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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 14:05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5-10)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제자도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제자도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물론 행위를 거룩하고 정의롭게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거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이를 놀부증후군이라 할 수 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전례동화이다. 그 이야기에서 보면, 흥부와 놀부는 똑같이 제비 다리를 고쳐주는데, 그 결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흥부는 복을 받았는데, 놀부는 벌을 받았다. 왜 그런가? 그들의 행위가 결과를 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Intension)가 결과를 갈랐다. 흥부는 선한 마음, 놀부는 악한 마음을 대표한다. 이처럼, 행위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정신, ()’이다.

 

이와 같이 제자도는 어떠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의 문제, 정신의 문제이다. 제자도에 대해 하인리히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도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려 우리 안에 사시게 하는 것이다. 제자됨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은 누가복음 9장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떻게 사냐?’ 일례로, 오늘 본문말씀과 가까이에 있는 제자도를 들여다 보자. 171절에서 4절에만 해도 2개의 제자도가 나온다. 하나는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자세이다. 우선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한 경고에서 보면, 제자도는 작은 자 하나라도 절대로 실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게 낫다고 한다. 두 번째로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자세에서 보면, 제자도는 자신에게 범죄한 형제에게 경고하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되, 죄를 짓고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계속해서 용서하라고 한다.

 

이게 쉬운가? 욕 나올 정도다. ‘더러워서 제자 못해먹겠네!’ 할 정도다. 인생을 돌아보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한 일이 한 두 개인가? 나는 조지아에서 10년 동안 담임목회를 하며 대략 3천 번 정도의 설교를 했다. 목회자로서 나도 설교를 통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한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개척 초기(목회 초기)에 한 실수인데, ‘부모 공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말씀에 자기 의가 들어가는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나의 설교가 부모님을 잘 공경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던 그분에게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설교했어야 하는데, 자기 의를 넣어서 설교하다 보니 그러한 일이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절대로 설교에 자기 의를 표출하지 않는다.

 

대개 그리스도인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경우는 바로 어떠한 말이나 행동에 자기 의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자기 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어떠한 일을 잘 하지 못해 죄책감을 지니고 사는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도 모르게 자기 의를 드러내느라 작은 자 하나를 얼마나 실족시키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우리는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의롭게하면 안 된다. 우리에게 무슨 의가 있는가?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우리는 그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렵다.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제자도는 더 어려워 보인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범죄하기는 쉬워도 나에게 범죄한 상대방을 용서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범죄했을 때 상대방에게는 용서해 주기를 당연히 바란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에게 범죄했을 때는 당연히 상대방을 죽여버리고 싶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라고 요구하신다. 이게 가능한가? 요즘엔 나한테 실제적인 피해를 끼치는 범죄가 아니라 단순히 좀 쳐다봤다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세상인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제자들도 이러한 가르침 앞에서 당황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제자들(오늘 말씀엔 사도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제자들을 사도들로 표현하는 것도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이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해 보인다.)은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한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런 제자도 앞에서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주님, 이런 것을 어떻게 실천합니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요청에 대하여 다소 엉뚱한 말씀을 하신다. 그냥 속 시원히, “옛다, 믿음을 받아라!”라고 말씀해 주셨다면 손쉽게 끝나는 문제일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더해주시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니라”(6).

 

이것은 믿음이 있으면 갑자기 괴력이 생겨서 뽕나무를 뿌리째 뽑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에 언급되는 뽕나무는 무화과나무과의 뽕나무(Mulberry Tree)로서 뿌리를 깊고 넓게 내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지금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가 뽕나무를 뿌리째 뽑는 게 어려운 것처럼 어렵다는 뜻이다. 제자도가 어렵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도를 이루는 방식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제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겨자씨 믿음이다.

