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6. 10. 27. 17:00

주께 보내심을 받은 설교자를 간구하는 기도

( 4:12~13)

 

주여, 저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는

영혼을 팔아먹는 중한 죄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들의 양심을 깨부수는 도끼와 같은 설교,

저들의 영혼과 골수를 쪼개는 날 선 검과 같은 설교,

저들의 팔 다리를 부들부들 떨게 하는 천둥 같은 설교를 수행하는

주께 보내심을 받은 설교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통하여

저들의 죄악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7. 16:59

설교하기 전 드리는 기도

( 2:14~41)

 

주여, 오늘 하는 설교가

저들의 귀에 들리게 하시고,

저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시고,

저들의 영혼을 쪼개게 하옵소서.

저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려

회개와 회심과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나의 입술과 마음과 영혼이

성령의 감동으로 벅차 오르게 하옵소서.

성령에 취해

담대함으로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증인으로서의 설교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7. 07:25

예수의 가족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3:20-35)

 

주여, 예수의 가족이 되게 하옵소서.

바알세불 논쟁을 불러일으킨 서기관들처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거부하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죽음과 죄와 질병을 지배하며

인류의 평화에 위협을 가하는 바알세불의 세력을

주의 권세로 물리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지배 받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인이 아니라,

주 안에서 거듭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며 사는

주의 자녀들이니이다.

주여, 우리는 예수께서 일으키신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이고 동참하는

믿음의 백성이오니

우리를 예수의 가족으로 받으시고

평화의 나라로 들이시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7. 07:02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3:20-35)

 

오늘 말씀은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다. ,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이야기 속에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구조다. 구조를 보자면,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해서, 중간에 바알세불 논쟁이 들어가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로 끝나는 구조다. 이야기의 샌드위치 구조는 마가복음의 특징이다.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붙들러 왔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또는 귀신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자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가 미쳤다는 헬라어의 엑세스테를 옮긴 것인데, ‘온전했던 정신을 다른 곳에 두다또는 정신이 나가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신천지 이만희: 자기 자신이 보혜사 성령이다. 자신만이 봉인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 사람은 미쳤거나, 진짜이거나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 가지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1) 자기가 주장하는 것을 실제로 믿는 확신범인가 2)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기꾼인가 3) 진짜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성경 전문가)은 바알세불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혹은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는 일을 주술로 이해했다. 그 당시 주술은 중범죄로 취급했다. (미쉬나 산헤드린 7:4). , 그들은 예수님이 치료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바알세불(사탄)의 힘을 빌어 주술을 시행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논리적인 대답을 펼치신다. ‘만약 하나님께 대항해 싸우고 있는 사탄이 다른 사탄을 사람에게서 내쫓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일이 되어 자신의 세력에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사역은 사탄의 역사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같은 편끼리의 분쟁은 좋지 못하다. 자신의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이야기 1)

작은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면서 툭하면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대판 싸웠다. 결국 그 중에서 많이 다친 금붕어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살아남은 금붕어 한 마리는 이제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죽은 물고기가 악취를 내면서 물을 썩게 만들더니, 결국 살아 있던 한 마리 금붕어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야기 2)

두 수도승이 오랫동안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들의 생활이 단조롭다고 느낀 한 수도승이 말하였다. "매일매일의 따분한 이 생활을 한번 다르게 바꿔 봅시다. 수도원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게 어떨까요?" 너무 오랫동안 수도원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다른 수도승은 세상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하면서 사는데요?"

"그들이 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분쟁이라는 것입니다."그러나 다른 수도승은 거룩한 사랑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데요?"

수도승이 말하였다.

"저 돌을 보십시오. 그것을 우리 사이에 두고 `이 돌은 내 것이야.'라고 서로 우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을 했던 수도승이 잠시 생각하고 나더니 자신들 의 오랜 우정에 위협을 느끼고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분쟁은 일어나기도 전에 끝났다.

( R. 리브)


둘 중의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감동적인가? 금붕어 이야기는 쓴 웃음을 유발하고, 수도승들의 이야기는 감동을 유발한다. 금붕어 이야기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비춰주고, 수도승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꿈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승들의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다. 왜 더 감동적인가?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도승들처럼 살아야 하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다.

 

평화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평화로운 자아, 평화로운 가정, 평화로운 교회, 평화로운 나라, 평화로운 지구를 만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부지런한 자기 비하에서 온다. 자기 비하란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다.

