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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6. 08:08

섬기는 자 (대속신학)

(막 10:32-45)


복음서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박해였고,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 지연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엮여 있었다. 사람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이 금방 끝나게 될 것을 안다면, 어렵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어려움이 언제 끝나게 될지 밑도 끝도 없이 묘연하면,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법이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랬다.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다. , 예수님의 재림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자신들의 박해가 끝날 것이고, 영광 중에 높임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 마태복음 1628절에 보면,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러한 희망을 품을 만한 말씀이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대개 이단들은 애매하고 풀기 힘든 성경 구절을 풀어내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혹시 그러한 구절을 들이대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이러한 것을 교회에서 배운 적이 있느냐고 말하며 접근하는 사람은 일단 의심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재림이 자신들이 죽기 전에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재림은 지연되었다.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재림은 묘연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당연히,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문제는 예수님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와 유대땅을 종횡무진 누비던 제자들이 하나 둘씩 죽어 갔다. 어떻게 해야할까?

 

마음이 흔들리면, 사람의 마음에서 세상적 욕망이 샘솟는 법이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가 그런 것이었다. 예수님의 재림 지연과 박해의 상황 속에서 공동체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세상의 가치가 교회 공동체 내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제자도라는 관점에서 말씀을 들여다보고 있다.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쳐 주고 계시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가 흐려질 때, 공동체 내에 세상의 가치가 들어오는 법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 들어온 세상의 가치가 세베대의 두 아들의 청탁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한 상황에 세베대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구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에 사로잡히면, 현재 초대교회 공동체가 겪고 있는 예수님의 재림 지연 속에서 겪는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 두 제자 중 일부인 이 두 사람만 이러한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다른 열 명의 제자가 세베대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구하는 것을 보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낸다. 이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다는 것은 나머지 제자들도 세베대의 두 아들처럼 똑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초대교회 공동체는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갔다. 예수님의 재림 지연과 박해가 위기요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점점 복음에서 멀어지고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간다는 것이 위기요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올바른 제자도를 가르쳐 주시고 자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는 세대배의 두 아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고난의 잔과 고난의 세례를 말한다. 현재 고난 중에 (박해 중에) 있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고난이다. 그냥 고난이 아니라, ‘영광의 고난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공동체가 재림 지연의 상황과 박해 속에서 받는 고난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인 것이다.

 

이 말씀은 굉장히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아버지도 그랬어.” 특히 현재 우리 아이들에게 오는 자연적인 고난 중 가장 큰 고난은 이빨 빼는 고난이다. 이빨 빼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이빨 뺀 뒤 아파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해준다. “아버지도 그랬어. 아버지도 너희 나이 때에 그렇게 이빨 뺐어. 그리고, 그렇게 이빨 빼야 헝아가 되는 거야.” 성장하기 위해서 이빨 빼는 아픔은 필수인 것이다. 그렇게 말해주면, 아이들은 아파하면서도 그것을 꾹 참아낸다.

 

올바른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두 번째 가르침은 모든 제자들을 향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 44).

 

여기서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는 말이 중요하다. ‘제자도는 기본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 제자란 세상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지니고 사는 자이다. 세상의 가치란, 42절이 보여주고 있듯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힘을 행사하고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 다른 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이다.

 

그러나, 제자는 그렇지 않는 것이다. 제자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이의 자유를 빼앗는 자가 아니다. 그 반대다. 제자는 다른 이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할 줄 아는 자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삶(생명, 목숨)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

 

여기서 대속물이라는 것은 노예()와 관련이 깊은 단어로, 노예에게 자유를 주려고 지불하는 몸값을 말한다. 자유 없는 이의 대표가 노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대속물로 표현하는 이유는 자유의 개념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대속이란 대신 죽는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그 안에 있는 신학적인 개념은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

 

대속신학은 주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자유를 말하기 위함이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대표적으로 사탄)에게 값을 치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속을 누군가에게 값을 치룬 개념으로 이해하면, 굉장히 큰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탄에게 자신의 아들을 값으로 치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대속신학을 심하게 오염시키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거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이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값을 치를 필요가 없으시다.

 

재림의 지연과 박해 가운데 세속적 가치에 점점 물들어 가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살리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다시 한 번 그들의 육체에 채우는 것 밖에 없다. 재림의 지연과 박해 가운데서 죽어가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닮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세상의 교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휘청이고 있다.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세베대의 두 아들처럼, 또는 다른 제자들처럼 누가 더 크냐의 논쟁에 빠져 있고, ‘영광 중에 주의 우편에, 좌편에앉을 궁리들만 하고 있다. 예수의 능력을 빌려, 출세하는 데만 관심 있고, 예수의 권세를 빌려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는 데만 관심이 있다.

 

어떻게 하면 현재 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육체에 채우는 수밖에 없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렇게 하지 않고(42)’, 이렇게(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 하는 자가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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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