

선한 지팡이 목사가 되게 하소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주여,

나를 그 지팡이와 막대기 삼아 주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