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6. 7. 29. 23:50

나귀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11:1~6)

 

주여, 맞은편 마을에 매여 있던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 쓰임 받는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쓰시겠다 할 때 풀려나는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쓰시는 나귀는 매여 있을 수 없나이다.

주께서 쓰시겠다 할 때 나귀를 풀어주지 않는 자를

어찌 복되다 할 수 있겠나이까.

주여, 매여 있는 나귀가 되지 말게 하시고

주께 쓰임 받기 위해 풀려나는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 쓰임 받는 나귀로 헌신할 때

묶고 있던 모든 것이 풀려나게 하옵소서.

주여, 풀린 나귀, 쓰임 받는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의 것이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29. 23:12
길 떠나는 자들을 위한 기도

(삼상 6:10~12)


주여, 얼마나 얼마나 주저 앉고 싶은 지 모릅니다.

주여, 얼마나 얼마나 가던 길을 멈추고 싶은 지 모릅니다.

서 계신 주여, 우리를 일으켜 주옵소서.

앞 서 가시는 주여,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여호수아의 팔과 다리를 굳세게 하시고

그의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신 주여,

우리의 팔과 다리, 그리고 마음에 힘을 주셔서

주께서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하게 하옵소서.

스룹바벨의 길을 평탄케 하신 주여,

우리의 길도 평탄케 하옵소서.

높은 산을 낮춰 주시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옵소서.

벧세메스로 법궤를 실어 나르던 어미 소의 눈물을 기억하시는 주여,

주의 부르심에 가냘프게 응답하여

뚜벅뚜벅 그 길을 걸어가는 연약한 주의 종들을 붙들어 주사,

눈물 흘리며 기도할 때 위로하시고 새힘을 주옵소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아브라함과 늘 함께 하셨던 주여,

길 떠나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내리셨던 동일한 복을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가는 길이 암사슴의 발걸음 같이

힘차고 소망차게 하옵소서.

주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29. 21:33

애통을 간구하는 기도

(슥 12:10~14)


주여,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옵소서.

그것들 없이 우리가 어찌 '찔린 자'를 보며 애통할 수 있사오리이까.

주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렸나이다. 바로 그가 '찔린 자'이니이다. 그 찔린 자를 보며 독자를 위하여, 장자를 위하여 애통하고 통곡하듯 가슴 치며 눈물 흘리게 하옵소서.

그의 찔림은 우리를 위함이요 그의 상함도 우리를 위함이니이다.

그의 찔림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고 그의 상함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나이다.

주여, 찔린 자를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옵소서. 그 애통함 없이 우리가 어찌 마음을 돌이켜 주께로 나아갈 수 있겠나이까.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서 전사한 요시야 왕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였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옆구리를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온 세상 각 사람이 따로 애통하게 하옵소서.

찔린 자를 바라보고 애통하여 마음을 돌이켜 주께로 나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찔린 자'는 우리의 구원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34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 <어두운 간격>의 마지막 단락문장이다. 실재(reality)를 자신들이 다 알고 있는 양 떠벌리는 종교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실재를 뒤엎으며 신비와 초월을 통해 참된 실재(하나님나라)를 향해 나아가려는 참목자들의 설 자리는 자꾸 줄어드는 것 같다. 이 현실이. 그래서 이 시대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용기 내는 게 정말 힘들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31

추적추적 비 내리는 가을, 나는 지금 2년 전 작고하신 안석모 선생님의 <욥을 위한 변명>을 읽고 있다.

이 책에는 내가 단 댓글 두 개도 나온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신학적 성찰은 <몸신학>이다. ", 주님, 몸이 생명입니다. 몸이 진실입니다. 몸이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이 시야에 들어온 이들의 성찰은 언제나 위대하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31

그리스도교인은 "참된 예언자가 되어 번민할지, 거짓 예언자가 되어 이 사회에 넘쳐나는 유혹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찾고 썩은 고기를 즐길지"를 선택해야 한다.

<토머스 머튼>

 

번민과 즐거움 사이에서 오는 갈등은 고독하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30

우리 자신인 하나님의 밭은 하나님의 날카로운 쟁기를 견디어야만 하는 것이다. 밤을 견디어낼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의 예술을 알지 못한다.

ㅡ 토마스 뮌처 (도로테 죌레, 신비와 저항, 142)

 

토마스 뮌처의 루터에 대한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특별히 뮌처는 루터의 칭의론을 맹렬히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뮌처가 보기에 루터의 칭의론은 고난 속으로 들어가는 예수의 길을 함께 가지 않으려는 달콤한 그리스도론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달콤한 그리스도는 독이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28

"가장 나쁜 피조물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 종속되어지는 공권력에 대한 것이다. 정부의 공권력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워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살아가기 위한 걱정에 갇혀 있게 되며,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상실한다."

