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되는 일은 참 피곤한 일이다.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즘 시대의 구호는 한 개인을 끊임 없는 자책과 자학으로 몰아 넣는다. 자책과 자학으로도 '나 자신'이 되지 않을 때, 한 개인은 결국 우울증에 걸릴 수 밖에 없다. 현대인의 지병, 우울증. 여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자책과 자학으로 몰아세우지 말아야 한다. 나 자신 외에 다른 적이 없는 현대인의 삶의 자리. 그래서 현대인은 늘 외롭고 피곤하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피로사회, 67쪽)
정말이지, 피곤해죽겠다.
이 피로에서 해방되기 위해 제시되는 것은 '무위의 피로'이다. 여기에서 노자의 사상과 기독교(또는 유대교)의 안식일 사상이 엿보인다. '쓸모 없는 것의 쓸모', '놀이의 시간', 결국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다움의 세상은 '사색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탈피로사회 또는 '오순절적 피로사회'이다. 이런 사회는 '그 무엇 때문'에 지치는 게 아니라, '그 무엇을 향해' 지치는 피로사회이다.
'나는 너때문에 지쳤어!'라는 말과 '나는 너를 향해 지쳐있어'라는 말의 뜻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에너지(영감)를 빼앗긴 상태이지만 후자는 에너지(영감)가 솟는 상태이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피곤한가? 왜 피곤한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지 말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삶은 곧 사랑이므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은 죄이다.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일은 의이다.
나도 살고 남도 사는 일은 구원이다.
죄는 아픔을 만들고
의는 슬픔을 만든다.
그러나 구원은 기쁨을 만든다.
그래서 구원은 기적이다.
그 기적은 하나님만 베푸실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은 너도 살고 나도 살게 하는 구원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사는 자는 구원 받은 자이다.
이미 천국을 사는 자이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