 

30년 전, 1986년도 8월에 선친께서 생애 처음 성지순례를 다녀오셨다. 그때만 해도 가족 중에 누가 해외 여행을 나가면 온 가족이 공항(김포공항)으로 배웅을 나가던 시절이었다. 생애 처음 가시는 아버지의 성지순례에 삼촌들, 이모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 모든 분들이 총 출동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아버지는 성지순례를 다녀오셔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신비한 이야기와 네 가지의 신비한 물건을 가져오셨다. 두 가지의 신비한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하나는, 사해바다에서 수영을 했더니 몸이 저절로 둥둥 뜨더라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고(사진으로 증명), 다른 하나는, 유럽에서는 물을 사먹어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지금은 물을 사먹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네 가지의 물건을 가지고 오셨는데, 요단강 물,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 감람나무로 만든 리코더, 그리고 겨자씨였다. 현재,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는 서울 어머니 집에 걸려 있고, 감람나무로 만든 리코더는 내 보물 1호이고, 요단강 물과 겨자씨는 사라졌다.

 

여기에, 요단강 물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물을 사 드시고 남은 빈 페트병에 요단강 물을 담아 오셔서 집 냉장고에 잘 보관해 두셨다. 그런데, 어느 주일 오후, 형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날씨가 더운 탓에 우리 집에 들어오자 마자 냉장고를 열면서 시원한 물을 찾았다. 형 친구는 마침 냉장고에 들어 있던 페트병에 담긴 요단강 물을 그것이 그냥 일반 물 인줄 알고 홀짝 다 마셔버렸다. 요단강 물은 그렇게 존재를 감췄다. 요단강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갑자기 믿음이 막 솟아날 것 같은가? 요단강 물을 마신 형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신 분은 이따 (식사 시간에) 물어보시라.

 

나는 그때 처음으로 겨자씨를 보았다. (그 이후로 나는 머스타드 소스를 좋아하게 됐다. 특별히 나는 허니머스타드 소스를 좋아한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대개 이렇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법이다.) 겨자씨는 굉장히 작다. 눈 어두운 어르신들은 안 보일 정도로 작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그토록 어렵게 보이는 제자도를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도대체 겨자씨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실마리는 이어 나오는 7절에서 10절 말씀에 있다. 예수님은 겨자씨 믿음을 말하신 후, ‘무익한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은 철저하게 주인에게 속해 있다. 종은 바깥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들어와서 주인이 차려놓은 밥상을 날름 받아 먹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된 노동 후에도 집에 돌아와 주인을 위해 밥상을 차려야 하는 존재이다. 종이 그렇게 한다고 주인이 종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종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10).

 

겨자씨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겨자씨 믿음이란 겸손의 믿음, 순종의 믿음을 말한다. , 위에서 하인리히 아놀드가 제자도를 “제자도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려 우리 안에 사시게 하는 것이다. 제자됨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문제이다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믿음이란 내가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시도록 우리 안에 주께서 사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는 일, 그 분이 역사하시도록 물러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인생과 사명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우리는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명을 갖게 된다. (공동체의 사명, 개인의 사명)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사명을 아름답게 완수하기 위해서 기도하며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여러분의 인생과 사명을 아름답게 완수하기 위하여 어떠한 계획을 하며 사시는가? 이렇게 사시는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정말 이렇게 사는 분이 있다면, 둘 중 하나다. 신앙의 경지가 하늘에 닿은 분이거나, 한량이거나.

 

"계획은 있지만, 계획 없이." 이 말은 참으로 무책임한 말 같지만, 기독교 영성에서는 꼭 필요한 말이다. 계획 없이 어떻게 인생을 살 수 있는가. 20141월 어느 신문매체에 실린 김정운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명강사, 전 명지대교수, 인기 작가, 김선도 목사의 아들)의 인터뷰 기사가 내 마음에 도끼질을 했다. 이런 제목의 기사였다. “100세 시대인데 이렇게 대책 없을 수 있나!”