(도로테 죌레, 신비와 저항, 142)

 

이 말은 죌레가 토마스 뮌처의 신비주의에 대하여 분석하면서 한 말이다. 이것은 국가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해야만 하는 정치신학의 가장 핵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에게도 이런 도전적인 질문이 들어왔었다. 물론 예수님은 지혜롭게 넘기셨지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게 무슨 뜻인가. 그런데 정말 이것으로 충분한가.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21. 21:58

새출애굽을 간구하는 기도
(슥 10:1~12)


봄비(늦은 비)를 내려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주여, 우리는 봄비를 내리시는 분이 누구인지 망각한채 허탄한 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불쌍한 백성이니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 쾌락 앞에서 바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날마다 무너져 내리는 부끄러운 백성이니이다.
주여, 우리를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곤고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마옵소서.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드라빔과 복술자에게 허탄한 위로를 구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애굽을 떠나 주께서 주신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겠사오니,
고난의 바다를 지날 때 바다 물결을 치시옵소서(strike).
나일의 깊은 곳이 마르게 하시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게 하시며
애굽의 규가 없어지게 하셔서,
주의 도우심으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의 삶 가운데 날마다 출애굽의 역사가 있게 하셔서
봄비를 내려주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서 주신 열매를 먹게 하시고,
주의 구원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새출애굽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7. 21. 08:11

거절당한 메시아

(마가복음 12:1-12)

 

예수님은 산헤드린 회원들(대제자장들, 서기관들, 장로들)권위 논쟁을 벌였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 이 말은 산헤드린 회원들 스스로 자신들만이 참된 권위가 있고, 자신들을 통하지 않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스스로 권위 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맞서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은 독선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만이 최고라고 교만에 절어 있다.

 

교만은 약이 없다. 교만은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한다. 오직 자기 자신만 보게 한다.

 

예수님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보여주신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대신 농사짓게 하고 타국에 가 있는 중이다. 때가 이르러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소출을 얻으려고 종을 보낸다. 그런데, 그들은 소출을 내어 놓기는커녕 종을 잡아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한다.

 

이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그리고 주인은 그들이 적어도 아들은 존대하리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농부들은 엉뚱한 생각을 한다. 만약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농부들 자신이 그 포도원을 차지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들을 잡아 죽인 후 포도원 밖에 내던진다.

 

포도원은 하나님이시고, 농부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말씀을 전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열매를 맺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성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이사야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5:1-2).

 

사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한 이야기로 읽어야 이해가 더 확실해 진다.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마친 후, 예수님은 느닷없이 머릿돌이야기를 하신다. 머릿돌 이야기는 시편 118편의 말씀이 근거이다. 그 말씀을 보면 이렇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118:22-23).

 

건축자가 버린 돌은 쓸모 없는 돌이다. 그런데, 그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기이한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버린 돌은 그냥 버린 돌이다. 건축 자재로 쓸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건축 자재로 쓸 수 없는 돌, 건축자가 버린 돌을 머릿돌 삼으셨다.

 

이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언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편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생각, 기대)를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말세에 메시아가 와서 악을 심판하고 의인을 신원해야 하는데, 그러한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발생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버리고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온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로 인정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들이 거절하여, 버림받고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시편의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요, 그들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자들은 거절당한 메시아예수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믿지 못했다.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는 우리의 사고(생각, 기대)를 전복시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 듣는 것, 생각해 온 것에만 절대적으로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거절한 그것이 사실은 우리에게 메시아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포도원 농부들처럼, 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교만하고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으면 실제로 주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와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을 능멸하고 죽이고 거절할 수 있다.

 

요즘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기독교에서는 뜨거운 이슈다. 그런데 몇몇 열린 사고를 하는 기독교인들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학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특별히 창조론을 말할 때 과학이 기독교의 진리를 흔들어 놓는 마귀인양 호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만약 21세기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내신 메시아가 바로 과학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학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기름부음 받은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을 열어 놓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따라 움직이며 행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예상이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지 모르니, (아마도 모든 일이 우리의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거절당하는 메시아가 없도록 날마다 깨어 기도하는 신실한 믿음의 자녀가 되자.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21. 04:58

나귀 타시는 왕을 간구하는 기도
(슥 9:1~17)


주여, 평화의 왕을 보내 주옵소서.
주께서 보내시는 평화의 왕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이시니이다.
세상 사람들은 전차와 군마를 타고 와

전쟁을 선포하고 통쾌하게 폭력적으로 악한 세력을 몰아내는 왕을 간구하오나,
주의 백성은 나귀 타고 오시는 왕을 갈망하나이다.
나귀 타고 오시는 평화의 왕은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신 왕이시니이다.
그는 고난을 당하시며 자기의 십자가를 겸허하게 지고