 

 

성경은 인류의 평화를 깨는 요소를 세 가지 지목한다. 죽음, , 질병이 그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을 사탄이 지배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죽음, , 질병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강한자를 공격하심으로 사탄의 나라를 결박하시고, ‘죽음, , 질병이 없는 하나님 나를 가져오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강한자(사탄)를 결박하는 것은 유대 묵시 사상의 특징이고, 기독교 종말론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역은 그저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확대되고 있음을 알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알세불 논쟁을 하시며,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에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대조되고 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블라스페미아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특히 다른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죄 용서 능력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오늘 말씀의 문맥 상,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이 논쟁을 통해서 마가복음 공동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역시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대답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여느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예수를 붙들러 온 것처럼 미친자가 아니다.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메시아이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님)로 인정하고 믿고 따르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예수의 사역(하나님 나라 사역)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를 미친 자로 생각하는 자는 예수를 떠날 것이고,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공동체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근본적으로 성령에 의한 사역으로 보았고, 사람들에게 메시아이신 예수를 따를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관심, 교회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은 단순히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 속에 예수를 끌어들여 이용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회심이란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 끌어들이지만, 결국에는 반대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여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예수님은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을 마무리 지으면서 누가 나의 가족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은 예수님께 아뢨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2).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왔다는데, 나가서 맞이하거나 사람을 시켜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거나 해야 맞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이렇게 대응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예수님은 누가 하나님 나라의 가족인지 새로운 정의를 내려주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5). 이것은 오늘 말씀의 처음에 언급했던 성령을 모독하는 자와 대비되는 말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예수를 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운동에 동참하며 헌신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즉 믿음이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간다의 개념이 아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이고 동참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죽음과 죄와 질병을 몰아내는 일, 즉 사탄(귀신)을 몰아내는 일을 계속하여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가? 아니면,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진실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는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더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가족이라 칭하여 주신다.

 

주님의 가족이라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도대체 우리의 일이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일 수 있겠는가?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주님은 평화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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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7. 06:59

특별한 부르심

(마가복음 3:7-19)


3 7-12절은 116절에서 35절까지의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요약하고 있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의 갈릴리 전기 사역을 요약하고 앞으로 있을 갈릴리 후기 사역을 전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기 사역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유대 전역에서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귀신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

 

왜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는가? ‘경고하다(에피티마오)’는 경고나 꾸짖음과 같은 강한 의미의 동사이다. 이는 마가복음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메시아의 비밀의 주제를 담고 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감춰져 있다. 사실 아직까지 감춰져 있다. 예수의 메시아성(메시아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도 사람들이 안 믿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갈리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메시아성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메시아되심(메시아성)이 온 세상에 완전히 드러날 날이 온다. 그날을 종말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종말은 단순히 세상의 끝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성이 완전히 드러나는 날을 말한다.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섬기는 이들에게는 복이 있다. 우리는 정말로 특별한 사람들이고 선택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 열 둘을 세우신다. 이것은 제자들을 선발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부르셨다. 이것은 갈릴리 후기 사역을 위한 준비였다.

 

사역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교회에는 헌신된 사역자가 꼭 세워져야 한다. 교회 다니면서 마음 속에 품어야 하는 것은 헌신된 사역자로 세워져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이어서 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이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교회 다니면서 교회 사역을 안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스스로 구원에서 멀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교회의 사역자는 단순히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자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이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인격이란 지속적인 자아를 가리킨다. 심신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자아가 아니라, 심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를 인격이라고 한다. ‘사역하는 일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의 인격과 사역(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담아내고 있는지를 늘 돌아보아야 한다.

 

KBS 2TV '제보자들'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 앞에서 시위하는 한 남성의 사연이 소개됐다. 이 남자는 자신의 아내와 교회 목사가 불륜을 저질렀다며 아들의 유전자 감식을 병원에 의뢰했다. 그리고 감식 결과, 99.99%의 확률로 목사의 아들임이 밝혀져 충격을 줬다. 그런데 아내는 "결과가 그렇게 나왔어도 아들이 하나님의 자식인 것은 때려죽여도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목사는 "(그 여성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기도해달라고 해서 기도를 했다" "기도한 것 외에는 없다, 불륜 관계는 아니었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면서 그 목사는 그 아이는 기도해서 생긴 아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것을 보고, 이들의 인격과 사역이 그리스도를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벗어난 일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들이다. 사도행전 1장부터 4장까지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아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재현했는 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되니까,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고, 한 마음이 되고,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가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드러낸 일과 정 반대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의 재산이 아까워서 얼마간 감추어 두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일이 소개되고 있다. 사도행전은 이 일을 베드로의 입을 빌려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것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다!”(5:3-4).

