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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谷城)의 곡소리(哭聲)

ㅡ 영화 곡성을 보고

* 주의: 핵심 내용이 스포일러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영화를 본 뒤 읽어보세요.

 

영화 제목은 곡성(哭聲)이지만, 촬영지는 곡성(谷城)이다. 곡성의 곡소리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들려오는 곡소리이다. 원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는 곡성이 아니라 함성(야호~)’이 들려야 한다. 그런데 어쩐지 곡성에서 곡소리가 난다

 

영화는 성경 말씀을 띄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누가복음 2438-39). 실제 영화에서는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의 구절이 빠져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37절부터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 누가복음 37절의 말씀은 없다. 빠진 그 부분은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이다.

 

곡성은 종교영화는 아니지만, 누가복음의 말씀이 모티브를 이룬다. 영화가 모티브로 사용하는 말씀은 예수가 부활한 뒤 열 한 제자(원래는 열 두 제자이지만 가룟 유다는 자살해 죽은 상태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평안을 빌며 하신 말씀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산 자의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그들이 여전히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세 번에 걸쳐 자신이 고난당하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예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 무지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도 이어진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 눈 앞에 나타난 예수가 인 줄로 알았다.

 

사실 누가복음에서 콕 짚어서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24:37)고 명시적으로 기록한 이유는 그 당시 예수의 부활을 놓고 논쟁을 벌이던 이단사설에 대한 반박 때문이다.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제자들이 본 것은 육체를 가진 예수의 몸이 아니라 그의 영(환영)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름으로 초대 기독교 사이에 널리 퍼진 이단사설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었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성경은 의심믿음의 적으로 생각한다. 바로 그 의심이 영화의 핵심 모티브이다. 인류의 역사는 의심과 배신의 역사라 불러도 될 정도로 의심과 배신에 의해서 생명을 망치고 그르쳐 왔다. 영화는 바로 그 의심과 배신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과 행복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준다. 누가복음에 있는 다른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10:23).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복된 눈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산 좋고 물 좋은곡성(谷城)에서 곡소리가 난다. 평온하던 마을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살인 사건 중에 가장 끔찍하고 가슴 아픈 존속살인사건이 줄을 잇는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사건과 점차 얽혀 드는 한 경찰(곽도원 분)의 의심과 의심이 드는 일본인(준 쿠리무라 분)을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건의 전말은 밝혀진다. 그 사이에 전혀 의심이 안 가는 미친사람, 무명(천우희 분)이 있다.

 

절박한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가장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의심 없이따라간다. 종구(경찰관, 곽도원 분)는 자신의 딸이 귀신 들리자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인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사람들의 의심을 물리치는 그 무당의 이름은 일광’(황정민 분). 사람들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딸을 귀신에게서 구하고자, 마을에 감도는 액운을 떼어내고자 종구는 일광의 말 대로 큰 굿 판을 벌인다. 일광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 엄청 기가 센 귀신이 붙었다.

 

영화를 보면 그 귀신이 바로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광이 바로 그 일본사람 귀신을 내쫓기 위해 굿판을 벌이는 중이라고 의심 없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감독은 편집의 기술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신명 나게 굿판을 벌이는 일광과 교차되는 장면은 자신의 은신처에서 자기의 방식대로 굿판을 벌이는 일본사람 귀신의 모습이다. 일광의 굿판이 진행되는 과정에 맞춰 일본사람 귀신은 일광의 굿판에 일격을 당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감독의 명백한 트릭이다. 편집이 가능한 영화(영상)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사실, 일광과 일본사람 귀신은 한통속이다. 감독은 일광의 환복(換服) 장면을 통해 그 복선을 깐다. 일본사람 귀신이 입고 있는 팬티와 일광이 입고 있는 팬티는 같다. 그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굿판을 벌인 것은 그들이 힘을 합쳐 물리쳐야 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무명(미친사람, 천우희 분)이다.

 

지금은 모든 불결한 것을 분리시켜 가두어 놓는 시대(미셸 푸코)이기에 정신병원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미친사람이 영화에 등장한다. 누가복음의 말씀을 끌어다 쓴 영화의 흐름 안에서 그 미친사람은 거라사 광인을 생각나게 한다.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거라사 광인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본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8:28).

 

무명(천우희 분)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인물이다. 사건 현장에 나타나 돌을 던지며 주목을 끌어보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녀가 사건 전담 경찰인 종구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말해주지만 결국 그 말을 믿은 종구조차도 동료 경찰과 마을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 받는다. 사람들 모두가 외면하고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 무명은 그저 미친사람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복된 사람이다.

 

일본사람 귀신과 일광의 적()의심 많은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꿰뚫고 있는 무명이었다. 일본사람 귀신은 자신을 섬기고 있는 일광을 불러들여 무명을 향해 협공을 날리지만 결국 의심 많은 종구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그것 때문에 분노를 품은 일본사람 귀신과 일광은 종구의 가족에게 비극을 안겨주려는 계획을 꾸민다. 그것을 막을 수 있은 존재는 오직 무명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두 장면이 오버랩 된다. 하나는 가족을 필사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종구와 무명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사람 귀신을 물리치고자 그의 은신처를 한 방 중에 홀로 찾아간 가톨릭 부제(신부가 되기 전 단계에 있는 성직자)와 귀신의 만남이다. 이 두 장면에서 의심의 모티브는 극적으로 작용한다.

 

종구는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다 어느 골목에서 무명을 만난다. 무명은 종구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가족을 구하려면 이웃집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절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안된다고 말한다. 종구는 의심과 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명을 대면한 탓에 기겁을 해서 도망치던 일광은 종구의 갈등을 깨는 역할을 한다. 무명은 종구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무명은 종구에게 의심을 품지 말고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을 주문한다.

 

부제는 귀신에게 속은 것에 분해 귀신을 물리치고자 용감하게도 귀신의 은신처를 찾아 간다. 부제는 은신처에서 좌정하고 있는 일본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귀신이라는 것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꾸짖는다. 그런 부제에게 귀신은 메시지를 전한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 이 말에 부제는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가 귀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확신에 의심을 갖는다.

 

종구는 무명을 의심하지 말았어야 하고, 부제는 귀신을 의심했어야 한다. 종구는 무명의 말을 믿었어야 하고, 부제는 귀신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없었다. 종구는 결국 의심하지 말아야 할 무명을 의심해서 그녀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의심은 결국 그의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간다. 부제는 결국 의심해야 할 일본사람을 의심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자신의 확신을 의심한 탓에 귀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귀신의 또다른 희생자가 된다.

 

산 좋고 물 좋은 곡성(谷城)에서 나는 곡소리(哭聲)는 연약한 인간이 자처한 곡소리이다.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인간은 믿어야 할 것에 의심을 두고 의심을 가져야 할 것에 믿음을 두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구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이란 무엇일까? 산 좋고 물 좋은 곡성에서 곡소리가 아니라 함성소리(야호~)가 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종구는 의심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부제는 믿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의심은 이토록 생사를 가르고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살인마(귀신)’와 같은 것이다. 예수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우리는 어떠한가. 종구와 부제처럼,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파멸과 구원을 오락가락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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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