주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는 분이시니이다.
주여, 참된 평화는 전차와 준마를 타고 오는 왕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인정하시고 보내신 나귀 타고 오시는 왕을 통해서 오는 것을 믿사오니,
우리도 나귀를 타는 작은 왕들이 되게 하옵소서.
어디서든지 메시아를 간구하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의 은혜로 메시아 같은 사람이 되어

평화로운 삶을 일구어 나가는 나귀 타는 왕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참된 왕이 어떠한 모습인지

참된 지도자가 어떠한 모습인지

참된 인간이 어떠한 모습인지

밝히 드러내신 주님,
우리도 참된 평화를 위하여 겸손하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연약한 발걸음을 골고다를 향해 내딛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내가 사는 지역은 많이 무덥고 약간 습한 지역이라 곤충들 천국이다. 개미, 거미, 터마이트, (호넷, 범블비), 실버피쉬, 바퀴벌레 등 수 없이 많은 곤충들이 각자 좋아하는 처소에서 왕성한 번식력을 뽑내며 산다.

 

그 중 사람들에게 가장 혐오감을 주는 것은 단연 바퀴벌레다. 평소에 나를 별로 매력적으로 보지 않는 집사람도 내가 바퀴벌레를 잡아줄 때는 멋있단다. 어느 아티클에서 보았는데, 바퀴벌레는 컨트롤만 할 수 있을 뿐 완전 박멸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 중 하나인 바퀴벌레의 위엄이 담긴 보고다.

 

많이 무덥고 약간 습한 환경에서는 곤충 뿐만 아니라 그들의 포식자인 도마뱀도 기승을 부린다. 그런데 도마뱀은 곤충들과는 달리 눈에 잘 띄지 않을 뿐더러 인간 생활에 특별한 위해를 가하지도 않는다.

 

우리 교회는 바퀴벌레가 득실될 수 있는 환경을 지녔다. 건물도 오래됐고, 주변엔 숲이고, 예비시간이나 모임이 없는 동안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의 손길이 많이 타지 않는 환경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바퀴벌레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나와 함께 동역하고 있는 도마뱀 때문이다. 교회를 처소 삼아 살고 있는 도마뱀은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움찔할 정도로 꽤나 크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둘이 나누는 겸연적은 인사이다. 도마뱀도 나를 신경 안 쓰고, 나도 도마뱀을 신경 안 쓴다.

 

사실, 덫을 놓아 도마뱀을 잡을 수도 있으나, 나는 몇 년 전부터 도마뱀을 그냥 살려두기로 작정했다. 왜냐하면, 도마뱀 덕분에 교회에 바퀴벌레가 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마뱀은 사람들 앞에 자기의 존재를 거의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기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사람이나 미물이나 쓸모가 있으면 살아남는 법인 것 같다. 만약 도마뱀이 바퀴벌레를 잡는 데 쓸모가 없었다면 이미 도마뱀은 제거당했을 것이다. 도마뱀은 사람들에게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조용히 그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

 

도마뱀은 나의 신실한 동역자이다. 만약 도마뱀이 자기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나는 바퀴벌레를 잡느라 노동력을 써야했을 것이고, 교회의 예산을 거기에 썼을 것이다. 그러나, 도마뱀 덕분에 나는 나의 사역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몇 년 동안 자기의 일을 묵묵히 잘 감당하고 있는 도마뱀에게 올 연말 '집사 직분'을 내릴까 한다. 그는 그냥 도마뱀이 아니라, 도마뱀 집사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0. 03:39

낙서 열 셋.

 

창조의 싹을 죽여버리는 것은 강한 햇볕이 아니라 우리의 게으름이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0. 03:38

낙서 열 둘.

 

우리는 뭔가를 모으기 전에 너무도 많은 것을 빼앗긴다.

이것이 우리가 가난해지는 이유이며 공허한 이유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빼앗기면서도 그것을 모으는 거라고 착각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소비주의문화의 매직(마술)이며 병폐이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0. 03:38

낙서 열 하나.

 

참회를 강요하는 종교 권력, 이것은 종교 권력을 통해 무고한 자들에게 죄책감을 들게 하여 그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악마적 수단이다. 입만 열면 '죄'라는 단어를 들먹이며 교인들을 협박하는 자들.. 그들은 정말 죄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고 그렇게 협박하는 것일까? 나는 설교자로서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서 '참회를 강요하는 종교 권력'에 기대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내가 관찰한 사실 중 절망적인 것은.. 교인들은 메저키즘적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종교 권력이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