 

성령이 마음에 내주하시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우리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사탄에게 이 마음을 빼앗기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사탄에 의해서 우리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자취를 감추고, 나를 죽이고 공동체를 죽이는 일로 돌변하고 만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특별히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위임하신다. 이 위임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부여된 위임이다. 모든 교회는 이것을 위해 한 마음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을 하고 있지 않는 교회는 교회라 할 수 없고, 이것을 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열 둘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무엇을 위임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4-15).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데,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 부르신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주님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주님과 동행하는 자를 통해서 일어난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자가 에녹과 노아이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세상을 떠나더라도, 하나님이 데려간 사람이 되어야지, 누가 데려갔는지 모르면 안 된다. 그것만큼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는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더니,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라. 오늘 내가 죽는다면, 내 죽음은 그냥 개죽음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데려가신 죽음인가?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6장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한다.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알리시고 세상을 구원할 방도를 알려 주신다.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덕분에 세상은 홍수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나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자.

 

예수님이 우리(제자)를 부르시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전도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한다. ‘복음(유앙겔리온)’은 예수님의 왕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 전하는 일은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수반한다. 복음 전하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가진다. 이게 중요하다. 복음 전하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위에서 보았던 제보자들의 방송을 통해서 보는 저들의 모습은 귀신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신을 불러들이고 있다. 음란 귀신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들은 음란 귀신을 오히려 불러들여 처참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면, 탐욕 귀신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탐욕 귀신을 불러드린다.

 

여러분을 죄악으로 옭아매는 귀신을 내어 쫓으라!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갖는 권세이다.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귀신을 불러들여 죄악에 얽매인 자가 어떻게, 무슨 힘으로 복음을 세상에 나가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전하겠는가? 이런 말이나 듣지 않겠는가! “너나 잘하세요!”

 

우리는 예수님께 특별한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부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일컬어 붙여준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1장의 안디옥에서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가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5-26).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1)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2)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우리를 죄악에 얽매이게 하는 귀신을 내쫓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부르심에 우리는 잘 응답하며 살고 있는가.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자답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인격과 사역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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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4. 14:40

파루시아를 간구하는 기도

(로마서 12:1-8) 


주여, 이 세대를 살지 말게 하시고

올 세대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세대를 본받아 아직까지 죄인으로 산다면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오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확신하고

마음을 돌이켜 이 세대를 떠나 올 세대에 마음을 두고 사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나이다.

주여,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 받아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겠나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이유는

바로 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니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에게

주의 은총과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파루시아를 사는 주의 거룩한 백성이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4. 14:39

파루시아를 살다

(로마서 12:1-8)


흔적

 

발자국은 몸이 눌리는 중력만큼 흔적을 남기지만

심장은 사랑의 무게만큼 흔적을 남긴다

돌아서서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여기까지 힘들게 온 흔적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없다

네가 지우지 않아도 바람이 지운다

바람은 너를 따라다니는 운명이다

흔적이 깊이 패인만큼 바람은 세차게 분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

 

1. 교회력으로 우리는 지금 성령강림절 후 스물 세 번째주일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곧 있으면 강림절(대림절)’이 온다. ‘강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인데, 성탄절에 온 세상이 기다리던 메시아(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림하신다. 메시아(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메시아(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새롭게 되었다.

 

2. <파루시아를 살다>는 개인적으로, 나의 인생관이다. (물론 오늘 말씀에서 나의 개인적인 인생관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파루시아는 문자적으로 강림이라는 뜻이고, 신학적으로는 종말을 뜻한다. 모든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는 때를 뜻한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그러한 때를 갈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서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파루시아(강림)을 산다는 것은 2천 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 안에서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사는 것이고, 이제 다시 오셔서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삶의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말해준다.

 

3. 바울의 편지(서신)의 특징은 앞부분에서는 교리를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실천을 권면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의 앞부분 (1장부터 11장까지)에서 길게 교리를 쓴 후 이어서 실천적 권면(12장부터 15장까지)을 쓴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이해하려면 로마서의 앞부분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로마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내용이니, 로마서 앞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3. 우리는 흔히 교리를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는 매우 지루한 것이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교리뿐만이 아니라, 실천도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실천이 교리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4.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교리는 지루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천은 어려운 게 아니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5.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교리는 연애이고, 실천은 결혼생활이다. 연애가 어려운가? 결혼생활이 어려운가? 교리는 좀 복잡하지만 어렵지 않다. 연애는 좀 복잡하지만 어렵지 않다. ? 사랑에 취해 있으니까. (연애할 때 참 힘들었다. 여자들은 왜 그러나?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는 시한 폭탄? 다시는 연애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연애할 때의 그 달콤한 로맨스는 늘 로망의 대상이다.)