 

그 기사 인터뷰에서 김정운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교수를 그만둘 때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강의는 계속 들어올지, 책은 잘 팔릴지 누가 장담하나. 50세에 훌쩍 버리고 떠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추구할 세계에 대한 동기가 분명해야 한다. 지금 내가 사는 세계가 내가 추구하는 삶이나 세계가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할 때 떠나야 한다. 새로 시작하려면 버려야 한다. 내려놔야 다시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다. 아무리 직장에서 버텨도 60이나 65세면 쫓겨난다. 우린 그동안 대학까지 1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60세까지 버텼다. 이제 100세 시대인데 왜 남은 인생에 대한 투자는 하지 않는가. 날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의 삶과 인생을 성찰해야 한다. … 평균수명의 연장은 어마어마한 혁명이다. 사회구조의 변혁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100년을 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 있나.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변하고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100년을 살아야 하는데 50년을 사는 속도와 의식으로 살 듯 조급하고 불안하게 살면 탈진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이성과 영성을 동원하여 인생을(사명을) 열심히 계획해야 한다. 그래야 낭패보지 않을 수 있다. 현재를 계획해야 하고, 10년 후를 계획해야 하고, 20년 후를 계획해야 하고, 노후를 계획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후를 계획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계획하는 데 열정을 들이지 않으면 인생은 산으로 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이성과 영성을 모두 동원하여 촘촘하게 짠 계획에 너무 얽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사명)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듯이, 성령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분이다. 성령은 결코 우리들이 촘촘하게 짜놓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우리는 믿음을 '더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지만, 주님은 결코 제자들에게 믿을 더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간구해야 할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알려주신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믿음을 더 가져서 무엇 하려는가? 결국 그것을 내 정욕에 쓰려는 것 아닌가? 믿음은 어떠한 것을 하는 능력이 아니다. 믿음이 있으면 병을 고치고, 손에서 장풍 나가고, 미래를 보고, 그러는가? 예수님께서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말씀하고 계시듯, 믿음은 나를 쳐서 주님께 굴복시키는 순종의 깊이이다.

 

인생(사명)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간과한 모든 계획은 그것이 아무리 촘촘하고 잘 짜인 것이라 하더라도 '탐욕'에 불과하다. 탐욕은 개인의 인생(또는 공동체)를 세우지 못한다. 탐욕은 결국 인생(공동체)을 허물고 만다.

 

아골 골짜기를 아는가? 가나안 입성을 앞 둔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은밀히 파견하는 등, 가나안 땅의 관문인 여리고 성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하나님의 말씀에 힘 입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리고 성을 어렵지 않게 정복한다. 다음 정복지는 아이성이었다. 아이성은 여리고 성에 비하면 작고 형편 없는 성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손 쉽게 아이성을 정복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보잘것없는 아이성에게 대패하고 만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

 

아이성 패배는 한 사람의 탐욕 때문이었다. 유대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여리고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탐욕스럽게 감추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졌다. 이와 똑 같은 일이 신약시대의 초대교회에서도 있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아간과 같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탐욕은 초대교회 신앙공동체를 흔들었다. 그 탐욕 때문에, 결국 공동체도 위기를 겪고, 개인의 삶은 파탄에 이르게 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획은 있지만, 계획 없이" 인생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도대체 얼마큼의 믿음이 필요한가. 믿음을 더 달라고 해서, 주님이 믿음을 더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사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하면 그 능력이 나타난다. 결국 믿음도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믿음을 더 달라는 탐욕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기 안에 있는 겨자씨 만한 믿음을 성령님께 맡기는믿음’, 그리고순종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사명)에는실패란 없다. 결국 성령이 하신 일이니까.

 

겨자씨 믿음을 간구하시라. 더하지 말고 오히려 빼시라. 나를 쳐서 주님께 굴복시키는 순종의 깊이를 간구하시라. 주께서 하시도록 우리 안에 주께서 사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시라. 주께서 역사하시도록 물러서시라. 겨자씨 믿음으로 인생과 사명에서 승리하시는 믿음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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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