 

6. 실천은 복잡하지 않지만 어렵다. 결혼생활은 복잡하지 않지만 어렵다. ? 실재의 삶이니까. 현실이니까. (결혼했기 때문에 이미 서로 밀고 당기는 복잡한 관계의 메커니즘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결혼한 후부터 삶의 전쟁이 시작된다.)

 

7. 로마서 12:1-2는 실천적 권면의 대전제와 같은 선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8.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기독교 윤리 생활, 기독교 신앙생활의 기초에 필요한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적인 생각과 가치관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이다.

 

9.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 (엉망으로 사는 게 아니라, 똑바로 사는 것)동기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 내지는 복음의 깨달음이다. ,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구원의 목적과 소명이 무엇인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윤리적 삶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1장에서 11장에 걸쳐 말하고 있다.

 

10. 상대방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삶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will you marry me?’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연애가 어려운 이유는 서로에게 이러한 것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1.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두려움 없이 결혼하여 서로 간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두려움 없는 온전한 헌신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지 못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12. 옛날에 한창 잘나가던 개그맨, 장두석이라고 있다. 부채도사 코너로 유명한데, 장두석은 음반까지 낸 뮤지션이기도 하다. 그의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 ‘사랑한다 해도 듣지를 않네~’

 

13.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믿니?” 그러나, 성경을 딱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믿는 이유도 간단하다. 성경을 진지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 볼 시간은 있어도, 성경 볼 시간은 없다. 아무리 피곤해도 드라마는 다 본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14.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그 사랑 가운데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연예하면서 나에 대한 상대방의 사랑의 확인하고 나면,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힘주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아이온)가 아니라 올 세대(파루시아, 강림)를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춘향전>을 통해서 설명해 보려 한다.

 

15. 한국 사람은 <춘향전>을 안다. 거기에 보면, 춘향이는 이몽룡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기에 이몽룡에게 헌신하며 수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춘향이는 퇴기 월매의 딸이다. 이몽룡은 남원부사의 아들이다. 둘은 몸종 향단이와 방자의 도움을 통해서 사랑을 키워간다. 사랑이 무르익어 백년가약에 대한 마음을 굳혀가던 때 그들에게는 시련이 다가온다. 남원부사였던 몽룡의 아버지가 한양으로 발령이 나서, 몽룡의 가족은 한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 사건으로 둘은 헤어질 위기에 처해진다. 그러나, 몽룡은 춘향에게 꼭 다시 돌아와 춘향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한다.

 

16. 이몽룡과 그의 가족은 떠나고 변학도(변사또)가 남원부사로 새롭게 부임한다. 변학도는 이 세대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는 주색에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고, 백성을 착취하면서 산다. 춘향은 변학도의 핍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 칼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17. 춘향전의 클리아막스는 이몽룡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몽룡은 춘향이가 기대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몽룡은 거렁뱅이 행세를 하며 넋이 나간 사람행세를 한다. 춘향이는 그런 이몽룡을 원망하기는커녕 여전히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며 월매에게 그를 극진히 대접해라주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18. 변학도의 생일잔치 날, 이몽룡은 변학도에게 시 한 수를 바친다.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황금술잔에 담겨있는 맛좋은 술은 천명 백성의 피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고기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락시(燭淚落時)에 민루락(民淚落)이요,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피눈물이 떨어지고,)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 (아름다운 노랫소리라 울려퍼지는 곳에 원망소리도 드높아진다.)

 

19. 춘향은 이 세대 (변학도의 세대변학도에게 잘 보였으면 그와 함께 황금술잔과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고기를 먹었을텐데)를 본받지 않고, 올 세대(이몽룡이 돌아와 자신과 결혼할 세대)를 생각하며 이 세대를 견뎠다. ? 사랑하니까! 이몽룡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20. 인간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 ? 인간에게는 약속한대로 그것을 이룰 능력이 부족하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약속을 하지만, 때로는 못 지킬 때가 있다.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을 이룰 능력이 부족해서다.

 

21.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한대로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랑한 대로,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믿음의 자녀로 살아도 손해볼 것이 전혀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힘이고, 하나님의 기쁨이며,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구원 받은 믿음의 백성들이 사는 길이다.

 

22. 우리가 처음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말씀이니까 1214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한 번 보자.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23. 사랑하지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다.

 

24.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려고 결단한다. ? 하나님께서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이다.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25.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랑을 확인하고 확신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결혼하라는 뜻이다.

 

26.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절절히 말하고 있는데도, 그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자는, 복권에 당첨됐다고 연락을 받았는데도, 그 복권당첨금을 안 찾아가는 사람과 같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27.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지금 이 세대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올 세대를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올 세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이 새롭게 된 때, 바로 파루시아를 사는 자들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이 세대를 살지 말고, 올 세대를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라. 이 말씀을 함께 읽으며 말씀을 마무리 짓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8:38-39).

 

파루시아를 간구하는 기도

 

주여, 이 세대를 살지 말게 하시고

올 세대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세대를 본받아 아직까지 죄인으로 산다면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오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확신하고

마음을 돌이켜 이 세대를 떠나 올 세대에 마음을 두고 사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나이다.

주여,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 받아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겠나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이유는

바로 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니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에게

주의 은총과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파루시아를 사는 주의 거룩한 백성이니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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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0. 15:10

언약궤를 맨 제사장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3:9-17)

 

주여,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들의 발처럼 우리의 발이

행동하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맨 제사장들에게는 두려움이 없나이다.

주의 말씀보다 두려운 것이 없는 줄 알기 때문이니이다.

그들은 강물이 언덕까지 넘치는 위험한 우기 때에

범람하는 강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요단강을 헤치고 들어갔나이다.

주의 명령에 순종해 과감히 물을 헤치고 들어간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처럼

우리도 순종에 근거한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하옵소서.

순종에 근거한 과감한 결단은

주의 기적과 이적과 은혜와 구원을 가져오며

찬양과 경배를 불러오나이다.

우리도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처럼

말씀을 들었으면 순종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순종하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눈 뿐 아니라 온 몸이 경험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0. 14:58

요단강 도하를 간구하는 기도

(3:1-17)

 

주여,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을 건너게 하옵소서.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앞서가려는 우둔함과 교만함을 버리게 하시고

언약궤를 뒤에서 따라가는 겸손한 자게 되게 하옵소서.

자기 열정이 강한 자,

그래서 앞서 가려는 자는

고난이나 유혹이 오면 넘어지나이다.

오직 언약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뒤따르는 자만이

고난을 감수하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나이다.

요단강을 건널 때

묵상의 거리를 유지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천사장 루시퍼처럼 교만하여져서

타락할 수 있사오니,

묵상의 거리를 유지하며

주께서 내신 길을 살펴 가게 하옵소서.

요단강을 건널 때

성결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몸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게 하옵소서.

성결은 남을 위한 것도 아니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주를 위한 것도 아니고

주께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닌,

우리 몸을 살리는 구원의 길이오니

몸이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묵상하며

몸을 성결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을 건너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0. 14:41

라합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2:1-14)

 

주여, 라합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라합의 구원이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백성이 되는 데에는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이 전부인 줄로 믿나이다.

라합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나이다.

라합은 주께 마음을 두었기에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탐꾼을 믿음으로 숨겨 주었나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생명을 살리고

살아 숨쉬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나이다.

주여, 라합의 신앙고백처럼

주께서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신 줄 고백하오니

우리를 주의 백성 삼으시고

라합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멸망 가운데서 건져

구원을 베푸시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0. 14:32

길갈의 할례를 간구하는 기도

( 5:1-9)

 

주여, 길갈의 할례를 받게 하옵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주께서 행하실 일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길갈의 할례를 받게 하옵소서.

길갈의 할례를 통하여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죽어간

불순종과 불신앙의 애굽의 수치

말끔히 씻어내게 하옵소서.

애굽의 수치를 이스라엘로부터

굴러가게(갈랄) 하신 주여,

우리의 삶 가운데

길갈의 할례를 매 예배 순간마다 베풀어 주셔서

나 자신도 살고

주께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승리가

우리의 삶에 날마다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길갈의 할례를 통하여

순종과 믿음의 백성으로 거듭났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20. 14:20

특별한 부르심을 간구하는 기도

(3:7~19)

 

주여, 우리를 특별히 불러 주옵소서.

우리를 불러 주와 함께 머물게 하옵소서.

우리를 불러 귀신을 내쫓는 권세와 함께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 주옵소서.

우리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에녹처럼, 노아처럼

매일 같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로

우리의 삶을 죄로 옭아매는 귀신을

주의 이름으로 쫓아내게 하옵소서.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고

귀신을 불러들여 죄 앞에 엎어지는

어리석은 자 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께서 특별하게 부르신 그리스도인이오니

우리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18. 01:54

과부의 기도를 간구하는 기도

(18:1-8)

 

주여, 우리는 모두 연약한 과부들이니이다.

우리는 힘이 없어 불의한 일에 노출되어 있나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불의한 일을 당해 억울하나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원수들 때문에 못살겠나이다.

주여,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옵소서.

주께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기까지

우리는 결코 기도하기를 멈출 수 없나이다.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여,

주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시오니

낙심하지 않고

끊임 없이 주께 기도하는 과부와 같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기도하는 한,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17. 02:38

예수 그리스도와 안식일

(마가복음 2:23-3:6)

 

오늘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두 가지 논쟁을 다루고 있다. 하나는 안식일에 밀이삭 자른 것과 다른 하나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 고쳐 준 것이다. 안식일에 두 가지의 행위를 한 것이 왜 논쟁거리인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지키는 것은 모세 언약(시내산)언약에 대한 징표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확인했다. , 안식일을 통해서 그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키는 언약백성으로 스스로를 이해했다.

 

게다가 바벨론 포로의 경험을 안고 있는 예수님 시대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조상이 겪은 질곡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조상의 실패를 번복하고 싶지 않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집착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 입방에서는 이 문제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일이 이해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삶의 질곡(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조상에 대한 제사는 그들에게 꼭 지켜내야만 하는 집착이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복음 저자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마가복음 저가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몰랐을 리 없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실제로 벌어졌던 것처럼 죽음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일어난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고수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안식일 제정 원리는 이렇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사실, 유대인들이 이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도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악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을 알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나은 지 알았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킴으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예수님과 초대교회 공동체에 따르면 이것은 안식일 법에 대한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단순히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일까?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의 안식에 있다. 출애굽기는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8, 10).

 

안식일 법 제정을 선포하는 출애굽기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안식은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기 보다, 창조의 완성이다. 창조의 완성은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끝내고 안식하신 것이다. , 창조의 완성은 안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안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인가? 하나님이 일을 끝내고 쉬셨으니까 우리도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이 안식일의 뜻인가? 그렇지 않다.

 

안식은 행복한 상태이다. 죄가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복이 충만한 상태이다. 하나님과 합일된 상태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안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한마디로, 안식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상태이다.

 

우리는 오늘, 현실을 말해 주고 있는 두 가지 이야기 접했다. 첫째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이야기이다. 왜 이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랐는가? 배고픔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다.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모든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생명의 빵으로 묘사된다.

 

둘째로, 현실을 말해주는 이야기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마른 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전도여행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님은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배고픔과 질병은 안식을 헤치는 요소이다. 이것이 존재하는 한 안식이 없다. 배고픈 자에게는 빵이 필요하고, 질병 때문에 고생하는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죄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필요하다. 배고픔, 질병, 죄가 존재하는 한 안식은 없다. 그러나, 반대로 배고픔과 질병과 죄가 없으면 안식을 누린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마가복음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배고픔과 질병을 없애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분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겼다는 것은 죄를 없애셨다는 뜻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공동체는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의 완성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안식을 누리는 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중요하다.

 

주일에 일 안 하는 것이 안식이 아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단순히 안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안식은 다시 노동으로 복귀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교회 와서 노동한다. 노동의 자리를 일터에서 교회로 옮기는 것을 안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는 노동의 자리에서, 그것이 일터가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그 노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면서 산다. 감사하면서 산다. 행복하게 산다.

 

여전히 안식을 가로막는 질병이나 배고픔 같은 근심 걱정과 시기 질투 가운데 살면서, 주일(안식일)에 일 안 나가고 교회 나오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면 바리새인의 믿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참된 안식이란 일 안하고 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종교적 의무를 행하면서 종교적 보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참된 안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고픔의 문제, 질병의 문제, 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 가운데 여전히 사로잡혀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서 안식일에 쉰 것을 통해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원을 싸구려로 만드는 불경한 행위에 불과하다.

 

안식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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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17. 02:33

과부의 기도, 우리의 기도

(누가복음 18:1-8)


나는 녹차를 좋아한다. 커피를 안 마신다. (물론 스타벅스의 바닐라 라떼 같은 달달한 커피는 가끔 마신다.) 중학교 때 커피 마셨다가 밤새 잠을 못 잔 경험이 있은 후로는 커피에 손이 잘 안 간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속도 아프다. 요즘엔 커피가 너무 자본주의적이라서 싫다. 스타벅스 등 커피를 시장에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거대 기업들이 커피를 너무 현대인의 필수 음료로 띄워 놓은 경향이 있다.

 

한 동안 메스컴에서는 커피의 좋은 효능에 대하여 연일 기사를 띄웠다. 정작 커피를 재배하는 가난한 농부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고생은 가난한 농부가 하고, 돈은 거대 기업이 버는 불의한 사회 구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커피 뿐만이 아니라,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재배하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농부들은 카카오가 그렇게 맛있는 초콜릿으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커피를 안 마신다. 대신에 나는 녹차를 즐겨 마신다. 녹차에는 카테킨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쌉쌀한 맛을 낸다. 녹차는 이 쌉쌀한 맛 때문에 먹는데, 카테킨이라는 성분은 항암효과도 있고, 체내의 노폐물도 배출해 주고, 카페인 흡수를 억제해줘서 중독효과도 막아 준다. 녹차를 마시면 피곤함도 덜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춰준다. 다만, 이뇨작용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는 단점은 있다. 그리고 몸이 차가운 사람들(음 기운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지 못한 음료이다. 몸을 더 차갑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양 기운이 강한 사람이라 녹차가 몸에 잘 맞는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기도이다. 기도의 주제를 듣는 순간, 귀를 닫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은 기도에 대하여 하도 많은 설교를 들었든지, 아니면 기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기도를 통해 어떠한 좋은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내가 녹차의 좋은 점에 대하여 아무리 이야기를 했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커피만 고집하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나처럼 녹차의 효능을 깊이 경험한 사람은 녹차를 마시듯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절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지 않는다.

 

오늘 말씀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이야기는 비유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이야기하시는 목적은 기도와 낙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다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낙심 하는 이유는 기도 안 하기 때문이고, 기도하는 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삶은 낙심 거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낙심하고 싶어서 낙심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나의 능력과 상관 없이 낙심하게 되는 상황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는 즐비하게 널려 있다.

 

나는 영어 때문에 매일 낙심한다. 물론 미국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일상 영어에는 별 문제 없지만, 모국어인 한국어로 깊은 사유를 하는 것만큼 영어로 사유하지 못해 공부하면서 토론을 하거나 페이퍼를 쓸 때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낙심한다. 그래서 때로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한탄까지 섞여 나올 때가 있다.

 

미국에 살다보니 낙심하게 되는 게 언어 이외에도 많다. 특별히 인종차별을 당하거나, 사회참여를 깊이 하지 못하는 현실이라든지, 이 나라가 나의 조국(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나 살다 묻혀 있는 땅을 조국이라 한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곳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 거기에 묻혀 계시기에 나의 조국은 한국이 될 수 밖에 없다.)이 아닌 것 때문에 느끼는 이방인의 느낌 같은 것이 현실 속에서 벽으로 다가올 때 많은 낙심을 하게 된다.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사업의 실패 또는 경제의 불황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여러 가지 삶의 환경들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얻게 된 정신적 질병이나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노화에서 오는 약해진 신체와 마주하게 될 때와 병 때문에 고생하게 될 때 우리는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낙심의 상황들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화 때문에 오는 육신의 연약함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낙심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겪게 되는 낙심들, 즉 불의한 낙심들에 대해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끊임 없이 탄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라고도 하고,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라고도 한다.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든, 이 비유의 핵심은 끊임 없는 기도이다.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과부의 끊임 없는 기도 때문에 그의 간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끊임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상황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다. 하나는 생활인의 입장에서,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우선 생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살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 없고, 능력을 벗어나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냥 자포자기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주께 아뢰며,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한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의 엄마 한나이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였는데, 엘가나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는데,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회(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에 여자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없는 여자는 사회적 사형을 당했다.

 

엘가나는 두 아내 중 한나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제사 드리러 갈 때 엘가나는 한나에게 브닌나에 비해 분깃을 두 배나 더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한나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두 배 사랑이 아닌, 자식이었다. 그 일로 한나는 매일 같이 펑펑 울었다. 이에 대해 엘가나는 한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한나여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여러분 같으면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하는 엘가나(남편)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고마워할 것인가, 아니면 남편을 향해 광선을 쏘며 도끼눈을 뜰 것인가? 남녀관계가 그렇다. 처음에는 너 없이는 못살아하다가 나중에는 너만 없으면 살겠다한다.

 

어느 부인이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구박했다. "당신이 뭘 알아요?"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부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 이였다. 부인은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부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편이 죽어서 하얀 천이 뒤집어 씌워져 있었다. 허구한날 남편을 구박 했지만 막상 죽은 남편을 보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부인은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다. 부인이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하얀 천을 내리면서 말 했다. "여보!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깜짝 놀란 부인은 울음을 뚝 그치면서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의사가 죽었다는데!"

 

남편 엘가나가 부인 한나의 마음을 뭘 알겠나. 한나는 실로에 있는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다. 그 당시 제사장은 엘리였는데,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성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말거나, 괴로운 마음을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로 아뢰었다. 한나는 오랫동안 끊이 없이 기도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속으로 말하고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한나가 취한 줄로 생각하고, 한나에게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한다.

 

한나는 기도하되, 남들이 보기에 술 취한 것처럼 간절히 기도했다. 이렇게 기도했던 사람들이 또 있다. 예수님이 승천 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시길 기다리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던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이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비아냥댔다.

 

이렇게 기도해 봤는가?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술 취한 것처럼기도해 봤는가? 내가 지금 겪는 문제가 불의하다고 생각이 들거든, 내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간절히 필요하거든, 그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술 취한 것처럼 기도해 보시라.

 

두번째로, 우리는 생활인에 이어,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기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은 누가 공동체의 상황 중, 재림의 지연 문제 가운데 놓여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재림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낙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주변 세계(로마와 유대공동체)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러한 핍박을 견뎠던 첫 번째 이유는 예수께서 곧 재림하여 자신들을 영원한 생명에 들이시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불의한 세력들을 혼내주실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재림은 지연되었고, 그들은 핍박(박해) 속에서 죽어갔다. 사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재림 지연의 문제 가운데 살고 있다. 예수의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의와 사랑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인데, 그 나라를 살다보니 세상의 불의와 부대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창궐하는 엄청난 악 때문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세상의 창궐하는 악을 보며 쉽게 절망하고 실망한다. 하나님이 안 계시나보다, 라는 불경한 생각까지 들 때가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구별돼서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적당히 살고 싶은 유혹이 몰려든다. 그래서 우리는 한 쪽 발은 세상에, 한 쪽 발은 하나님 나라에 은근슬쩍 들여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산다.

 

한국에서는 최근 6살짜리 입양 딸의 시신을 훼손해 야산에 묻은 혐의를 받는 양부모가 아동이 숨지기 전 온몸에 투명테이프를 감아 놓고 17시간 동안 방치한 것으로 드러난 사건 기사가 언론을 도배했다. 세상에 얼마나 악이 창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악이 창월하는 불의한 세상을 심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주님은 우리가 끊임 없이 기도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 졸라서 원하는 것을 받아내라는 뜻이 아니다. 험한 세상, 악이 창궐하는 세상을 보더라도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나의 의도나 의지와 전혀 상관 없는 일, 나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일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끝까지 기도한다는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러시아 속담에 희망은 맨 나중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희망은 우리를 부활케 한다. 내가 죽었다고, 내가 과부처럼 힘 없는 자라고, 희망까지 죽고 힘 없나? 십자가를 보라. 죽었다고 끝이 아니다. 희망을 끝까지 붙든 자는 부활한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개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 벼락이 치더니 그 나무를 반으로 쪼개는 게 아닌가. 이것을 보고 놀란 다른 짐승들이 그 딱따구리에게 와서 물었다. ‘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이 큰 나무를 쪼갤 수 있니?’ 그러자 딱따구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단지 나에게 맡겨진 일을 매일 성실히 했을 뿐이야.’

 

우리가 기도를 끊임 없이 하느냐 아니냐는 끈기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비유의 불의한 재판장처럼 불의한 분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는 분이고, 우리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주시는 분이고, 우리를 올바르게 판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창궐하는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약함을 아시며, 우리에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거나 예상치 못한 기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과부는 그 시대에 가장 힘 없는 약자였다. 단순히 남편을 잃은 여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과부와 무엇이 다른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우리는 여전히 약하다. 힘 없는 과부와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기도할 때 듣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끊임 없이 기도하라. 주께서는 분명 우리의 끊임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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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